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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2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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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섭대만 약모브대만





"대만아. 힘 빼."

남자가 나지막이 귓가에 대고 말했음. 남자는 제 말에 오히려 긴장하는 대만이를 보고 작게 웃었음.

"안 아프게 할게. 그러니까 걱정마."
"괜찮아요. 나도 선배 믿으니까."

대만이는 얌전히 다리를 벌리고,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음. 남자가 아닌 다른 이가 떠오르는 걸 간신히 억누르면서.

거의 턱걸이로 들어온 대학이라 긴장 반, 기쁨 반이었음. 고등학교와는 다른 분위기에 아무리 정대만이어도 조금 굳어있었겠지.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더 그랬을 거고. 그럴 때 다가온 게 남자였음. 체육학과 전체가 다 모여서 단합대회 겸 신입생환영회였는데, 술에 잔뜩 취해서는 유난히 들러붙는 선배 A 덕에 난감하던 찰나였음. 그 남자는 A를 교수님이 부른다고 전해주고는 대신 그 자리에 착석했음.

"저 녀석, 널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

대만이는 괜히 어색해서 뒷머리를 긁적거렸음. 유독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기는 했지만 대학에 와서는 더 늘어난 것 같았음.

"네가 정대만이지?"
"...네."

대만이가 경계하듯 쳐다보자 남자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다가왔음.

"우리 과에서 정대만 모르는 사람도 있나? 너 되게 유명해. 1학년인데 벌써 주전이라고."

남자는 대만이보다 선배였고, 복학생이었음. 의무적으로 대답을 해주고 있는데 마치 저를 구제라도 해주듯이 핸드폰 진동이 울렸음. 문자였음. 대만이는 문자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음.

[대학 생활 재밌어요? 애들이 선배 보고 싶대요.]
[안 바쁘면 언제 한번 들러요.]

송태섭, 넌 나 안 보고 싶었냐? 아님 애들 핑계 대면서 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서 그 문자를 읽고 있는 대만이겠지. 옆에 앉은 선배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을 무렵, 옆에서 어깨를 톡톡 치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렸음.

"....아니라면 미안한데."
"네?"

남자가 대만이 옆에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였음. 대만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뗐음.

"혹시 남자 좋아해? 태섭..이면 남자 맞지?"
"......제 핸드폰 봤어요?"
"미안. 네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이길래."

대만이는 황당해서 선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송태섭'이라는 이름이 찍힌 문자를 감추기 위해 핸드폰을 덮었음.

"걔랑 사귀는 사이야?"
"......아뇨."
"그럼 걔도 남자 좋아해?"

대만이가 대답 없이 쏘아봤지만 남자는 신경도 안 썼음.

"대만아. 나도 스트레잇 좋아해 본 적 있어. 근데 그거 되게 힘든 거야. 그 쪽한테도 실례되는 일이고."
"...실례요?"
"그래. 넌 남자를 좋아하는데, 너한테 관심 있다고 여자가 들이대면 얼마나 거북하겠어?"
"...아니, 전..."

예전에 여자랑 사귄 적 있다는 말은 하려다가 말았음. 별로 깊은 관계가 아니기도 했지만, 그 선배가 계속해서 말을 하는 탓에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었음.

"대만아. 난 네가 꽤 마음에 드는데 우리 사귀어 보는 게 어때? 남자는 만나본 적 있고?"
"아뇨...없어요."
"그럼 내가 알려줄게."
"...그래도 돼요? 난 아직 선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아직 좋아하지도 않는데."

당연히 거절의 뜻으로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음.

"순진하긴. 다들 그렇게 만나. '우리' 같은 부류 말이야."
"......"
"그럼 생각해 봐. 알았지?"
"...네. 알았어요."

선배는 눈에 띄게 축 처진 대만이를 위로하듯 어깨를 두들겨준 다음 자리를 떴음. 대만이는 그 상태로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겠지. 주변의 소음도 뭣도 들리지 않았음. 그 순간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그 녀석' 때문에.

내 마음이 너한테는 정말 민폐야? 잘 알지도 못하는 선배 말 따위는 무시하고 싶은데, 정말 너에게 민폐라면 더 이상 이 마음을 품어선 안 되는 거잖아...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네가 보고 싶다, 태섭아.

[나도 애들 보고 싶다고 전해줘.]
[다음 주쯤에 한번 들를게.]

태섭이에게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음.

약속한 대로 대만이는 북산고에 찾아갔지. 원래는 혼자 갈 생각이었지만 기어코 같이 가겠다고 A가 끈질기게 달라붙었음. 결국 A와 함께 북산고에 오게 됐음. 오랜만에 본 송태섭은 정말 그대로였고, 윈터컵때 경험했던 것처럼 채치수보다 더 한 호랑이 주장이었음. 아쉽게도 몇 마리 못 나누고 계속 농구만 했고, 농구를 하니까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새삼 기뻤음.

쉬는 시간이 돼서 잠깐 화장실에 갔다가 나오는데 A가 언제 따라왔는지 화장실 앞에 서 있었음. A랑 함께 있는 모습을 애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좀 구석으로 데리고 갔음. A는 다른 생각이 있어서 구석으로 부르는 줄 알고 좋다고 어깨에 손을 올리며 히죽거렸음. 어깨에 있던 손이 점점 내려가는 것 같은 게 기분 탓이 아니라고 느낀 순간,

"어? 송태섭?!"

갑자기 송태섭이 나타났음. 대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야? 설마 붙어있는 걸 본 건 아니겠지? 남들한테 다 보여주더라도 태섭이에게는 남자와 단둘이 붙어있는 모습 따위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음. A와 멀리 떨어지려는데 여전히 어깨에 올려진 손은 떨어질 생각을 안 했음.

태섭이는 쉬는 시간이 끝났으니 빨리 오라는 말을 전하러 온 거였음. 다행이다. 아무것도 못 봤구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무언가를 들킨 것 같아 심장이 쿵쿵대며 뛰었음. 왜 쉬는 시간이 끝난 걸 이제 알려주냐며 태섭이 탓을 하며 재빨리 체육관으로 뛰어갔음.

한동안 송태섭을 만나지 못하는 나날이 늘어났음.

보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이 감정이 민폐고, 부담이고, 끝내 송태섭으로부터 '더는 안 찾아왔으면 좋겠어요' 라는 말을 듣지는 않을까 불안해졌음.

송태섭이 아닌 남자와 사귈 생각을 해본 적도, 언젠가 사귄다 해도 아직은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종종 저와 동류라며 자신을 소개하던 남자가 떠올랐음. 정확히는 태섭이를 잊어야 한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그 선배가 눈에 들어오겠지. 싱긋 웃는 얼굴 너머로 아직 진지한 감정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선배 B. 대만이는 몰래 주먹을 꽉 쥐었음. B가 저를 좋아한다면 미안해서라도 못 사귀겠지만, '우리'라는 부류로 엮여 그냥 서로 보듬듯 가볍게 만나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 거. 그러다 정말 마음이 통한다면 좋은 거고.

"...좋아요. 저도 선배랑 만나 보고 싶어요."

태섭아, 너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 난. 그래서라도 조금만 더 네 옆에 붙어있고 싶어.

B와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육체 관계만큼은 빨랐음. 남자끼리는 원래 이런 건가 하고 그냥 B가 하는 대로 따라갔음. B는 아프지 않게 하겠다고 했지만 솔직히 아팠음. 마지막에는 느꼈다곤 해도 어쨌든 생각보다는 좋지 않았음. 그럴수록 더 송태섭이 생각났음. 걔랑은 이런 거 없어도 즐겁기만 했는데.

"야, 송태섭. 나 애인 있으니까 이제 안심해라."

이런 말을 해도 녀석은 부담스러워 보였지만, 모른 척했음.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평범한 선후배로 지낼 수 있게 되겠지 싶어서.





오해와 삽질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