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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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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촬영이 시작되면서 내 컨디션은 점점 나빠졌다. 축축 늘어지는 몸 덕분에 사진작가가 원하던 나른한 모습의 컨셉은 제대로 뽑아낼 수 있었다.
스케줄을 끝내고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한기가 돌아 으슬으슬 몸이 떨릴 정도였다.

“너 괜찮아?”

이번엔 정말 매니저의 목소리에 걱정이 담겨 있어 웃음이 났다.

돌아오는 길 그가 사 준 약봉지를 들고 힘없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약 먹고 자면 돼. 내일 몇 시에 올 거야?”

밀려오는 스케줄을 외우는건 포기했다. 준비해야 할 시간만 물어보는 것이 일상이 됐다.

“내일 직방이야. 괜찮을까?”

“응. 일찍 자면 나을 거야.”

“9시에 데리러 올게.”

“알았어. 내일 혹시 내가 죽어있으면 장례는 간소하게 해.”

“쓸데없는 소리 하는 거 보니 죽을 정도는 아닌가 보네. 너 죽으면 골프클럽은 전부 내가 가질 거야.”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펴서 욕을 내뱉고는 차에서 내렸다.


무거운 몸은 한번 누워 버리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바로 욕실로 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약을 먹었다.
느려지는 발을 끌고 침실 문을 열었을 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반듯하게 접혀진 이불, 일자로 놓여진 베개들.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을만큼 좋아보였다.

하지만 저것들은 내가 한 게 아니었다.

방 안에 대충 늘어놓았던 옷들도 옷가게에 진열 된 옷처럼 차곡차곡 개어져 1인용 소파에 놓여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방에 가 냉장고를 열었다. 먹기 좋게 잘라 포장 된 과일들과 맨션 지하 슈퍼로고가 찍혀있는 음식들이 냉장고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

주방과 거실은 미묘하게 티는 나지 않지만 전보다 깔끔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부 공준이 한 것이었다.


내가 일하러 간 사이 쉬지 않고 장을 보고 가사일까지 한거야?

나는 냉장고 안의 음식들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버리고는 문을 닫았다.


알람을 설정하려고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찾을 기운도 없어 대신 탁상시계로 알람을 설정하고는 침대에 엎어졌다.

열이 올라서인지 아니면 피곤해서인지 정신이 몽롱했다.

나는 기절하듯 잠이 들어버렸다.






'형, 우리…'

'응?'

'헤어져요.'

숙였던 고개를 들더니 그 아이가 나를 똑바로 보며 단호하게 말한다. 처음 보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싫어.'

공준은 당황한 나를 알아차리고 마치 나를 비웃는 듯했다. 그리고 등을 돌려 나에게서 멀어졌다.

나는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물 속에 있는 것처럼 모든 행동이 느렸고 입을 열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어!

역시 그거였나.

너! 가만있는 나를 뒤흔들어놓고 이렇게 냉정할 수 있어.

좋아하게 만들어놓고 너무하잖아.


사무치게 억울한 마음에 절로 눈이 떠졌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은 줬다가 뺐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그가 이럴 수가 있지.
아무리 꿈이라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다시는 그런 꿈을 꾸고 싶지 않았다.


나는 천장을 보고 제정신을 차리려고 눈을 몇 번 깜빡인 후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알람이 울리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지만 이상하게 더운 느낌에 몸을 일으켜 체온계를 찾으러 거실로 나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꿀렁꿀렁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겨드랑이에 낀 체온계에서 삐-소리가 울렸다.

응? 37.5도??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미간을 찌푸리며 체온계를 노려봤다.
잘못 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다시 한번 체온을 쟀다.

38도

젠장. 처음보다 더 높아졌잖아.


평소에 나는 체온이 낮은 편이라 열이 조금만 올라도 꽤 불편한 느낌을 받는다.
어제 아침에 춥다고 느꼈던 건 감기의 전조였나?
나는 내 마음대로 감기라 진단을 내리고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소파로 갔다.

소파에 쓰러져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 나름 살금살금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저렇게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를 내는 건 매니저인 Xiao Yu밖에 없다.

나는 일어나서 맞이할 기력도 없어 그대로 누워있었다. 발소리는 침실 앞에서 멈추더니 조심스레 문을 열며 작게 내 이름을 불렀다. 반응이 없자 매니저는 방 안으로 들어갔고 얼마 안 있어 비명소리가 들렸다.

“없어! 대체 어디 간 거지?!“

후다다닥 뛰어다니는 소리에 나는 힘겹게 소파 목 받침을 붙들고 상반신만 일으켜 내 존재를 알렸다.

“나...여깄어.”

"으아아악!"

매니저는 내 베개를 들고 욕실 쪽으로 뛰어가다가 나를 보더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너…너 왜 거기 있어? 괜찮아?"

“...안 괜찮은 거 같아. 근데 내 베개로 뭐 하려고?”

"네가 어제 헛소리를 지껄이니까. 설마 정말 어딘가에 쓰러져 죽었나 했지..."

매니저는 자기도 모르게 베개를 들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손에 든 걸 쳐다보더니 곧 바닥에 내팽개치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걸 왜 던지는 건데...?

나는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켜 소파에 기댔다.

“왜 벌써 왔어? 아직 8시도 안됐잖아.”

때마침 설정해 둔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매니저는 얼른 방에 들어가 알람을 끄고 나오며 말했다.

“너 괜찮나 보려고 와 봤는데 야…어떡하냐. 어제보다 안색이 더 창백한 것 같은데. 약은 먹었어? 어.. 어? 갑자기 일어나지 마. 왜 그렇게 비틀거리는 거야?”

매니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와 내 몸을 부축했다.
세상이 나를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서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나 씻고 나올 테니까 커피 좀 줘.”




한껏 나아진 기분으로 욕실에서 나오자 매니저가 냉장고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뭐해?”

“아침식사거리가 뭐 있나 보고 있어.”

나는 냉장고 안에 뭐가 있었더라? 생각했지만 멍해서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젖은 머리를 대충 털며 말했다.

“배 안 고프니까 커피만 줘.”


“위 상할까 봐 그렇지. 약도 먹어야하잖아. 기다려. 음식이 좀 있던데 렌지에 데워올게."

매니저는 내린 커피를 내 앞에 두고는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냈다.

"모둠 과일도 있네? 먹기 좋게 잘라져 있어. 이거 슈퍼에서 사 온 거야?"

모둠 과일?

어젯밤 기억이 떠오르자 갑자기 입 안에 씁쓸해졌다.

”아무 것도 안 먹을래. 꺼내지 마.“

”왜? 약도 먹어야하고....“

”가는 길에 죽이나 포장하자.“

나는 내 앞에 놓인 우유를 넣지 않은 커피를 쳐다보다가 그냥 들이키고는 빈 속에 약을 삼켰다.

씻고 나오니 아까보다는 컨디션이 훨씬 괜찮아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후드에 목을 끼워 넣으며 휴대폰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매니저에게 말했다.

“집에서?"

“그걸 모르겠어.”

매니저는 바로 휴대폰을 꺼내더니 내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다.

“안 받네. 신호가 가는 거 보니 전원이 꺼져있지는 않은 것 같아. 어제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썼던 곳이 어디야?”

나는 기억을 더듬어 마지막으로 쓴 장소를 생각했다. 그러자 공준의 스캔들 기사를 보며 불쾌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음... 화보 촬영장.”

“그럼 있다가 내가 거기로 가볼게. 몸은 좀 어때?”

“그냥저냥 죽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나는 한쪽 팔을 붕붕 돌리며 짓궂게 말했다.
사실 약이 잘 들어 열은 평균체온으로 내려갔다. 쌩쌩할 때와 비교하면 컨디션은 좋지 않았지만 어제보다는 나으니 살만했다.

“죽는다는 말 좀 쉽게 하지 마. 너 죽으면 난 뭐 먹고살아?"

자기는 아직 한창이고 장가도 못 갔는데 어떻게 벌어먹고 살라는 거냐며 투덜댔다.
그러더니 그는 내 손에서 그다지 무겁지 않은 가방을 뺏아 들어주었다.



훗, 이 츤데레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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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가 준 약의 효과가 좋다고 생각했다.
현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열이 났다 한기가 드는 냉열감에 다시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거기다 방송에서는 룩스패드가 너무 밝아 눈이 시려 몇 번이나 나오는 눈물을 감추려 깜빡였다. 중간에 눈치를 챈 스태프가 밝기를 조절해 나아졌지만 눈의 피로감과 턱 밑까지 올라오는 울렁거림에 이 날 이동의 절반은 매니저에게 몸에 의지해 스케줄을 치러야 했다.

방송이 끝나자 모니터 너머로 나를 보고 있던 매니저가 서둘러 들어왔다. 나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든든한 팔을 붙잡고 일어나 대기실로 향했다.

"조명 너무 강했지? 신입이 실수했나 봐. 그런데 너 얼굴이 너무 창백해. 괜찮아?"

“Xiao Yu.”

“야, 너…. 너 왜 갑자기 내 이름을 불러? 네가 그러면 나 무섭단 말이야!"

내가 그의 팔을 강하게 잡자 매니저가 기겁을 하며 나를 쳐다봤다.

“나 너무 아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쓰러졌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내가 쓰러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찧는 바람에 이마 옆이 찢어져 피가 났고 매니저가 그런 나를 안고 펑펑 울며 놓지 않아 사람들이 떼어내느라 고생했다고 했다.





그로부터 내가 제정신이 든 건 쓰러진 날로부터 이틀 후였다.
그 사이엔 열이 오르락내리락 하느라 꿈을 꾼 것처럼 기억이 흐릿했다.
여러 가지 검사를 받은 결과는 피로와 몸살감기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감기로 쓰러진게 처음이었는데 쉬는 날이 없이 몇 개월 동안 달려온 스케줄에 몸은 조금씩 축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직방 중 예민한 팬들은 내가 평소보다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고 sns에는 내가 병원에 실려갔다는 사진 없는 목격담이 몇 개 올라왔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공식계정에 내 사진과 영상을 계속 올렸다.
만약 내가 입원한 것을 회사가 인정했다면 어떻게 해서든 병원을 찾아 내 언론과 팬들이 진을 치고 난리를 벌일 거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도가 심할 경우 변장을 하고 병실까지 들어와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곳은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병원이었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 나았다.

정말 그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사장님인데?”

매니저는 전화기를 손으로 가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귀찮아. 그냥 나 잔다고 해. 아무 연락도 바꿔주지 말고 내버려 둬.)

내가 입모양과 손짓으로 거부하자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손에 연결된 수액줄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나는 이불을 끌어 머리까지 덮었다.
다음 스케줄은 광고 촬영들 뿐이라 사정을 말해 뒤로 미뤘고, 몸이 나을 땐까지 푹 쉬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이번 기회에 모자란 잠이나 보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까 공준한테 전화 왔었어. 아니 어제부터인가?“

“뭐?”

나는 얼른 이불을 내리고 방금 통화를 마친 매니저를 쳐다봤다.

신하령 촬영 때 공준과 Xiao Yu는 내 앞에서 번호 교환을 했다. 공준은 가끔 다른 스케줄로 현장을 떠났는데, 촬영에 들어간 내가 연락이 되지 않을 때는 내 매니저를 통해 연락을 했다.
그건 대부분 그가 현장에 복귀할 때 내가 필요한 걸 사다 주거나 지방 특산물을 사 오는 내용이었다.

“...뭐래?”

“너랑 연락이 안 된다고. 옆에 있으면 바꿔달라고 해서 지금 좀 바쁘다고 했어."

"........"

"목소리가 너무 안 좋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봐. 자기한테 꼭 연락해달라고 부탁하더라. 나중에 다시 전화 오면 그냥 입원했다고 솔직하게 말할까?"

"아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깜빡 잊고 있었다. 큰일이었다. 벌써 사흘째 아무 연락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는 공준의 연락처를 몰랐다.
저장은 했지만 번호까지 외우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휴대폰 아직 못 찾았어?"

"응, 화보 촬영장에 전화해봤는데 없다고 하더라. 이참에 그냥 새로 사. 네껀 너무 낡았어. 내가 사다 줄까? "

"그래야 하나..."

크게 휴대폰에 의지하는 편은 아니지만 당장 손에 없으니 연락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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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할 때까지 우선 이거 쓰고 있어. 내 번호 등록되어 있으니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매니저는 나이 든 세대가 쓸 것 같은 효도폰 같은 휴대폰을 구해와 내 손에 쥐여주며 토닥였다. 휴대폰은 오래된 기종으로 폴더식이었는데 열어보지 않았지만 분명 글씨가 잘 보일 큰 화면에 큼직한 키보드 일 거라고 확신했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매니저가 달래듯이 말했다.

"잠깐이야. 입원할 동안 아주 잠깐."

"... 알았어. 그럼 잠깐만 빌릴게. 그리고 공준 전화번호 좀 알려줘."

나는 퇴원하면 얼른 새 휴대폰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폴더폰을 매니저에게 건넸다.

“그러고 보니 너, 공준 기사 봤어? 스캔들 났더라."

“뭐?”

나는 마치 처음듣는 것처럼 놀란 척을 했다.

“둘이 사귀나 봐. 공준 쪽은 아직 아무말도 없는데 여자 쪽은 sns에 웃고 있는 이모티콘만 떡하니 올려놓은 거 있지. 너 이거에 대해서 공준과 말해봤어? 참, 너 휴대폰 잃어버려서 말할 틈도 없었겠다. 그럼 이번에 한번 물어봐봐. 나 궁금해 죽겠다.”

"공준은 아무 말도 없다며? 그럼 아니겠지."

"에이, 말이야 그렇지. 라오따도 처음엔 그랬지만 결국엔 인정했잖아."

매니저는 공준의 휴대폰 번호를 폴더폰에 입력하고는 나에게 돌려줬다.

"야, 솔직히 걔가 아직 라오따 정도의 인기는 아니잖아."

그리고 그게 대체 언제적 이야기야?! 왜 공준을 우치룽이랑 비교하는 건데.

"내가 장담하는데 걔는 앞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을 거야."

매니저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천장 어딘가를 올려다보며 두 손을 모았다.

Xiao Yu는 우치룽의 엄청난 팬이었다. 우치룽이 나온 드라마나 광고하는 물건은 금액이 크지 않다면 꼭 구매를 했고 도저히 못 살 정도의 비싼 것은 생일날 내가 선물해 줬다. 우치룽의 스캔들이 터지고 결혼을 했다는 발표가 났을 때는 그는 밤새 술을 마시고 울었다. 아, 물론 기뻐서였다. 첫 번째 결혼과 그 끝이 좋지 않았던 우치룽이 새로운 사랑을 하고 새출발을 한다는 것이 굵직한 남성 골수팬은 너무 기뻤던 것이었다.

Xiao Yu는 인터넷으로 기사를 나에게 보여주며 "준준이도 이젠 어른이다, 그치?"라고 웃으면서 신나했다.

아이씨. 나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왜 자꾸 그를 어린애 취급하는 거야.
나는 그 애와 몇 번이나 입을 맞췄는데 그렇게 말하면 마치 내가 어린애를 희롱한 범죄자 같은 느낌이 들잖아!

"너 그만 말해."

흥분해 더욱 높아진 매니저의 목소리에 지친 나는 귀를 막으며 그를 노려봤다.

"왜? 그 둘이 사귄다면 정말 아름다울텐데. 그렇지 않아?"

"넌 왜 공준이 왕홍과 사귀었으면 하는데?"

"Mei는 요새 엄청 인기야. 귀엽고 청순하고. 둘이 같이 서 있는 것만으로 그림이 된다고! Mei도 쓰촨성 출신이라는데 거기 터가 좋은가 봐. 미남 미녀가 많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참을성은 체력과 비례한다.
평소라면 코웃음칠 수 있는 말이 몸이 좋지 않을 때는 기다란 창이 되어 푸슉 푸슉 가슴을 찔러댔다.

“... 네 휴대폰 좀 빌려줘.”

“왜?

“환자의 안정을 방해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때리면 정상참작이 되나 지금 검색해 보려고."

폴더폰은 검색 기능이 없고 오직 전화만 가능했다.
Xiao Yu는 자신의 휴대폰을 건네다가 내 말을 듣고 멈칫하더니, 눈치를 보며서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나와 거리를 두며 뒤로 물러나는 Xiao Yu를 보며 물었다.

"왜? 어디 가?"

"....슬슬 회사로 돌아가야겠어. 밤도 늦었고 네 일도 보고해야 하고. 넌 푹 쉬어.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새벽에라도 전화해. 알았지?"

매니저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등을 돌려 달아나듯 그대로 병실에서 나갔다.





혼자 남아 조용해진 분위기에서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폴더폰을 집어들었다.

그와 연락하기로 한 날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그가 받으면 먼저 무엇을 말해야할지 생각했다. 잠깐 고민을 하다가 저장된 번호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잘 지냈어? 아, 미안. 휴대폰을 잃어버렸어. 연락이 안돼서 답답했지? '

이렇게 말하면 자연스러울까?

나는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며 그가 받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몇 번의 신호가 울려도 상대는 받지 않았다.
이 번호는 낯선 번호니까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단 나는 전화를 한거니까 나중에 그에게 변명할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바로 전화가 왔다. 이 오래된 전화기는 발신자 표시 서비스도 해두지 않았다.

나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는 내 목소리를 듣더니 잠시 침묵을 했다.

"....형?"

"어....나야."

나는 그가 보지도 않는데 괜히 쑥쓰러워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왜...왜 연락이 계속 안됐어요?

그의 목소리는 나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떨리는 것 같았다.

“휴대폰을 잃어버렸어. 네 번호도 외우지 않아서
걸지 못했어.“

“.......”

“이건 임시로 쓰는 번호거든. 다시 새로 사면 알려줄게."

아니다. 이제 헤어질지도 모르는데 알려줄 필요는 없지.

"나는... 형이 내 기사를 보고 화가 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락도 안 받고 피하는 거라고. 혹시 제 스캔들 때문에 기분 나쁜 건 아니죠? 그건 정말 사실이..."

"아니야. 화가 왜 나겠어. 설령 그 기사가 진짜라 해도 뭐."

이런 걸로 질투하면 그가 웃을지도 몰라.
봐. 이 아이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아무렇지 않잖아.
나는 괜히 허세를 떨며 말했다.

"진짜라 해도... 뭐라고요?"

전화기가 낡아서 잘 들리지 않나? 나는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진짜라 해도 어쩔 수 없다고."

"....그게 진심이에요?"

그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고 반대로 나는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갑자기 그 날 아침 그가 하려던 말이 정말 헤어지자는 말일지도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알량한 자존심으로 밝게 대답했다.


"물론이야.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막상 생각이 바뀌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예쁜 사람에게 끌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별로 무겁게 생각하지 마. 언제든 끝이란게 있잖아. 이런 독특한 관계....내 말은 그러니까....“

남자끼리 연애하는 거. 솔직히 이상한거 맞지...

헤어지자는 말은 내가 먼저 하겠다고, 절대 먼저 차이지는 않을 거라고, 며칠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입에서 이별이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 아이를 꽤 좋아했던 것 같다.
감정이 훨씬 깊어지기 전이라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입을 열 때 였다.
갑자기 공준이 다시 웃더니 순간 전화기 너머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지금 무슨 소리야?"

놀란 나는 소리를 듣기 위해 휴대폰을 귀에 바짝 갖다댔다.

공준이 날카롭게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형이 나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지도."

"지금 무슨 소리냐고! 뭐 깨진 거 아니야?"

".... 글쎄요. 내 마음인가 보죠. 형, 시간이 늦어서 전 이만 자야겠어요. 내일 일찍 촬영이 있어서요."

낮게 깔린 목소리가 언제나처럼 다정한데 왠지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그래... 잘 자."

"참, 이번 주 행사에 참석하는거 맞나요?“

나는 모레 퇴원을 하기로 했고 이후부터는 밀린 스케줄을 천천히 진행하기로 했다.

"맞아. 참석해."

"그럼 우리 그 때 이야기해요."

"그래."

"잘 자요, 형."

늘 내가 먼저 끊을 때까지 기다려주던 공준은 먼저 전화를 끊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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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을 때, 공준은 이미 화면을 보고 있었다.

사흘 동안 그와는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고 공준은 불안함에 반쯤 미친 것 같은 상태였다. 그건 일할 때는 조금 진정되었다가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듯 솟구쳐 공준을 괴롭혔다.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 촬영 외에는 계속 휴대폰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연락한 그의 매니저는 그가 바쁘다고 했다.
공준은 의아했다. 아무리 바빠도 늦게라도 연락을 해줬는데 사흘이나 연락이 없는 것은 이상했다. 형에게 47통의 전화를 걸었고 전화의 두 배 정도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바빠서 연락을 못했다고....?

분명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아침까지는 좋았다.

공준은 새벽에 눈을 떴고 떨어져 자는 형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잠투정을 하듯 뭐라 웅얼거리면서 그는 공준의 품 안으로 깊이 들어왔다. 반쯤 깬 잠이 정신이 확 들면서 공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공준은 그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등에 팔을 두른 후 그의 머리 위에 자신의 턱을 걸쳤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하고 좋았다. 이 소중한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시간은 턱없이 빨리 흘렀다.
꿈을 꾸는지 입술을 꾹 다물고 간간이 미간을 찌푸리는 장철한의 얼굴을 보며 아쉬운 한숨을 내쉬고 먼저 일어났다.

공준은 아침에 맨션 밑의 슈퍼에서 사 온 재료와 이미 냉장고에 들어있던 것으로 아침식사를 만들었다.

만든 보람이 있게 그는 정말 맛있게 먹어줬다.

식탁에 앉아 그저 홀린 듯이 그의 모습을 한참을 쳐다봤다. 야무지게 작은 입술을 움직이며 꼭꼭 씹어먹는 모습이 귀여웠다.
공준은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먼저 나가는 그를 배웅할 수 있었다. 전화를 받으며 나가는 그를 안았고 아쉽지만 놓아줬다. 장철한의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느낀 건 그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날 오후 스캔들이 터지고 나서부터 그와의 연락이 끊겼다. 설마 믿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그를 만난 후로 자신의 마음은 온통 그였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될 즈음에 한 고백을 그가 받아준 게 얼마 안 되었는데. 그리고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아닐 거야.

불안은 쓸데없는 상상을 만들고 그의 등을 밀며 절벽으로 향하게 했다.

공준은 모르는 착신번호를 가는 눈을 뜨고 노려봤다.
어떻게 알았는지 종종 악질 팬에게 전화가 걸려올 때도 있어 모르는 번호는 절대 받지 않았다.
이 번호도 그런 걸까 의심하던 차에 착신이 끊겼다.

팬이 아님을 바로 확신했다.

왜냐면 악질 팬은 끈질기게 끊지 않는다. 몇 번이나 연결해서 다시 걸기도 한다.
그런데 이 번호는 네 번밖에 울리지 않았는데 끊겼기 때문에 혹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전화를 걸면서 그가 아니라면 끊어버리고 번호
를 블록을 해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전화기에서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자 공준은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 형?"

"어.... 나야."

너무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살짝 가라앉아있었고 웃음기도 섞여있었다. 안도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왜 연락이 계속 안됐어요?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정말 그 사흘은 그에게 지옥 같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꾹 참았다.

“휴대폰을 잃어버렸어. 네 번호도 외우지 않아서
걸지 못했어.“

“.......”

“이건 임시로 쓰는 번호거든. 다시 새로 사면 알려줄게."

공준은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는 화면에 뜬 번호를 보고 바로 외워버렸다.

"나는... 형이 내 기사를 보고 화가 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락도 안 받고 피하는 거라고. 혹시 제 스캔들 때문에 기분 나쁜 건 아니죠? 그건 정말 사실이..."

"아니야. 화가 왜 나겠어. 설령 그 기사가 진짜라 해도 뭐."

음....? 방금 형이 뭐라고 한 거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공준은 얼른 핸드폰을 다른 귀로 옮겼다.


"진짜라 해도... 뭐라고요?"

"진짜라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이럴 수는 없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면서 쿵쿵 울리는 소리가 머리까지 전해졌다.

".... 그게 진심이에요?"

"물론이야.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막상 생각이 바뀌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예쁜 사람에게 끌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별로 무겁게 생각하지 마. 언제든 끝이란게 있잖아. 이런 독특한 관계....내 말은 그러니까....“

공준은 이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했다.
전화감은 괜찮았다. 그렇다면 자신의 귀가 문제던가 아니면 말한 이가 문제겠지.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돌았다.

사흘 만에 연락이 되어 방금까지 천국에 올랐던 공준의 기분은 지옥 바닥까지 떨어졌다. 공준은 자신도 모르게 잡고 있던 컵을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았다. 아름답게 세공이 된 컵은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졌고 컵 바닥에 남아있던 조각은 손바닥을 찔러 붉은 피가 흘러나왔지만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아픈 건 가슴이었다.

그는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이별을 의미하듯 말했고 그것은 자신의 심장을 무자비하게 헤집어놓았다.

"지금 무슨 소리야?"

흐르는 피가 카펫을 적셨다. 공준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형이 나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지도."

"지금 무슨 소리냐고! 뭐 깨진 거 아니야?"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이이상 대화를 한다면 그가 이별을 말할 것 같아 두려웠다.

".... 글쎄요. 내 마음인가 보죠. 형, 시간이 늦어서 전 이만 자야겠어요. 내일 일찍 촬영이 있어서요."

장난친거라고 말해요.

"그래... 잘 자."

아니라고. 그런 건 믿지 않는다고 말해줘요.

"참, 이번 주 행사에 참석하는거 맞나요?“

"맞아. 참석해."

공준은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말했다.

"그럼 우리 그 때 이야기해요."

"그래."

"잘 자요, 형."

공준은 멍하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심장이 너무 아팠다.
상처 입은 손으로 주먹을 쥐고는 가슴을 눌렀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금세 옷에 스며들었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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