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애니
- 애니
575766757
view 847
2023.12.08 19:15
제르마 국왕 빈스모크 저지에게는 숨겨진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 실패작이라며 버림 받은 세번째 아들이. 네 쌍둥이로 태어난 아들들이 최강의 전사이기를 원한 아비는 비정한 사람이었다.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아이들 중 유일하게 형질보인자가 아니었던 셋째를 외면했으니까. 저지는 알파 특유의 강인한 육체와 제르마 왕국의 과학 기술만 있다면 세계 최강의 전사를 만들 수 있다고 염원하던 자였다. 이를 위해서는 사랑이나 슬픔, 기쁨 같은 감정도 필요 없다고. 하지만 이 사상에 반대한 왕비는 임신 당시 약을 먹었고 그 결실이 셋째, 상디였다. 싸움보다 요리를 좋아하고 매일같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도시락을 싸서 엄마에게 문병와주던 사랑스러운 아이. 아이들을 지키고자 먹은 약이 제 몸에는 독이 된 왕비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지만 죽는 날까지 상디를 보며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더랬다. 저 아이 하나만이라도 지켜서 다행이라고, 다른 세 아이를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그래서 쌍둥이들의 누나인 레이쥬 또한 알게 모르게 상디를 신경썼는지 모른다. 유전자 조작 없이 태어난 그녀 역시 뒤에서는 형제들에게 괴롭힘받던 상디를 걱정했으니. 결국 왕비가 죽고 유폐된 상디를 몰래 빼내서 도망치게 해준 것도 레이쥬 아니었던가. 그렇게 제르마 왕국을 떠나는 상선에 몰래 숨어든 상디를 거둬준 이가 해상 레스토랑 발라티에의 오너인 제프였으니, 그는 현재 드레스로자의 왕실 주방장이기도 했다. 때문에 발라티에의 주방장이자 제프의 양아들이기도 했던 상디가 드레스로자 궁을 훤히 꿰고 있음은 당연했다. 어릴 적부터 제프를 따라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었으니까.
“형수님, 안에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 일도 없어!”
“큰소리가 들리던데요? 잠시 문을 열어봐도 될까요?”
“열지 마! 오, 옷을 벗다가 넘어져서 그래!”
“어디 다치신 건 아닙니까? 의사라도 부를까요?”
“정말 괜찮아! 신경 끄고 네 일이나 봐, 인마!!”
“하지만 형수님 몸에 생채기라도 나면 왕자님께 저희 목이 날아갈 수도…….”
“내가 막아줄게! 됐지?? 그러니까 제발 그냥 가라 좀! 내가 창피해서 그래!”
조로가 문고리를 잡고 생쇼를 하는 동안 검은 복면의 금발 남, 빈스모크 상디는 캐노피를 뜯어내는 중이다. 그가 인정하는 오메가란 오직 레이디뿐이었으니, 루피의 그녀를 공주님 안기로 정중하게 모셔갈 계획이 깨진 지금 남은 선택지는 마리모 인간을 포박해 끌고가는 것뿐이다. 세상 모든 남성과는 사사로이 손끝 하나 닿고 싶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어이! 너 이거 허리에 잘 묶어라. 어쨌든 난 널 루피한테 배달해야 하니까.”
“네놈 정체가 뭐야? 내가 뭘 믿고 네 말을 들어야 하지? 왜 루피가 직접 오지 않은 건데?”
“첫째, 드레스로자 왕궁은 내부 구조를 비슷하게 만들어서 처음 온 사람은 헤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 지리에 훤한 내가 온 거다. 둘째, 성의 경비는 매우 삼엄해서 나는 네놈 하나 데리고 가는 것도 벅차다. 셋째, 너 여기서 루피와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겠냐?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이 캐노피에 네 몸이나 잘 묶어라. 내 임무는 네놈을 루피에게 배달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을 왜 믿어야 하냐고.”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건만 팔짱을 끼고 선 조로는 강경했다. 그래서 상디는 일찍이 발라티에 단골로 만나 친구가 된 루피를 한 대 패고 싶어졌다. 루피가 한 말과 생판 다른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 빵빵한, 쿨뷰티 타입의 오메가가 대체 어딨는 거냐, 루피!!!’
검은 선글라스너머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으로 조로를 노려보던 상디는 간신히 절규를 삼켰다. 물론 이는 루피의 말을 멋대로 오해한 상디의 착각이었다. 알라바스타의 내란이 종결된 뒤 오랜만에 가프를 비롯한 형제들과 레스토랑을 찾은 루피가 색시감을 찾았다고 떠들어댔으니 말이다. 그에 상디도 한껏 고무돼서 이것저것 물었더랬다.
‘가슴 크냐?’
‘음… 한 이정도?’
루피가 조로를 끌어안았을 때를 떠올리며 팔을 펴니 상디의 눈이 하트로 변했다지.
‘그렇게 커??’
‘운동 열심히 하거든! 검사야! 엄청 세다고!’
‘오오! 그럼 진짜 쭉쭉빵빵이겠네!’
‘맞아!’
‘이야! 루피 너! 순진한 척하더니 엄청 밝히는구만! 쭉쭉빵빵 미인이 취향이었어?’
‘헤… 조로한테서는 엄청 향긋한 냄새도 나.’
‘오… 설마… 오메가냐?’
‘어? 상디 너 어떻게 알았, 우왁!’
‘이자식! 성공했네! 좋겠다, 인마!’
세상 모든 레이디를 위하여가 모토인 상디에게 남성 오메가란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루피가 알파라는 걸 알고 있던 그는 냄새 어쩌고란 말을 들었을 때 조로의 존재를 쭉쭉빵빵한 검사 미녀로 확정했다. 그 부러움을 담아 루피에게 헤드락을 걸며 장난도 쳤고 말이다. 이름이 조로라는 건 그에게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레이디의 이름이라면 무엇이라도 전부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아름다운 것이었으니. 때문에 이번 일을 부탁받았을 때 상디는 마왕성에 갇힌 공주를 구출하는 듯한 책임감을 느꼈더랬다. 비록 조금 전 공주가 신체 건장한 마리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꿈과 희망도 산산조각 났지만. 뿐이랴, 못생긴 고양이가 하악질하듯 경계심 가득인 놈은 상디의 실낱같은 의욕마저도 재로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나랑 안 간다고?”
“그래.”
“잘 생각해라, 너. 후회할텐데.”
“내가 네놈 뭘 믿고 가냐? 멍청아.”
“멍ㅡ! 너 내가 이 천금같은 기회 만든다고 그인간한테 처음으로 아쉬운 소리까지 했는데 안 가? 네놈은 뇌도 마리모라 천야차가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지 모르나본데 너 오늘 아니면 두번 다시 기회는 없다?”
짜증 가득한 음성에서 조로는 오늘 만찬이 금발 남의 공작임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루피 쪽 사람임이 거의 확실시 되지만 조로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저놈이 자신을 어떻게 몰래 데려갈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어서였다.
“좋아. 네 말을 믿는다 치자. 그럼 날 여기서 어떻게 데리고 나갈 거지?”
“방금 봤잖아, 자식아! 너는 내가 말하기 전까지 발코니를 넘어온 것도 몰랐으면서!”
동시에 상디가 보란듯 주변과 동화돼 사라졌다. 제르마 왕국의 과학 기술이 집약된 그의 슈트는 주변 사물과 동화돼 모습을 감추는 기능이 있었다. 이름하야 제르마66 3호, 스텔스 블랙은 때문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마리모 놈이 놀라 자빠지는 걸 예상했었다. 이 수트를 본 루피의 눈이 휘둥그레졌던 것처럼.
“근데 그거 너만 적용되는 거 아니냐? 나는?”
“뭐?”
조로는 여전히 날카롭게 쳐다보며 냉정히 말했다. 상디가 허를 찔린 듯 움찔하니 조로가 짧은 숨을 쉰다.
“나는 그대로 보이면 무슨 수로 몰래 데려간다는 건데? 정면돌파냐?”
“날아갈 거다, 인마! 이 수트에는 제트 기능이 있으니까!”
상디가 한 다리를 들어보이니 발 뒤축에 조그만 배기구가 보인다. 저 조그만 배기구에는 제트기와 맞먹는 기술이 축약돼 있었다. 유전자 조작으로 알파에 버금가는 강인한 신체를 타고난데다 수트의 보호 기능을 받는 상디라면, 순간이나마 초음속까지 끌어올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일반인인 조로는 견디지 못할 터였다. 그래도 죽지 않을 정도로는 속도를 낼 생각이니 상디는 이곳을 빠져나갈 자신 있었다. 놈이 순순히 오라를 받아 몸을 잘 묶기만 한다면 말이다.
“좋아, 한번 믿어보지.”
“예……!! 어이, 마리모! 그 거만한 태도는 뭐냐??”
저도 모르게 기뻐할 뻔한 상디가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격분해 너무 큰 소리를 낸 게 문제였을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을 두드리는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쿵.
“셋.”
긴장감이라고는 없이 졸린 듯한 음성은 베르고였다. 그리고 또 쿵.
“둘.”
어쨌든 이것이 위험 신호라는 건 방 안의 두 사람도 직감했다. 화도일문자를 손에 쥔 조로가 앞으로 튀어나가려 할 때 상디가 그 팔을 잡아 뒤로 당긴다. 상디는 어쩌자고 제게 도망갈 틈을 만들어주려는지 모를 조로가 답답했다. 이 모든 일은 조로를 루피 앞에 데려다놓는 게 목적이지 않은가. 오늘이 아니면 두 사람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상디는 발코니로 턱짓하며 달아날 것을 종용했다.
“꽃밭!”
종이 조각으로 된 비브르 카드를 급히 건내며 상디는 조로에게 루피가 기다리는 장소를 말했다.
“무슨……!”
“가!!”
“하나!”
조로의 손에 비브르 카드가 쥐어지자 상디는 발코니를 향해 그를 걷어찼다. 때맞춰 마지막 숫자를 셈과 동시에 베르고가 문을 들이받으며 들어왔다. 그의 눈에 조로가 발코니 너머로 떨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그대로 멈춤 없이 달려가려던 베르고는 보이지 않는 공격에 얼굴을 맞고 방 밖으로 날아갔다. 벽이 무너져 내리며 잠자던 궁을 깨우는 굉음이 울려퍼졌다.
때는 조로가 상디와 실랑이를 하던 중이었다. 조로의 방 앞에서 물러난 병사가 찾아온 곳은 저희 분대장이 있는 곳이다. 오늘밤 왕자궁 경비를 맡은 펭귄은 한참 전부터 로우의 방 발코니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형님! 형수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아무 일 아니니까 외곽 순찰이나 돌아.”
“네? 하지만 그럼 궁 내 경비가 너무 허술해지는데요? 지금 외곽 순찰을 몇이나 돌게 하시는지 아세요?”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너희들 세트로 데려다놔도 나 하나만 못하잖아.”
“에이… 또 뼈 때리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가 되게 약해보이잖아요. 형님이 너무 강한 거면서. 샤치 형님도 형님한테는 인간이 아니라면 혀를 내두르잖아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뺑뺑이나 돌아.”
“……네.”
궁에 들어온 지도 제법 짬이 찬 녀석이 펭귄의 말에 결국 돌아섰다. 제 상관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늘 이상하게 왕자 궁 내 경비 수를 적게 배치한 게 신경 쓰였지만 펭귄은 이유를 말할 거라면 진작했을 상관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입이 찢어져도 다물 사람이고. 하니 괜히 보고하러 왔다가 대다수 동료들과 함께 뺑뺑이 대열에 참가하게 된 병사가 터덜터덜 사라질 때 펭귄은 다시 이층의 발코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빨리 안 가고.’
아까의 요란한 소리는 펭귄도 익히 들었음이다. 잠입의 의미가 무슨 소용인가 싶게 요란을 떠는데 어찌 모를까. 대장의 명령에 부러 모른 척해주는데 왜 밍기적대고 있나 싶은 펭귄은 상디를 전혀 보지 못했음에도 존재를 확신했다. 그는 아까부터 내내 이층 방에서 두 사람의 기척을 놓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펭귄은 젊은 왕이 오늘 만찬에 베포, 샤치를 비롯해 그 휘하 주력 병사를 호위로 데려간 게 찜찜했다. 젊은 왕은 평소 호위로 크로커다일이나 베르고 하나만 데려가지 않던가. 이 둘이라면 병사 수천보다 나을 전력이니 말이다. 한데 오늘은 젊은 왕이 전혀 안 하던 짓을 했고 이는 로우도 걱정하던 일이다. 그래서 더 오늘밤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랐던 펭귄은 제 바람을 비웃듯 소름 한줄기가 등골을 타고내림을 느꼈다. 이어 앞에 뚝 떨어진 형수님과 이층에서 들려온 굉음에 펭귄은 재빨리 검을 뽑았다. 이층에서 떨어진 조로 역시 아픔을 상쇄할 새 없이 벌떡 일어났지만 펭귄은 그를 등지듯 설 뿐이었다.
“꼭 돌아오실 거라 믿습니다, 형수님.”
그 말을 끝으로 펭귄은 궁을 향해 뛰어갔다. 조로는 잠시 그가 사라진 방향을 굳은 얼굴로 쳐다볼 뿐이었다.
젊은 왕은 원래 오늘 만찬에 크로커다일을 동행하려 했었다.
‘난 안 가.’
‘…….’
‘내 나이가 몇인 줄은 아나? 괴물같은 자식아. 너 때문에 몸이 엉망진창이야. 그러니 쉴 거다.’
저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도플라밍고는 하고 싶으면 들이닥쳐서 제멋대로 크로커다일을 취하고는 했으니. 또 매번 그때마다 둘 모두 피를 볼만큼 격렬하게 치뤄지던 정사에 더 엉망이 되는 건 받는 쪽이었다. 하지만 크로커다일이 누구던가. 설령 밑구멍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도플라밍고에게는 약한 소리 한번 않는 이였다. 그런 놈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건, 또 다른 이도 아닌 자신에게 하도록 만들었다는 건 로시난테의 유산이랄 수 있는 존재뿐이었다. 그래서 도플라밍고는 어젯밤 크로커다일이 한 말에 눈치챈 거였다. 제가 궁을 비운 사이에 누군가 잔재주를 부릴 거라는걸. 그러니 판이 깔리도록 제가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는 걸 말이다.
“기분이 좋아보이는군요, 돈키호테 국왕.”
“티가 났나요? 저희 나라에는 주인이 집을 비운 동안 쥐잡이를 하는 전통이 있는데 지금쯤 궁에서도 이 놀이를 할 거라 생각하니 즐거워지는군요.”
“처음 듣는 얘긴데 드레스로자에 그런 전통이 있습니까?”
호화로운 음식이 올려진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 중심에서 저지가 물음을 던진다. 그러나 이는 로우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가 눈살을 구기며 쳐다보니 젊은 왕은 귀 밑까지 찢어진 듯한 미소를 짓고 눈을 맞춘다.
“집에 숨어든 쥐새끼를 잡아죽이는 놀이죠. 무척 재미있지만 주인이 자리를 비워야만 시작되는지라 저는 동참하지 못해 아쉽군요.”
“그렇습니까? 그거 참 아쉽겠군요.”
“예, 정말 아쉬운 일입니다.”
로우를 향해 말하던 젊은 왕이 이번에는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저지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확인시키듯 아쉬움을 입에 담으니 레이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제가 속이 안 좋아서 잠시 일어나겠습니다.”
“저런, 공주께서 먼 길 오시느라 무리하셨나 보군요. 여긴 개의치 마시고 어서 일어나시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젊은 왕이 인심 좋게 말하니 품 넓은 드레스를 입은 공주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모습이 뭔가에 쫓기듯 다급하기 짝이 없으나 빈스모크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녀를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초면에 결례를 보였군요, 돈키호테 국왕. 몸이 약한 아이니 이해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빈스모크 국왕.”
웃고 있지만 서로 속내를 다 눈치챘음이다. 이로써 빈스모크도 오늘의 쥐잡이에 동참한 일당이라는 걸. 그리고 젊은 왕이 모두 알아차렸다는 걸 말이다.
평온하게만 보이던 저녁 만찬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렸다. 이 숨막히는 공간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던 로우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비브르 카드, 즉 생명의 종이라도 불리는 이것은 손톱을 섞어 만드는데 이 주인이 있는 장소로 모이려는 성질이 있었다. 또한 이것은 생명력을 나타내기도 해서 종이의 상태는 주인의 상황을 대변하는 척도다. 때문에 비브르 카드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직진하던 조로는 종이의 끝이 불에 그을린 듯한 흔적을 보고 초조함을 느꼈다. 그리고 드레스로자 궁에서는 베르고에 의해 수세에 몰린 상디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고작 이정도 실력으로 궁에 침입해 왕자의 신부감을 강탈하다니 당장 죽어도 할 말은 없겠지?”
전신을 무쇠처럼 강화시키는 게 가능하다는 건 상디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때문에 스텔스 기능으로 모습을 감추고 들어간 공격이 모두 무효가 됐다. 도리어 타격 방향으로 위치를 짐작한 베르고의 공격이 유효타가 되면서 상디도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날린 회심의 발차기가 오히려 베르고의 손에 발목을 잡히는 불상사를 나았다.
“우악! 컥!”
상디의 몸이 땅에 처박히면서 대리석 바닥이 사방으로 갈라졌다. 커다란 덩치와 달리 날쌘 움직임으로 위를 선점한 베르고가 무쇠를 두른 주먹을 휘둘러 내리꽂을 때였다. 죽는다. 찰나에 위기를 직감한 상디가 대리석에 박힌 몸을 움직이려 안간힘을 쓸 때였다. 머리 위에서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불꽃이 번쩍 트인 것은.
“…….”
상디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무쇠 주먹을 가로막은 건 한줄기 모래바람에 섞잇 금빛 갈고리였다.
“읏!”
곧이어 모래로 된 사신의 낫이 빛과 같이 눈앞을 스쳐감에 상디가 신음할 때 그 위를 군림한 덩치도 뒤로 뛰어올랐다.
“감히 주군을 배신하는 거냐? 크로커다일!”
“누가 주군이라고? 난 그런 걸 둔 적 없는데?”
상디의 머리맡에 우뚝 선 구둣발의 정체는 흰 크라바트를 목에 두르고 검은 정장 코트를 걸친 크로커다일이었다. 그러나 격한 몸놀림에 흐트러진 머리를 한차례 쓸어넘기던 그는 시가를 짓씹을 정도로 베르고의 말에 화가 난 상태다. 상디는 애써 여유롭게 웃는 척하는 게 안쓰럽다고 생각됐다.
“웃기는군, 크로커다일. 네가 누구 밑에서 울어ㅡ! 대는지 세상이 다ㅡ! 아는데, 꼴에 자존심은 있다고ㅡ!!”
몸에 무쇠를 두른들 압에서 밀리면 불가항력이다. 소용돌이처럼 쏘아지던 모래기둥을 피하던 중 거대한 모래 폭풍이 해일처럼 덮쳐오는데 베르고라고 별 수 있을까. 결국 방 전체를 잠식하는 모래의 산에 베르고가 파묻히니 대리석에 깊숙이 박혀 옴짝달싹 못하던 상디까지 생매장당할 뻔한 순간이었다. 간발의 차로 방에 뛰어든 이가 뽑아주지 않았더라면 상디는 정말 죽었으리라.
“우웩! 콜록! 카악 퉤!”
겨우 방을 빠져나온 상디가 복면을 끌어내려 흙먼지를 토악질해댈 때였다.
“어? 상디?”
“쿨럭! 큼!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정말 제프 요리장님 아들인 상디가 아닙니까?”
“예, 저 그런 사람 모릅니다. 그럼 이만.”
“그럼 상디가 발라티에에서 매번 나미, 로빈이란 해군 친구들에게 공짜 풀코스를 대접했다는 걸 제프 요리장님에게 말해도 당신은 상관없겠지?”
“그, 그건……!”
“좋아. 어쨌든 난 당신을 구해줬으니 얼른 가보라고. 당신 루피 대위가 보내서 온 거지? 난 제프 요리장님께 가볼 테니까.”
“펭귄 너 이자식! 거기 안 서?!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나미, 로빈 해군이랑 내 분대원인 잇카쿠가 친구란 걸 잊었냐? 애초에 그 두사람한테 발라티에를 소개해준 것도 잇카쿠잖아, 자식아. 그리고 너 상디 아니라며?”
펭귄은 상디가 베르고와의 싸우는 동안 궁 내 병사들을 대피시키느라 이제 나타난 거였다. 그는 로우의 부탁에 남아있던 크로커다일을 알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크로커다일이라도 베르고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모래로 가득찬 방 앞에서 투닥대던 잠깐 동안 몇차례 큰 진동이 울리던 안에서 돌연 베르고가 튀어나왔으니. 날아오던 그대로 손에 든 죽봉을 휘두르는 이에 펭귄과 상디 앞으로 두터운 모래장벽이 솟아오른다. 그것은 휘둘러진 죽봉에 반동강이 났지만 두 사람이 복도 저편으로 튈 시간을 벌어줬다. 이들을 향해 다시 바닥을 차고 나가려던 베르고를 막아선 건 역시나 모래바람이 돼 날아든 크로커다일이었다. 베르고가 다시 손에 든 봉을 휘두르니 크로커다일의 몸이 반으로 동강나지만 그것은 곧 모래화돼 붙기 시작했다.
“어디 가나? 베르고. 네 상대는 나다!”
“네 처분은 주군께서 하실 거다, 크로커다일! 더이상 날 방해하지 마라!”
“한때의 몸정도 정이라고 날 제대로 공격하기 어려운가 보지? 설마 네녀석 아직도 그때를 그리는 건가?”
“조용히 해! 네가 주군의 사람이 된 순간 내 마음도 끝났으니까! 너는 더이상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누가 누구 거라는지 원… 이놈이나 저놈이나 헛소리만 늘어놓는군! 바르한!”
“윽! 너 정말 나랑 끝장을 보고 싶은 거냐?”
옆을 스쳐지나던 베르고의 말에 크로커다일이 짓씹던 시가가 드디어 끊어졌다. 이어 그가 몸을 돌리며 날린 모래바람에 다리를 맞은 베르고가 크게 비틀거렸다. 그순간 정말 열받은 놈이 죽봉을 길게 뻗으며 최후통첩을 날리니 남은 시가를 뱉어낸 크로커다일이 씩 웃었다. 나름 베르고를 도발하려 한 말들에 도리어 제 자존심이 상해버렸으니, 제대로 기분 더러워진 크로커다일은 앞의 놈이라도 곤죽을 만들어야 화가 좀 풀릴 성싶었다. 그렇다고 도플라밍고나 로우의 목을 딸 수는 없잖은가.
“그래, 네놈의 끝을 보는 것도 괜찮겠지.”
“크로커다일!!”
느긋한 녀석이 도발에 훌쩍 넘어오는 게 평소와 다름이지만 크로커다일은 신경쓰지 않았다. 베르고가 과거의 불장난 같던 관계로 발목잡혔다면 크로커다일 또한 같은 신세였으니. 로시난테에게 스스로 발목만 잡히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라는 건 진작 깨우친 일 아니던가.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 기구한 생을 살다 간 녀석이 한순간이라도 마음껏 행복을 누렸더라면 그 또한 이토록 미련스럽게 굴지 않으련만. 그러나 자신의 하나뿐인 형제와 로우를 걱정하던 녀석은 죽는 순간에도 크로커다일에게 부탁했었다. 서투르고 상처 많은 두 사람을 잘 돌봐달라고. 차마 그 유지를 버리지 못해 지금도 미련스레 이곳에 남은 크로커다일은 때문에 오늘밤 도플라밍고가 방해치 않도록 도와달라던 로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이러니 죽은 녀석에게 가장 미련이 남은 것은 그일지도 몰랐다.
한조각
“형수님, 안에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 일도 없어!”
“큰소리가 들리던데요? 잠시 문을 열어봐도 될까요?”
“열지 마! 오, 옷을 벗다가 넘어져서 그래!”
“어디 다치신 건 아닙니까? 의사라도 부를까요?”
“정말 괜찮아! 신경 끄고 네 일이나 봐, 인마!!”
“하지만 형수님 몸에 생채기라도 나면 왕자님께 저희 목이 날아갈 수도…….”
“내가 막아줄게! 됐지?? 그러니까 제발 그냥 가라 좀! 내가 창피해서 그래!”
조로가 문고리를 잡고 생쇼를 하는 동안 검은 복면의 금발 남, 빈스모크 상디는 캐노피를 뜯어내는 중이다. 그가 인정하는 오메가란 오직 레이디뿐이었으니, 루피의 그녀를 공주님 안기로 정중하게 모셔갈 계획이 깨진 지금 남은 선택지는 마리모 인간을 포박해 끌고가는 것뿐이다. 세상 모든 남성과는 사사로이 손끝 하나 닿고 싶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어이! 너 이거 허리에 잘 묶어라. 어쨌든 난 널 루피한테 배달해야 하니까.”
“네놈 정체가 뭐야? 내가 뭘 믿고 네 말을 들어야 하지? 왜 루피가 직접 오지 않은 건데?”
“첫째, 드레스로자 왕궁은 내부 구조를 비슷하게 만들어서 처음 온 사람은 헤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 지리에 훤한 내가 온 거다. 둘째, 성의 경비는 매우 삼엄해서 나는 네놈 하나 데리고 가는 것도 벅차다. 셋째, 너 여기서 루피와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겠냐?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이 캐노피에 네 몸이나 잘 묶어라. 내 임무는 네놈을 루피에게 배달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을 왜 믿어야 하냐고.”
시간을 끌수록 불리하건만 팔짱을 끼고 선 조로는 강경했다. 그래서 상디는 일찍이 발라티에 단골로 만나 친구가 된 루피를 한 대 패고 싶어졌다. 루피가 한 말과 생판 다른 놈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 빵빵한, 쿨뷰티 타입의 오메가가 대체 어딨는 거냐, 루피!!!’
검은 선글라스너머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으로 조로를 노려보던 상디는 간신히 절규를 삼켰다. 물론 이는 루피의 말을 멋대로 오해한 상디의 착각이었다. 알라바스타의 내란이 종결된 뒤 오랜만에 가프를 비롯한 형제들과 레스토랑을 찾은 루피가 색시감을 찾았다고 떠들어댔으니 말이다. 그에 상디도 한껏 고무돼서 이것저것 물었더랬다.
‘가슴 크냐?’
‘음… 한 이정도?’
루피가 조로를 끌어안았을 때를 떠올리며 팔을 펴니 상디의 눈이 하트로 변했다지.
‘그렇게 커??’
‘운동 열심히 하거든! 검사야! 엄청 세다고!’
‘오오! 그럼 진짜 쭉쭉빵빵이겠네!’
‘맞아!’
‘이야! 루피 너! 순진한 척하더니 엄청 밝히는구만! 쭉쭉빵빵 미인이 취향이었어?’
‘헤… 조로한테서는 엄청 향긋한 냄새도 나.’
‘오… 설마… 오메가냐?’
‘어? 상디 너 어떻게 알았, 우왁!’
‘이자식! 성공했네! 좋겠다, 인마!’
세상 모든 레이디를 위하여가 모토인 상디에게 남성 오메가란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루피가 알파라는 걸 알고 있던 그는 냄새 어쩌고란 말을 들었을 때 조로의 존재를 쭉쭉빵빵한 검사 미녀로 확정했다. 그 부러움을 담아 루피에게 헤드락을 걸며 장난도 쳤고 말이다. 이름이 조로라는 건 그에게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레이디의 이름이라면 무엇이라도 전부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아름다운 것이었으니. 때문에 이번 일을 부탁받았을 때 상디는 마왕성에 갇힌 공주를 구출하는 듯한 책임감을 느꼈더랬다. 비록 조금 전 공주가 신체 건장한 마리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꿈과 희망도 산산조각 났지만. 뿐이랴, 못생긴 고양이가 하악질하듯 경계심 가득인 놈은 상디의 실낱같은 의욕마저도 재로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나랑 안 간다고?”
“그래.”
“잘 생각해라, 너. 후회할텐데.”
“내가 네놈 뭘 믿고 가냐? 멍청아.”
“멍ㅡ! 너 내가 이 천금같은 기회 만든다고 그인간한테 처음으로 아쉬운 소리까지 했는데 안 가? 네놈은 뇌도 마리모라 천야차가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지 모르나본데 너 오늘 아니면 두번 다시 기회는 없다?”
짜증 가득한 음성에서 조로는 오늘 만찬이 금발 남의 공작임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루피 쪽 사람임이 거의 확실시 되지만 조로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저놈이 자신을 어떻게 몰래 데려갈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어서였다.
“좋아. 네 말을 믿는다 치자. 그럼 날 여기서 어떻게 데리고 나갈 거지?”
“방금 봤잖아, 자식아! 너는 내가 말하기 전까지 발코니를 넘어온 것도 몰랐으면서!”
동시에 상디가 보란듯 주변과 동화돼 사라졌다. 제르마 왕국의 과학 기술이 집약된 그의 슈트는 주변 사물과 동화돼 모습을 감추는 기능이 있었다. 이름하야 제르마66 3호, 스텔스 블랙은 때문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마리모 놈이 놀라 자빠지는 걸 예상했었다. 이 수트를 본 루피의 눈이 휘둥그레졌던 것처럼.
“근데 그거 너만 적용되는 거 아니냐? 나는?”
“뭐?”
조로는 여전히 날카롭게 쳐다보며 냉정히 말했다. 상디가 허를 찔린 듯 움찔하니 조로가 짧은 숨을 쉰다.
“나는 그대로 보이면 무슨 수로 몰래 데려간다는 건데? 정면돌파냐?”
“날아갈 거다, 인마! 이 수트에는 제트 기능이 있으니까!”
상디가 한 다리를 들어보이니 발 뒤축에 조그만 배기구가 보인다. 저 조그만 배기구에는 제트기와 맞먹는 기술이 축약돼 있었다. 유전자 조작으로 알파에 버금가는 강인한 신체를 타고난데다 수트의 보호 기능을 받는 상디라면, 순간이나마 초음속까지 끌어올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일반인인 조로는 견디지 못할 터였다. 그래도 죽지 않을 정도로는 속도를 낼 생각이니 상디는 이곳을 빠져나갈 자신 있었다. 놈이 순순히 오라를 받아 몸을 잘 묶기만 한다면 말이다.
“좋아, 한번 믿어보지.”
“예……!! 어이, 마리모! 그 거만한 태도는 뭐냐??”
저도 모르게 기뻐할 뻔한 상디가 분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격분해 너무 큰 소리를 낸 게 문제였을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을 두드리는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쿵.
“셋.”
긴장감이라고는 없이 졸린 듯한 음성은 베르고였다. 그리고 또 쿵.
“둘.”
어쨌든 이것이 위험 신호라는 건 방 안의 두 사람도 직감했다. 화도일문자를 손에 쥔 조로가 앞으로 튀어나가려 할 때 상디가 그 팔을 잡아 뒤로 당긴다. 상디는 어쩌자고 제게 도망갈 틈을 만들어주려는지 모를 조로가 답답했다. 이 모든 일은 조로를 루피 앞에 데려다놓는 게 목적이지 않은가. 오늘이 아니면 두 사람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상디는 발코니로 턱짓하며 달아날 것을 종용했다.
“꽃밭!”
종이 조각으로 된 비브르 카드를 급히 건내며 상디는 조로에게 루피가 기다리는 장소를 말했다.
“무슨……!”
“가!!”
“하나!”
조로의 손에 비브르 카드가 쥐어지자 상디는 발코니를 향해 그를 걷어찼다. 때맞춰 마지막 숫자를 셈과 동시에 베르고가 문을 들이받으며 들어왔다. 그의 눈에 조로가 발코니 너머로 떨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그대로 멈춤 없이 달려가려던 베르고는 보이지 않는 공격에 얼굴을 맞고 방 밖으로 날아갔다. 벽이 무너져 내리며 잠자던 궁을 깨우는 굉음이 울려퍼졌다.
때는 조로가 상디와 실랑이를 하던 중이었다. 조로의 방 앞에서 물러난 병사가 찾아온 곳은 저희 분대장이 있는 곳이다. 오늘밤 왕자궁 경비를 맡은 펭귄은 한참 전부터 로우의 방 발코니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형님! 형수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아무 일 아니니까 외곽 순찰이나 돌아.”
“네? 하지만 그럼 궁 내 경비가 너무 허술해지는데요? 지금 외곽 순찰을 몇이나 돌게 하시는지 아세요?”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너희들 세트로 데려다놔도 나 하나만 못하잖아.”
“에이… 또 뼈 때리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가 되게 약해보이잖아요. 형님이 너무 강한 거면서. 샤치 형님도 형님한테는 인간이 아니라면 혀를 내두르잖아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뺑뺑이나 돌아.”
“……네.”
궁에 들어온 지도 제법 짬이 찬 녀석이 펭귄의 말에 결국 돌아섰다. 제 상관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늘 이상하게 왕자 궁 내 경비 수를 적게 배치한 게 신경 쓰였지만 펭귄은 이유를 말할 거라면 진작했을 상관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입이 찢어져도 다물 사람이고. 하니 괜히 보고하러 왔다가 대다수 동료들과 함께 뺑뺑이 대열에 참가하게 된 병사가 터덜터덜 사라질 때 펭귄은 다시 이층의 발코니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빨리 안 가고.’
아까의 요란한 소리는 펭귄도 익히 들었음이다. 잠입의 의미가 무슨 소용인가 싶게 요란을 떠는데 어찌 모를까. 대장의 명령에 부러 모른 척해주는데 왜 밍기적대고 있나 싶은 펭귄은 상디를 전혀 보지 못했음에도 존재를 확신했다. 그는 아까부터 내내 이층 방에서 두 사람의 기척을 놓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펭귄은 젊은 왕이 오늘 만찬에 베포, 샤치를 비롯해 그 휘하 주력 병사를 호위로 데려간 게 찜찜했다. 젊은 왕은 평소 호위로 크로커다일이나 베르고 하나만 데려가지 않던가. 이 둘이라면 병사 수천보다 나을 전력이니 말이다. 한데 오늘은 젊은 왕이 전혀 안 하던 짓을 했고 이는 로우도 걱정하던 일이다. 그래서 더 오늘밤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랐던 펭귄은 제 바람을 비웃듯 소름 한줄기가 등골을 타고내림을 느꼈다. 이어 앞에 뚝 떨어진 형수님과 이층에서 들려온 굉음에 펭귄은 재빨리 검을 뽑았다. 이층에서 떨어진 조로 역시 아픔을 상쇄할 새 없이 벌떡 일어났지만 펭귄은 그를 등지듯 설 뿐이었다.
“꼭 돌아오실 거라 믿습니다, 형수님.”
그 말을 끝으로 펭귄은 궁을 향해 뛰어갔다. 조로는 잠시 그가 사라진 방향을 굳은 얼굴로 쳐다볼 뿐이었다.
젊은 왕은 원래 오늘 만찬에 크로커다일을 동행하려 했었다.
‘난 안 가.’
‘…….’
‘내 나이가 몇인 줄은 아나? 괴물같은 자식아. 너 때문에 몸이 엉망진창이야. 그러니 쉴 거다.’
저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도플라밍고는 하고 싶으면 들이닥쳐서 제멋대로 크로커다일을 취하고는 했으니. 또 매번 그때마다 둘 모두 피를 볼만큼 격렬하게 치뤄지던 정사에 더 엉망이 되는 건 받는 쪽이었다. 하지만 크로커다일이 누구던가. 설령 밑구멍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도플라밍고에게는 약한 소리 한번 않는 이였다. 그런 놈이 이런 말을 했다는 건, 또 다른 이도 아닌 자신에게 하도록 만들었다는 건 로시난테의 유산이랄 수 있는 존재뿐이었다. 그래서 도플라밍고는 어젯밤 크로커다일이 한 말에 눈치챈 거였다. 제가 궁을 비운 사이에 누군가 잔재주를 부릴 거라는걸. 그러니 판이 깔리도록 제가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는 걸 말이다.
“기분이 좋아보이는군요, 돈키호테 국왕.”
“티가 났나요? 저희 나라에는 주인이 집을 비운 동안 쥐잡이를 하는 전통이 있는데 지금쯤 궁에서도 이 놀이를 할 거라 생각하니 즐거워지는군요.”
“처음 듣는 얘긴데 드레스로자에 그런 전통이 있습니까?”
호화로운 음식이 올려진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 중심에서 저지가 물음을 던진다. 그러나 이는 로우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가 눈살을 구기며 쳐다보니 젊은 왕은 귀 밑까지 찢어진 듯한 미소를 짓고 눈을 맞춘다.
“집에 숨어든 쥐새끼를 잡아죽이는 놀이죠. 무척 재미있지만 주인이 자리를 비워야만 시작되는지라 저는 동참하지 못해 아쉽군요.”
“그렇습니까? 그거 참 아쉽겠군요.”
“예, 정말 아쉬운 일입니다.”
로우를 향해 말하던 젊은 왕이 이번에는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저지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확인시키듯 아쉬움을 입에 담으니 레이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제가 속이 안 좋아서 잠시 일어나겠습니다.”
“저런, 공주께서 먼 길 오시느라 무리하셨나 보군요. 여긴 개의치 마시고 어서 일어나시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젊은 왕이 인심 좋게 말하니 품 넓은 드레스를 입은 공주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모습이 뭔가에 쫓기듯 다급하기 짝이 없으나 빈스모크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녀를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초면에 결례를 보였군요, 돈키호테 국왕. 몸이 약한 아이니 이해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빈스모크 국왕.”
웃고 있지만 서로 속내를 다 눈치챘음이다. 이로써 빈스모크도 오늘의 쥐잡이에 동참한 일당이라는 걸. 그리고 젊은 왕이 모두 알아차렸다는 걸 말이다.
평온하게만 보이던 저녁 만찬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렸다. 이 숨막히는 공간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던 로우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비브르 카드, 즉 생명의 종이라도 불리는 이것은 손톱을 섞어 만드는데 이 주인이 있는 장소로 모이려는 성질이 있었다. 또한 이것은 생명력을 나타내기도 해서 종이의 상태는 주인의 상황을 대변하는 척도다. 때문에 비브르 카드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직진하던 조로는 종이의 끝이 불에 그을린 듯한 흔적을 보고 초조함을 느꼈다. 그리고 드레스로자 궁에서는 베르고에 의해 수세에 몰린 상디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고작 이정도 실력으로 궁에 침입해 왕자의 신부감을 강탈하다니 당장 죽어도 할 말은 없겠지?”
전신을 무쇠처럼 강화시키는 게 가능하다는 건 상디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때문에 스텔스 기능으로 모습을 감추고 들어간 공격이 모두 무효가 됐다. 도리어 타격 방향으로 위치를 짐작한 베르고의 공격이 유효타가 되면서 상디도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날린 회심의 발차기가 오히려 베르고의 손에 발목을 잡히는 불상사를 나았다.
“우악! 컥!”
상디의 몸이 땅에 처박히면서 대리석 바닥이 사방으로 갈라졌다. 커다란 덩치와 달리 날쌘 움직임으로 위를 선점한 베르고가 무쇠를 두른 주먹을 휘둘러 내리꽂을 때였다. 죽는다. 찰나에 위기를 직감한 상디가 대리석에 박힌 몸을 움직이려 안간힘을 쓸 때였다. 머리 위에서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불꽃이 번쩍 트인 것은.
“…….”
상디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무쇠 주먹을 가로막은 건 한줄기 모래바람에 섞잇 금빛 갈고리였다.
“읏!”
곧이어 모래로 된 사신의 낫이 빛과 같이 눈앞을 스쳐감에 상디가 신음할 때 그 위를 군림한 덩치도 뒤로 뛰어올랐다.
“감히 주군을 배신하는 거냐? 크로커다일!”
“누가 주군이라고? 난 그런 걸 둔 적 없는데?”
상디의 머리맡에 우뚝 선 구둣발의 정체는 흰 크라바트를 목에 두르고 검은 정장 코트를 걸친 크로커다일이었다. 그러나 격한 몸놀림에 흐트러진 머리를 한차례 쓸어넘기던 그는 시가를 짓씹을 정도로 베르고의 말에 화가 난 상태다. 상디는 애써 여유롭게 웃는 척하는 게 안쓰럽다고 생각됐다.
“웃기는군, 크로커다일. 네가 누구 밑에서 울어ㅡ! 대는지 세상이 다ㅡ! 아는데, 꼴에 자존심은 있다고ㅡ!!”
몸에 무쇠를 두른들 압에서 밀리면 불가항력이다. 소용돌이처럼 쏘아지던 모래기둥을 피하던 중 거대한 모래 폭풍이 해일처럼 덮쳐오는데 베르고라고 별 수 있을까. 결국 방 전체를 잠식하는 모래의 산에 베르고가 파묻히니 대리석에 깊숙이 박혀 옴짝달싹 못하던 상디까지 생매장당할 뻔한 순간이었다. 간발의 차로 방에 뛰어든 이가 뽑아주지 않았더라면 상디는 정말 죽었으리라.
“우웩! 콜록! 카악 퉤!”
겨우 방을 빠져나온 상디가 복면을 끌어내려 흙먼지를 토악질해댈 때였다.
“어? 상디?”
“쿨럭! 큼!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정말 제프 요리장님 아들인 상디가 아닙니까?”
“예, 저 그런 사람 모릅니다. 그럼 이만.”
“그럼 상디가 발라티에에서 매번 나미, 로빈이란 해군 친구들에게 공짜 풀코스를 대접했다는 걸 제프 요리장님에게 말해도 당신은 상관없겠지?”
“그, 그건……!”
“좋아. 어쨌든 난 당신을 구해줬으니 얼른 가보라고. 당신 루피 대위가 보내서 온 거지? 난 제프 요리장님께 가볼 테니까.”
“펭귄 너 이자식! 거기 안 서?!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나미, 로빈 해군이랑 내 분대원인 잇카쿠가 친구란 걸 잊었냐? 애초에 그 두사람한테 발라티에를 소개해준 것도 잇카쿠잖아, 자식아. 그리고 너 상디 아니라며?”
펭귄은 상디가 베르고와의 싸우는 동안 궁 내 병사들을 대피시키느라 이제 나타난 거였다. 그는 로우의 부탁에 남아있던 크로커다일을 알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크로커다일이라도 베르고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모래로 가득찬 방 앞에서 투닥대던 잠깐 동안 몇차례 큰 진동이 울리던 안에서 돌연 베르고가 튀어나왔으니. 날아오던 그대로 손에 든 죽봉을 휘두르는 이에 펭귄과 상디 앞으로 두터운 모래장벽이 솟아오른다. 그것은 휘둘러진 죽봉에 반동강이 났지만 두 사람이 복도 저편으로 튈 시간을 벌어줬다. 이들을 향해 다시 바닥을 차고 나가려던 베르고를 막아선 건 역시나 모래바람이 돼 날아든 크로커다일이었다. 베르고가 다시 손에 든 봉을 휘두르니 크로커다일의 몸이 반으로 동강나지만 그것은 곧 모래화돼 붙기 시작했다.
“어디 가나? 베르고. 네 상대는 나다!”
“네 처분은 주군께서 하실 거다, 크로커다일! 더이상 날 방해하지 마라!”
“한때의 몸정도 정이라고 날 제대로 공격하기 어려운가 보지? 설마 네녀석 아직도 그때를 그리는 건가?”
“조용히 해! 네가 주군의 사람이 된 순간 내 마음도 끝났으니까! 너는 더이상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누가 누구 거라는지 원… 이놈이나 저놈이나 헛소리만 늘어놓는군! 바르한!”
“윽! 너 정말 나랑 끝장을 보고 싶은 거냐?”
옆을 스쳐지나던 베르고의 말에 크로커다일이 짓씹던 시가가 드디어 끊어졌다. 이어 그가 몸을 돌리며 날린 모래바람에 다리를 맞은 베르고가 크게 비틀거렸다. 그순간 정말 열받은 놈이 죽봉을 길게 뻗으며 최후통첩을 날리니 남은 시가를 뱉어낸 크로커다일이 씩 웃었다. 나름 베르고를 도발하려 한 말들에 도리어 제 자존심이 상해버렸으니, 제대로 기분 더러워진 크로커다일은 앞의 놈이라도 곤죽을 만들어야 화가 좀 풀릴 성싶었다. 그렇다고 도플라밍고나 로우의 목을 딸 수는 없잖은가.
“그래, 네놈의 끝을 보는 것도 괜찮겠지.”
“크로커다일!!”
느긋한 녀석이 도발에 훌쩍 넘어오는 게 평소와 다름이지만 크로커다일은 신경쓰지 않았다. 베르고가 과거의 불장난 같던 관계로 발목잡혔다면 크로커다일 또한 같은 신세였으니. 로시난테에게 스스로 발목만 잡히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라는 건 진작 깨우친 일 아니던가.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 기구한 생을 살다 간 녀석이 한순간이라도 마음껏 행복을 누렸더라면 그 또한 이토록 미련스럽게 굴지 않으련만. 그러나 자신의 하나뿐인 형제와 로우를 걱정하던 녀석은 죽는 순간에도 크로커다일에게 부탁했었다. 서투르고 상처 많은 두 사람을 잘 돌봐달라고. 차마 그 유지를 버리지 못해 지금도 미련스레 이곳에 남은 크로커다일은 때문에 오늘밤 도플라밍고가 방해치 않도록 도와달라던 로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이러니 죽은 녀석에게 가장 미련이 남은 것은 그일지도 몰랐다.
한조각
[Code: 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