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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2 23:55
근데 태섭이는 아무고토 모르는... 아방하다기보단 그냥 갓반인이라 생각도 못한거임


***

요즈음의 송태섭은 고민이 많다. 큰 시련 없이 무던하게 살아온 그에게 가장 큰 난관은 가게를 열었을 때 정도였을 것이다. 날티나는 외모와 스타일인 남자가 꽃집이라니 주변 상가의 상인들과 주민들이 이상하게 봤더랬다. 앳된 외모에 사장이 아닌 직원인줄 알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꽃에 박식하고 관심이 많은 것은 그의 어머니가 꽃집을 운영했기 때문이었다. 외향적이라 밖으로 돌며 노는 형이나 여동생과 달리 가게 한 구석에 둔 의자에 얌전히 앉아 어머니가 일하는 것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던 소년은 가업 아닌 가업을 이어 꽃집 사장이 되었다.
한 쪽 귀에만 피어싱을 했고 밑머리를 밀었어도 흔한 타투나 문신 하나 하지 않았고 응대할 때의 차분한 태도는 모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의 경계심을 빨리 무너뜨렸다. 옷을 잘 입는 센스가 어디 가지 않는지 꽃다발과 바구니의 디자인도 몹시 훌륭했기에 입소문이 나고 단골도 생겼다. 이제 20대 후반을 넘어가는 그에게 딸을 비롯한 주변 처자들을 소개시켜주려는 사람들도 그득하지만 그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다. 그것도 이제 1년이 좀 넘어가는 신혼이었으니 그야말로 평화와 행복만이 가득한 나날 뿐이다.

그래서 그런 송태섭이 왜 고민이 많은가하면 뒤숭숭한 분위기 때문이다. 그 뒤숭숭함은 그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으니 손님 중에 께름칙한 이가 몇 명 찾아온 탓이다. 1차적으로 그걸 느낀 것은 어머니에게 주기적으로 꽃을 선물하는 효자이자 단골에서 친구가 된 정우성이었다. 그는 늦가을쯤부터 나타난 남자였는데 추위를 몹시 타서 그 시기에도 터틀넥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여름이 되고 셔츠에 감춰진 피부가 드러나니 그 위에 펼쳐진 화려한 그림이 눈에 띈 것이다. 색까지 아주 휘황찬란하게 칠해져 있었다. 그런 걸 이레즈미라고 한다지. 소매 안으로 언뜻 보였던 그림은 잘못 본 것이 아니었고 그게 팔과 몸통까지 이어져있었다. 그러나 개업하면서 이미 외양에 의한 편견을 몸소 체험했던터라 그런 걸로 선입견을 가지기 싫었던 태섭은 우성에게 혹시 타투이스트냐고 물으며 컬러타투-어쩌면 문신-를 칭찬했다.

"아니?"

태섭의 희망회로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외국에는 운동선수들과 배우, 가수들도 멋지게 타투를 하지 않나. 언젠가 우성이 운동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태섭은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화려한 타투를 보며 사람들이 사나운 눈초리로 본다던가 선입견을 가져서 피곤하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 자리에 처음 가게를 열 때 겪었던 일도 늘어놓으니 우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준다. 여느 때와 같이 꽃다발을 칭찬하고 엄마가 좋아하시겠다며 잘생긴 얼굴로 웃고 가게를 나가는 우성의 뒷모습을 허리에 손을 짚고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래, 쟤가 조폭이라 하더라도 보호비를 뜯어간 것도 아니고 가게나 이 상가거리에 행패를 부린 것도 아니니 괜히 긁어부스럼 만들지 말자. 그렇게 생각했다.

-

"너무 신경쓰지 마. 사장님이 되서 손님을 그렇게 편견 가득한 눈으로 보면 어떡해."

커다란 화분을 옮기며 달재가 말했다. 오늘은 손님을 끌어들일 미끼 겸 가게 테라스에서 키우는 화분의 분갈이를 해주는 날이다. 태섭은 가게 안에서 포대를 카트에 싣고 나오며 정곡을 찔린 듯 앓는 소리를 냈다. 학창시절부터 친한 친구였던 이달재는 가끔씩 태섭의 가게에 와서 하루종일 머무르며 말벗이 되어주곤 했다. 오늘같이 분갈이를 하는 날에는 무조건 나와서 도와주는 고마운 친구다.

"달재 너 요즘 자주 온다. 안 바빠?"
"어? 어어... 요즘은 일거리를 좀 줄였어."

근무지에 구애받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달재는 가게에 찾아올 때면 늘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가져와 작업을 했다. 오늘같이 분갈이를 하는 날에는 들고오지 않는다. 화분이 워낙 많고 그러는 중에도 손님이 오면 태섭이 응대하러 자리를 비우니 하루종일 일하는 꼴이라 도저히 일에 집중을 할 수 없대나. 그래서 분갈이를 하는 날은 달재와 회식을 하는 날이다. 태섭은 달재에게 먹고 싶은 메뉴를 물었다. 달재는 순한 얼굴로 아무래도 고기가 아니겠냐고 말했다. 고기를 대접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고기의 종류를 고르라고 맞받아쳤다.
달재는 은근슬쩍 말을 돌리며 태섭에게 근황을 물었다. 태섭은 무덤덤하게 뿌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최근 출장이 잦고 길어지는 남편 덕에 주말부부 신세를 면치 못하며 외롭게 독수공방을 하는 중이라 대답했다.

"하하. 형님도 힘드시겠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너 대만이 형이랑 연락해?"
"너 아직도 한창 신혼인 거 아니까 하는 말이지."

불타오르는 신혼의 정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태섭은 괜히 손바닥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씰룩이는 입술은 가렸지만 불긋해진 뺨은 가리지 못했다.

"뭐어~ 못 본 기간만큼 반겨주기야 하지이."

예약손님 외에는 거의 없어서 생각보다 한가했기에 분갈이는 금방 끝이 났다. 태섭이 화분을 제 위치에 정렬하고 뒷정리를 하는 동안 달재는 당을 충전할 달짝지근한 커피를 사러갔다. 물을 주던 태섭은 눈으로 화분의 갯수를 세다 하나가 또 없어졌음을 눈치챘다. 어제만 해도 있던 화분이 왜 없어졌지.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이라 몰랐나. 최근들어 급격히 화분이 도난당하는 일이 잦다.

커피를 하나만 사온 달재가 태섭의 손에 컵을 쥐어주며 급한 일이 생겨 저녁은 다음에 먹자고 말했다. 그리고 태섭이 대답하기도 전에 손목시계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몸을 돌려 황급히 떠났다. 멀어지는 달재의 등을 향해 작별의 인사를 외친 태섭은 다시 가게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빨대로 음료를 한 번에 많이 빨아마시며 폰을 들었다.

"아, 뭐야. 카라멜 마키아토? 이거 달재 거잖아."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평소에 당 충전용으로 음료를 사오면 태섭은 카페모카, 달재는 카라멜 마키아토로 고정되어있다. 그렇다고 이 음료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노동 뒤에 오는 짜릿한 당을 음미하며 남편에게 메세지를 보내 또 화분이 도난당했음을 알렸다. 바쁜 것인지 답이 늦었다.

태섭은 아이스 음료를 시키면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먹는다. 카라멜 마키아토를 절반 정도 마셨을 쯤에서야 답장이 왔다. 그렇지 않아도 태섭의 가게에서만 도난이 일어나는 것 같아 cctv를 설치해두었으니 영상을 확인해보라는 말이었다. 태섭은 cctv라는 네 글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느리게 몸을 일으켜 가게 밖으로 나가 외곽을 둘러보았다. 어닝 밑에 교묘하게 숨겨진 카메라가 보였다.
태섭은 카메라를 쳐다보며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자 수화기 너머로 남편의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설치했냐고 물으니 화분이 세 번째 없어졌을 때였단다. 그 화분은 연애시절 남편이 처음으로 사준 선물이었기에 자신의 선물이 없어진 것에 단단히 화가 나 상습범으로 추정되는 범인을 잡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태섭은 전화를 끊지 않은 채로 가게로 다시 들어가 작업대 위에 놓인 노트북을 켜고 남편이 지시하는 대로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메뉴와 버튼을 살펴보던 태섭은 녹화파일이 백업되어있는 폴더를 열었다. 태섭은 전화를 끊은 뒤 제일 오래된 날짜부터 순차적으로 영상을 재생시켰다. 꽃집이 아니어도 가게 앞에 둔 화분이 도난당하는 일은 종종 뉴스에 나와서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화분을 훔쳐간 사람들도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물론 한 두 명 정도는 달갑지 않은 재방문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영상을 보는 태섭의 눈에 띈 것은 오히려 도둑들이 아니라 어느 날부터 가게 주변을 서성이며 염탐하고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나타나는 주기가 정해져있지 않았는데 일주일 전 부터는 거의 매일같이 맞은편에 있는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가게를 쳐다보거나 골목에 서있었다. 그저께 영상에서는 그 사람이 가게로 걸어오기에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에 일시정지를 하고 화면을 확대해보았다. 그저께 들어왔던 손님인데다 cctv의 화질의 퍽 좋았기에 특정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일 것이다.

".....정우성?"

딸랑

가게 문이 열리며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왔다. 태섭은 황급히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입구에는 태섭과 키가 비슷하지만 치켜올라간 눈과 쳐진 눈썹에 서늘한 인상을 가진 남자가 말없이 서있었다. 그는 눈을 굴리며 내부의 꽃들을 둘러보고는 드라이 플라워도 주문이 가능한지 물었다.

"당장 필요하신 건가요?"
"아니요."
"원하시는 형태가 있으세요?"
"다발이면 좋겠네요. 그래서 주문은 가능한가요? 시간은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습니다."

평소에 생화만 취급하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또한 손님의 말투는 묘하게 고압적이었다.

"원하는 꽃다발을 고르시거나 꽃의 종류를 말씀해주시면 제가 말려드릴게요."
"그렇게 해주세요. 언제쯤 찾으러 오면 됩니까."

남자는 전시되어 있는 꽃다발을 대충 둘러보더니 아무 거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것으로 드라이 플라워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메세지 카드가 필요한지 물었다. 남자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물어졌다.

"필요없습니다."

그는 픽업날짜를 재차 물었다. 2주 뒤에 방문할 것을 알리니 남자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계산대 위에 돈을 올려두고 나갔다. 빳빳한 새 지폐였다.

"얼만지 안 알려줬는데..."

정확한 액수만큼 올려진 지폐를 집어올리며 태섭이 중얼거렸다. 가게 출입구로 가까이 다가가 밖을 내다보니 어둑한 골목에서 아까의 그 남자가 멀리서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상대는 키와 덩치가 제법 큰 남자였고 담배를 피고 있다 가게에서 나간 손님이 가까이 다가오자 담배를 땅에 버리고 구두로 비벼껐다. 태섭은 문득 저 둘과 우성이 모두 삭발한 머리라는 공통점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

쎄함은 살아온 인생이 말해주는 빅데이터라고 했던가. 찝찝함을 떨쳐낼 수 없었던 태섭은 며칠 뒤에 달재를 가게로 불러냈다. 자꾸 핑계를 대며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던 달재는 꽃등심을 비롯한 한우 풀코스를 먹이겠다고 엄포를 놓으니 친구를 말리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왔다.
태섭의 이야기를 들은 그는 가족들에게 알려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제들은 물론 남편에게도 걱정을 끼치기 싫었기에 고개를 내저었다.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오랜 친구의 속내를 짐작한 달재는 그럼 그렇지하는 얼굴을 했다.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잖아. 괜찮아. 그냥 어디든 털어놓아야 덜 답답할 것 같아서 그래."

달재가 녹화된 영상을 자기도 봐도 되겠냐고 물었다. 태섭은 어깨를 으쓱이며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달재가 영상을 보는 동안 예약주문이 들어온 꽃다발을 만들었다. 꽃과 어울리는 색의 리본을 고르고 있으니 뒤에서 달재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단골 중에 우리랑 동갑인 사람 있댔지?"
"엉."
"희한하게 그 사람이랑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
"그랬나."
"나도 손님은 아니지만 단골 못지 않게 자주 오는데, 그치?"
"오가는 손님이 몇인데 손님끼리 마주치는 것도 쉬운 일 아니다?"

달재의 한 번 굳힌 결정은 태섭도 쉬이 꺾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소고기가 아닌 삼겹살을 살 수 밖에 없었단 얘기다. 달재는 마지막 맥주잔을 비우며 그래도 태섭의 촉은 제법 날카로운 편이니 당분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라 말했다. 태섭은 그 말을 들어도 이 이상 조심할 것이 딱히 무엇이 더 있겠나 싶었다. 한낱 꽃집 사장이 경호원을 고용할 것도 아니고 cctv는 이미 달려있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세콤정도는 다 이용하고 있다. 오히려 출장기간이 계속 연장되어 아직도 못 만나고 있는 남편의 얼굴이나 보고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의 넓은 품과 팔이 힘있게 꽉 안아주면 더없이 큰 안정감을 느낄텐데.

-

작업대 위에 올려둔 드라이 플라워가 잘 말랐다. 약품처리를 하지 않아도 어찌나 색이 예쁘게 말랐는지 여태 만들었던 드라이 플라워 중에 제일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다. 태섭은 거꾸로 매달려있는 드라이 플라워의 사진을 찍었다.

의자에 앉아 작업대에 턱을 괴고 바깥에 어둠이 깔리는 것을 쳐다보며 예약 손님을 기다렸다. 예약할 때도 늦은 시간에 오더니 찾으러 올 때도 늦은 시간에 올 모양이다. 하긴 직장인이 저녁 외에 언제 꽃집에 오겠나.

드라이 플라워를 제외한 예약도 다 찾아갔고 더 이상 손님도 없고 거리도 조용했다. 태섭은 테라스의 화분이 또 없어지지 않았는지 살펴보기 위해 가게 밖으로 나갔다. 이제 여름이라 해가 길어지는데도 유난히 한산해진 거리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원래 이렇게까지 조용한 곳이 아닌데.

"?"

언뜻 저 멀리 골목의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예감이 맞다면 아마 정우성. 태섭은 좌우를 살피며 잠시 가게에서 멀어져도 도둑이 들지 않겠다는 판단이 서자 모퉁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헛 것을 보았나. 요즘 범죄 유튜브나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사춘기도 아니고 상상력이 너무 지나쳤나. 가게의 문이 열리면 울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달려가니 드라이 플라워를 예약한 손님이 가게 한가운데 멀뚱히 서있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근처 가게에 볼 일이 있었어요. 꽃 찾으러 오셨죠?"

태섭은 작업대 위에 조심히 두었던 드라이 플라워를 건넸다. 남자는 말없이 받아들고는 다발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는 느리게 고개를 움직이며 태섭과 눈을 맞췄다.

"괜찮네요."
"네, 네에.. 감사합니다."
"혹시 대량주문도 가능할까요."
"꽃.. 다발을요?"
"뭐든."

이상한 주문이었다. 이 서늘하고 고압적인 손님이 정확히 뭘 원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찰나의 순간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짧은 고민은 뒤에 들어온 덩치가 큰 남자에 의해 해결되었다.

"뭐하러 빙빙 돌려. 그냥 바로 말해. 당신 우리랑 잠시 얘기 좀 하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섭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왼쪽 손목을 작업대 아래로 꽉 쥐었다.

"상담이라면 바로 도와드릴게요."
"얼굴보니 그 얘기가 아니라는 거 아는 거 같은데?"

거대한 남자의 팔이 태섭의 목을 졸랐다. 크고 두툼한 손이 얼굴을 거의 덮어버려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우악스러운 힘에 끌려가는 것에 저항했지만 택도 없는 짓이었다. 시야에 정성스레 말린 꽃이 바닥에 부서지는 게 보였다. 머리에 어두운 천이 씌워졌다.

-

범죄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차에 태워졌다. 그리 긴 거리를 이동하지 않았으나 등 뒤로 묶인 팔을 풀어내려 몸부림칠 때마다 실컷 얻어맞은 통에 온몸이 얼얼했다. 태섭은 이내 반항을 그만두고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가게에 들어왔던 두 남자는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어 내용을 판별할 수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차의 시동이 꺼졌다.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봉고차의 문이 둔탁하게 열리고 누군가 태섭의 팔을 낚아채 사정없이 끌고갔다. 신발 한 쪽은 언제 벗겨졌는지 땅에 끌린 양말이 찢어져 발에 상처가 났다. 이내 짐짝처럼 태섭을 어깨에 짊어지고 실내로 들어가는 것 같더니 푹신한 소파에 내던져졌다. 그들은 뭄을 웅크리고 있는 태섭의 머리에 씌워진 천을 벗겨냈다. 태섭은 눈물과 침, 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끌려온 곳을 훑어보았다. 낡은 건물과 촌스러운 검정색 가죽 소파. 전형적인 흥신소 아니야 이거.

"대체 누구세요!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기개는 좋았지만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목에 느껴지는 금속의 차가운 감각에는 누구나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이쪽을 등지고 있던 의자가 부드럽게 돌아갔다. 그곳에 앉아있던 정우성이 읏차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나 손가락으로 단도를 돌리며 걸어왔다.

"넌 아무 잘못 없어. 걱정 마."

정우성의 커다란 손이 태섭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네 남편이 좀 문제가 많지."

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존재가 화두에 오르자 태섭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삼켰다. 회사원이 흥신소나 조폭과 엮일 일이 뭐가 있지.

"그 사람이 보증이라도 잘 못 섰어? 너 사채업자야? 그 사람이 사채썼어?"

거의 악을 쓰는 목소리에 우성이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태섭의 입을 틀어막았다. 구타로 실핏줄이 터져 충혈된 눈이 요동쳤다. 우성은 무심한 얼굴로 슬쩍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태섭의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살살 쓰다듬었다.

"차라리 보증선 게 낫지 않을까?"

우성의 칼이 태섭의 뺨을 얕게 그었다. 태섭은 호흡과 몸을 심하게 떨었다.

"네 남편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하디?"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그냥 경호업체 직원이에요. 저는 작은 꽃집을 하는 자영업자구요. 저희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우성을 제외한 남자들은 적당히 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갔다.

"지금 형들이 화가 많이 나서 말을 잘 들어야 해."

우성은 두 손으로 태섭의 얼굴을 움켜쥐고 힘을 주었다. 악력도 셌지만 상처가 짓눌려 더 아팠다. 테이블 위에 놓인 헝겊으로 태섭의 입에 재갈을 물려 묶은 뒤 어깨를 두드렸다.

"마음같아서는 너도 동오형처럼 병원신세를 지게 하고 싶지만... 자세한 건 느이 그 잘난 남편에게 물어봐."

우성은 거대한 몸을 구기며 잘생긴 얼굴로 한껏 애처롭고 귀여운 표정을 짓고 모은 두 손을 얼굴에 비볐다.

"얼마나 심한 짓을 했는데."

그러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삐딱하게 웃었다. 가늘게 뜬 눈이 태섭이 아닌 그 너머의 누군가를 쏘아보았다.

"얼마나 못되고 잔인했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노크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던 두 사람의 눈이 다시 마주치고 우성은 다시 태섭의 머리에 검은 천을 씌웠다.

-

차에서 내던져진 태섭은 쉰 목소리로 기침을 하며 부서질 것같은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태섭을 던져두고 간 장소는 가게 앞이었다. 맞은편에 있는 카페의 사장이 웅크리며 바들바들 떠는 태섭을 보고 화들짝 놀라 담요를 들고 뛰쳐나왔다. 카페 사장은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태섭의 얼굴을 닦아주며 이틀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물었다. 체감상 20일은 된 기분이었는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태섭은 가게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문도 잠겨 있으며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쉰다는 팻말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카페 사장이 태섭을 부축하며 남편이 다 정리한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돌아왔대요? 언제?"
"송사장님 없어진 바로 그 날이요. 가게가 난장판이 되어있던걸 혼자서 묵묵히 치우던데요."

카페 사장은 비어있는 꽃집에 갑자기 웬 깡패들이 들이닥쳐 화분을 깨고 가게를 어지럽히고는 홀연히 떠났다고 말했다. 보란듯이 하는 행동이 묘하게 기이해서 주변 상가의 사장들 사이에 많은 추측이 오갔단다.

"무슨 일 있어요?"

태섭은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긴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어요."
"우린 둘 중 누가 사채라도 끌어다 썼나 걱정했어요."
"....걱정 감사합니다. 사채애...는 아닌 것 같은데 아직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카페에 들어와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카페 사장에게 피와 흙이 묻은 담요는 빨아서 돌려주겠다고 꾸벅 인사했다. 카페 사장은 평소에도 엄마처럼 잘 챙겨주는 사람이니 담요를 돌려줄 때 보답품도 얹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태섭의 집은 낡은 복도식 아파트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라는 것이고 운동 삼아 계단으로 걸어다녀도 좋은 5층에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엘리베이터는 고장으로 점검중이고 태섭은 걸어가기보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은 몸이었다. 별 도리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집에 가면 우선 샤워를 하고 한숨 잔 다음에 병원을 가야겠다. 발목이 삐었는지 욱신거리지만 당장 걷는데 큰 문제는 없고 당장은 침대에 누워서 몸을 뉘이고 쉬고 싶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태섭은 애초에 수중에 집열쇠가 없음을 깨달았다. 출근하고나면 열쇠는 서랍 속에 넣어두기에 난장판이 되었던 가게 안에 있을 것이다. 다행히 복도 저 멀리에 현관문이 열려있는 것이 보였다. 피곤함에 다른 상황은 이미 염두에 두지 않고 있어 태섭의 얼굴에 힘이 탁 풀리며 미소가 떠올랐다.

가벼운 마음으로 현관으로 들어서니 집 안이 엉망이었다. 조심스레 신발을 벗으며 설마 가게뿐만이 아니라 집에도 조폭들이 쳐들어왔다거나...따위의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불이 꺼진 어둑어둑한 거실에 웬 남자가 동상처럼 우뚝 서있는 것이 보였다. 태섭은 실루엣만 보고도 그 사람이 남편임을 알았다.

"....형."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 태섭과 달리 대만은 몸을 홱 돌려 눈도 깜빡이지 않고 태섭을 쳐다보았다. 태섭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쿵쾅대며 달려와 태섭의 작은 몸을 부술 기세로 꽉 끌어안았다. 태섭은 오랜만에 맡는 남편의 체취가 기분이 좋아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어쩐지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까지 당신이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을 거야."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스러운 톤으로 얘기하니 대만의 날선 감정도 무뎌져 금세 다정한 눈빛과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오래 만나지 못한 한이라도 풀겠다는 듯 오랫동안 끌어안고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다 태섭이 발을 살짝 밟혀서 소리를 냈다. 대만은 화들짝 놀라며 사과하고는 신발장으로 달려가 신발을 벗어던졌다. 태섭은 대만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주변도 같이 살펴보았다. 바닥은 흙과 자갈로 더러웠고 정체모를 얼룩도 있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대만의 셔츠의 깃과 소매에도 갈색 얼룩이 묻어있다.

"어디 다쳤어요?"
"내가 다칠 일이 뭐가 있어."

다시 대만의 품에 안긴 태섭은 눈 앞의 셔츠깃에 집중했다. 아무리봐도 이건 핏자국이잖아. 시간이 지나 말라붙은. 형이 다치지 않았으면 이건 누구의 피란 말이야. 설마 그 깡패들의 말대로 대만이 조폭이라도 된다는 거야? 아니 하지만 배우자가 납치당한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꼭 누군가를 때리지는 않았겠지.

대만은 태섭을 안아올려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는 다정한 손길로 망가진 옷가지를 벗겨내고 따뜻한 물을 틀어 몸을 씻겨 욕조 안에 앉혔다. 그리고 수도꼭지를 돌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태섭은 욕조 안에 쪼그리고 앉아 똑같이 더러워진 옷을 벗고 씻기 위해 옷을 벗는 대만의 등을 쳐다보았다. 눈에 띄는 상처는 없어도 약간의 타박상과 멍이 보였다. 화장실의 밝은 조명 아래에서는 대만의 손등에 난 상처가 잘 보였다. 주먹으로 벽을 치기라도 했나. 까진 상처가 못내 제 상처보다도 아파 그 손을 잡아끌었다.

"다쳤잖아요."
"이건... 가게를 정리하다 긁힌 거야."

욕조 밖에서 간단히 샤워를 한 대만은 태섭을 앞으로 살짝 밀고 그 뒤로 들어와 앉았다. 어디를 맞아 얼마나 다쳤는지 살펴보는 조심스러운 손길에도 태섭은 몸을 흠칫하며 떨었다. 밖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고 시계도 없던 방에서 그만하고 보내달라고 울며 빌었던 기억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마지막으로 차에서 태섭을 걷어차기 직전 귓가에 남긴 말은 머릿속을 날카롭게 찔렀다.

'잘 생각해 봐.'

-

안방의 침대에 누운 것이 마치 오래 전의 일처럼 아득했다. 침대란 이렇게 푹신하고 좋은 것이었나. 대만은 이번에도 태섭을 뒤에서 끌어안았고 내일 병원에 가서 상처의 처치를 제대로 받자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태섭이 실종된 동안 잠을 거의 자지 않아 피곤했기에 코를 골기도 했다.
반면 태섭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해 눈 앞에 놓인 대만의 손등에 난 상처를 매만졌다. 그러고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이 사람은 다친 상태로 가게 테라스에 엎어져 있었지. 당시엔 술버릇이 좋지 않아 굴렀다고 하더니 생각해보면 술 냄새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탄 내가 좀 났나. 그 뒤로 이어진 수많은 만남과 연애시절, 결혼한 이후로도 그는 입에 술을 거의 대지 않았다. 못 먹느냐하면 그것은 또 아니라 소주 2병을 먹어도 혀가 꼬부라지지 않고 멀쩡한 상태를 유지했다.

"비가 와서 물 냄새가 났나..."

테라스의 화분을 3개나 깨뜨리며 엎어져 비를 맞고 있던 남자의 등과 그 당시의 냄새를 떠올렸다. 대만은 피가 났었나. 그 피는 비에 다 씻겨내려갔나. 상처는 왜 났을까. 왜 비오는 날 밤 그렇게 쓰러져 있었을까. 가게 문을 닫고 집에 가려다 처음에 시체인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협탁 위에 올려진 휴대전화의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대만의 것이었다. 화면이 꺼지는 듯 싶더니 다시 불이 들어왔다. 누가 메세지를 보내고 있나. 평소의 태섭이라면 신경쓰지 않고 몸을 돌려 대만과 마주안고 잠을 청했을테다. 태섭은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든 대만의 얼굴을 확인하고 손을 뻗어 폰을 집어들었다. 태섭의 적갈색 눈동자에 네모난 빛이 비췄다.

[형님. 태섭이 들어갔나요?]
[그쪽에서 드디어 풀어준 것 같아요]
[중식이가 카페 사장님이 태섭이 챙기는 걸 확인했다고 하네요]

미리보기로 뜨는 메세지만 읽고 마려고 했건만 태섭의 손은 어느새 메신저 앱을 켜고 있었다.

[백호가 쳐들어가려고 하는 걸 저랑 준호형이 막느라고 얼마나 진땀 뺐는지]
[저한테 화나신 건 알겠는데 답장 좀 주세요... 자릴 비운 게 제 의지가 아니었단 거 아시잖아요]
[일단 태섭이가 귀가했다고 치수형님께 보고 올릴게요]

발신자는 달재였다.



슬램덩크 대만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