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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1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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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내 마지막 기억은 이렇다.

폐하와의 대면이 끝난 뒤,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숲을 지키는, 이제는 새카맣게 타버린 너도 밤나무 위에 내 두 손을 얹고, 힘을 불어 넣었다.

너도 밤나무는 내 힘을 흡수하기위해, 그 뿌리로 나를 힘껏 끌어 안았다.

그간의 기억들이 잔상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형제 자매들과 숲 속을 뛰어다니며 놀던 기억, 

다람쥐들이 내 몸을 타고 올라와 간지럽히던 기억,

처음으로 화관을 만들어 머리에 장식했던 기억,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했던 로키와의 기억들 모두.

이젠 내 몸과 함께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그 잔상들은 곧 희미해지며, 주변은 천천히 어두워졌다. 

내 시야가 완전히 닫혀질 무렵, 코 끝으로 향긋한 잎사귀 냄새가 전해졌다.


그것이 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전혀 예상하지 못 한 곳에서...

아니, 정확하게는... 여기가 어딘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끝없이 펼쳐진 평야 위에 서서, 내 앞에 우둑커니 서있는 나무 한 그루를 멍하니 쳐다봤다.

하늘로 쭉 솟아있는 그 나무 위엔 총 아홉 개의 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 나도 처음 봤을 땐 그랬단다.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있는 내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어떤 여인이 서있었다. 그녀는 놀랄만큼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하지만 이것이 이그드라실이란 걸 깨달았을 땐, 정말 충격적이었지.

- 이그드라실이라고요?


여인의 말에, 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 그러니까... 이게 온 우주를 지키는, 그 생명의 나무라는 건가요?

- 그래.


나는 다시 한번 이그드라실을 올려다보았다. 

아홉 개의 별이, 나무의 힘을 빌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 저는 여기가 발할라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 비슷하지. 하지만 엄연히 다르단다.


여인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 발할라는 모든 생명이 땅 위에서의 삶이 끝났을 때 보내지는 곳이란다. 하지만 이그드라실은 조금 다르지. 

- 음... 고귀한 생명들이 가는 곳인가요? 폐하같은 분이요.


내 말에,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 모든 생명을 고귀하게 여길 줄 아는 자만이 이그드라실에 들어설 수 있지. 예를 들면,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 모두를 구한 용감한 정령말이다.

- 어머니 같은 분이군요.


나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그리고 너 같은 아이지.


어머니도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후, 나는 어머니와 넓은 평원를 거닐었다. 

이그드라실은 밤 산책 중 우리를 따라오는 달처럼, 어머니와 나를 따라왔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 그래도 제가 이곳에 왔다는 게 아직 믿겨지지 않아요. 저는 어머니랑 다르게 자격이 없거든요.

- 무슨 말이니?


어머니가 자상하게 물었다.

나는 그 말에, 천천히 대답했다.


- 처음에 어머니와 같은 힘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고, 폐하께 제 힘을 바칠 수 있음을 깨달았을 때, 저는 무엇보다 영광스러웠어요. 저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정령의 명예와 의무를 잇게 되다니, 놀랍잖아요?

- 그래서?

- 하지만 곧 깨달았죠.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정령의 명예와 의무를 잇는 게 아니라, 제 삶을 사는 거란 걸요. 죽는 게 무서웠고, 그래서 도망쳤어요. 그러다가... 모두를 죽게 만들었죠.


나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제가 기꺼이 제 힘을 바친 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어요. 저 때문에 일어난 일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요. 그리고... 로키를 구하기 위해서요.


어머니는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시더니 말했다.


- 그러니까 네 말은, 네 행동은 결국 네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귀하지 않다?

- 엄밀히 따지면요.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결국 모두를 구한 건 사실이잖니. 


어머니께서 가벼운 투로 말씀하셨다. 


- 네 의도야 어찌됐든, 넌 왕자님의 손에 희생된 모든 이를 구했고, 또 폐하께서 원하시던 바도 이루어드렸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머니의 말씀도 맞으니까.


어머니가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 같은 상황에 쳐한다해도, 너처럼 행동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단다. 네가 보여준 용기는, 아스가르드의 역사로 기억 될 만큼 대단했어.

- 네... 누군가 절 기억한다면요.


나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내 얼굴을 들여다 본 어머니가 물었다.


- 폐하를 원망하니?

- 아니요. 제가 잘못한 건데요, 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 어머니는요? 폐하를 원망하신 적 있으세요?


어머니는 나와 똑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 아니. 그 분의 진심을 안다면 원망할 수가 없지.

- 진심이요?


내 물음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 분은 슬퍼하셨거든. 본인 때문에 누군가가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에 말이야.

- 슬퍼...하셨다고요?


내가 물었다.


- 그 오딘께서요?


어머니는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당장 내 모가지를 따실 것처럼 호통을 치시던 그 분이... 내면은 슬퍼하고 계셨다니.


어머니는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


- 널 이 곳에 보낸 분도 폐하시란다.

- 폐하께서 저를 여기로 보내신 거라고요?


나는 경악하며 소리쳤다.


당장 내 사지를 잘라서 니플헤임, 아니... 헬헤임으로 떨어뜨리실 것처럼 벌을 내리시더니... 


- 이해가 안 되는데요.


내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 로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서 저란 존재를 지우신 분이, 동시에 저를 이그드라실로 보내셨다뇨. 

- 폐하께서 하신 일을 이해하려해선 안 된다.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 깨달아야지.


도통 모르겠다는 내 얼굴에 대고, 어머니께선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셨다.





 비는 자신이 다시 눈을 뜰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오딘에게 흡수되는 순간, 엄청난 빛과 함께 자신의 몸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정령은 낯선 곳에서 다시 눈을 뜨게 됐다.

그녀의 옆엔, 그 어떤 산보다 높게 솟은 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다. 그 나무는 머리 꼭대기부터 뿌리 끝까지 총 아홉 개의 별을 매달고 있었다.

오딘의 숲에서는 한 평생 볼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나무였다. 

 
- 이그드라실의 온 것을 환영한다.

- 으아악!


비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정령은 그 목소리의 근원지를 깨달고, 여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그 나무였다.

 
- 혹시... 나무의 정령이신가요?


비가 살짝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나무가 가지를 흔들며 대답했다.

 
- 나는 정령이 아니다. 우주를 지키는 생명의 나무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이그드라실이라고도 하지.

 
나무의 말에도, 비는 모든 것이 어리둥절했다.


이그드라실은 정령에게 잠시 걷기를 청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비는 나무가 어떻게 자신과 걸을 지 궁금했으나, 의혹은 간단히 풀렸다. 

그녀가 가늘 길마다, 이그드라실은 밤하늘의 달처럼 그녀를 천천히 따라와 주었다.

 
나무가 물었다.
 

- 그대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는가.

- 모르겠습니다.

 
비가 대답했다.

나무는 웅장하지만,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 이그드라실은 오직 자격이 되는 자들만 허락하는 곳이지. 오래 전, 나는 신들의 왕과 계약을 맺었다. 그가 자격이 될 만한 자를 이곳에 보내면, 나는 그들을 심판하지. 과연 그들이 내 영광 아래 살만한 자들인지 아닌지 말이야.

- 저를 이곳에 보내신 분이 폐하시라고요?

 
비의 반응에, 나무는 큰소리로 말했다.

 
- 그래, 그리고 그대를 받아들인 건 나다.


정령은 감사함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숙여 나무에게 예를 표했다. 

그녀는 곧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저는 제가 죽으면 그대로 없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폐하께 흡수되면서요.

- 원래는 그런 거였지.

 
나무가 말했다.

 
- 하지만 그대는 아직 죽은 게 아니다.

- 네?

 
비가 놀라며 물었다.

 
- 죽은 게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 오딘의 큰 생명을 다 채우기엔, 그대의 생명은 너무나도 작았다. 하지만 그의 생명을 다 채우기엔, 그대의 생명은 너무나도 귀했지.

 
나무의 말에, 비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 모든 생명은 다 끝이 있는 법이다. 그대가 모든 힘을 오딘에게 바친다 하더라도, 언젠간 그 힘 또한 종말을 맞이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대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정령이, 언젠가는 또 같은 희생을 해야한다는 말이지. 온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나무는 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오딘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생명을 위해, 그대의 모든 생명력을 흡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신 그대 안에 약간의 생명력을 남겨두고 이곳에 그대를 보냈지. 훗날의 같은 이유로 자신 앞에 설, 또 다른 정령을 위해 말이다.

 
비는 이그드라실을 올려다봤다. 

나무 위로 온 우주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그드라실이 말했다.

 
- 그대 안의 생명력은, 신들의 왕이 그대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남겨둔 마지막 선물이다.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나도,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가 부드럽게 물었다.


- 무슨 문제 있니?

- 아깐 어머니의 말씀이 이해가 안 되었는데, 지금은 폐하와 어머니의 말씀이 이해가 안 가네요.

 
내 말에 어머니는 크게 웃으셨다.

 
- 내가 말했잖니. 이해하려고 하면 안 돼. 깨달아야 한단다.

 
어머니는 웃음을 그치기 위해 크게 숨을 한번 쉬셨다.

 
- 어쨌든 폐하께서 너를 이곳에 보내신 뜻을 생각해보렴.

- 어떻게 하면 그걸 알 수 있을까요?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 내 머릿속을 열어보면, 생명의 나무만큼이나 모든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 게 분명하다.


내가 진지하게 생각에 빠졌을 때, 어머니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 잘 모르겠다면… 한번 직접 여쭤보는 건 어떠니?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

 
- 네… 그럴게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니, 잠깐만!

 

- 어머니, 그게 무슨… 직접 여쭤보라뇨?

 
나는 소리치며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 대신 말없이 두 손을 내 어깨 위에 올렸다.


어머니는 웃으며 나를 바라보셨다.

 
- 이곳에 널 보내신 게 폐하고, 널 받아준 게 생명의 나무라면… 다시 널 돌려보내는 건 바로 나다.

 
어머니가 손가락을 한번 튕기자, 작은 빛이 어머니의 손에서 피어올랐다.


그녀는 그것을 나의 가슴으로 밀어 넣었다.

 
뜨거운 불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그리운 향기를 뿜으며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어머니는 그것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 폐하께서 남겨주신 내 생명은 이제 네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말에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곧 대지에 몸을 맡겼을 때처럼 엄청난 빛이 다시 한번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주변은 눈이 부시게 환해지더니 주변의 풍경들도, 생명의 나무도… 점점 희미해져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어머니는 끝까지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를 불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나의 사정을 잘 아는 것처럼 그저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드셨다.

 
- 모두에게 안부 전해주렴.

 
어머니를 감싸던 그 빛은 이제 내 눈을 감싸며 더욱 그 빛을 발하였다. 

 

 

 

  눈 부신 빛이 내 눈에서 점점 사라지고,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나무 뿌리 위에 누워서 떨어지는 꽃잎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그드라실에서 느꼈던 느낌은 점점 사라지고, 손끝과 발끝에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며 내 목소리도 다시금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 여기는…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아직 미처 돌아오지 못한 감각 때문에, 곧 비틀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잔디 위로 떨어질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따뜻한 무언가가 나를 감싸며 받아주었다.

그 사람은 한 손으로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은 나의 뺨을 만졌다.

 
그러는 중에 내 시력은 완전히 돌아왔고, 곧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은 머리의 두 어깨에 황금 견갑을 차고 있는 그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얼굴보다 더욱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키가 조용하게 물었다.

 
- 괜찮아?

- 로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의 초록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지금껏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던 그 두 눈은 나와 마주치자, 눈가에 맺혀있는 눈물이 에메랄드처럼 빛났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 내가 누군지 알겠어…?

 
그러자 그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GIF Con Il Sorriso Di Tom Hiddleston 
- 약속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알아보겠다고.

 
그는 내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 허니...

 
로키의 말에, 꽃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내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새롭게 뛰는 내 심장이, 귓가에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내가 살아있음을 알렸다.

 
하지만 가장 행복한 것은 로키가 나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었고, 나 역시 뺨 아래로 눈물을 떨어뜨렸다.

 
나는 로키를 힘껏 끌어안았다.

 
 지금껏 붉은 꽃잎을 날리며 나의 행복을 태우던 나무는, 이제 대신 가지 위로 하얀 꽃을 피우며 다시금 내 안에 행복을 채우고 있었다.

이전보다 더욱 엄청난 힘이 대지에 스며들며, 오딘의 숲에 옛 영광을 넘어선 새로운 빛을 씌워 주고 있었다.


행복의 하얀 꽃잎은 이 상황을 축복하듯이 바람을 타고 숲 전체에 눈처럼 내려왔다.







- 로키, 숲은 어떻게 됐어?

 
정신이 완전히 돌아 온 내가 물었다.

 
- 원래대로 돌아왔어?


로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보단 당신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더 빠를 거야. 주위를 둘러봐.

 
그의 말에 나는 어깨 너머로 펼쳐진 수많은 잔디와 꽃밭을 바라보았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 여기가… 오딘의 숲이라고?

 
나의 말에, 왕자는 자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두 다리로 그 땅 위에 올라섰다. 

이그드라실의 평원만큼이나 부드러운 감촉이 발밑에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나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네가 어떻게 날 기억할 수 있는 거지?

 
나는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조건으로 난 아스가르드로부터 잊혀졌어야 하는데….

 
- 걱정은 그만두는 게 좋겠군.

 
먼 발치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며 말했다.

 
- 프레이님!

 
나는 고개를 숙여 풍요의 신에게 예의를 갖췄다. 

그분의 미소는 내 기억과 전혀 다른 점이 없이,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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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를 다시 보니 참으로 기쁘도다.

- 저도요.

-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풍요의 신은 의심의 눈초리로 말을 이었다.

 
- 내가 정령의 언어를 잘못 이해하는 게 아닌 이상, 그대는 지금 걱정을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군.

- 그게 아니라… 제가 기억하는 것과 보이는 것이 달라서 그럽니다.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 분명 저는 아스가르드로부터 영원히 잊혀지는 벌을 받았는데 보시다시피 프레이님도… 로키도… 저를 기억하고 있으니… 혹여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나 걱정이 되어서요.

-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이번에는 로키가 말했다.

 
- 오딘의 마법으로 잠시 기억을 잃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때 저…

   
로키는 순간 말을 멈추며 프레이님을 쳐다보았다. 

 
나는 뚫어지게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 뭐라고, 로키? 잘 안 들려.

- 장난의 신은 신경 쓰지 말 거라, 정령이여. 미처 이 풍요의 신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은 할 수 없나 보군.

  
풍요의 신은 작게 웃으면서 내게 속삭였다.

프레이님의 그런 여유로운 미소가 로키의 심기를 건드린 게 분명했다. 

왕자의 얼굴이 곧 불만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얼굴도, 내가 지르는 고함에는 별 수 없었다.


- 세상에, 로키! 프레이님의 도움으로 기억을 되찾은 거였어? 폐하의 기억 마법은 고대 주술이잖아! 하마터면 나에 대한 기억은 둘째치고 너까지 통째로 삼켜질 뻔했다고! 빨리 감사하다고 인사드려!

 
그는 당황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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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당신, 지금 나보고 저런 짐승한테 고개를 숙이라고 말하는 거야?

 
로키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나에게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아휴, 다시 태어나도… 저 고고함은 여전히 적응이 안 돼….

 
나는 한숨을 쉬었다.

풍요의 신은 그런 로키와 나를 구경하듯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먼저 침묵을 깨며 말했다.

 
- 나와 장난의 신 사이에 굳이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 정령이여. 설령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서로 풀지 못한 앙금이 있으니, 감사 인사 따위는 불필요하다.

- 그래도 저희 두 사람을 위해 나서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프레이님.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게다가 폐하의 마법에도 저를 잊지 않아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 나는 그 마법에 걸리지 않았다.

 
프레이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커진 눈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 하지만 아스가르드의 모든 것이…

- 나는 알프헤임의 왕. 애초에 그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 하긴… 폐하께서는 ‘아스가르드로부터’라고 하셨죠. 분명 프레이님의 존재를 모르실 리가 없었는데… 왜 프레이님의 기억은 지우지 않으신 걸까요?

 
나는 턱을 괸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 폐하께서 실수하신 건가?

- 그럴 리가.

 
로키가 단호하게 말했다.

 
흠….

 
내가 계속해서 생각에 빠져있을 때, 저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신과 나는 목소리에 반응하며 고개를 돌려 저 먼 곳을 응시했다. 

조금씩 그들이 가까워질수록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고, 익숙한 목소리에 내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완전히 가까워지자, 나는 단번에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수 많은 백성들이 숲으로 몰려들고 있었고, 가장 앞선 곳에는 나의 아홉 형제 자매들과 장로님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허니!

 
레아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기쁨이 가득한 미소로 풀밭을 가로지르며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아홉 명의 아름다운 나의 형제 자매들이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고, 우리는 서로 눈물을 흘리며 껴안았다.

 
-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멀쩡한 거야?

- 폐하께 흡수된 줄로만 알았어!

- 다친 데는 없는 거야?

 
너도나도 나에게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나는 눈물을 닦으면서도 일일이 모든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썼다.

 
- 물론이지! 나 아주 멀쩡해! 심지어 이전보다 더 강해진 기분이 들어. 그나저나 너희들은 괜찮은 거야? 모두 불에 타버렸잖아. 몸도 그대로 돌아온 거니?

-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허니?

 
레아가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반응에, 나 또한 같이 눈을 깜빡였다.

 
- 너희들… 모두 불에 탔었잖아. 오딘의 숲에 불이 나는 바람에 우리 종족들이 몰살을 당하고…

-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니?

 
형제 자매들이 비명을 질렀다.

 
- 우리는 모두 폐하의 부름을 받고 왕궁에 있었거든. 그래서 화를 면했나 봐.

 
레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분명… 내 기억이 맞다면… 왕궁에 있던 정령은 나 혼자였고, 가족들은 모두 잠을 자고 있었는데….

게다가 형제 자매들의 혼이, 숨어있던 나를 숲으로 이끌었고 말이야.

 
- 그나저나 어떤 못된 놈이니? 오딘의 숲에 불을 지르다니… 제정신이 아니지!

 
레아의 외침에 형제 자매들은 동조하며 하나둘 입을 모아 범인을 욕하기 시작했다. 

나는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며 대충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고개가 스르르 뒤로 돌아간다….




Tom Hiddleston as Loki in Loki | 1x05 Journey Into... : i'm with you til  the end of the line.
얘네들은 그 못된 놈이 지금 뒤쪽에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잠깐만…. 왜 다들 로키가 저지른 일은 기억 못 하는 거지?

 
- 왜 그래?

 
로키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 좀 이상하지 않아? 지금 상황의 앞뒤가 안 맞아.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진지하게 말하자, 주변 모두가 나에게로 모여들었다.

 
- 폐하께서 나의 존재를 확실히 지우려고 하셨다면 왜 프레이님의 기억은 그대로 남겨두신거지? 게다가 마법이 풀리면서 모두 기억이 돌아왔지만, 로키 네가 했던…

 
쉬지 않고 상황에 대해서 말하던 나는 그 순간 말을 멈춰야만 했다. 

내가 로키의 이름을 말하자 형제 자매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로키에게 낮게 속삭였다.

 
- 네가 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하잖아.

 
나는 고갯짓으로 숲에 사는 짐승들과 나의 자매들을 가리켰다. 

허리를 숙여 내 말을 듣던 로키도 힐끗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때까지 크게 동요하지 않던 그도 이번만큼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 그러게.

- 상황이 예전보다 더 좋아졌어. 폐하께서 실수한 게 아니라면…

- 노망이 난 거겠지.

 
로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 제발 로키… 장난칠 때가 아니야.

 
나는 주먹으로 그의 팔을 툭 치며 짜증을 냈다. 

그는 팔을 매만지며 어깨를 들썩했다.

 
- 장난치는 게 아니야. 이미 말했지만, 아버지께서 실수를 했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렇다고 이 모든 게 우연처럼 일어난 일이란 건 더욱 말이 안 되고. 그럼 답은 하나…

 
로키는 손가락 하나를 피며 말을 줄였다. 

내가 하찮은 눈빛을 보내며 한숨을 쉬자, 그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그냥 이해되는 선에서 말한 것뿐이야.

- 그래, 어련하시겠어.

 

이해되는 선이라…. 이해되는…. 이해….

 
아…!

 
그 순간 어떤 말이 번뜩 떠올랐다.

 
- 폐하께서는 눈이 하나지만, 아홉 왕국 중 그 누구보다 먼 곳까지 보는 분이시잖아!

- 그래, 그게 뭐 어쨌는데?

 
로키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 어머니가 그러셨어. 폐하께서 하시는 일을 모두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나는 로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이해하는 게 아니라… 깨달아야 하는 거라고.

 

  그러던 중 갑자기 끔찍한 울부짖음이 하늘 위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파랗고 높았던 하늘은 어느새 먹구름이 가득한 잿빛 하늘로 변해 있었고, 중간중간 천둥이 치며 하늘 위를 갈라놓고 있었다.

 
- 토르님인가?

 
내가 귀를 막으며 물었다.

 
- 아니.

 
로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는 어느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자신의 황금투구를 다시 머리에 썼다.

그는 단검을 꺼내 들고 나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그의 뒤에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큰 까마귀 두 마리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 까마귀는 천천히 하강하더니 하얀 꽃잎을 뿌려대는 행복의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은 나와 로키를 보며 더욱 찢어지게 지저귀기 시작했다.

 

- 후긴과 무닌이야.

 
로키가 낮은 저음으로 말했다.


- 내 힘으로 다시 되살아났나 보네.


내가 말했다. 


후긴과 무닌은 우리를 바라보며, 각각 다른 소리를 내며 날갯짓을 해댔다. 

그 모습은 까마귀가 아니라 오히려 저승에 묶여있는 늑대처럼 보였다.


그들은 나를 응시하며 계속 짖어대기만 했다.

우리는 모두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 아무래도… 신들의 왕이 정령을 부르는 것 같군.

 
풍요의 신이 말했다.

그것을 들은 로키가 비웃는 투로 말했다.

 
- 내가 살아있는 한 어림없는 일이지.

 
그는 양 손에 단검을 뽑아내더니 곧 그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나는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 안돼, 로키! 넌 예전에 저들을 이미 한번 죽였잖아! 또 죄인이 되고 싶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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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뭘 어쩌라는 거야? 저들이 당신을 잡아가도록 두라는 거야?


그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키의 얼굴에는 혼란함이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단호하고 확실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왕자에게 말했다.

 
- 난 도망가지 않을 거야.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로키는 얼떨결에 잡은 내 손을 내려다보며 확신이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더욱 그의 손을 세게 잡았다. 

그가 나에게 늘 미소짓던 것처럼,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로키는 그런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 그래.
 

결국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 뜻이 그렇다면.






***

분량 조절 실패로 결말을 못 들고 왔다 ㅠㅠ 에필로그까지 합쳐서 다다음화 내에 끝내볼게. 히들러들 햅삐 뉴이어!

 
2024.01.01 02:41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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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개추후댓글
[Code: 9391]
2024.01.01 02:43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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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와 센세 이런 대작을 저한테 선물해주시다니 너무감사합니다 정말 너무재밌게 잘읽었어요 한줄한줄 아껴가며 읽었어요 다음편도 기대가 되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센세
센세 해피뉴이어 새해복많이받으시고 만수무강하세요
[Code: 9391]
2024.01.01 03:1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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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ㅠ해피뉴이어 센세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허니 살아나서 너무 기쁨
[Code: 33ef]
2024.01.01 03:27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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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해피뉴이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de: 53b6]
2024.01.01 09:26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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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울부짖음이 하늘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토르님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de: d80f]
2024.01.01 13:26
ㅇㅇ
미친 해피뉴이어 아진짜 너무 좋아 ㅠ 어떻게 이런 작품을 주실수가 ㅠㅠㅠ
[Code: 68b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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