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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3 02:49
그건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선량함과 희망을 모두 지불해서 깊은 공포와 불신밖에 얻지 못한 란각에게는 끔찍하고도 신비로운 일이었다.
도성에서 왕연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는 적었다. 개국 이후로 대를 이어 인재와 충신을 배출해 왔다는 왕가의 둘째 공자와 나라를 배반한 매국노의 아들이 어울려 다닌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흥미를 돋구었다. 그들의 호칭이 몇 차례를 바뀌었다가 마침내 정착했을 무렵, 사람들은 출세와 영화에 눈이 벌개진 매국노의 아들이 어떻게든 왕가에 빌붙어 보려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고 떠들었다. 그럴 듯한 소문이었다. 란각은 자신조차도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말이 자신의 귀에 쏟아졌을 때 눈 앞이 깜깜해졌다가, 시뻘개졌다가를 반복하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자신이 없었다. 왕연은 확실히 꽤나 좋은 사다리였다. 출세가 글만 읽으면 되는 것이고, 재능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면 왕연의 가문처럼 몇 십 년 몇 백 년을 도성에서 뿌리내린 세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테였다. 란각이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십 년 동안, 왕연은 영의정을 삼촌이라 부르고, 세가의 자제들과 함께 사냥을 즐기며,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에게 마련된 특권을 즐기고 또 다지며 살아왔으니까. 그리고 이런 명문가의 자제가 자신에게는 의아할만큼 호방하고 너그러우니, 이 때를 기회 삼는 것은 사실 총명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란각은 아직 어렸고, 아무리 아버지의 억울함을 떠올려도 어쩔 때는 뼛속 깊이 스며드는 수치심을 이기진 못해서, 그런 말을 왕연의 생일 연회에서, 모두를 앞에 두고 들었을 때는 주먹을 그러쥐고 얼굴을 숙이고 말았다. 찰나의 실수였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잠시 동안, 스스로도 마치 숨겨온 더러운 치부를 보인 것 같은 격렬한 수치와, 거리에 떠돌던 자신과 아버지를 조롱하던 잔혹한 말들이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러나 왕연은 마치 연회장이 쥐 죽은 듯 고요해지지 않았다는 듯, 여전히 포도 한 알을 입 안에 던져 넣으며 웃었다.
"눈이 있다면 명백하지 않습니까. 이 한량이 아무리 집안의 대들보를 빼다 바치겠다고 애걸해도 란 공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무심한 사람이란 게."
그리고 연회의 주인공은 이내 시선을 돌려 란각을 향해 웃었다.
"게다가 란 공자 한 명이 기대었다고 쓰러질 대들보라면 일찌감치 썩은 나무 아니겠습니까."
고작 매국노의 아들을 비방하는 것과 왕가의 가세가 기울었다고 떠드는 것은 천지차이였기 때문에 결국 왕연은 그 자의 사과를 받아내고 말았다. 물론 대가가 없던 것은 아니어서, 그 다음 날 왕가의 둘째 공자는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몰골로 나타나긴 했지만, 그는 후회 없다고 했다.
"이제 난 왕 대인에게 단단히 밉보였겠군."
란각이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왕연이 불평했다.
"내 얼굴이 이 모양인데 그게 문제야? 너무하는군."
"그러게 말을 조심했어야지. 왕 대인으로서는 앞날이 창창한 아들이 시꺼먼 사내를, 그것도 나라를 팔아먹은 집안의 자식을 쫓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속이 말이 아니시겠지."
"뭐 어때. 할 일 없는 인간들끼리 뭐라고 떠들든."
"묵문은 소문이 얼마나 무서운 지 모르나보군."
란각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려 애썼지만 어쩐지 그게 쉽지 않았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 너무 무거운 진심이 담긴 탓이었다.
"사람들이 하늘이 붉다하면 하늘도 붉은 색이 되는 거야. 모든 이들이 소를 양이라고 부르면, 소는 양이 되는 게 세상의 법칙인데, 그걸 아직도 모르나?"
왕연은 언뜻 터진 입술 꼬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소는 소고. 양은 양이지. 멍청한 인간들은 멍청한 인간들이고. 패지 자네야말로 아직까지도 그걸 모르나?"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현명할지도 모르지. 내가 출세에 눈이 멀어 왕가의 둘째 공자님을 이용하려고 드는 거면 어쩌려고?"
왕연의 입꼬리가 통쾌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게 그렇게 부럽고,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마음껏 이용해보시지요, 란 대인."
란각이 힘없는 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만약 자네에게 갚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겠지만, 난 자네에 비해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내 빚이 쌓이면 쌓일 수록 우리의 관계도 무너지겠지. 묵문, 자네가 늘 나에게 이토록 솔직하니 나도 솔직하게 말하겠네. 내가 원하는 건 출세도, 명예도, 금은보화도 아니야. 난,"
왕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가로챘다.
"자네 가문의 불명예를 회복하고 싶다고?"
란각은 말문이 막혀버린 채 그를 응시했다. 밝지 않은 등불 밑에서도 왕연의 눈가가 붉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알아."
"......"
"명예도 사치도 네가 즐기는 것들이 아니지. 그런 네가 시험에 목숨을 건 듯 굴고, 조정 관리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묵문."
란각은 가슴 안에서 피어오르는 통증에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했고, 만에 하나 그렇지 않더라고 끝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자네를 이용하고 싶지 않아."
"그것도 알아."
왕연이 자신을 향해 웃었다. 란각은 그의 눈꼬리가, 입가가, 세가 공자답게 수려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란각의 떨리는 주먹을 자신의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그것도 패지, 자네의 성정에는 맞지 않지. 그렇지만 이건 내가 허락한 거야. 얼마든지 이용하라고."
란각은 눈 안이 뜨거워지는 감각에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묵문."
"아니면 자네도 우리 집안을 무시하는 건가? 우리 영감이 뒷목을 잡겠는걸."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란각은 아주 오랫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왕연의 손은 자신의 떨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군자맹 묵문란각
도성에서 왕연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는 적었다. 개국 이후로 대를 이어 인재와 충신을 배출해 왔다는 왕가의 둘째 공자와 나라를 배반한 매국노의 아들이 어울려 다닌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흥미를 돋구었다. 그들의 호칭이 몇 차례를 바뀌었다가 마침내 정착했을 무렵, 사람들은 출세와 영화에 눈이 벌개진 매국노의 아들이 어떻게든 왕가에 빌붙어 보려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고 떠들었다. 그럴 듯한 소문이었다. 란각은 자신조차도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말이 자신의 귀에 쏟아졌을 때 눈 앞이 깜깜해졌다가, 시뻘개졌다가를 반복하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자신이 없었다. 왕연은 확실히 꽤나 좋은 사다리였다. 출세가 글만 읽으면 되는 것이고, 재능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면 왕연의 가문처럼 몇 십 년 몇 백 년을 도성에서 뿌리내린 세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테였다. 란각이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십 년 동안, 왕연은 영의정을 삼촌이라 부르고, 세가의 자제들과 함께 사냥을 즐기며,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에게 마련된 특권을 즐기고 또 다지며 살아왔으니까. 그리고 이런 명문가의 자제가 자신에게는 의아할만큼 호방하고 너그러우니, 이 때를 기회 삼는 것은 사실 총명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란각은 아직 어렸고, 아무리 아버지의 억울함을 떠올려도 어쩔 때는 뼛속 깊이 스며드는 수치심을 이기진 못해서, 그런 말을 왕연의 생일 연회에서, 모두를 앞에 두고 들었을 때는 주먹을 그러쥐고 얼굴을 숙이고 말았다. 찰나의 실수였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잠시 동안, 스스로도 마치 숨겨온 더러운 치부를 보인 것 같은 격렬한 수치와, 거리에 떠돌던 자신과 아버지를 조롱하던 잔혹한 말들이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러나 왕연은 마치 연회장이 쥐 죽은 듯 고요해지지 않았다는 듯, 여전히 포도 한 알을 입 안에 던져 넣으며 웃었다.
"눈이 있다면 명백하지 않습니까. 이 한량이 아무리 집안의 대들보를 빼다 바치겠다고 애걸해도 란 공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무심한 사람이란 게."
그리고 연회의 주인공은 이내 시선을 돌려 란각을 향해 웃었다.
"게다가 란 공자 한 명이 기대었다고 쓰러질 대들보라면 일찌감치 썩은 나무 아니겠습니까."
고작 매국노의 아들을 비방하는 것과 왕가의 가세가 기울었다고 떠드는 것은 천지차이였기 때문에 결국 왕연은 그 자의 사과를 받아내고 말았다. 물론 대가가 없던 것은 아니어서, 그 다음 날 왕가의 둘째 공자는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몰골로 나타나긴 했지만, 그는 후회 없다고 했다.
"이제 난 왕 대인에게 단단히 밉보였겠군."
란각이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왕연이 불평했다.
"내 얼굴이 이 모양인데 그게 문제야? 너무하는군."
"그러게 말을 조심했어야지. 왕 대인으로서는 앞날이 창창한 아들이 시꺼먼 사내를, 그것도 나라를 팔아먹은 집안의 자식을 쫓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속이 말이 아니시겠지."
"뭐 어때. 할 일 없는 인간들끼리 뭐라고 떠들든."
"묵문은 소문이 얼마나 무서운 지 모르나보군."
란각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려 애썼지만 어쩐지 그게 쉽지 않았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 너무 무거운 진심이 담긴 탓이었다.
"사람들이 하늘이 붉다하면 하늘도 붉은 색이 되는 거야. 모든 이들이 소를 양이라고 부르면, 소는 양이 되는 게 세상의 법칙인데, 그걸 아직도 모르나?"
왕연은 언뜻 터진 입술 꼬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소는 소고. 양은 양이지. 멍청한 인간들은 멍청한 인간들이고. 패지 자네야말로 아직까지도 그걸 모르나?"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현명할지도 모르지. 내가 출세에 눈이 멀어 왕가의 둘째 공자님을 이용하려고 드는 거면 어쩌려고?"
왕연의 입꼬리가 통쾌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게 그렇게 부럽고,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마음껏 이용해보시지요, 란 대인."
란각이 힘없는 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만약 자네에게 갚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겠지만, 난 자네에 비해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내 빚이 쌓이면 쌓일 수록 우리의 관계도 무너지겠지. 묵문, 자네가 늘 나에게 이토록 솔직하니 나도 솔직하게 말하겠네. 내가 원하는 건 출세도, 명예도, 금은보화도 아니야. 난,"
왕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가로챘다.
"자네 가문의 불명예를 회복하고 싶다고?"
란각은 말문이 막혀버린 채 그를 응시했다. 밝지 않은 등불 밑에서도 왕연의 눈가가 붉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알아."
"......"
"명예도 사치도 네가 즐기는 것들이 아니지. 그런 네가 시험에 목숨을 건 듯 굴고, 조정 관리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묵문."
란각은 가슴 안에서 피어오르는 통증에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했고, 만에 하나 그렇지 않더라고 끝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자네를 이용하고 싶지 않아."
"그것도 알아."
왕연이 자신을 향해 웃었다. 란각은 그의 눈꼬리가, 입가가, 세가 공자답게 수려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란각의 떨리는 주먹을 자신의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그것도 패지, 자네의 성정에는 맞지 않지. 그렇지만 이건 내가 허락한 거야. 얼마든지 이용하라고."
란각은 눈 안이 뜨거워지는 감각에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묵문."
"아니면 자네도 우리 집안을 무시하는 건가? 우리 영감이 뒷목을 잡겠는걸."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란각은 아주 오랫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왕연의 손은 자신의 떨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군자맹 묵문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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