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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7 22:20
망천화처럼 이연화 해독할 수 있는 약초가 있는데, 형질을 바꾸는 부작용이 있어서 떨떠름해하던 이연화와 그런 게 뭐가 중하냐 하던 주변사람들이 우당탕하는 게 보고싶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이연화가 물었다. 평온한 목소리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주의를 기울였다. 질문했던 남자는 땀방울을 억지로 붙드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적비성은 남자의 가늘게 떨리는 손이, 비단 혼신의 연기 때문만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비록 미리 합의가 되었다 하더라도, 지금 이연화가 내비치는 불편한 기색은 보통 사람에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윤, 윤씨 가문의 차남 윤청언입니다."
"윤가의 정보력이 대단한가 봅니다. 저조차 오늘 들었던 이야기를 이리 바로 꺼내시니 말입니다."
이연화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말했다.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후보들 중 하나가 흐려진 낯빛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이 문주, 그럼...저 무례한 자의 질문이 사실입니까?"
"이거 모양새가 이상해졌군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이연화는 다소 씁쓸하면서도 부끄러운 미소를 처연히 흘렸다. 일반적으로 혼사에 있어 꽤 결격 사유인 내용을 들었음에도, 수십의 양인들은 절대 이연화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경청의 태도를 취했다. 짙은 눈썹을 괴상한 모양으로 찌푸린 채, 적비성은 이 웃기지도 않은 행태를 어이없이 지켜보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한숨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제 체질이 바뀐 지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확신하기는 어렵다 했으나, 아무래도 약초에 의한 후천적 발현이다 보니...후사를 보기는 어려울 가능성도 크겠다더군요. 저도 오늘 알게 된 사실이라 조금 더 확실해진 후, 최종 과제를 드리기 전 말씀드리려 했는데...이렇게 윤 공자께서 먼저 꺼내시니, 조금 무안하고 당혹스럽습니다. 하늘과 땅에 맹세코, 모여주신 분들을 끝까지 속일 마음은 없었습니다. 허나 이 사람을 믿기 어려우시다면, 그 또한 이해합니다. 모두 저의 잘못이겠지요."
이연화가 살짝 흔들리는 목소리로 맺으며 고개를 반쯤 숙였다. 그 속눈썹이 흰 뺨 위로 파르르 떨리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유리로 된 연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슨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사방에서 옹호하는 목소리들이 터졌다.
"아니, 문주께서 그런 상황을 어찌 예측하셨겠습니까?"
"워낙 놀라운 일이었을 테니, 바로 말씀하시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좋은 혼처를 구하기 위해 저희를 속이실 작정이셨다면, 첫날에 본인은 더 이상 사고문주가 아니라 미리 알려주시지도 않았겠지요."
적비성은 날개를 열심히 흔드는 공작새들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눈살을 찡그렸다. 금원맹주는 옛날부터 각려초에게 홀려 멍청한 짓을 하는 놈들을 매우 경멸하거나 한심스럽게 여겼는데, 대상이 이연화가 되자 어쩐지 그 멸시의 마음이 배로 커졌다. 후보들의 눈에야 이연화가 그저 애처롭고 유약해 보일지 몰랐으나, 적비성의 눈에는 꼬리를 슬슬 흔들며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는 노회한 여우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문주. 저는 사씨 집안의 가주, 사인백입니다. 문주를 탓하지 않으나, 이곳에는 자신이 속한 가문의 의지에 반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겝니다."
마흔에 가까운 남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잘 손질된 수염을 가진, 호리호리한 몸과 말쑥한 외양의 사내였다.
사인백의 말에, 몇몇 청년들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혼사는 통상 집안 전체의 중대사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모들에게, 혼인이란 곧 후손 생산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만일 그 기능에 결점이 있을 확률이 높다면, 아마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그냥 돌아오라 지시할 가능성이 컸다. 이연화가 희미한 억지 미소를 띠었다.
"물론 이해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갑작스럽지만 시기를 앞당겨 여쭈어야겠군요. 말씀드린 것처럼, 제 상황이 이렇습니다. 여러분도 고민하고 논의하실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엿새의 여유를 드릴 테니, 그 사이 떠나실 분들은 떠나셔도 좋습니다. 남아 계신 분들께, 엿새 뒤 신시에 두 번째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평정을 회복했지만, 그래도 마음의 충격과 흔들림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한 표정'을 지은 채 기품 있게 예를 표했다(적비성은 대체 이연화가 어떻게 '파리한 낯빛'을 연기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많은 분들을 오늘까지만 뵙게 되겠지요. 미리 작별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는 얼굴은 진심으로 안타깝고도 슬퍼 보여, 몇몇 사람들이 더욱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그 면면에 난처하고도 복잡한 열망이 가득했다. 개중 한 사람이 충동적으로 말했다. 혼잣말인지 질문인지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그, 그래도...후손 문제는 후처나 첩으로도 해결할 수 있으니...."
그 멍청한 말이 울리자마자, 문간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무인들은 모두 깜짝 놀라 한 방향을 돌아보았다. 석수가 옛 경전에 나오는 마귀들처럼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채 채찍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이연화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척하고 자연스럽게 이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심려를 끼치게 되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첫날 있었던 소란도 그렇고, 제가 여러분께 거푸 피해를 드리는 듯합니다. 부디 제 진심에서 비롯된 상황이 아님을 알아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이상이와 이연화의 은원이 참으로 질기군요."
말을 마친 이연화가 그윽하고도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속사정을 아는 적비성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문주의 탓이 아니다, 무도한 악인들의 잘못이지 않느냐 등등의 위로가 쏟아지는 가운데, 관심의 주인공은 감사의 말과 미소를 남긴 채 미끄러지듯 자리를 떴다. 남은 이들은 당연하게도 대혼란에 빠져 웅성거렸다(몇몇 사람들은 대놓고 윤청언을 죽일 것처럼 쏘아보기도 했다). '집안에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기한 안에 가족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따위의 걱정을 늘어놓는 이들 사이에 대충 끼어 있다가, 금원맹주는 모두가 잠자리를 찾아 침소에 들었을 즈음을 틈타 훌쩍 하늘로 뛰어올랐다.
이연화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아주 멀리에서 보더라도, 그 모습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든 채, 이연화는 백천원의 내밀한 공터에서 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웬만한 명검도 부럽지 않을 기세로 공기를 찢어내며 날카로운 파공음을 냈다. 지붕을 한 번 박차고 날아, 적비성은 그 옆으로 척 내려섰다. 이연화가 퍼뜩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입은 옷은 연회 때와 같았으나, 그 분위기는 영락없는 무인이었다. 객들의 앞에서 보여주었던 가짜 비애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적비성이 심술스럽게 말했다.
"미친 소리를 할 거라면 미리 예고를 해라."
"내가 언제 미친 소리를 했다고 그래? 하여튼 하나하나 불만이 많아. 끝까지 안 남겨준다."
이연화가 혀를 차며 적비성을 훑어보았다. 오늘 저녁까지의 고상한 모습에 비하면 참으로 불량하면서도 소탈한 말투였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차라리 이런 모습이 훨씬 대하기 편했다.
"갑자기 그런 소리를 왜 한 거냐?"
"음. 두 개 정도의 이유가 있었지."
나뭇가지를 팔 뒤로 검처럼 갈무리한 이연화가 태평하게 설명했다. 하나, 그런 소문을 퍼뜨리면 아직 남아있는 허수가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공개 혼사가 끝난 이후, 다른 양인들이 혼인하자며 자신을 귀찮게 만들 가능성도 낮아질 것이다. "둘. 이게 더 중요한데." 이연화가 느슨하게 팔짱을 낀 채 이었다.
"첫날 이후로, 적들은 좀처럼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지 않았어. 첫날의 습격이 전부였을 리는 없는데 말이야. 심지어 오늘 연회 자리에서도 행동하지 않았고. 그렇다면, 그들의 목적이 뭔지 대강 알 만하잖아? 움직이게 만들 방법이 되겠다 싶었지."
금방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적비성이 알아듣게 설명하라는 의도를 눈으로 쏘아붙이며 마주 팔짱을 끼었다. 조금 딱한 학생을 보는 듯한 시선을 던지며, 이연화는 나뭇가지로 허공을 콕 찍었다.
"자, 봐. 그저 날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십중팔구 오늘 연회 자리에서 손을 썼을 거야. 가장 좋은 기회였을 테지. 객이 많고 자리가 협소하니, 내가 즉각적으로 강한 초식을 쓰기도 쉽지 않았을 테고. 구 공자처럼 행동해서 날 근처로 끌어들일 수도 있었을 테니까. 나 술 마실 때 일부러 굉장히 경계를 늦추고 있었어. 뛰어난 살수라면 분명 기회란 걸 알았을 거야. 끌어들여 공격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걸."
아. 적비성은 이제야 그 속 터지던 행동을 이해하고 눈썹을 까딱했다. 눈을 반쯤 감은 채 술을 마시던 모습이 퍽 무방비하기는 했다. 고수의 간격에 들어갔을 때 자연스레 엄습하는 긴장감 따위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엉뚱한 자들이 엉뚱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대꾸하는 대신, 금원맹주는 가만히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이연화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꽤 여지를 주었는데도 움직이지 않더라고. 그렇다면 가능성이 하나로 좁혀지지 않겠어? 천기산장에서 잡힌 자객이 했던 말처럼, 정말 나한테서 남윤의 적통을 볼 생각이 있는 거지."
이연화가 남의 이야기를 하듯 읊었다. 적비성이 미간을 좁혔다. 이미 들은 바가 있는 가설이었지만, 들을 때마다 불쾌하다 못해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그러면 최종 후보가 되든, 때를 봐서 날 납치하든 뭔가 행동을 할 작정이지 않았겠어. 하지만 짠, 이걸 어쩌나? 내게 아이를 낳을 능력이 없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진실이든 아니든, 이건 그들에게 있어 꽤 중요한 정보란 말이야. 지금껏 잠자코 있었다 해도, 이런 정보를 외부에 알려주지 않을 수는 없지."
"이연화, 찾았어!"
방다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남자가 홱 한편을 돌아보았다. 약간 상기된 얼굴의 방다병이 달려오고 있었다. 청년은 주변에 기척이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서야 낮게 이었다.
"오늘 엄청난 수의 새들이 백천원을 나갔단 말이야. 천기산장의 새들까지 급히 빌려서 감시망을 넓혀야 했어. 대부분은 상황을 알리고 부모와 집안 어른들의 의향을 묻는 서신이었는데, 그 중에 이런 게 섞여 있었어."
방다병에 급히 조그만 서신 통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서 나온 쪽지를 보고, 적비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하게 차 있었지만, 그 내용은 조금 전 방다병이 말해준 많은 서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서신이잖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지."
방다병이 긴 머리를 뽐내듯이 넘기며 대꾸한 말에, 적비성이 험한 시선을 던졌다. 아무리 나이에 비해 역량이 출중하더라도, 이런 하룻강아지에게 무시당할 마음은 없었다. 둘을 무시하고 서신을 살피던 이연화가 중얼거렸다.
"암호문이로군."
"맞아, 신불 사건 때 봤던 것과 비슷해. 이렇게 읽으면...."
"앞의 두 줄을 보고하지 않을 수 없어 서신을 드립니다. 나흘 안으로 다음 지시를 바랍니다. 뱀과 여우도 문제 없이 잔류하여 있습니다."
이연화가 빠르게 글자를 조합해 읽어내렸다. 방다병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뱀과 여우. 서신을 쓴 사람 말고도, 후보들 중에 적이 두 명 더 있는 거야. 정확히 누굴 가리키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정말 믿을 수가 없다니까. 지금 남은 사람들은 거의 명문가의 가주거나 자제들인데, 그 안에 남윤이나 각려초의 추종 세력이 있다니."
"이걸 보낸 사람은...성대경? 누구더라?"
"신기산장의 소가주야. 성가의 뒷조사를 할 사람들은 이미 운 원주와 백 원주께서 안배해 뒀어. 성대경은 어떻게 하지? 지금 당장 잡아들일까?"
"그랬다간 배후를 알아낼 가능성이 낮아질 거야. 뱀과 여우도 몸을 사릴 테고. 일단 성대경은 그대로 둬. 누군지 알았으니 당할 일은 없겠지. 만일 성대경이 떠나려는 기색을 보이면, 그때 뒤를 밟거나 몰래 잡아서 심문하자고."
"그냥 잡아서 족치면 안 되나? 내가 봤을 땐 별 무골도 아니고, 고문을 잘 견딜 것처럼 생기지도 않았던데."
적비성이 귀찮은 얼굴로 말했다. 금원맹주는 늘 적을 앞에 두고 잘 참는 편이 아니었다. 성대경이라면 같은 숙소에 묵었던지라 대충 면식이 있었다. 키는 컸지만, 몸이 가늘고 안색이 어두워 영 병약하고 미덥지 못한 인상이었다. 이연화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적 맹주, 이런 무리를 단번에 소탕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피곤해져. 사람으로 치면 손가락이나 발가락까지 모두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뇌와 심장은 반드시 처리해야 한단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계속 새로운 세력이 암약하고 자라날 뿐이야. 너와 나도 그래서 십 년이 넘도록 고생했잖아? 조금 기다리더라도, 최대한 뿌리를 뽑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아."
이연화의 말에, 적비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이연화를 쏘아보았다. 이연화가 의심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뭐, 왜. 왜 사람을 그렇게 봐?" 적비성이 입을 살짝 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영 판단이 서지 않았다. 상황은 분명 이연화의 의도와 예측대로 흘러가는 중인데도, 마치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혔을 때처럼 석연찮은 마음이 들었다. 동물적 본능이라고 칭할 수도 있었으나, 결국은 근거 없는 감일 뿐이었다. 적비성은 그 모호한 껄끄러움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상대를 타박하듯 퉁명스럽게 건넸다.
"칼이나 제대로 하나 갖춰라, 이상이. 언제까지 남의 칼과 나뭇가지 따위로 싸울 거냐?"
"그럼 네가 적당한 걸로 하나 갖다주든가."
이연화가 뻔뻔하게 이야기하며 나뭇가지 끝으로 적비성의 어깨를 꾹 찔렀다. 그 나뭇가지를 한 손으로 툭 쳐내며, 적비성은 정말로 마교 내에서 쓸 만한 무기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방다병이 한숨을 푹 쉬었다.
"너랑 혼인하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이 이런 애 같은 꼴도 봐야 하는데."
"하하, 이제 이 연극에 속는 사람들도 거의 다 사라질걸. 앞으로 며칠 뒤면 반절 이상이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말이야."
이연화가 천진한 악동처럼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적비성은 과연 그 말대로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가늘게 뜬 눈으로 이연화를 노려보다가, 이내 자신과 비슷한 시선을 보내던 방다병을 발견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연화의 형질이 바뀐 이후로, 어쩐지 이 하룻강아지와 비슷한 표정을 짓는 경우가 늘어난 듯했다. 퍽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본편 이후 시점으로 ㅅㅍㅈㅇ 다병연화 비성연화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이연화가 물었다. 평온한 목소리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주의를 기울였다. 질문했던 남자는 땀방울을 억지로 붙드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적비성은 남자의 가늘게 떨리는 손이, 비단 혼신의 연기 때문만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비록 미리 합의가 되었다 하더라도, 지금 이연화가 내비치는 불편한 기색은 보통 사람에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윤, 윤씨 가문의 차남 윤청언입니다."
"윤가의 정보력이 대단한가 봅니다. 저조차 오늘 들었던 이야기를 이리 바로 꺼내시니 말입니다."
이연화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말했다.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후보들 중 하나가 흐려진 낯빛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이 문주, 그럼...저 무례한 자의 질문이 사실입니까?"
"이거 모양새가 이상해졌군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이연화는 다소 씁쓸하면서도 부끄러운 미소를 처연히 흘렸다. 일반적으로 혼사에 있어 꽤 결격 사유인 내용을 들었음에도, 수십의 양인들은 절대 이연화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경청의 태도를 취했다. 짙은 눈썹을 괴상한 모양으로 찌푸린 채, 적비성은 이 웃기지도 않은 행태를 어이없이 지켜보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이연화가 입을 열었다. 한숨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제 체질이 바뀐 지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확신하기는 어렵다 했으나, 아무래도 약초에 의한 후천적 발현이다 보니...후사를 보기는 어려울 가능성도 크겠다더군요. 저도 오늘 알게 된 사실이라 조금 더 확실해진 후, 최종 과제를 드리기 전 말씀드리려 했는데...이렇게 윤 공자께서 먼저 꺼내시니, 조금 무안하고 당혹스럽습니다. 하늘과 땅에 맹세코, 모여주신 분들을 끝까지 속일 마음은 없었습니다. 허나 이 사람을 믿기 어려우시다면, 그 또한 이해합니다. 모두 저의 잘못이겠지요."
이연화가 살짝 흔들리는 목소리로 맺으며 고개를 반쯤 숙였다. 그 속눈썹이 흰 뺨 위로 파르르 떨리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유리로 된 연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슨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사방에서 옹호하는 목소리들이 터졌다.
"아니, 문주께서 그런 상황을 어찌 예측하셨겠습니까?"
"워낙 놀라운 일이었을 테니, 바로 말씀하시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좋은 혼처를 구하기 위해 저희를 속이실 작정이셨다면, 첫날에 본인은 더 이상 사고문주가 아니라 미리 알려주시지도 않았겠지요."
적비성은 날개를 열심히 흔드는 공작새들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눈살을 찡그렸다. 금원맹주는 옛날부터 각려초에게 홀려 멍청한 짓을 하는 놈들을 매우 경멸하거나 한심스럽게 여겼는데, 대상이 이연화가 되자 어쩐지 그 멸시의 마음이 배로 커졌다. 후보들의 눈에야 이연화가 그저 애처롭고 유약해 보일지 몰랐으나, 적비성의 눈에는 꼬리를 슬슬 흔들며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는 노회한 여우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문주. 저는 사씨 집안의 가주, 사인백입니다. 문주를 탓하지 않으나, 이곳에는 자신이 속한 가문의 의지에 반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겝니다."
마흔에 가까운 남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잘 손질된 수염을 가진, 호리호리한 몸과 말쑥한 외양의 사내였다.
사인백의 말에, 몇몇 청년들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혼사는 통상 집안 전체의 중대사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모들에게, 혼인이란 곧 후손 생산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만일 그 기능에 결점이 있을 확률이 높다면, 아마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그냥 돌아오라 지시할 가능성이 컸다. 이연화가 희미한 억지 미소를 띠었다.
"물론 이해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갑작스럽지만 시기를 앞당겨 여쭈어야겠군요. 말씀드린 것처럼, 제 상황이 이렇습니다. 여러분도 고민하고 논의하실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엿새의 여유를 드릴 테니, 그 사이 떠나실 분들은 떠나셔도 좋습니다. 남아 계신 분들께, 엿새 뒤 신시에 두 번째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평정을 회복했지만, 그래도 마음의 충격과 흔들림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한 표정'을 지은 채 기품 있게 예를 표했다(적비성은 대체 이연화가 어떻게 '파리한 낯빛'을 연기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많은 분들을 오늘까지만 뵙게 되겠지요. 미리 작별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는 얼굴은 진심으로 안타깝고도 슬퍼 보여, 몇몇 사람들이 더욱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그 면면에 난처하고도 복잡한 열망이 가득했다. 개중 한 사람이 충동적으로 말했다. 혼잣말인지 질문인지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그, 그래도...후손 문제는 후처나 첩으로도 해결할 수 있으니...."
그 멍청한 말이 울리자마자, 문간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무인들은 모두 깜짝 놀라 한 방향을 돌아보았다. 석수가 옛 경전에 나오는 마귀들처럼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채 채찍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이연화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척하고 자연스럽게 이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심려를 끼치게 되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첫날 있었던 소란도 그렇고, 제가 여러분께 거푸 피해를 드리는 듯합니다. 부디 제 진심에서 비롯된 상황이 아님을 알아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이상이와 이연화의 은원이 참으로 질기군요."
말을 마친 이연화가 그윽하고도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속사정을 아는 적비성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문주의 탓이 아니다, 무도한 악인들의 잘못이지 않느냐 등등의 위로가 쏟아지는 가운데, 관심의 주인공은 감사의 말과 미소를 남긴 채 미끄러지듯 자리를 떴다. 남은 이들은 당연하게도 대혼란에 빠져 웅성거렸다(몇몇 사람들은 대놓고 윤청언을 죽일 것처럼 쏘아보기도 했다). '집안에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기한 안에 가족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따위의 걱정을 늘어놓는 이들 사이에 대충 끼어 있다가, 금원맹주는 모두가 잠자리를 찾아 침소에 들었을 즈음을 틈타 훌쩍 하늘로 뛰어올랐다.
이연화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아주 멀리에서 보더라도, 그 모습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든 채, 이연화는 백천원의 내밀한 공터에서 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웬만한 명검도 부럽지 않을 기세로 공기를 찢어내며 날카로운 파공음을 냈다. 지붕을 한 번 박차고 날아, 적비성은 그 옆으로 척 내려섰다. 이연화가 퍼뜩 적비성을 돌아보았다. 입은 옷은 연회 때와 같았으나, 그 분위기는 영락없는 무인이었다. 객들의 앞에서 보여주었던 가짜 비애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적비성이 심술스럽게 말했다.
"미친 소리를 할 거라면 미리 예고를 해라."
"내가 언제 미친 소리를 했다고 그래? 하여튼 하나하나 불만이 많아. 끝까지 안 남겨준다."
이연화가 혀를 차며 적비성을 훑어보았다. 오늘 저녁까지의 고상한 모습에 비하면 참으로 불량하면서도 소탈한 말투였다. 적비성이 코웃음을 쳤다. 차라리 이런 모습이 훨씬 대하기 편했다.
"갑자기 그런 소리를 왜 한 거냐?"
"음. 두 개 정도의 이유가 있었지."
나뭇가지를 팔 뒤로 검처럼 갈무리한 이연화가 태평하게 설명했다. 하나, 그런 소문을 퍼뜨리면 아직 남아있는 허수가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공개 혼사가 끝난 이후, 다른 양인들이 혼인하자며 자신을 귀찮게 만들 가능성도 낮아질 것이다. "둘. 이게 더 중요한데." 이연화가 느슨하게 팔짱을 낀 채 이었다.
"첫날 이후로, 적들은 좀처럼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지 않았어. 첫날의 습격이 전부였을 리는 없는데 말이야. 심지어 오늘 연회 자리에서도 행동하지 않았고. 그렇다면, 그들의 목적이 뭔지 대강 알 만하잖아? 움직이게 만들 방법이 되겠다 싶었지."
금방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적비성이 알아듣게 설명하라는 의도를 눈으로 쏘아붙이며 마주 팔짱을 끼었다. 조금 딱한 학생을 보는 듯한 시선을 던지며, 이연화는 나뭇가지로 허공을 콕 찍었다.
"자, 봐. 그저 날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십중팔구 오늘 연회 자리에서 손을 썼을 거야. 가장 좋은 기회였을 테지. 객이 많고 자리가 협소하니, 내가 즉각적으로 강한 초식을 쓰기도 쉽지 않았을 테고. 구 공자처럼 행동해서 날 근처로 끌어들일 수도 있었을 테니까. 나 술 마실 때 일부러 굉장히 경계를 늦추고 있었어. 뛰어난 살수라면 분명 기회란 걸 알았을 거야. 끌어들여 공격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걸."
아. 적비성은 이제야 그 속 터지던 행동을 이해하고 눈썹을 까딱했다. 눈을 반쯤 감은 채 술을 마시던 모습이 퍽 무방비하기는 했다. 고수의 간격에 들어갔을 때 자연스레 엄습하는 긴장감 따위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엉뚱한 자들이 엉뚱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대꾸하는 대신, 금원맹주는 가만히 이연화를 바라보았다. 이연화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꽤 여지를 주었는데도 움직이지 않더라고. 그렇다면 가능성이 하나로 좁혀지지 않겠어? 천기산장에서 잡힌 자객이 했던 말처럼, 정말 나한테서 남윤의 적통을 볼 생각이 있는 거지."
이연화가 남의 이야기를 하듯 읊었다. 적비성이 미간을 좁혔다. 이미 들은 바가 있는 가설이었지만, 들을 때마다 불쾌하다 못해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그러면 최종 후보가 되든, 때를 봐서 날 납치하든 뭔가 행동을 할 작정이지 않았겠어. 하지만 짠, 이걸 어쩌나? 내게 아이를 낳을 능력이 없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진실이든 아니든, 이건 그들에게 있어 꽤 중요한 정보란 말이야. 지금껏 잠자코 있었다 해도, 이런 정보를 외부에 알려주지 않을 수는 없지."
"이연화, 찾았어!"
방다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남자가 홱 한편을 돌아보았다. 약간 상기된 얼굴의 방다병이 달려오고 있었다. 청년은 주변에 기척이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서야 낮게 이었다.
"오늘 엄청난 수의 새들이 백천원을 나갔단 말이야. 천기산장의 새들까지 급히 빌려서 감시망을 넓혀야 했어. 대부분은 상황을 알리고 부모와 집안 어른들의 의향을 묻는 서신이었는데, 그 중에 이런 게 섞여 있었어."
방다병에 급히 조그만 서신 통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서 나온 쪽지를 보고, 적비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하게 차 있었지만, 그 내용은 조금 전 방다병이 말해준 많은 서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서신이잖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지."
방다병이 긴 머리를 뽐내듯이 넘기며 대꾸한 말에, 적비성이 험한 시선을 던졌다. 아무리 나이에 비해 역량이 출중하더라도, 이런 하룻강아지에게 무시당할 마음은 없었다. 둘을 무시하고 서신을 살피던 이연화가 중얼거렸다.
"암호문이로군."
"맞아, 신불 사건 때 봤던 것과 비슷해. 이렇게 읽으면...."
"앞의 두 줄을 보고하지 않을 수 없어 서신을 드립니다. 나흘 안으로 다음 지시를 바랍니다. 뱀과 여우도 문제 없이 잔류하여 있습니다."
이연화가 빠르게 글자를 조합해 읽어내렸다. 방다병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뱀과 여우. 서신을 쓴 사람 말고도, 후보들 중에 적이 두 명 더 있는 거야. 정확히 누굴 가리키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정말 믿을 수가 없다니까. 지금 남은 사람들은 거의 명문가의 가주거나 자제들인데, 그 안에 남윤이나 각려초의 추종 세력이 있다니."
"이걸 보낸 사람은...성대경? 누구더라?"
"신기산장의 소가주야. 성가의 뒷조사를 할 사람들은 이미 운 원주와 백 원주께서 안배해 뒀어. 성대경은 어떻게 하지? 지금 당장 잡아들일까?"
"그랬다간 배후를 알아낼 가능성이 낮아질 거야. 뱀과 여우도 몸을 사릴 테고. 일단 성대경은 그대로 둬. 누군지 알았으니 당할 일은 없겠지. 만일 성대경이 떠나려는 기색을 보이면, 그때 뒤를 밟거나 몰래 잡아서 심문하자고."
"그냥 잡아서 족치면 안 되나? 내가 봤을 땐 별 무골도 아니고, 고문을 잘 견딜 것처럼 생기지도 않았던데."
적비성이 귀찮은 얼굴로 말했다. 금원맹주는 늘 적을 앞에 두고 잘 참는 편이 아니었다. 성대경이라면 같은 숙소에 묵었던지라 대충 면식이 있었다. 키는 컸지만, 몸이 가늘고 안색이 어두워 영 병약하고 미덥지 못한 인상이었다. 이연화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적 맹주, 이런 무리를 단번에 소탕하지 못하면 두고두고 피곤해져. 사람으로 치면 손가락이나 발가락까지 모두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뇌와 심장은 반드시 처리해야 한단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계속 새로운 세력이 암약하고 자라날 뿐이야. 너와 나도 그래서 십 년이 넘도록 고생했잖아? 조금 기다리더라도, 최대한 뿌리를 뽑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아."
이연화의 말에, 적비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이연화를 쏘아보았다. 이연화가 의심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뭐, 왜. 왜 사람을 그렇게 봐?" 적비성이 입을 살짝 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영 판단이 서지 않았다. 상황은 분명 이연화의 의도와 예측대로 흘러가는 중인데도, 마치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혔을 때처럼 석연찮은 마음이 들었다. 동물적 본능이라고 칭할 수도 있었으나, 결국은 근거 없는 감일 뿐이었다. 적비성은 그 모호한 껄끄러움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상대를 타박하듯 퉁명스럽게 건넸다.
"칼이나 제대로 하나 갖춰라, 이상이. 언제까지 남의 칼과 나뭇가지 따위로 싸울 거냐?"
"그럼 네가 적당한 걸로 하나 갖다주든가."
이연화가 뻔뻔하게 이야기하며 나뭇가지 끝으로 적비성의 어깨를 꾹 찔렀다. 그 나뭇가지를 한 손으로 툭 쳐내며, 적비성은 정말로 마교 내에서 쓸 만한 무기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방다병이 한숨을 푹 쉬었다.
"너랑 혼인하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이 이런 애 같은 꼴도 봐야 하는데."
"하하, 이제 이 연극에 속는 사람들도 거의 다 사라질걸. 앞으로 며칠 뒤면 반절 이상이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말이야."
이연화가 천진한 악동처럼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적비성은 과연 그 말대로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가늘게 뜬 눈으로 이연화를 노려보다가, 이내 자신과 비슷한 시선을 보내던 방다병을 발견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연화의 형질이 바뀐 이후로, 어쩐지 이 하룻강아지와 비슷한 표정을 짓는 경우가 늘어난 듯했다. 퍽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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