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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3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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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몽롱하고 무지근하게 머리를 누르는 기운은 뇌수를 느리게 치는 파도처럼 일렁이게 한다. 의식이 깜빡 들어왔다가도 깜깜해지고 또다시 깜빡 들어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기억은 잘린 것처럼 암전되었다가 하나씩 서서히 떠올랐다.

활짝 열어놓은 커튼 너머로 밝은 햇살이 스며든다. 샐 틈 하나 없이 가득 넘실대는 빛 속에서 마치다가 드디어 깨어났다. 그는 지난 수일 동안 아픈것도 모른 채 앓았고, 잠든 것도 모른 채 잠이 들었다.



".......읏......."



감은 눈가가 가파르게 떨렸다. 정신은 깨어나는데 몸은 그렇지가 못했다. 뇌의 어디를 자극해야 신체 어느 부위가 움직이는지 잊어버린 것처럼, 몸을 마음대로 지시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물속에 푹 잠긴 것처럼 감각은 뭉근하기만 했다.

숨을 빨아들일 때마다 나는 냄새는 위생적이었다. 그것이 소독 약품이라는 걸 생각해 내는데 한참 걸렸다. 마치다는 의식을 차린 지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이곳이 스즈키 그룹 소유의 병원임을 깨달았다.



"이 사람 몸 상태 언제 회복할 수 있습니까."

"글쎄요……, 그게……"



낮게 나누는 대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마치다는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였다. 노부유키의 목소리다. 그가 딱딱하고 무서운 말투로 누군가를 다그치고 있었다. 상대는 머뭇거렸다. 겁을 집어먹은 것도 같았다.



"스즈키 재단이 의료 개발에 투자한 자본금만 해도 얼마인지 알고 있습니까?"

"......송구합니다. 환자의 질환에 대한 규명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서....."

"사과는 됐습니다. 기대했던 수준에 못 미쳐 매우 유감이군요."



마치다가 겪고 있는 기면 증상에 대한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의료진이다.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하던 노부유키의 시선이 향하는 게 느껴졌다. 뜨겁고 날카로운 것이 얼굴 위에 멎는다. 동시에 마치다의 가슴이 후드득 떨렸다.

굽어지지 않는 강파르고 혹독한 눈빛은 당장에라도 이 초라한 육신을 회 떠 먹으려는 기세로 굽이치고 있었다. 마치다는 얼굴 위로 그것이 드러날까 숨소리마저 죽이며 동요를 참아 냈다. 손가락도 움직일 수 있었고 발가락도 움직일 수 있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고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삼일."

"……."

"삼일 안에 원하는 성과를 가져오시죠."



겁을 주는 것도 아니고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채근하고 있었다.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게 직업인 이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곤혹스러움이 고스란히 읽혀졌지만, 의사는 한참 후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발소리가 들리고 정맥에 꽂힌 링거액이 잘 들어가고 있는지 확인한 의사는 곧 병실을 나갔다.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검은 실루엣의 형상은 하나로 줄었다. 노부유키는 여전히 우두커니 서서 마치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케이. "

".........."



목소리에 희미한 책망이 배어 있었다. 그러고는 마치다의 뺨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척을 하는 것은 곤욕스러웠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숨소리가 거슬리게 흐트러졌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대표님, 방금 본사에서 연락 왔습니다."



스즈키 그룹의 수행 비서였다. 긴급한 사안을 전달하는 목소리는 경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노부유키는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대신, 한 구석을 마구 헤집어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다는 숨 쉬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산소가 희박해지는 기분이었다. 노부유키는 그 뒤로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바로 갈 테니까 차 대기시켜."

"알겠습니다. 그럼 십 분 뒤에 출발하겠습니다."



갑자기 얼굴 위로 낯선 온도가 훅 끼쳐 왔다. 촉-, 하고 물컹한 살이 입술에 살포시 내려 앉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위에 머물렀다. 마치다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내쉬는 숨결이 얼굴 전체로 덮여 왔다. 그렇게 상대의 뺨을 한 번 더 쓰다듬고 남자는 조용히 나갔다.










* * * * *



"............"



마치다는 아무도 없는 병실 안에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선반 위에 계절 감각을 읽을 수 없는 꽃병과 꽃이 놓여 있었고, 아이보리색 벽과 침구의 색상이 화사하게 눈에 들어왔다.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드리워져 있고 벽에 걸린 시계는 오후 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



입술 위에 뜨끈하게 남아 버린 감촉을 마치다는 떨리는 손끝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남자가 나가고 나서도 그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갑갑한 심정을 전부 갈무리할 수가 없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뭉쳤던 뺨이 파르르 떨리고, 입가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상대는 자신에게 매우 정중하고 친절한 태도로 예우했으나, 마음 한쪽에서 솟는 긴장감을 좀처럼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당연했다. 한번 격정이 폭발하면 남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 광포한 폭도로 돌변하는 자니까.



".....도망쳐야 해."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렸다. 그것은 위험 신호였다. 노부유키가 자리를 비운 지금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마치다는 시트를 걷어치우고 팔에 꽂혀 있는 주사를 뽑아냈다. 몽둥이 찜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욱신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켜 서둘러 침대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철컹, 앞으로 쏠린 상체가 더럭 붙잡혔다.



"허억……!"



빠져나가려고 하는 힘에 반동이 더해져 누가 머리채를 뒤에서 잡아챈 것처럼 몸이 휘청했다. 마치다는 병실 바닥으로 꼴사납게 쓰러졌다. 한쪽 발목에 쇠사슬이 채워져 침대에 묶여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 앉는다. 침대에 매달린 형상으로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자 철컹, 철컹, 풀리지 않는 쇠사슬이 날카롭게 요동쳤다. 그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부인!"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마치다를 일으켜 도로 침대에 눕혀 주었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몸은 괜찮으세요?"

"다리에.....이게 뭐에요? 당장 풀어줘요!"

"진정 하세요, 부인."

"이것 놔! 놓으란 말이야!"

"혈액 검사을 하셔야 합니다."

"싫어-!!!"



마치다는 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미친 사람처럼 발광했다. 그때 뒤늦게 들어온 경호원들이 양팔을 한 명씩 잡아 쥐고 병원복 소매까지 친절하게 걷어 호출된 간호사에게 들이댄다. 마치다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붙들려 낮은 숨소리만 씨근덕거렸다. 그제야 간호사가 겨우겨우 피를 뽑아 갔다.



"놔!!! 내 몸에서 당장 떨어져-!!!"

"환자분. 자꾸 이러시면 안정제 투입해야 합니다. 안정제로도 안 되면 손을 묶어 놔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거놔-!!!



노부유키의 지시로 붙여둔 감시자들은 마치다를 침대에 바로 눕히고 그 위로는 시트까지 덮어 주었다. 벌떡벌떡 일어나려고 하는 어깨를 그들이 꾹 눌렀다. 묵직하게 쳐다보는 여러개의 시선이 더 이상의 반항을 그만두라는 듯 깜박였다.



"부인, 제발요....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다치면 어쩌려 그래요. 꼬박 석달이 넘게 누워 계셨어요."

"........."

"한 동안은 추적 검사가 진행될거에요. 여기서는 치료에 전념하셔야 합니다."



가정부는 이런 처치에 굉장히 능숙했다. 마치다는 숨을 고르며 몸의 힘을 풀자, 경호원들이 손을 떼고 물러났다. 마치다의 시선을 읽었는지 그녀는 경계를 누그러트리려는 것처럼 말을 늘어놓으며 경직된 분위기를 풀려 했다.



"대표님은 일 때문에 잠시 나가셨어요. 불편한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이야기하세요."

"........."

"......힘드시겠지만 지금은 최대한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럼 쉬고 계세요."



가정부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을 닫고 나갔다. 사방이 곧 조용해졌다. 분을 참지 못한 숨소리만 낮게 울리고 있었다. 그 숨소리도 얼마 후 잦아들었다. 반항하듯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것도 풀어 버리자, 오랜 지병을 앓는 듯한 한숨이 나왔다.



".....하...빌어먹을....."



마치다는 폭풍처럼 휩쓸렸던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다른 것은 마음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흔들리던 남자의 눈동자는 옳지 않았다. 자신이 잠든 줄 알고 그가 몰래 입을 맞춘 것 또한 옳지 않았다. 그건 다시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 * * * *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마치다는 넋이 나간 것처럼 허연 벽만 바라보았다. 이따금 제 모습을 확인한 경호원 하나가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 같았다.

침대 위에서 잠든 모습을 확인한 경호원은 특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었다.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태블릿 PC에 메모를 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그 역시 업무의 하나인 것 같았다. 두 번째 신문을 펼쳐 들었을 때였다. 마치다가 몸을 웅크리자 남자가 기민하게 반응하며 시선을 들었다.



"으윽…….!"



배가 아팠다. 갑자기 배 한구석이 아파 마치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불규칙적으로 찌르듯이 시작된 통증은 갑자기 나타났다가 이내 가라앉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아랫배를 손으로 짚고 신음을 하자 경호원이 신문을 던지듯 내려놓고 다가온다. 얼굴이 빨개지고 이마 위로 진땀이 솟아올랐다. 발목에 걸린 쇠가 찰캉찰캉 소리를 내며 이곳저곳에 부딪쳤다.



"어디 아프십니까? 괜찮으세요?"



그가 마치다의 몸을 흔들었다. 마치다는 아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다는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경호원이 간호사와 의사를 불렀다. 호출된 의사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청진기를 이리저리 대 보기도 하던 그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지만 마치다는 어디가 아프다고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발작했다.



"일단 복부 CT 찍어 봐야겠습니다. CT실 잡아 주세요."



의사의 외침에 간호사가 송화기를 집어 들고 예약을 잡았다. 다른 간호사는 밖으로 나가 이동식 침대를 밀고 들어왔다.



"선생님, 환자분 발목에……."



이동 침대 위로 환자를 옮기려던 간호사가 발목에 죄어져 있는 족갑을 난감하게 바라보았다. 의사가 경호원을 재촉했다. 남자는 망설이다 마지못해 발에 채워진 쇠고랑을 풀어 주었다.



"셋에 옮깁니다. 하나, 둘, 셋!"



몸이 잠깐 들리더니 이동식 침대 위로 옮겨졌다. 마치다는 눈을 질끈 감고 헐떡거렸다. CT실로 들어가기 전, 의사는 경호원에게 통제 구역임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남자가 불안한 눈초리로 걸음을 멈추었다.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침대 바퀴가 덜그럭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환자분 조금만 참으세요."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움직이면, 으헉-!!"




-퍼억-!!!!!

마치다는 있는 힘껏 의사를 밀었다. 트레이 위의 약품이 바닥으로 나뒹굴며 와장창 깨져 버렸다. 간호사가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벌러덩 까무러쳤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마치다는 혈관 조영실밖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제한 구역으로 이어진 통로 끝에 비상구가 보인다.



"하아.......하!"



마치다는 조명이 어두운 출구 계단으로 정신없이 뛰어 내려갔다. 한 층을 내려가 구름계단으로 연결된 다른 건물의 일반 입원실이 보였다. 그는 문이 열려 있는 6인실 병실로 들어가, 누군가 벗어 놓은 점퍼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들어간 병실에서 잠이 든 환자의 슬리퍼와 모자를 훔쳐 냈다. 그 뒤로 마치다는 계단이 아닌 엘리베이터를 선택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복도 앞에는 휠체어에 앉은 환자와 그것을 밀어 주는 보호자가 서 있었다. 그들은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뛰어가는 남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하지만 호기심은 거기서 그쳤다. 대부분이 6인실에 8인실이라 사람이 수시로 들락거렸기 때문에 경계하는 시선은 없었다.

-띵동

드디어 멀리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헐떡이는 숨을 죽이고 급하게 뛰어가 막 닫히려는 것에 올라타려는 찰나. 어느 틈에 마치다를 쫓아 내려왔는지, 누군가가 뒤에서 그를 억세게 붙잡는다.



"....으윽-!!!"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온몸을 굳힌 채, 마치다는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상대가 낮게 속삭이며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요."



마치다는 무덤에 묻혔다가 되살아난 사람을 본 것처럼 창백했다. 그렇지 않아도 파리한 낯빛이 저 정도로 새하얗게 질릴 수 있다니, 그녀는 잠시 그런 태평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움켜쥔 마치다의 손이 간헐적으로 떨리는 것을 발견하고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마치다를 엘레베이터안, 구석진 곳으로 은밀히 밀어 붙이며 북적한 인파들 사이로 몸을 피해 섰다.



"여기서부턴 제가 주의를 끌겠습니다."

"당신이 왜.....?"



만약 목소리에도 색깔이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 마치다의 목소리는 그의 낯빛만큼이나 핏기 없이 창백하리라. 마치다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의 진동이 사람들에게 들릴 것 같았다. 온몸의 모든 액체를 분비해 버리려는 듯, 그래서 기어이는 그의 몸을 말려 버리려는 듯, 축축한 땀이 손끝에서 한없이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때로는 기회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아 이런 선택이 불가피할 때도 있더군요."



그때 로비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마치다가 움찔했다. 열린 문 밖으로 계단을 뛰어왔는지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경호원들의 모습이 다수 보였다.



"부디 있는 힘껏 달아나세요."

"잠깐......!"



미처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가정부가 사라진다. 그 뒤로 서서히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지하로 내려갔다. 한 층, 한 층, 일 초가 한 시간 같았다. 마치다는 제 얼굴을 쓸어 가리고, 인파들 사이로 주위를 확인하며 지하 1층 주차장에서 가까스로 내릴수 있었다.

그때 병원 주차장 앞으로 빈 택시 한대가 보였다.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차들과 합류하는 지점은 혼잡했다. 앞차의 꼬리를 쫓아 택시도 대열에 합류했다. 마치다는 그 틈으로 긴급히 택시에 올라타 창밖을 확인했다. 다행히 쫓아오는 사람도 쳐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손님, 어디로 가십니까?"

"........"

"손님?"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계획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짐작할수 없다. 노부유키는 자신의 행동 반경 주변으로 사람을 풀 것이다. 제차 목적지를 묻는 기사의 물음에 마치다는 머뭇거리며 무심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뭐가 있어 꺼내 보니 지폐 수십장이 접혀 들어 있었다. 아까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가 제 몫의 돈까지 은밀하게 챙겨준 것이 틀림 없었다. 왜 일까. 한낱 가정부일 뿐인 여자는 왜 자신을 도와주는 것일까? 아니, 그런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녀가 의도적이든 의도하지 않았든, 총체적인 명분이 관철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마치다는 자신도 모르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제법 침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여기서 최대한 멀리 가주세요.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곳으로."

"아이고, 손님. 그 정도의 장거리 운행은 곤란합니다만.... 무슨 일로 멀리 가십니까?"



기사는 백미러로 마치다를 돌아보았다. 유쾌하지 못한 시선이었다. 못마땅하게 인상을 찌푸리다 마치다를 빤히 쳐다보기만했다. 노골적으로 의심 어린 눈초리를 주고 있었다.



"여기 돈 더 드릴게요. 그냥 조용히 가 주세요."

".....뭐, 그럽시다."



큰 돈을 쥐어주자 택시 기사는 목적지를 향해 성실하게 달려 나갔다. 마치다는 좌석에 등을 묻으며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앉아 몸을 숨겼다. 기사가 액셀을 밟자 차가 느릿느릿 움직였다. 차가 도로로 진입하고 나서야 마치다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바깥 거리는 행인들의 차림이 길어져 있었다. 반소매를 입은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덧 가을이고 어느덧 계절의 끄트머리였다. 빗줄기에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 노란 은행잎을 환경 미화원이 부지런히 쓸어 담고 있었다.

자신이 도망친 것을 노부유키는 지금쯤 알았을까. 병원을 아무리 이 잡듯이 뒤져도 보이지 않을 테니 경호원이 어떤 참담한 심정으로 그에게 연락했을지 상상이 갔다.

마치다는 맞지 않는 모자를 벗어 버렸다. 달리는 택시를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그것을 되새기며 긴장이 풀자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고단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한숨을 흘리는데, 돌연 배가 뒤틀릴 듯 아파 왔다.



"큭……!"



비정상적인 복통에 배를 움켜쥐었다. 배 속에서 뭔가가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며 손바닥으로 배를 문질렀다. 끔찍스러운 고통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러면 곤란해.....제발......"



마치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의 배를 쉼없이 어루만졌다.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낸 무언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설렘이나 기대감 보다는 불안과 초조가 엇갈리고 있었다. 당연했다. 뱃속에 든 이것은 아마도 제대로된 인간으로 태어날수 없을 것이다.

어떤 위험을 자초하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징조 같은 것이 눈 앞에 싹트고 있는 것 같았다. 육신은 육신대로 축나고 정신은 정신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이제는 구속이나 속박 따위가 없는 자유로운 몸이지만,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곳에 갇힌 것처럼 막막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