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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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9 16:19
눈보라가 몰아치던 밤이었다. 동생의 부재를 눈치챈 도플라밍고가 그를 찾았을 때, 깊은 산중에는 놈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성체가 대략 삼미터 정도의 녀석들은 팔과 몸통에 날개가 붙어있었다. 두 발로 걷는 겅중한 모양새는 사람을 닮았지만 진득하게 흘러내리던 검붉은 피에서는 달걀 썪은 내가 났다. 그 악취에 숨을 쉬기도 힘든 한가운데서 상처투성이의 로시난테는 아이를 보호하며 서있었다. 탄이 바닥난 총은 버려둔 채 대검을 뽑아든 로시난테는 한 손에 폭약 줄을 움켜쥔 채 못 박힌 듯 서있던 아이를 달래듯 웃고 있었다. 사방에 깔린 놈들을 경계하면서. 놈들은 로시난테의 강함에 겁을 먹은 듯 일정 거리를 둔 채 쉽게 다가오지 못했는데 바닥에 쓰러진 녀석들의 꿈틀거림이 심상치 않았다.
어깨띠의 폭약은 줄 하나로 전부 연결돼 있다. 로우가 손가락에 건 줄만 당기면 단숨에 전부 터질테고 저 작은 몸은 육신이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로시난테는 제 형이 가져온 폭약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봤다. 때문에 그는 제게서 도망쳐 폭약을 터뜨릴 궁리만 하던 아이를 놓칠 수 없었다. 더 안쪽으로 도망치듯 숨은 놈의 얼굴이 이질적이게도 어린 여자아이였던 걸 봤기 때문이다. 라미. 로우가 그 얼굴을 보고 동생의 이름을 불렀으니까. 이것만으로 상황을 추측한 로시난테는 로우가 노리는 게 동생의 얼굴을 한 괴물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저 아이가 적어도 자신만은 죽지 않도록 폭약 줄을 당기지 않는다는 것 또한. 때문에 로시난테는 놈들을 사이에 두고 나타난 제 형과 크로커다일에 아이가 눈을 뺏긴 순간을 놓칠 수 없었다. 놈들에게서 등을 돌리면 위험해질 걸 알면서도.
‘안 돼ㅡ!!!’
‘…괜찮아. 그냥 좀 물린 것뿐이야.’
아이를 감싸듯 끌어안던 품은 손 하나도 까딱하지 못하게 했다. 동시에 뒤에서부터 몰아치던 도플라밍고와 크로커다일에 놈들의 주의가 돌아갔지만 문제는 이미 로시난테가 처리해 쓰러진 몇몇이었다. 로우는 몸에서 머리를 완전히 분리하라고 했지만 전부 깔끔히 도려내질 못한 모양이다. 바닥을 기어온 한 녀석이 로시난테의 다리를 물어뜯었다. 톱니바퀴처럼 날카로운 이빨에 크게 떨어져나간 살점에서 흐른 피가 눈을 녹였다. 순식간에 웅덩이처럼 패인 눈구덩이를 보며 로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로시난테는 와중에도 아이에게서 폭약띠를 떼어내 멀리 던져버렸다.
‘내가… 내가 입을 조심하랬잖아! 물리지만 말라고…… 으아아앙!’
‘그래, 내가 미안해. 네가 애써 말해줬는데 결국 물렸네.’
‘로시! 너 괜찮냐?!’
‘도피! 녀석들 이빨에 독이 있으니 절대 물리지 말고 머리를 자르래! 그래야 놈들이 죽는대! 이 애가 알려줬어!’
로시난테는 펑펑 우는 아이가 더이상 끔찍한 것들을 보지 못하게 머리까지 완전히 품에 감싸 안아줬다. 로우는 포근한 검은 날개가 저를 감싸는 것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귀신이 흐느끼는 것 같던 바람 소리도, 서걱이며 목이 잘리는 소리도, 끔찍한 놈들의 비명까지도 모조리 사라지고 고요해진 세상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악몽조차 꾸지 않은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헉! …허억… 허억…….”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서재 책상에 앉아 잠시 눈을 붙인 도플라밍고가 깨어났다. 마의 지대로 들어선 뒤 내내 귀를 때리는 천둥 소리와 귀신이 곡하는 양 울어대는 바람이 악몽의 원인일 터다. 이런 날씨는 눈보라치던 설산에서 마물이 내던 기괴한 비명소리를 떠올리게 했으니. 크로커다일에게 제가 떠난 뒤 취합한 알라바스타 정세를 전달받아 보던 중인 도플라밍고는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은땀이 범벅인 얼굴을 한차례 손으로 쓸던 그가 좁은 창너머로 번쩍이는 번개를 바라봤다.
“아직 밤인가… 로우 그녀석도 잠을 설치겠군.”
마의 지대로 들어선 뒤 시간은 지긋지긋하게도 더디게 흐른다. 그리고 도플라밍고는 저와 같은 지옥을 건너온 로우가 똑같은 악몽을 꾸고 밤새 잠 못 이룰 것이라 생각했다. 하니 이런 밤이면 직접 등장해 현실이 더 뭣같음을 알려줘야 할 그였지만 도플라밍고도 오늘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 역시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늘같은 밤은.
항해 사일차, 로우도 당연히 저처럼 밤새 잠 못 이루고 끙끙댄 몰골을 예상했던 도플라밍고는 왠지 재미가 없어졌다. 아침에 나타난 로우는 눈밑이 다소 퀭하기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만족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오메가로서는 하등품이던데 그정도란 말인가…….’
향기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오메가다. 오랜 훈련에도 타고난 뼈대는 오메가 티를 낸다지만 그게 전부 아니던가. 한 나라의 왕자쯤 되면 더 아름답고 형질도 좋은 오메가를 옆에 앉히는 건 일도 아니다. 상성이라는 게 무조건 형질이 우세하다고 다 들어맞는 것도 아니라지만. 알파든 오메가든 성적인 끌림에 우위를 차지할 수는 있어도 최고의 상성을 만드는 건 교감이라는 거다.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이런 의미에서 로우는 얼마든지 더 나은 상대를 고를 수 있건만 조로로 만족하는 듯했다. 그리고 여전히 과거에 얽매인 도플라밍고는 로시난테의 다정한 성정을 그대로 이어받은 로우가 싫지 않았다. 저희 두 사람은 로시를, 코라손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공범이지만 동시에 로우는 그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와도 같았으니까. 로우가 아니었다면 동생은 온몸이 썪어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억지웃음이나마 짓지 않았을 것이고 이년이나 미련스레 삶에 집착하지 않았을 테다. 도플라밍고는 다 알고 있다. 사랑스런 동생이 무슨 심정으로 지옥같은 날들을 버텼는지.
마물에게 기어코 다리가 뜯긴 로시난테를 보며 어린 녀석은 온종일 울었더랬다. 로시난테는 다른 두 사람이 마리조아 병사들을 피해 플레반스를 탈출하는 동안 로우가 마음 편히 울도록 주변 소리를 차단했다. 고요고요 열매를 먹은 그의 능력은 더불어 이쪽의 소리를 전부 없애줘서 마리조아 군의 지척에서도 움직임이 수월했다. 그렇게 네 사람은 눈보라가 몰아치던 설산을 빠져나왔다.
항해 오일째 늦은 밤, 방에 갇혀 있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더는 갑갑해서 못 버티겠다 싶은 조로가 선언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뭐?”
“지금 시간이면 밖에 다니는 사람도 얼마 없겠지. 바람만 쐐고 올게.”
왕자로서 책무를 다하던 로우는 오늘 유독 늦게서야 방에 돌아왔다. 마의 지대에서는 외부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일을 몰아치듯 했기 때문이다. 왕과 왕자 모두 자리를 비운 동안 도플라밍고의 충신인 베르고가 행정업무를 도맡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왕자의 인가를 기다리는 서류더미는 한가득이었고. 스물이 넘어가자 대놓고 일을 떠넘기던 도플라밍고에 왕자가 멀쩡한 왕을 두고 대리청정을 하게 된 것도 벌써 몇해였다. 그럼에도 귀족들이 반발하지 못했던 것 또한 천야차 돈키호테 국왕이 건재한 덕분이었지만. 덕분에 로우의 온건한 정책들이 하나씩 무사안착한 나라는 귀족의 고혈을 짜내서 국민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그러니 왕과 왕자는 드레스로자 국민들에게만큼은 인기가 높을 수밖에. 애당초 숙부의 목을 베고 왕좌를 되찾은 열일곱 왕이 순순히 귀족들을 봐준 게 아니었다. 이때 호의호식하던 놈들은 하나같이 숙부에게 아첨하고 제 가족을 사지로 내몬 자들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씨가 마르도록 왕족 모두를 처형대로 보낸 천야차가 온전히 귀족들을 살려둔 것 서서히 고혈을 빨아내 말려죽이려는 심산이었다는 걸 이들은 너무 늦게 알았다. 젊은 왕의 공포를 수년에 걸쳐 뼈저리게 느낀 이들이 지금에 와서 도망치거나 반기를 들기란 어려웠고 말이다. 그 결과 순풍에 돛단듯 일이 몰아쳤던 로우는 마침 외부 통신이 연결된 오후부터 왕의 서재에 박혀 나오지 못한 참이다. 하니 자정이 다 돼서 돌아온 그는 폭풍우 치는 이 밤에 조로를 품에 안고 잠들 생각뿐이었다.
“아니, 잠깐……!”
너 없으면 나도 못 자는데. 나 잠들면 나가든가. 로우는 순간적으로 머리속에 뱅글뱅글 돌던 말을 간신히 삼켰다. 그러느라 커다란 녹색 스카프를 챙겨들고 나서던 조로를 잡지 못했다.
아무리 큰 배라도 한정된 공간의 오밀조밀함은 피할 수 없음이다. 그리고 조로는 얼마 가지 못하고 길을 잃었다. 비에 폭삭 젖더라도 갑판에 나가려 했건만 그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갈수록 창문도 사라지는 것이 헤매고 또 헤매다 보니 웅웅 울어대는 소리만 가득한 기계실이었다. 특유의 기름 냄새와 열기가 펄펄 끓던 자리에 서있기도 잠시, 검은 때가 잔뜩 묻은 남자 하나가 어느새 조로의 어깨를 툭 쳤다.
“뭐야, 신참인가? 왜 그러고 섰어? 빨리 이리 와. 안 그래도 지금 기계 하나가 맛이 가기 직전이라 손이 열개라도 부족하다고!”
배의 최하층에 자리한 기계실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미로처럼 복잡하고 비좁은 길을 지나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만 한 철제 사다리를 밟고 내려와야 하는 이곳에 낯선 사내가 서있다는 건 당연히 신참일 수밖에. 턱수염이 덥수룩한 고참은 신체 건장한 녹색머리 사내를 보며 이번에는 오래 버티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멀끔한 행색은 기계 하나가 터지기 직전이라 쉬는 놈을 급히 불러냈구나 여길 뿐이고. 그래도 일이 일이니만큼 하나같이 체격 좋은 놈들 사이에서 제법 얄쌍한 녀석이 들어와 다행이었다. 쓸데없이 체격만 큰 놈들은 앞으로 할 일에 별반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까.
“읏? 이게 뭐…….”
“전원은 내렸어도 아직 엄청 뜨거울 테니 살이 안 닿게 조심하라고. 뭐해? 어서 들어가지 않고?”
작업 반장인 듯한 남자가 거대한 기계 앞에서 조로에게 대뜸 물 한동이를 끼얹더니 마스크와 삽을 준다. 그리고는 버튼을 눌러 기계 입구를 여니 안쪽에 자잘한 쓰레기며 찌꺼기들이 기름 범벅으로 쌓여 있었다. 이것들은 기계 안쪽의 부서진 여과기를 통해 들어온 모양이었다.
“이것들 때문에 연료가 순환을 못하잖아. 어서 치우도록 해. 여기서 한 대만 더 멈춰도 당장 배가 서야 할 판이니까. 폭풍 때문에 다들 일손이 부족해서 도와줄 사람은 없다, 신입. 그러니 다 치우면 날 찾아오도록 해. 기계 청소반은 따로 있으니까.”
“…이것들만 치우면 되나?”
이곳은 거대한 기계실로 복층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때문에 고참은 벽을 따라 둘러진 난간을 가리키며 제가 거기 어딘가 있을 거라 알린 뒤 돌아섰다. 그에 들고 있던 삽을 물끄러미 보던 조로가 묻자 남자는 열심히 해보라는 양 씩 웃었다.
“잘해보라고, 신참. 일을 다 끝내면 내가 꿍쳐둔 보드카 한잔 줄 테니까.”
남자가 아기마냥 매끈한 얼굴의 신참을 향해 놀리듯 말했다. 그순간 삽을 움켜쥔 조로 역시 입끝을 비틀었고 남자는 만만치 않은 녀석이 들어왔구나 생각했다.
“그 제안, 받아주지.”
녹색머리 신참이 기세 좋게 하는 말에 남자가 껄껄 웃었다. 어디 한번 잘해보라며 머리 위로 손을 휘적이던 남자가 멀어질 때, 조로 역시 후텁지근한 기계실 안으로 들어갔다. 산처럼 쌓인 폐찌꺼기 앞에 선 그의 두 눈이 어느 때보다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밤새 기다리던 로우가 능력을 쓴 시간은 새볔 동이 틀 때였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마의 지대는 해도 거의 들지 않았지만. 그리고 조로는 마침 원통형으로 된 내부의 폐쓰레기를 다 치운 참이었다.
“좋은 아침ㅡ! 로우 왕자? 얼굴이…….”
“내 얼굴이 뭐! 에이스 중령!”
시간을 알기 힘든 날씨일수록 규칙적인 생활이 중요했다. 마의 지대에서부터 이 배에 동행한 군의관의 잔소리에 아침 식사를 하러 온 에이스가 로우를 보고 움찔한다. 겁 많고 부끄럼도 많이 타는 군의관은 왕과 겸상하는 자리는 체할 것 같다며 선원들 식당으로 빠졌고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에이스는 염탐 겸 더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왕과의 겸상을 반길 정도다. 같은 맥락으로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올 듯하던 로우 왕자에 잠시 멈칫한 그의 입은 거침없었다.
“벌써 사랑싸움입니까?”
“누가ㅡ!!!”
“신부님이랑 사이 좋으시네요. 정략혼은 대개 무늬만 부부처럼 보이던데 왕자님은 사랑싸움도 하시고.”
에이스가 빈 자리에 앉으며 여상히 하는 말에 얼굴이 새빨개진 로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누가 봐도 사랑싸움을 한 얼굴이다. 덕분에 앞서 젊은 왕에게 된통 말렸던지라 로우는 더 대꾸하길 거부했다. 세번째로 나타난 로우에 크로커다일마저 시가를 빼들고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지 않았나. 그러다 씩 웃어보인 젊은 왕이 본격적으로 입을 털어대는 통에 로우가 식탁을 뒤집어엎기 직전까지 갔었다. 에이스가 나타난 게 딱 그때쯤이었으니 이제 크로커다일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시가만 뻑뻑 피워댔다. 산해진미가 올라온 식탁 위에서 마음 편히 식사하는 건 끝과 끝에 앉은 젊은 왕과 에이스뿐이었다.
“왕자님, 신부님께서 통 식사하러 오지 않으시던데 혹시 저 때문인가요?”
“그놈… 그 사람은 자고 있는 것뿐이야. 그러니 중령은 신경쓸 것 없어.”
에이스의 말에 새벽 일이 떠오른 로우가 쓰린 속을 부여잡으며 긴 숨을 쉬었다. 어지간해서는 입맛이 안 돌아도 먹는 편인데 오늘은 정말 한 술 뜨는 것도 힘이 든다. 실컨 놀려먹을 때는 언제고 주방장에게 주먹밥과 생선구이까지 대령하게 한 도플라밍고인데 말이다. 마치 그만을 위한 특식이라는 양 갓 지어진 밥에 갓 구워 노릇노릇한 생선이 올라왔지만 로우는 그것을 들고 정말 억지로 씹고 있었다. 남의 속을 뒤집어놓은 검사 놈은 피곤하다며 소파에 구겨져 자는 중이다.
‘무신경한 놈 같으니라고. 밤새 사라져서는 기름 때가 절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왜 불렀냐고?’
그나마 마의 지대를 지나고 있은 덕에 조로가 도망치지 못할 거라는 게 밤새 로우를 위안삼게 한 유일한 것이었다. 그런데 몇시간을 끙끙대게 만든 놈을 불러다놓으니 왜 찾았느냐며 인상을 썼더라지. 조로는 로우가 제멋대로 능력을 써서 불러다놓은 게 불만이라고 했다. 고참 아저씨에게 일을 끝냈다는 얘기도 해야 한댔고. 그러나 제가 간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던 이가 다시 그곳을 찾기란 요원해서 조로는 로우에게 원래 자리로 돌려놓으란 말을 했다. 이는 밤새 전전긍긍하며 기다린 로우가 조로를 보자마자 들은 말이다. 그 무신경함에 폭발해버린 로우가 언성을 높인 건 당연했고.
‘롤로노아야! 건방지게 굴지 마라! 여기서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허락한 것뿐이야! 그리고 이따위 더러운 건 왜 들고 있는 거냐!’
동시에 손가락 세개를 펴 능력을 사용한 로우에 조로가 들고 있던 삽이 사라졌다. 물론 삽은 제자리로 얌전히 돌아갔지만 조로는 정말 화가 났다. 일하는 동안 머리에 둘러쓴 녹색 천을 벗겨낸 조로의 눈빛이 전에 없이 사나웠으나 차게 내려앉은 시선의 로우도 만만찮았다. 대치하듯 선 둘 사이 팽팽한 적막을 깬 건 조로였다.
‘그 삽, 빌린 거다.’
‘…뭐?’
‘그러니 제대로 돌려놨겠지?’
‘그, 그래.’
로우는 이제 또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다. 또 무슨 말로 사람 속을 뒤집어놓으려나. 피곤에 지친 몸으로 밤새 감감무소식인 놈을 걱정하느라 속이 타들어간 이는 로우였다. 그런데 여태 미안하단 말은커녕 도리어 걱정시킨 놈이 화를 내는 상황 아니던가. 뿐이랴, 뭘 어떻게 하면 기름 때 범벅으로 삽을 들고 나타난단 말인가. 살면서 도플라밍고와는 다른 결로 속 터지게 하는 사람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 못한지라 로우도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이다음에 조로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씻는다.’
‘뭐?’
‘씻는 것도 네 허락을 받을까?’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 조로가 말했다. 역시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로우가 침묵하니 조로는 시위하듯 셔츠를 벗어던졌다. 몇시간을 찜통같은 더위에서 땀흘리며 삽질한 몸에 땀이 흘러내렸다. 잘 다듬어진 조각과도 같던 몸은 곳곳이 크고 작은 흉터로 가득했지만 아름다웠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는 윤기가 흘렀고 검을 잡기 위해 다듬어진 상반식은 근육으로 이뤄진 곡선의 향연이었다. 그럼에도 저 몸이 제 품에 착 감긴다는 걸 로우는 익히 알고 있었다. 저 품이 얼마나 보드랍고 따뜻한지도. 그래서 로우는 저를 사납게 노려봐준 뒤 돌아서던 조로에도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갖고 싶다. 저 육신이 주는 다정한 온기는 폭풍우치는 밤의 악몽도 잊게 해준다. 저 품에서라면 자신은 어떤 밤도 단꿈에 젖을 것이다. 로우는 괴롭고 아프고 처절하게 슬프기만 한 악몽에 더이상 떨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그 꿈에 자신이 먹혀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로우가 아침 식사 중에 에이스로부터 들은 정보가 있다면 클라바우터만이다.
“오다가 선원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 배에 정말 클라바우터만이 있나요? 녹색 요정이 지난밤에 나타나서 일만 하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던데. 한 남자가 신참을 찾으러 간 자리에 녹색 스카프만 남아있었다는 얘길 하더라고요. 크로커다일 경, 혹시 당신은 본 적 있어?”
“글쎄, 난…….”
“중령, 자네는 내 사람과 꽤 친근하게 얘기하는군.”
에이스가 크로커다일에게 물었지만 젊은 왕이 끼어들었다. 해군 중령이라면 왕의 측근과 말할 기회가 더 많은 게 당연할진대 젊은 왕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업무상 얘기일 뿐인데도 거슬리는 모양이다. 이는 특히 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반응으로 크로커다일은 젊은 왕의 예민한 반응이 귀찮아 알아서 조심했다. 다만 이번은 왕이 함께한 배라는 특이점이 아무리 조심해도 눈에 띈다는 함정을 만들었을 뿐. 덕분에 젊은 왕의 한마디는 맹수가 대놓고 발톱을 드러낸 격이었다. 문제는 에이스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었고.
“배를 수호하는 요정에 관해서라면 이쪽이 더 잘 알 것 같아서요, 폐하. 크로커다일 경의 정보력은 저희 해군에서도 혀를 내두르잖습니까. 저 역시 경이 탐날 정도라니까요.”
“아아, 그래? 중령 자네가 그정도로 내 사람을 마음에 들어할 줄은 몰랐는데.”
“저뿐인가요? 누구라도 탐낼 인재인데요. 사카즈키 대장은 지금도 크로커다일 경을 대놓고 탐내지 않습니까? 그사람 일처리가 워낙 완벽해서 도통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는데 그 야박하신 분이 크로커다일 경은 칭찬하시더군요. 저도 듣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코드네임 아카이누라 불리는 사카즈키 대장과 크로커다일을 엮어서 말하는 건 불문율이다. 도플라밍고 앞에서. 과거 그가 왕좌를 되찾고 왕권을 공고히할 때까지 수면 위로 올라와 가장 큰 활약을 한 건 크로커다일이었다. 또 다른 반정공신인 베르고가 내실을 다졌다면 크로커다일은 세계 각지에 뻗은 정보력으로 도플라밍고가 몇수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했다. 그로인해 드레스로자의 귀족들은 저희들이 개미지옥에 빠진 줄도 모르고 빨려들어간 것 아닌가. 이 과정에서 부러 빌미를 줘 귀족들이 반기를 들게 한 것은 젊은 왕의 계략이었다. 반정군을 완전히 묵사발내는 걸 보여줌으로써 다른 귀족들이 고개도 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으니. 그러나 양측 모두 목숨을 건 싸움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한 건 크로커다일의 정보력과 베르고처럼 어떤 불리한 전세에도 목숨 걸고 돌격하던 공신들이 있은 덕분이다. 때문에 젊은 왕은 저와 함께한 공신들을 절대 잊지 않았고 이들이 부리는 횡포만큼은 눈 감아줄 정도였다. 이를 묵과하지 않는 건 로우였고 말이다. 그러나 젊은 왕의 최측근이랄 수 있는 크로커다일과 베르고가 왕자의 편에 서니 현재는 공신들의 횡포도 기강이 잡힌 상태였다. 이래봬도 그는 고작 십대에 위세가 기고만장하던 공신들 앞에서 눈 하나 깜짝 않던 인물이다. 그 위아래 없는 성격만큼은 내내 젊은 왕의 자식입네 아니네 하는 꼬리표가 따라붙던 로우를 왕의 씨가 맞다는 쪽이 우세하게 만들었고. 다들 저 지독한 성질머리는 같은 유전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한데 그 한성질하는 왕자가 지난 새벽 시위하듯 소파에서 잠든 녹색머리 검사로 인해 인생 최대 난관에 부딪혔다. 덕분에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도 아랑곳 않던 그는 제 할 말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정은 무슨. 이런 배에 그딴 건 없어!”
클라바우터만이 다 얼어죽었나. 조로를 두고 멋대로 떠드는 선원들도 로우는 다 거슬린다. 삼인용 소파에 몸을 움츠리고 쿨쿨 잘만 자는 녀석을 침대 발치에 앉아 지켜보기만 한 그 자신도. 덕분에 밤을 꼬박 세운 로우는 그럼에도 조로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그 점이 로우는 제일 화가 났고 말이다.
향을 풀어볼까. 이러는 자신이 얼마나 치졸한지 알지만 로우는 궁지에 몰렸다. 어쩌면 지난번은 너무 개방된 공간이라 조로가 멀쩡했던 거라고 억지까지 부릴 정도로. 조로처럼 약한 형질이라면 로우의 페로몬에 이성을 잃고 달려들어야 했다. 이건 본능이었다. 로우의 향은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일반인들조차 본능적으로 호감을 가질 저도였으니. 이뿐 아니다. 직접 말하기 뭐하지만 그의 향은 같은 알파조차 향기롭다고 언급할 정도다. 줏대없는 하반신의 소유자인 도플라밍고는 로우가 첫 알파의 발정기를 겪을 때 한번 해보자고 덮쳐왔을 정도니까. 그러나 알파의 경우 형질이 강할수록 타고난 신체기능이 우월한만큼 러트 시기의 흉폭함도 배가 된다. 덕분에 공격 의사가 없던 도플라밍고는 로우의 첫러트에 흠씬 두들겨맞고 쫓겨나야 했다. 그렇게 맞고 나와서도 잘 컸다며 흐뭇해하던 이를 크로커다일은 경멸하듯 봤고 말이다. 그는 로우가 도플라밍고의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직접 서류 조작을 한 이였으니 둘 사이가 생판 남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대외적으로 아들의 첫 발정기에 달려들던 아비를 도저히 제정신으로 보기 어려웠다. 상대는 도리어 그 경멸하는 시선에 입맛을 다시며 크로커다일을 제 침대로 끌고 갔다지만. 덕분에 러트 중도 아닌데 며칠을 침대에서 나오지 않던 젊은 왕 대신 국정을 처리한 건 베르고였다. 덩달아 혼자 러트를 견딘 덕에 기진맥진해져 나온 로우는 왕 대신 베르고에게 끌려가 대신 옥쇄를 찍는 작업을 했고. 그래서 이때쯤의 로우는 도플라밍고가 저를 부려먹으려고 왕자 자리에 앉혔을 거라 확신했었다. 실로 도플라밍고는 의사 출신의 부모를 닮은 로우의 명석함을 높이 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사람을 다루는 데도 능숙했던 로우에게 조로는 정말 알 수 없는 종류였다. 그는 친구나 동료도 아니었고 군신관계나 적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로우가 이런 생각으로 어떻게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며 방에 다다른 순간이다. 뭔가 거대한 것이 배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차례 큰 진동이 느껴졌다. 이를 감지한 듯 문이 열리니 조로와 로우가 마주봤다. 그 뒤로 비치는 창가에서는 때맞춰 번개가 연달아 내리치는 게 마치 지옥이 하늘에서 강림하는 모습이었다.
“왕자…….”
“저런 번개 속이라면 넌 나와봐야 위험하기만 해! 그러니 조로야 넌 방에 얌전히 있어! 알겠지?”
로우가 조로의 양팔을 붙들고 다급히 말했다. 또 한차례 배의 후미에서 거대한 뭔가가 부딪히는 게 느껴지고 갑판이 소란스러웠다. 바로 머리 위에서 울려대는 발소리에 둘의 시선이 힐끗 돌아간 뒤 다시 마주쳤다. 손짓으로 귀곡을 불러낸 로우는 상대의 미간이 구겨지는 걸 내려다보고는 그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몸에서 한순간 힘이 풀리는 게 느껴짐에 로우의 굳은 입매도 슬쩍 미소가 그려졌다.
“금방 다녀올게. 나머지는 갔다와서 얘기하자, 조로야.”
꽉 끌어안은 몸과 떨어지는 게 아쉬웠지만 로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대신 로우는 조로의 이마에 깊게 입술을 묻고 뛰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조로 역시 심란한 표정으로 이마를 매만질 뿐이었다. 사방에 검은 구름이 몰려든 하늘에서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조각
읽어줘서 정말 고마워!!!
어깨띠의 폭약은 줄 하나로 전부 연결돼 있다. 로우가 손가락에 건 줄만 당기면 단숨에 전부 터질테고 저 작은 몸은 육신이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로시난테는 제 형이 가져온 폭약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봤다. 때문에 그는 제게서 도망쳐 폭약을 터뜨릴 궁리만 하던 아이를 놓칠 수 없었다. 더 안쪽으로 도망치듯 숨은 놈의 얼굴이 이질적이게도 어린 여자아이였던 걸 봤기 때문이다. 라미. 로우가 그 얼굴을 보고 동생의 이름을 불렀으니까. 이것만으로 상황을 추측한 로시난테는 로우가 노리는 게 동생의 얼굴을 한 괴물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저 아이가 적어도 자신만은 죽지 않도록 폭약 줄을 당기지 않는다는 것 또한. 때문에 로시난테는 놈들을 사이에 두고 나타난 제 형과 크로커다일에 아이가 눈을 뺏긴 순간을 놓칠 수 없었다. 놈들에게서 등을 돌리면 위험해질 걸 알면서도.
‘안 돼ㅡ!!!’
‘…괜찮아. 그냥 좀 물린 것뿐이야.’
아이를 감싸듯 끌어안던 품은 손 하나도 까딱하지 못하게 했다. 동시에 뒤에서부터 몰아치던 도플라밍고와 크로커다일에 놈들의 주의가 돌아갔지만 문제는 이미 로시난테가 처리해 쓰러진 몇몇이었다. 로우는 몸에서 머리를 완전히 분리하라고 했지만 전부 깔끔히 도려내질 못한 모양이다. 바닥을 기어온 한 녀석이 로시난테의 다리를 물어뜯었다. 톱니바퀴처럼 날카로운 이빨에 크게 떨어져나간 살점에서 흐른 피가 눈을 녹였다. 순식간에 웅덩이처럼 패인 눈구덩이를 보며 로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로시난테는 와중에도 아이에게서 폭약띠를 떼어내 멀리 던져버렸다.
‘내가… 내가 입을 조심하랬잖아! 물리지만 말라고…… 으아아앙!’
‘그래, 내가 미안해. 네가 애써 말해줬는데 결국 물렸네.’
‘로시! 너 괜찮냐?!’
‘도피! 녀석들 이빨에 독이 있으니 절대 물리지 말고 머리를 자르래! 그래야 놈들이 죽는대! 이 애가 알려줬어!’
로시난테는 펑펑 우는 아이가 더이상 끔찍한 것들을 보지 못하게 머리까지 완전히 품에 감싸 안아줬다. 로우는 포근한 검은 날개가 저를 감싸는 것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귀신이 흐느끼는 것 같던 바람 소리도, 서걱이며 목이 잘리는 소리도, 끔찍한 놈들의 비명까지도 모조리 사라지고 고요해진 세상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악몽조차 꾸지 않은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헉! …허억… 허억…….”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서재 책상에 앉아 잠시 눈을 붙인 도플라밍고가 깨어났다. 마의 지대로 들어선 뒤 내내 귀를 때리는 천둥 소리와 귀신이 곡하는 양 울어대는 바람이 악몽의 원인일 터다. 이런 날씨는 눈보라치던 설산에서 마물이 내던 기괴한 비명소리를 떠올리게 했으니. 크로커다일에게 제가 떠난 뒤 취합한 알라바스타 정세를 전달받아 보던 중인 도플라밍고는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은땀이 범벅인 얼굴을 한차례 손으로 쓸던 그가 좁은 창너머로 번쩍이는 번개를 바라봤다.
“아직 밤인가… 로우 그녀석도 잠을 설치겠군.”
마의 지대로 들어선 뒤 시간은 지긋지긋하게도 더디게 흐른다. 그리고 도플라밍고는 저와 같은 지옥을 건너온 로우가 똑같은 악몽을 꾸고 밤새 잠 못 이룰 것이라 생각했다. 하니 이런 밤이면 직접 등장해 현실이 더 뭣같음을 알려줘야 할 그였지만 도플라밍고도 오늘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 역시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늘같은 밤은.
항해 사일차, 로우도 당연히 저처럼 밤새 잠 못 이루고 끙끙댄 몰골을 예상했던 도플라밍고는 왠지 재미가 없어졌다. 아침에 나타난 로우는 눈밑이 다소 퀭하기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만족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오메가로서는 하등품이던데 그정도란 말인가…….’
향기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오메가다. 오랜 훈련에도 타고난 뼈대는 오메가 티를 낸다지만 그게 전부 아니던가. 한 나라의 왕자쯤 되면 더 아름답고 형질도 좋은 오메가를 옆에 앉히는 건 일도 아니다. 상성이라는 게 무조건 형질이 우세하다고 다 들어맞는 것도 아니라지만. 알파든 오메가든 성적인 끌림에 우위를 차지할 수는 있어도 최고의 상성을 만드는 건 교감이라는 거다.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이런 의미에서 로우는 얼마든지 더 나은 상대를 고를 수 있건만 조로로 만족하는 듯했다. 그리고 여전히 과거에 얽매인 도플라밍고는 로시난테의 다정한 성정을 그대로 이어받은 로우가 싫지 않았다. 저희 두 사람은 로시를, 코라손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공범이지만 동시에 로우는 그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와도 같았으니까. 로우가 아니었다면 동생은 온몸이 썪어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억지웃음이나마 짓지 않았을 것이고 이년이나 미련스레 삶에 집착하지 않았을 테다. 도플라밍고는 다 알고 있다. 사랑스런 동생이 무슨 심정으로 지옥같은 날들을 버텼는지.
마물에게 기어코 다리가 뜯긴 로시난테를 보며 어린 녀석은 온종일 울었더랬다. 로시난테는 다른 두 사람이 마리조아 병사들을 피해 플레반스를 탈출하는 동안 로우가 마음 편히 울도록 주변 소리를 차단했다. 고요고요 열매를 먹은 그의 능력은 더불어 이쪽의 소리를 전부 없애줘서 마리조아 군의 지척에서도 움직임이 수월했다. 그렇게 네 사람은 눈보라가 몰아치던 설산을 빠져나왔다.
항해 오일째 늦은 밤, 방에 갇혀 있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더는 갑갑해서 못 버티겠다 싶은 조로가 선언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뭐?”
“지금 시간이면 밖에 다니는 사람도 얼마 없겠지. 바람만 쐐고 올게.”
왕자로서 책무를 다하던 로우는 오늘 유독 늦게서야 방에 돌아왔다. 마의 지대에서는 외부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일을 몰아치듯 했기 때문이다. 왕과 왕자 모두 자리를 비운 동안 도플라밍고의 충신인 베르고가 행정업무를 도맡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왕자의 인가를 기다리는 서류더미는 한가득이었고. 스물이 넘어가자 대놓고 일을 떠넘기던 도플라밍고에 왕자가 멀쩡한 왕을 두고 대리청정을 하게 된 것도 벌써 몇해였다. 그럼에도 귀족들이 반발하지 못했던 것 또한 천야차 돈키호테 국왕이 건재한 덕분이었지만. 덕분에 로우의 온건한 정책들이 하나씩 무사안착한 나라는 귀족의 고혈을 짜내서 국민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그러니 왕과 왕자는 드레스로자 국민들에게만큼은 인기가 높을 수밖에. 애당초 숙부의 목을 베고 왕좌를 되찾은 열일곱 왕이 순순히 귀족들을 봐준 게 아니었다. 이때 호의호식하던 놈들은 하나같이 숙부에게 아첨하고 제 가족을 사지로 내몬 자들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씨가 마르도록 왕족 모두를 처형대로 보낸 천야차가 온전히 귀족들을 살려둔 것 서서히 고혈을 빨아내 말려죽이려는 심산이었다는 걸 이들은 너무 늦게 알았다. 젊은 왕의 공포를 수년에 걸쳐 뼈저리게 느낀 이들이 지금에 와서 도망치거나 반기를 들기란 어려웠고 말이다. 그 결과 순풍에 돛단듯 일이 몰아쳤던 로우는 마침 외부 통신이 연결된 오후부터 왕의 서재에 박혀 나오지 못한 참이다. 하니 자정이 다 돼서 돌아온 그는 폭풍우 치는 이 밤에 조로를 품에 안고 잠들 생각뿐이었다.
“아니, 잠깐……!”
너 없으면 나도 못 자는데. 나 잠들면 나가든가. 로우는 순간적으로 머리속에 뱅글뱅글 돌던 말을 간신히 삼켰다. 그러느라 커다란 녹색 스카프를 챙겨들고 나서던 조로를 잡지 못했다.
아무리 큰 배라도 한정된 공간의 오밀조밀함은 피할 수 없음이다. 그리고 조로는 얼마 가지 못하고 길을 잃었다. 비에 폭삭 젖더라도 갑판에 나가려 했건만 그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갈수록 창문도 사라지는 것이 헤매고 또 헤매다 보니 웅웅 울어대는 소리만 가득한 기계실이었다. 특유의 기름 냄새와 열기가 펄펄 끓던 자리에 서있기도 잠시, 검은 때가 잔뜩 묻은 남자 하나가 어느새 조로의 어깨를 툭 쳤다.
“뭐야, 신참인가? 왜 그러고 섰어? 빨리 이리 와. 안 그래도 지금 기계 하나가 맛이 가기 직전이라 손이 열개라도 부족하다고!”
배의 최하층에 자리한 기계실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미로처럼 복잡하고 비좁은 길을 지나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만 한 철제 사다리를 밟고 내려와야 하는 이곳에 낯선 사내가 서있다는 건 당연히 신참일 수밖에. 턱수염이 덥수룩한 고참은 신체 건장한 녹색머리 사내를 보며 이번에는 오래 버티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멀끔한 행색은 기계 하나가 터지기 직전이라 쉬는 놈을 급히 불러냈구나 여길 뿐이고. 그래도 일이 일이니만큼 하나같이 체격 좋은 놈들 사이에서 제법 얄쌍한 녀석이 들어와 다행이었다. 쓸데없이 체격만 큰 놈들은 앞으로 할 일에 별반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까.
“읏? 이게 뭐…….”
“전원은 내렸어도 아직 엄청 뜨거울 테니 살이 안 닿게 조심하라고. 뭐해? 어서 들어가지 않고?”
작업 반장인 듯한 남자가 거대한 기계 앞에서 조로에게 대뜸 물 한동이를 끼얹더니 마스크와 삽을 준다. 그리고는 버튼을 눌러 기계 입구를 여니 안쪽에 자잘한 쓰레기며 찌꺼기들이 기름 범벅으로 쌓여 있었다. 이것들은 기계 안쪽의 부서진 여과기를 통해 들어온 모양이었다.
“이것들 때문에 연료가 순환을 못하잖아. 어서 치우도록 해. 여기서 한 대만 더 멈춰도 당장 배가 서야 할 판이니까. 폭풍 때문에 다들 일손이 부족해서 도와줄 사람은 없다, 신입. 그러니 다 치우면 날 찾아오도록 해. 기계 청소반은 따로 있으니까.”
“…이것들만 치우면 되나?”
이곳은 거대한 기계실로 복층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때문에 고참은 벽을 따라 둘러진 난간을 가리키며 제가 거기 어딘가 있을 거라 알린 뒤 돌아섰다. 그에 들고 있던 삽을 물끄러미 보던 조로가 묻자 남자는 열심히 해보라는 양 씩 웃었다.
“잘해보라고, 신참. 일을 다 끝내면 내가 꿍쳐둔 보드카 한잔 줄 테니까.”
남자가 아기마냥 매끈한 얼굴의 신참을 향해 놀리듯 말했다. 그순간 삽을 움켜쥔 조로 역시 입끝을 비틀었고 남자는 만만치 않은 녀석이 들어왔구나 생각했다.
“그 제안, 받아주지.”
녹색머리 신참이 기세 좋게 하는 말에 남자가 껄껄 웃었다. 어디 한번 잘해보라며 머리 위로 손을 휘적이던 남자가 멀어질 때, 조로 역시 후텁지근한 기계실 안으로 들어갔다. 산처럼 쌓인 폐찌꺼기 앞에 선 그의 두 눈이 어느 때보다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밤새 기다리던 로우가 능력을 쓴 시간은 새볔 동이 틀 때였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마의 지대는 해도 거의 들지 않았지만. 그리고 조로는 마침 원통형으로 된 내부의 폐쓰레기를 다 치운 참이었다.
“좋은 아침ㅡ! 로우 왕자? 얼굴이…….”
“내 얼굴이 뭐! 에이스 중령!”
시간을 알기 힘든 날씨일수록 규칙적인 생활이 중요했다. 마의 지대에서부터 이 배에 동행한 군의관의 잔소리에 아침 식사를 하러 온 에이스가 로우를 보고 움찔한다. 겁 많고 부끄럼도 많이 타는 군의관은 왕과 겸상하는 자리는 체할 것 같다며 선원들 식당으로 빠졌고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에이스는 염탐 겸 더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왕과의 겸상을 반길 정도다. 같은 맥락으로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올 듯하던 로우 왕자에 잠시 멈칫한 그의 입은 거침없었다.
“벌써 사랑싸움입니까?”
“누가ㅡ!!!”
“신부님이랑 사이 좋으시네요. 정략혼은 대개 무늬만 부부처럼 보이던데 왕자님은 사랑싸움도 하시고.”
에이스가 빈 자리에 앉으며 여상히 하는 말에 얼굴이 새빨개진 로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누가 봐도 사랑싸움을 한 얼굴이다. 덕분에 앞서 젊은 왕에게 된통 말렸던지라 로우는 더 대꾸하길 거부했다. 세번째로 나타난 로우에 크로커다일마저 시가를 빼들고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지 않았나. 그러다 씩 웃어보인 젊은 왕이 본격적으로 입을 털어대는 통에 로우가 식탁을 뒤집어엎기 직전까지 갔었다. 에이스가 나타난 게 딱 그때쯤이었으니 이제 크로커다일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시가만 뻑뻑 피워댔다. 산해진미가 올라온 식탁 위에서 마음 편히 식사하는 건 끝과 끝에 앉은 젊은 왕과 에이스뿐이었다.
“왕자님, 신부님께서 통 식사하러 오지 않으시던데 혹시 저 때문인가요?”
“그놈… 그 사람은 자고 있는 것뿐이야. 그러니 중령은 신경쓸 것 없어.”
에이스의 말에 새벽 일이 떠오른 로우가 쓰린 속을 부여잡으며 긴 숨을 쉬었다. 어지간해서는 입맛이 안 돌아도 먹는 편인데 오늘은 정말 한 술 뜨는 것도 힘이 든다. 실컨 놀려먹을 때는 언제고 주방장에게 주먹밥과 생선구이까지 대령하게 한 도플라밍고인데 말이다. 마치 그만을 위한 특식이라는 양 갓 지어진 밥에 갓 구워 노릇노릇한 생선이 올라왔지만 로우는 그것을 들고 정말 억지로 씹고 있었다. 남의 속을 뒤집어놓은 검사 놈은 피곤하다며 소파에 구겨져 자는 중이다.
‘무신경한 놈 같으니라고. 밤새 사라져서는 기름 때가 절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왜 불렀냐고?’
그나마 마의 지대를 지나고 있은 덕에 조로가 도망치지 못할 거라는 게 밤새 로우를 위안삼게 한 유일한 것이었다. 그런데 몇시간을 끙끙대게 만든 놈을 불러다놓으니 왜 찾았느냐며 인상을 썼더라지. 조로는 로우가 제멋대로 능력을 써서 불러다놓은 게 불만이라고 했다. 고참 아저씨에게 일을 끝냈다는 얘기도 해야 한댔고. 그러나 제가 간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던 이가 다시 그곳을 찾기란 요원해서 조로는 로우에게 원래 자리로 돌려놓으란 말을 했다. 이는 밤새 전전긍긍하며 기다린 로우가 조로를 보자마자 들은 말이다. 그 무신경함에 폭발해버린 로우가 언성을 높인 건 당연했고.
‘롤로노아야! 건방지게 굴지 마라! 여기서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허락한 것뿐이야! 그리고 이따위 더러운 건 왜 들고 있는 거냐!’
동시에 손가락 세개를 펴 능력을 사용한 로우에 조로가 들고 있던 삽이 사라졌다. 물론 삽은 제자리로 얌전히 돌아갔지만 조로는 정말 화가 났다. 일하는 동안 머리에 둘러쓴 녹색 천을 벗겨낸 조로의 눈빛이 전에 없이 사나웠으나 차게 내려앉은 시선의 로우도 만만찮았다. 대치하듯 선 둘 사이 팽팽한 적막을 깬 건 조로였다.
‘그 삽, 빌린 거다.’
‘…뭐?’
‘그러니 제대로 돌려놨겠지?’
‘그, 그래.’
로우는 이제 또 상대가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다. 또 무슨 말로 사람 속을 뒤집어놓으려나. 피곤에 지친 몸으로 밤새 감감무소식인 놈을 걱정하느라 속이 타들어간 이는 로우였다. 그런데 여태 미안하단 말은커녕 도리어 걱정시킨 놈이 화를 내는 상황 아니던가. 뿐이랴, 뭘 어떻게 하면 기름 때 범벅으로 삽을 들고 나타난단 말인가. 살면서 도플라밍고와는 다른 결로 속 터지게 하는 사람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 못한지라 로우도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이다음에 조로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씻는다.’
‘뭐?’
‘씻는 것도 네 허락을 받을까?’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 조로가 말했다. 역시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로우가 침묵하니 조로는 시위하듯 셔츠를 벗어던졌다. 몇시간을 찜통같은 더위에서 땀흘리며 삽질한 몸에 땀이 흘러내렸다. 잘 다듬어진 조각과도 같던 몸은 곳곳이 크고 작은 흉터로 가득했지만 아름다웠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는 윤기가 흘렀고 검을 잡기 위해 다듬어진 상반식은 근육으로 이뤄진 곡선의 향연이었다. 그럼에도 저 몸이 제 품에 착 감긴다는 걸 로우는 익히 알고 있었다. 저 품이 얼마나 보드랍고 따뜻한지도. 그래서 로우는 저를 사납게 노려봐준 뒤 돌아서던 조로에도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갖고 싶다. 저 육신이 주는 다정한 온기는 폭풍우치는 밤의 악몽도 잊게 해준다. 저 품에서라면 자신은 어떤 밤도 단꿈에 젖을 것이다. 로우는 괴롭고 아프고 처절하게 슬프기만 한 악몽에 더이상 떨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그 꿈에 자신이 먹혀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로우가 아침 식사 중에 에이스로부터 들은 정보가 있다면 클라바우터만이다.
“오다가 선원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 배에 정말 클라바우터만이 있나요? 녹색 요정이 지난밤에 나타나서 일만 하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던데. 한 남자가 신참을 찾으러 간 자리에 녹색 스카프만 남아있었다는 얘길 하더라고요. 크로커다일 경, 혹시 당신은 본 적 있어?”
“글쎄, 난…….”
“중령, 자네는 내 사람과 꽤 친근하게 얘기하는군.”
에이스가 크로커다일에게 물었지만 젊은 왕이 끼어들었다. 해군 중령이라면 왕의 측근과 말할 기회가 더 많은 게 당연할진대 젊은 왕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업무상 얘기일 뿐인데도 거슬리는 모양이다. 이는 특히 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반응으로 크로커다일은 젊은 왕의 예민한 반응이 귀찮아 알아서 조심했다. 다만 이번은 왕이 함께한 배라는 특이점이 아무리 조심해도 눈에 띈다는 함정을 만들었을 뿐. 덕분에 젊은 왕의 한마디는 맹수가 대놓고 발톱을 드러낸 격이었다. 문제는 에이스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었고.
“배를 수호하는 요정에 관해서라면 이쪽이 더 잘 알 것 같아서요, 폐하. 크로커다일 경의 정보력은 저희 해군에서도 혀를 내두르잖습니까. 저 역시 경이 탐날 정도라니까요.”
“아아, 그래? 중령 자네가 그정도로 내 사람을 마음에 들어할 줄은 몰랐는데.”
“저뿐인가요? 누구라도 탐낼 인재인데요. 사카즈키 대장은 지금도 크로커다일 경을 대놓고 탐내지 않습니까? 그사람 일처리가 워낙 완벽해서 도통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는데 그 야박하신 분이 크로커다일 경은 칭찬하시더군요. 저도 듣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코드네임 아카이누라 불리는 사카즈키 대장과 크로커다일을 엮어서 말하는 건 불문율이다. 도플라밍고 앞에서. 과거 그가 왕좌를 되찾고 왕권을 공고히할 때까지 수면 위로 올라와 가장 큰 활약을 한 건 크로커다일이었다. 또 다른 반정공신인 베르고가 내실을 다졌다면 크로커다일은 세계 각지에 뻗은 정보력으로 도플라밍고가 몇수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했다. 그로인해 드레스로자의 귀족들은 저희들이 개미지옥에 빠진 줄도 모르고 빨려들어간 것 아닌가. 이 과정에서 부러 빌미를 줘 귀족들이 반기를 들게 한 것은 젊은 왕의 계략이었다. 반정군을 완전히 묵사발내는 걸 보여줌으로써 다른 귀족들이 고개도 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으니. 그러나 양측 모두 목숨을 건 싸움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한 건 크로커다일의 정보력과 베르고처럼 어떤 불리한 전세에도 목숨 걸고 돌격하던 공신들이 있은 덕분이다. 때문에 젊은 왕은 저와 함께한 공신들을 절대 잊지 않았고 이들이 부리는 횡포만큼은 눈 감아줄 정도였다. 이를 묵과하지 않는 건 로우였고 말이다. 그러나 젊은 왕의 최측근이랄 수 있는 크로커다일과 베르고가 왕자의 편에 서니 현재는 공신들의 횡포도 기강이 잡힌 상태였다. 이래봬도 그는 고작 십대에 위세가 기고만장하던 공신들 앞에서 눈 하나 깜짝 않던 인물이다. 그 위아래 없는 성격만큼은 내내 젊은 왕의 자식입네 아니네 하는 꼬리표가 따라붙던 로우를 왕의 씨가 맞다는 쪽이 우세하게 만들었고. 다들 저 지독한 성질머리는 같은 유전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한데 그 한성질하는 왕자가 지난 새벽 시위하듯 소파에서 잠든 녹색머리 검사로 인해 인생 최대 난관에 부딪혔다. 덕분에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도 아랑곳 않던 그는 제 할 말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정은 무슨. 이런 배에 그딴 건 없어!”
클라바우터만이 다 얼어죽었나. 조로를 두고 멋대로 떠드는 선원들도 로우는 다 거슬린다. 삼인용 소파에 몸을 움츠리고 쿨쿨 잘만 자는 녀석을 침대 발치에 앉아 지켜보기만 한 그 자신도. 덕분에 밤을 꼬박 세운 로우는 그럼에도 조로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그 점이 로우는 제일 화가 났고 말이다.
향을 풀어볼까. 이러는 자신이 얼마나 치졸한지 알지만 로우는 궁지에 몰렸다. 어쩌면 지난번은 너무 개방된 공간이라 조로가 멀쩡했던 거라고 억지까지 부릴 정도로. 조로처럼 약한 형질이라면 로우의 페로몬에 이성을 잃고 달려들어야 했다. 이건 본능이었다. 로우의 향은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일반인들조차 본능적으로 호감을 가질 저도였으니. 이뿐 아니다. 직접 말하기 뭐하지만 그의 향은 같은 알파조차 향기롭다고 언급할 정도다. 줏대없는 하반신의 소유자인 도플라밍고는 로우가 첫 알파의 발정기를 겪을 때 한번 해보자고 덮쳐왔을 정도니까. 그러나 알파의 경우 형질이 강할수록 타고난 신체기능이 우월한만큼 러트 시기의 흉폭함도 배가 된다. 덕분에 공격 의사가 없던 도플라밍고는 로우의 첫러트에 흠씬 두들겨맞고 쫓겨나야 했다. 그렇게 맞고 나와서도 잘 컸다며 흐뭇해하던 이를 크로커다일은 경멸하듯 봤고 말이다. 그는 로우가 도플라밍고의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직접 서류 조작을 한 이였으니 둘 사이가 생판 남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대외적으로 아들의 첫 발정기에 달려들던 아비를 도저히 제정신으로 보기 어려웠다. 상대는 도리어 그 경멸하는 시선에 입맛을 다시며 크로커다일을 제 침대로 끌고 갔다지만. 덕분에 러트 중도 아닌데 며칠을 침대에서 나오지 않던 젊은 왕 대신 국정을 처리한 건 베르고였다. 덩달아 혼자 러트를 견딘 덕에 기진맥진해져 나온 로우는 왕 대신 베르고에게 끌려가 대신 옥쇄를 찍는 작업을 했고. 그래서 이때쯤의 로우는 도플라밍고가 저를 부려먹으려고 왕자 자리에 앉혔을 거라 확신했었다. 실로 도플라밍고는 의사 출신의 부모를 닮은 로우의 명석함을 높이 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사람을 다루는 데도 능숙했던 로우에게 조로는 정말 알 수 없는 종류였다. 그는 친구나 동료도 아니었고 군신관계나 적은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로우가 이런 생각으로 어떻게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며 방에 다다른 순간이다. 뭔가 거대한 것이 배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차례 큰 진동이 느껴졌다. 이를 감지한 듯 문이 열리니 조로와 로우가 마주봤다. 그 뒤로 비치는 창가에서는 때맞춰 번개가 연달아 내리치는 게 마치 지옥이 하늘에서 강림하는 모습이었다.
“왕자…….”
“저런 번개 속이라면 넌 나와봐야 위험하기만 해! 그러니 조로야 넌 방에 얌전히 있어! 알겠지?”
로우가 조로의 양팔을 붙들고 다급히 말했다. 또 한차례 배의 후미에서 거대한 뭔가가 부딪히는 게 느껴지고 갑판이 소란스러웠다. 바로 머리 위에서 울려대는 발소리에 둘의 시선이 힐끗 돌아간 뒤 다시 마주쳤다. 손짓으로 귀곡을 불러낸 로우는 상대의 미간이 구겨지는 걸 내려다보고는 그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몸에서 한순간 힘이 풀리는 게 느껴짐에 로우의 굳은 입매도 슬쩍 미소가 그려졌다.
“금방 다녀올게. 나머지는 갔다와서 얘기하자, 조로야.”
꽉 끌어안은 몸과 떨어지는 게 아쉬웠지만 로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대신 로우는 조로의 이마에 깊게 입술을 묻고 뛰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조로 역시 심란한 표정으로 이마를 매만질 뿐이었다. 사방에 검은 구름이 몰려든 하늘에서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조각
읽어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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