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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3 22:19
아, 그러고보니 우연히 야렵에서 사숙을 만났는데요...

금릉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말을 멈췄다. 강징의 표정은 조금 전 그대로였다. 느린 걸음걸이도 흔들리지 않았다. 금릉은 잠시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강징의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소와 공동으로 진행되어 온 야렵에 대해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교류회를 여는게 어떠냐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말을 마친 금릉은 마치 이 화제에 별 다른 사감은 없으며 위무선과의 만남도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표정으로 강징을 바라보았다.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관음사에서 그렇게 헤어진 이후, 강징과 위무선은 단 한번도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 혹여 공적인 장소에서 마주친다하더라도 서로의 존재를 필사적으로 무시하며 스쳐 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무선과 강징이 완전한 타인이란 사실은 모두에게 통하는 공식이 되었다. 금릉을 제외하고는.

본인들마저도 원치 않는 관계를 어떻게든 이어 붙여보려 안간힘을 쓰는 금릉의 모습은 어떤 면에선 유별나기까지 했다. 운심부지처의 제자 녀석들은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금릉의 성화에 못이겨 위무선을 끌고 부지런히 운몽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강징은, 이제 더 이상 그렇게까지 애 쓸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왜냐면 우리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위무선이 살아 돌아오기 전 강징의 악몽은 늘 타오르는 연화오에서 시작되어 천길 낭떠러지에서 끝났다. 하지만 지금은 눈을 감으면 관음묘에서 깨어났다. 강징은 아직도 그 순간의 모든 것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추적거리던 빗소리. 비에 젖어 척척하게 피부에 달라붙던 옷. 볼을 쓰다듬는 차가운 손...위무선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면 강징은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언제나 위무선의 입술은 벌어지고 강징은 듣는다.

나는 이제 모두 전생처럼 느껴져,

그만.

우리 둘 다 잊어버리자.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그만해. 강징이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위무선의 목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위무선은 산산히 부수어진 강징의 잔해를 홀로 남겨둔 채 떠나는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영원히.

강징은 그 순간의 모든 것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 홀가분한 얼굴, 망설임 없이 뒤돌아 떠나버리는 뒷모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강징은 여전히 16년 전에 갇혀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는데, 위무선이 죽은 순간에 영원히 못 박혀버렸는데.

대범산에서 헌사한 위무선과 마주쳤을 때, 강징은 왜 위무선이 자신이 아닌 남망기를 따라갔는지 궁금했다. 다시 살아나자 마자 왜 내 곁에 돌아오지 않는지 궁금했다. 왜 연화오로 돌아오지 않는지 궁금했다. 너는 내가 없어도 괜찮은지 궁금하다가 사실은 없는 쪽이 더 행복한 건지 묻고 싶었다.

나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을 후회하는지 궁금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또 비가 오고 있었다. 차가운 돌바닥의 냉기가 익숙하게 무릎을 타고 올라왔다. 검에 베인 상처가 불에 덴듯 화끈 거렸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눈 앞에 위무선이 보였다. 차가운 손이 볼을 감쌌다. 희미하게 미소짓는 위무선을 보면서 강징은 그저 피곤하다는 생각을 했다. 위무선의 약속을 내내 보물처럼 간직했다. 영원히 곁에 있어 주겠다니. 그런 말을 잘도 믿었었구나. 정말로. 이렇게 오랫동안. 그저 믿었어. 위무선의 환영이 떠나고 혼자 남겨진 강징의 몸이 무너졌다. 짐승같은 흐느낌이 곧 허탈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아득하게 심장의 빛이 사그라든 것이 느껴졌다. 불꽃이 타오르고 남은 자리에 창백한 재만이 남았다. 어둠 속에 남겨진 듯 차갑고 공허했다. 하지만 불을 피우기 위해 장작을 넣고 불씨를 피우려 노력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위무선에게 강징이 필요 없다면, 강징을 만나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마음의 불편함도 감수하고 싶지않다면. 그 모든 시간들이 가볍게 대체될 수 있던 무언가라면. 강징이 그저 거추장스러운 과거의 잔재일 뿐이라면. 이제 나 또한.

아릉.
네,
이제 내게 위무선에 대해 전해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강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

위무선이 필요없어.

그 말과 동시에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마음 속에서 난 일이 아니었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강징은 얼빠진 표정으로 담벼락에 매달린 위무선을 발견했다. 멍청한 표정이 꼭 뺨이린도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어...아니, 난...

자신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을 느낀 위무선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담벼락에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평소에는 혼자서도 잘만 떠들어대던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이 쓸모 없는 주둥이! 들켰을 때를 위한 변명도 미리 생각해뒀는데 머리 속이 얻어맞는 것처럼 멍하기만 했다. 떠올려 봐. 난 뭐하러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난, 그냥...

위무선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오랜만에 제대로 본 강징의 얼굴은 낯설었다. 담을 타고 넘어 온 위무선의 낯설었다 큰소리로 꾸짖지도 않았고 퉁명스레 걱정하는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눈동자는 어떠한 온기나 상처도 없이 무심했다.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 상관 없는 타인을 보는 것처럼. 그 생각이 주는 두려움에 손 끝이 떨렸다.

위무선은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위무선은 할 수있는 말이 없었다. 그가 강징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는 16년동안 그를 기다린 강징의 앞에서 강징이 지나간 과거일 뿐이라 말했다. 강징의 손을 붙잡고 과거의 상처를 나누며 함께 우는 대신에. 책임을 지는게 무서워서 도망쳤다. 지금도, 위무선은 차라리 도망치고 싶었다. 언제나 도망치는게 더 쉬웠다.

이곳은 외부인의 출입은 금하고 있습니다.

강징이 조용히 축객령을 내렸다. 밖으로 통하는 문은 바로 지척에 있었다. 이대로 나가는건 너무나 쉬울 것이다. 도망치려는 발을 붙잡는 것은 강징의 눈동자였다. 체념의 눈동자. 16년은 충분히 길었어. 강징은 이미 너무 많이 기다렸다. 언제까지고 위무선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만약 이번에도 도망친다면 이번에야말로 강징은 위무선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다...담! 담 넘은 건 미안해, 그리고 교류회 이야기는 내가 먼저 부탁했어.. ! 왜냐면 금릉 일이면 넌 나올테니까.. 왜냐면...왜냐면...

다음 말은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위무선은 도망치지 않기 위해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늘 후회했다. 헌사한 직후에 바로 강징을 찾아갔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도망치지 않았다면.

네가 보고싶었어, 그리웠어...! 다 전생 같다고 말했지만, 그래, 사실 거짓말이었어.

위무선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둑이 터져나오듯 외면했던 감정들이 쏟아져내렸다. 위무선의 말투는 온통 두서없고 우습기 짝이 없었지만 적어도 멈추지는 않았다

널 좋아해!! 그러니까 필요없다고 말하지마 난 계속 널 만나러 올거야! 앞으로도 평생 만나러 올거야! 만약 네 옆에서 날 떼어내려면 연화오의 모든 사람을 다 데려와야 할거야!!

위무선의 가슴이 씩씩거리며 격렬하게 오르내렸다.

사랑해 강징.

강징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마지막 말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맙소사. 내가 무슨 말을 한거지? 그제야 제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담장 위에 서있던 위무선은 도망치려던 자세 그대로 담장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악!

와장창! 무언가 깨지는 소리,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 조심성 없이 도망가는 위무선의 발소리까지 한바탕 커다란 소란이 일어났다.

침묵에서 먼저 풀려난 것은 금릉이었다. 그의 얼굴을 터질것처럼 새빨갛고 가슴은 크게 부풀었다. 금릉은 얼굴만큼이나 붉은 입술을 질겅이다 마침내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미친 놈! 외숙한테 무슨 헛소릴 하는거야 !

사납게 발을 구르며 위무선을 쫓으려는 금릉을 멈춘 것은 강징이었다.

됐어, 놔 둬.
외...외숙...!

금릉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강징에게 다가왔다.

하...하하...얼 빠진 자식...!

강징이 맥아리 없이 없이 웃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초봄에 눈이 녹듯이. 마른 땅에 비가 스미듯이. 그저 기쁨인지 슬픔인지 알수없는 감정이 가슴에 미지근한 온기를 전하며 타올랐다.




훗 날 외숙의 침실에서 기어나오는 위무선을 본 금릉 : 이렇게까지 친해지길 바란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