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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0 19:13
* 새업
이어지는 전편 ; 프로포즈 갈기는 서태웅 https://hygall.com/528218589

약약 우명 요소 있음
청국대 날조ㅈㅇ













"서태웅 선수, 여기요!"
"서태웅 선수!"

때는 초겨울이었다. 태웅은 청소년 국가대표 농구경기 결승전을 치르고 돌아왔다. 따낸 금메달의 무게만큼 어깨가 무거웠다. 그러나 태웅에게는 이미 끝난 경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거늘, 언론은 십대 선수단에게 카메라 렌즈와 마이크를 정신 사납게 들이밀었다.

불러대는 이름에 무어라 답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회견장에 들어가기 전 감독이 일러준 말은 도움이 되었다. 어려운 질문은 안 하겠지만, 대답하기 어려우면 무조건 좋다고, 감사하다고 해. 그래서 우승한 소감이 무어냐 묻기에 당연히 좋다고 했고 MVP감으로 거론되는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는 그건 내가 왈가왈부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고맙다고 했던 것 같다.

마이크에 대고 다소 상투적으로 내놓은 답변에 거짓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는 주저없이 진심이 튀어나왔다. 그건 당연히 병원에 있는 빨간머리... 그러니까,

"강백호요."

그게 누군데? 느닷없는 이름에 순간 장내가 가라앉았다. 정적을 깬 건 어느 젊은 기자였다.

"지난 인터하이에서 산왕공고를 상대로 활약한, 북산고 강백호 선수 말인가요?"

태웅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강백호 선수에게도 한 말씀 해달라는 요청이 이어졌다. 태웅은 정면의 카메라를 응시하며 또 한 번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강백호, 이건 네 거야. 빨리 나아서 같이 뛰자."

거기서 말을 맺으려 했는데 누군가가 옆구리를 찌르는 바람에 말하지 않아도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마저 읊었다. 그리고 감독님, 동료선수들, 부모님과 누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그제서야 태웅에게 향했던 렌즈들이 옆자리 선수에게 돌아갔다.

그 때부터는 기다림이었다. 남은 기자회견 시간이 굼뜨게 흘러갔다. 태웅은 사진에 찍히기 위해서 목에 걸고 나온 메달을 내내 만지작거렸다. 대회 기간 내내 잘 버텼는데, 한 번 소리내어 말하고 나니 더 생각이 났다.

강백호. 그 이름을 떠올리노라면 바다 건너까지 뒤따라오는 향기가 있었다. 병원이 있는 바닷마을로 향하는 낡은 지하철의 비릿한 쇠 냄새,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 들이치는 눅눅한 햇살 냄새까지도.

그게 사랑의 시작점인 줄도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태웅은 오늘도 벅차는 가슴을 툭툭 두드려보고 병원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걸음은 저도 모르게 빨라져 곧 뛰다시피 했지만 숨도 차지 않았다. 손에는 짐이 담긴 캐리어와, 백호의 기나긴 편지에 대한 답장을 쥔 채였다.






*



"기사님, 내릴게요."

기억은 삽시간에 미화된다. 고작 몇 주 발길을 끊었다가 돌아온 지금, 공항에서 백호에게 향하는 약 세 시간의 여정은 실제로는 그리 향기롭지 않았다. 그러나 눈 앞에 굽이굽이 이어진 도로 끝에 새파란 바다가 펼쳐진 순간, 태웅은 그간의 그리움이 휘황찬란한 설렘으로 뒤바뀌는 것을 느꼈다. 태웅에게 실로 향기로운 건 그런 사소한 것들을 지나, 이 길의 끝에 다시 만나게 될 존재였기에.

탈탈거리며 태웅을 태우고 온 마을버스는 치익,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제 갈 길을 갔다. 멀찍이 병원이 보였다. 태웅은 길가에 가만히 서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겨울바다의 냉랭하고 습한 소금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병원 어딘가에 멍하니 앉아있을 백호를 떠올리자 기대감에 부푸는 가슴은 비단 오리털 파카 속에 국가대표 훈련복을 껴입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병문안을 뻔질나게 다니던 시절, 병실 문을 열면 마주하는 광경은 낯설고도 자꾸만 눈이 갔다. 손 안에 농구공이 없고, 주변에 친구들이 없는 잿빛 풍경 속 뒷모습. 녀석은 항상 창밖의 먼 바다를 내다보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리듯이. 태웅은 그런 백호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께가 아렸다. 당시에는 정의를 내릴 수 없던 옅은 통증은 마냥 즐거운 감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기껍지 않은 건 아니어서, 그 정체를 알아내고자 태웅은 출국 직전까지 백호를 찾아가곤 했었다. 유니폼 자랑하는 꼴 보기 싫으니 오지 말라고 화를 내도 꿋꿋이 무시할 각오를 했는데, 녀석은 왜 이리 자주 오냐고 핀잔을 줄지언정 태웅의 병문안을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간질거리는 가슴이란 또 알 수가 없는 것이어서.

여름 전국체전 이후, 태웅의 나머지 여름과 가을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흘러갔다. 곁에는 늘 백호가 함께였다. 부상 부위 통증으로 처음엔 산책조차 힘들어하던 백호는 태웅이 약올리는 소리에 이를 뿌득뿌득 갈더니 금세 기운을 차리고는 바닷가를 함께 뛰어다녔다. 괴물 같은 회복력이라고, 회진 시간에 병실에서 놀다가 만난 담당의가 혀를 내두르며 하는 말에 태웅은 어쩐지 자신이 우쭐했다. 바보니까 건강하기라도 해야지. 괜히 토를 달면 냅다 드잡이를 하려고 덤벼오는 두 팔이 반가웠다.

그 무렵이었다. 태웅은 혼자 있으면 무심코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드리곤 했다. 턱턱, 먹먹한 가슴을 두드려놓고선 텅 빈 늑골 안에 들어있는 그 무언가가 대답을 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청량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 병원의 쓸쓸한 바닷가가 아니라, 언젠가 잡지에서 보았던 열대 휴양지마냥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굽이치는 시원한 파도였다.

어느 날도 가슴께를 두드리던 태웅은 그걸 목격한 누나에게 붙잡혀 식탁 앞에 앉았다. 어디 아프냐고 걱정하는 그에게 태웅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 걔 생각을 하면, 바닷소리가 들리고 가슴이 답답해.

앞뒤를 다 잘라먹은 말이었다. 누가 들으면 고작 그렇게밖에 설명을 못 하냐고 성을 내겠지만 태웅의 누나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속으로 놀라움을 삼켰다. 얘가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애였나?

- 서태웅, 너 걔 좋아하는 것 같은데?

누이의 말에 태웅은 가만히 눈을 끔벅이다 대꾸했다. 누나, 걔가 누군지 알면 그런 말 못 해.

- 누군데?
- 있어, 그런 애가.
- 아니 이게?
- 그래도 생각해볼게.

도대체 가 보지도 않은 바다의 파도소리가 왜 들리는지.

그날 저녁 태웅은 어렴풋한 기억 속의 휴양지 사진을 찾으려고 한밤중에 온 집안을 뒤졌다. 문제의 잡지는 베란다의 분리수거용 폐지 더미에 끼어 있었다. 이제 보니 그건 태웅의 누나가 좋아하는 배우 지면화보가 실려서 샀던 패션지로, 태웅은 총천연색의 화보와 럭셔리니 하이엔드니 하는 요란한 단어들을 지나 마침내 그 사진을 찾아냈다. 진부할 정도로 새파란 하늘과 하얗게 빛나는 모래사장, 그리고 옥색으로 빛나는 바다. 눈부시게 뜨거운 풍경은 알고 보니 고급 리조트 홍보용으로 실린 한 페이지짜리 광고였다.

발리, 하고 태웅은 하단에 적힌 지역명을 소리내 발음해 보았다. 낯설어서 혀에 잘 감기지도 않는 어색한 이름에 잠깐의 꿈이 실렸다. 발리의 파도는 그 병원의 파도랑 다를까, 망연한 생각을 하다 광고면을 쭉 찢어 주머니에 접어 넣었다. 가 보면 알게 되겠지.



*



그러니까 우리 농구선수가 되어 돈을 벌면 같이 가 보자고, 백호에게 말하려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기척이 없었던 탓에, 언제나처럼 병실 문을 등지고 창가를 향해 앉은 백호는 태웅이 온 줄도 몰랐다. 창턱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손을 꼼지락대는 채였다.

- 야. 뭐 하냐.

으악! 태웅의 목소리에 백호가 온몸으로 놀랐다. 제풀에 아픈 곳을 건드렸는지 외마디 비명이 곧 앓는 소리로 바뀌었다.

- 아이, 깜짝이야... 으으.....

여우놈 대체 언제 왔느냐고, 등이 아파서 움츠리지도 펴지도 못한 채 앉아있는 백호에게 얼른 다가간 태웅은 놀란 근육을 마사지해주며 그의 어깨 너머를 곁눈질했다. 더께가 쌓인 창틀 위에 분홍 보라 연두 하늘 색색깔의, 작고 작은 종이학이 귀엽게도 줄지어 내려앉아 있었다. 어림잡아 열 마리도 넘어 보이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더 만들려고 했는지 그 옆에는 손바닥보다 작은 색종이 뭉치도 함께였다.

- 이게 뭐야? 네가 만들었어?
- 아,아무것도 아냐! 그,그냥 혼자 있으니까 심심해서.

의사선생님도 이런 거 하면 좋댔어. 덧붙이기까지 하는 멍청이는 한결같이 거짓말을 못 했다. 심심하기야 했겠지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닐 텐데. 연애사업에 관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던 태웅도 저렇게 조그만 새를 여러 개 접는다는 게 무얼 뜻하는지는 알았다. 이따금 무슨 기념일이면 태웅의 락커에, 사물함에 저런 게 분홍색 편지와 함께 앙증맞은 케이스에 담겨있곤 했다. 태웅은 그 때마다 곱게 접힌 종이 모서리에서 느껴지던 사각이는 정성을 떠올렸다. 그러면 자연히 궁금해졌다. 저 멍청이가, 저렇게 정성스럽게 접어서 대체 누굴 주려고?

바지 주머니에 접어 넣은 바다 사진의 모서리가 따갑게 허벅지를 찔렀다. 병원으로 오는 내내 마냥 간질거리던 가슴이 이젠 불타고 남은 재처럼 뜨거웠다. 불퉁한 마음이 모난 말이 되어 튀어나갔다.

- 진짜 못생겼다.
- ...이이익, 이 도움 안 되는 여우자식!! 저리 가!

파닥거리는 걸 보니 이젠 고통이 잦아든 모양이었다. 태웅이 마사지를 멈추고 백호에게서 떨어졌다. 백호는 학을 주섬주섬 모아 유리병에 소중하게 주워담았다. 그 꼴을 잠자코 보고 있다간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 태웅은 그대로 걸음을 돌려 병실을 나왔다. 야아! 벌써 가냐?! 어딘지 미안한 듯 발목을 잡는 백호의 목소리도 듣기 싫었다. 속이 너무 쓰려서 쥐어뜯으며 집에 갔다. 내내 거슬리던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펼쳤다. 예뻐 보였던 바다 풍경이 이젠 푸르딩딩하니 꼴사나웠다. 태웅은 제 방에 다다르자마자 그 종이를 책상 위에 집어 던졌다.

바다는 얼어죽을 바다.

그날 밤 꿈에 백호가 나왔다. 반가운 얼굴에 기뻐하기도 잠시, 커다란 종이학을 타고 나타난 게 얄미워서 고래고래 소리치며 싸우느라 잠을 설쳤다. 번쩍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자다 깨다니, 태웅으로선 좀체 드문 일이었다. 눈이 말똥말똥해진 태웅은 깜깜한 천장에 백호가 붙어있기라도 한 듯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멍청이. 진짜 멍청이.

다음날, 전에 없이 퀭한 얼굴로 아침상 앞에 앉으니 온가족의 걱정스러운 눈초리가 꽂혀왔다.

- 아들, 무슨 일 있니?

어머니의 질문에 태웅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맨날 가는 병원에, 그 멍청이가 누굴 주려는지 종이학을 접는다, 꿈에서도 싸웠다.

- 그러니 오늘은 병원에 안 가요.

짧은 이야기를 맺으니 태웅의 부모는 우리 아들 속이 많이 상했나보구나, 다정하게 다독여주었고 누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야 서태웅, 가서 그 망할 종이학 싹 다 구겨버리고 오든지 해. 감히 내 동생을 울려?
- 울진 않았는데.
- 어쨌든!

누나의 위로에는 비약이 있었지만 그의 말처럼 종이쪼가리 따위, 끝장을 내주자고 생각하니 어쩐지 속이 후련해졌다. 덕분에 태웅은 그 날 오후 농구부 연습경기에서 슛을 삼십 점을 성공해 주장 치수에게 칭찬을 받았다.

- 멍청아.

그 기세를 몰아 찾아간 입원실에, 왜인지 백호가 기다린 게 분명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태웅이 성큼성큼 침대맡에 다가가 무어라 선전포고를 하려는 찰나였다. 백호가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 ......뭐야.

사실 묻지 않아도 보면 알았다. 백호의 두 손에 올려진 건 문제의 종이학이 곱게 담긴 유리병이었다. 이번에는 병 뚜껑 위에 빨간 리본까지 삐뚤빼뚤하게 매인 채로. 스팀이 가득찼던 태웅의 머릿속 압력이 서서히 낮아졌다. 피쉬이익. 백호가 눈치를 보듯 눈을 굴리고 입을 비죽이다 입을 열었다. 백호는 모르는 듯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간지러운 사람의 행동이었다.

- 여우 너 줄게.
- 왜.
- 네 거야.
- 아니잖아.
- 맞대도.
- 아니잖아.
- 맞다고, 여우자식아! 네 거야. 진짜로, 진짜로 그냥 심심할 때 만들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어린아이가 어른의 말을 뜻도 잘 모르고서 따라하듯이, 백호는 종종 어른들이 하는 상투적인 말을 흉내내곤 했다. 말이 상황에 조금 안 맞는 것 같은데, 난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태웅은 속으로만 생각하며 백호와 종이학을 번갈아보았다. 태웅이 선뜻 수락하지 않는 이유를 선물의 품질을 이상하게 여겨서라고 느낀 백호가 빨개진 얼굴로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 그니까 내 말은, 심심할 때마다 너 주려고 접은 거야. 워,원랜 더 많이 접으려고 했어! 그런데 들켜버렸으니까... 나도 재미가 없어서, 그만하려고. 다음엔 더 잘 만들어 줄게.

모,못생겨서 싫으면 말고! 라는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태웅의 손이 병을 낚아챘다. 태웅이 손바닥만한 병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바닥에 깔린 작은 학들 위에 커다란 오로라빛 학 하나가 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평소 태웅은 실용적이지 않은 물건에는 시큰둥한 편이었다. 학우들에게 선물받을 때마다, 그리고 누나가 좋아하는 동급생에게 고백하겠다고 만드는 걸 도와줄 때마다 이런 쓸모없는 것보단 차라리 초코바 같은 걸 주고받는 게 그나마 낫지 않은가 생각했었는데.

가장 큰 학이 대가리에 짝짝이로 웃는 눈을 달고 태웅을 쳐다봤다. 그걸 들여다보고 있자니 백호가 그 큰 등을 웅크리고, 간호사에게 빌린 사무용 펜을 꼭 쥐고 선을 그었을 모습이 떠올랐다. 접은 선이 삐뚤빼뚤 못생긴 모양도 귀여워 보였다. 누가 봐도 만듦새가 고왔던 여타 여자 동급생들의 학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날 주려고. 이걸.

밤사이 술렁이던 가슴 속 파도가 이젠 사정없이 요동쳤다.

태웅이 수상할 정도로 긴 시간을 아무 말이 없자 멋쩍어진 백호가 태웅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 여우, 너 되게 맘에 들었나보다아? 감동했어? 내가 좀 잘 만들었지?

태웅은 주저하지 않고 대꾸했다.

- 어. 고마워. 안 못생겼어.

예뻐. 태웅이 그런 칭찬까지 덧붙이자 잠시 묘하게 가라앉았던 병실 내 기류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곧 떠들썩해졌다. 으익! 너 뭐 잘못 먹었냐?! 백호가 요란법석을 떠는 와중에도 태웅은 오래도록 유리병 속을 들여다보았다.



*



- 서태웅 표정 왜 저래.

무슨 콧노래라도 부를 것 같네. 가족들은 투지를 불태우며 나갔다가 흐물흐물한 얼굴로 종이학을 들고 온 태웅을 음흉한 눈으로 구경했다. 아주 그냥 밥 안 먹어도 배 부르냐? 누나가 놀리는 말에도 태웅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으휴, 닭살. 누이는 진저리를 치며 식탁에서 일어났고 태웅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흐뭇한 표정의 부모님을 두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유리병을 곱게 책상 위에 올려두고 그 앞에 턱을 괴고 엎드렸다. 정말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알록달록한 학들이 볼수록 백호를 닮아 있었다. 꼭 병원의 모든 색을 머금은 듯, 모든 온기를 담은 듯. 삭막한 직사각 공간에서 홀로 박동하는 뜨거운 심장 같은 이를 떠올리게 했다.

-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백호에게 통지서를 늦게 보여준 건 그런 이유였다.

- 여우자식, 언제 말하나 했다. 고릴라한테 다 들었다구!
- ...화, 났냐.

태웅과 백호의 사이에 손때가 탄 종이 한 장이 놓였다. [청소년 농구 국가대표 소집 통지서]. 출국을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왜 그렇게 주저하느냐 치수가 넌지시 물었을 때, 태웅은 8주간의 소집 기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어쩐지 아무렇지 않게 자랑하며 내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뒤늦은 소식에 백호는 화를 내기는 커녕 태웅의 가족들만큼이나 크게 기뻐해 주었다.

- 화나긴. 야 여우, 너도 이 천재 대신 뽑힌 거라 알리기 민망했던 거잖아?

으하하! 백호는 온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잿빛 바다가 한순간 푸르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태웅은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멍청아, 넌 따라올 생각이나 해. 뒤늦은 잔소리에도 백호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당연하지! 힘찬 대꾸를 닮은 듯 그 오후는 바다가 내내 푸르렀다.

쏴아아. 태웅의 가슴 속에 파도가 부서졌다.




*




- 다음엔 같이 출전하는 거다.

가을보다 겨울에 가까운 계절. 바람이 거세지고 바다는 점점 더 색을 잃어갔다. 출국 하루 전, 희부연 하늘 아래 백호와 말없이 해변을 걷던 중이었다. 백호는 아직도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그 꼴이 추워 보였던 태웅은 백호에게 제 저지를 벗어 건네주었다. 백호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 내일이지?

옷을 받아들며, 백호가 이미 아는 사실을 되물었다.

- 응.

주고받는 말마디 사이로 쏴아, 발 밑까지 거슬러 온 파도가 부서졌다. 포말이 하얗게 흩어질 때, 태웅은 그 얼굴에 묻는 슬픔을 보았다. 녀석이 외롭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두 팔을 포옹하듯 들어올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한동안 잠잠했던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거, 뭐지?

태웅은 들었던 손을 내려 가슴을 꾹 눌렀다. 백호는 태웅이 준 옷을 꿰어 입느라 그 손짓을 미처 보지 못했다.

- 어머, 네가 백호구나! 태웅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단다.
- 태웅이가 이렇게 잘생긴 친구라고는 안 했는데?

가슴의 울림을 정의내리지 못한 채 출국일이 다가왔다. 태웅은 공항으로 향하기 직전에도 병원에 들렀다. 부모와 함께였다. 그들은 병실 냉장고에 온갖 먹을거리를 채워 넣어주고 따스한 인사말을 건넸다. 두 어른을 맞이하는 백호의 미소가 더없이 환했다. 아이구 번거로우실 텐데 뭐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 나이답지 않게 너스레를 떠는 백호를 태웅의 부모도 한껏 따스하게 대해 주었다. 병실의 온도가 3도 가량 오른 것 같다고, 흡족스럽게 생각하던 태웅은 그러나 오래도록 화기애애한 세 사람을 지켜보다 이윽고 부모를 병실에서 내쫓았다. 서씨 내외는 쫓겨난 복도에서 조금 놀란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다 숨죽여 웃었다. 통 떼를 쓰는 일이 없던 아들이 출국 당일에 기어이 병문안을 가겠다고 어깃장을 놓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 태웅아, 백호야, 인사하고 있으렴. 우린 병원 구경하고 올게.

태웅은 두 명분의 발소리가 병실에서 멀어지는 걸 확인하곤 백호의 병상에 털썩 걸터앉았다. 맘대로 앉지 말라고 티격태격하던 것도 이젠 오래 전의 일이었다.

- 야, 여우. 엄마아빠를 내쫓으면 어떡해? 기껏 여기까지 오셨는데. 병원에 볼 것도 없단 말야.
- 어차피 너 보러 온 건 나야.
- 이거 완전 불효자네!

백호가 타박하거나 말거나 태웅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손을 만져볼까 말까, 망설이다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 두 달이면 끝나. 훈련이랑 경기.

안 물어봤거든. 냅다 대꾸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태웅이 희미하게 웃었다.

- 너 없이는 재미없을 거니까. 빨리 올게.
- 누가 뭐랬나...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투덜대는 귀끝이 머리칼만큼이나 빨갰다. 태웅은 용기내어 백호의 손을 감싸쥐었다. 삭막한 병원에서 홀로 뜨거운 손이 제 가슴까지 달구는 기분에 태웅은 속에서 울컥,하고 치미는 것을 억눌렀다. 그건 코트 위에서 백호와 손바닥을 마주쳤을 때 느꼈던 기분과 비슷하지만 더 깊은 무언가였다.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쥔 손아귀를 백호가 내치기는커녕 살며시 맞잡아왔을 때는 생각했다. 아, 정말 가기 싫다.

- 야, 그래도 가야지, 니가 국가대푠데. 심지어 나 대신이면서!

생각만 한 줄 알았는데. 말을 흘렸나보다. 기세등등하게 저를 보고 씩 웃는 얼굴이 그다워서. 벅차올랐다. 태웅은 뭇 선수들이 코트 위에서 인사하듯, 붙잡은 손을 가슴으로 끌어당겨 백호와 몸을 부딪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동작으로 등을 얼싸안으려다 주춤, 아플까봐 머뭇대는 팔을 백호가 스스로 둘러안고 태웅의 등에는 자신의 팔을 감았다. 온통 맞닿은 살이 뜨거웠다. 가슴에 닿은 손이 두근거렸다. 서로의 목덜미에 닿는 뺨이 부드럽고 폭신했다. 닿고 나니, 떨어지기가 싫었다.

헤어질 무렵. 태웅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서야 제 감정의 형태를 깨달았다.

- 태웅이가 백호 많이 보고 싶어할 거야. 그렇지?

서태웅은 강백호가 보고 싶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



짧은 비행 후 선수촌에 도착하자 잠깐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숙소는 2인1실로, 태웅은 대표팀 주장인 이명헌과 한 방에 배정되었다. 몇 달 전 전국체전에서 상대팀으로 만난 이후 첫 재회였지만, 명헌은 어떠한 인사치레 대신 매점에 가자는 말로 태웅을 이끌었다. 뭐, 드시게요? 느릿한 물음에 그는 한구석에 작게 마련된 기념품 코너를 가리키더니 곧장 엽서를 고르기 시작했다. 음... 그를 멀뚱히 지켜보던 태웅도 명헌을 따라 진열장을 들여다보다 원정국의 바다가 가장 푸르게 출력된 엽서를 골랐다.

- 잘 골랐다 삐뇽. 이제 써라 삐뇽.

국제우편은 배달되는 데에 몇 주는 걸린다는 그의 설명에 태웅은 얼른 백호의 앞으로 몇 자를 적었다. 나는 도착했다, 잘 지내고 있어라, 이기고 돌아가겠다.

그게 다냐 삐뇽? 옆에 나란히 엎드려 엽서를 쓰던 명헌이 넌지시 물었다. 잠시 생각하다 한 줄을 더 적었다. 여기 바다는 역시 네가 없으니 재미없어.

어린 선수들에게 주어진 휴식은 그 때뿐이었다. 이어진 혹독한 훈련과 경기들을 태웅은 백호의 답장에 대한 기대감으로 버텼다.

편지가 분실된 건 아닐지 걱정할 때쯤 답장이 도착했다. 대회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보낸 사람 : 천재 강백호]. 태웅은 기다리던 이름이 적힌 봉투를 받아들었다가 탄식처럼 웃었다. 종이학을 그렇게 접어댈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허, 하고 헛웃음을 흘리자 반대편 침대에서 제 앞으로 온 편지를 펼치던 명헌이 고개를 들었다. 왜 삐뇽? 태웅은 대답 대신 손에 들린 편지지를 다시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장. 엽서 한 장에 대한 백호의 답장이었다. 태웅이 보낸 건 인사말을 빼면 세 줄도 채 안 되는 내용이었는데, 그에 비하면 이건 무슨...

- 대서사시네. 삐뇽.
- 너무 많아요...
- 너를 엄청 아끼는 사람인가보다 삐뇽.

태웅은 심상하게 대꾸하는 명헌을 가만히 쳐다보다 도로 편지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알 수가 없는 녀석이라니까... 꾹꾹 눌러쓴 글씨는 분명 악필인데 어딘지 동글거리고 귀엽기까지 했다. 미색 종이에 익숙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기분에 태웅은 고개를 젖혀 편지지를 얼굴에 덮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를 지켜보던 명헌이 따라서 자신의 편지를 얼굴에 덮었다.

- 무슨 냄새 나냐 삐뇽.
- 바다 냄새요. 주장은요.

...난...치즈 냄새가 난다 삐뇽. 정우성 치즈버거 먹고 썼나 삐뇽. 명헌의 말에 키득거리던 둘은 곧 정좌하고 각자의 편지를 읽어 나갔다.

백호의 편지 첫번째 장은 여우야, 나 바다 건너 보내는 편지 꼭 써보고 싶었어,라는 머리말로 시작했다. 거기에는 평소의 백호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또 어딘지 백호다운 말들로 그의 지난한 하루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경기 잘 보고 있다. 이 천재님만큼 잘 하더라. 네 경기를 보려고 맨날 TV가 있는 휴게실에 가서 죽치고 있었더니 의사쌤이 내 병실에 낡은 TV를 놔 주셨어. 경기를 보고 있으니 몸이 근질거려서 큰일이야. 재활치료 시간을 늘려달라고 했다가 선생님께 혼났어. 맘대로 고무줄처럼 늘리고 줄일 수 있는 게 아니래나. 언제는 환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더니! 의사쌤 앞에서 흥칫뿡이라고 했다가 간호사 형한테 잔소리를 들었어.]

[어제는 고릴라랑 안경선배가 다녀갔어. 농구 잡지를 잔뜩 갖고 왔길래 고맙다고 했어. TV가 있는 걸 보더니 다음에 오면 비디오를 볼 수 있게 뭘 설치해준대.]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아니 글쎄 그 둘이 내년부터는 농구부를 안 한대! 어차피 못 하는 공부가 겨우 하루 몇 시간 더 하는 걸로 늘겠냐고 했다가 고릴라랑 대판 싸웠어. 자기랑 나는 다르대나? 차암, 사람 머리통이 다 똑같지 뭘...]

[근데 부장이랑 부주장이 농구부 관두는 거 여우 너는 알고 있었다고, 너한테 못 들었냐고 하더라? 사실이면 넌 죽었어. 은혜도 모르는 여우자식. 병원 출입금지야!......]

이제 보니 편지를 오랜 시간, 며칠에 걸쳐 쓴 모양이었다. 첫 장은 꽤 그럴듯하게 적어내려가더니 다음 장에서는 태웅을 죽이네 살리네 하고 네 번째 장 말미에는 저녁 물리치료 시간이라 가봐야 한다는 인사로 끝을 맺었다.

그러다 다짜고짜 서태웅 너 짜증나, 로 시작하는 마지막 장은 글씨체도 미묘하게 다르고 펜 종류도 달랐다.

[서태웅 너 짜증나. 병문안 오지 말라고 할 걸. 이제 슬슬 심심해. 아니 사실 진작부터 심심해 죽을 것 같았어. 니가 엽서 보내기 전부터 심심하면 편지를 썼어. 글씨를 오래 쓰면 등이 조금 불편해서, 매일매일 조금씩. 그랬더니 벌써 다섯 장 째야. 빨리 보내고 싶었는데 네 주소를 모르니까 보낼 수가 없었어. 네 엽서도 왔겠다, 이거 다 쓰면 이제 부쳐달라고 하려고. 엽서에 바다 사진 멋지더라. 여기보다 훨씬 기분 좋겠지? 언젠가 그런 곳에 가보고 싶다.]

[아무튼 편지를 아무리 써도 시간이 잘 안 가. 나도 병원이 이젠 재미가 없어. 너랑 놀면 시간이 빨리 갔는데. 편지를 안 쓸 땐 창밖을 구경해. 지루한 바다를 보고 있으면 수평선 너머에서 니가 커다란 돛단배를 타고 짜잔, 하고 나타날 것 같아서. 방금 멍청이라고 생각했지? 나도 알아, 비행기 타고 온다는 거. 그래도 괜히 상상하게 돼. 국제 대회에 다녀온 너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여우같고 열받는 서태웅일까.]

[이건 의사쌤이 한 말인데, 너 빨리 오래. 내가 자꾸 심통을 부려서 하는 말이라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의사쌤은 바빠서 내가 알아듣게 설명을 안 해줘. 진짜 흥칫뿡이야. 간호사 누나한테 물어보니까 그 대회는 9일에 끝난다는데. 진짜야? 대회는 끝나면 바로 집으로 오나? 그랬으면 좋겠다. 중간에 지면 더 빨리 오겠지만 지는 건 싫으니까, 이왕이면 이기고 와. 무엇보다 이 천재님 대신 간 건데 이겨야지. 그렇지?]

태웅은 마지막 장을 읽고 또 읽다 편지의 한 대목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시간이 잘 안 가. 너랑 놀면 시간이 빨리 갔는데. 그런 표현을 읽을수록 마음에 비쳐드는 감정이 있었다. 아마도 백호는 깨닫지 못했을 감정이, 편지를 통해 또렷한 상이 되어 가슴에 맺혔다. 습관처럼 늑골을 꾹 눌러내린 태웅은 작은 책상 위의 유리병을 쳐다봤다. 꼭 누구처럼, 바보같이 웃는 종이학이 담긴.

이내 손가락 끝에 굴리던 펜을 쥐고 새 엽서에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옆에서 이부자리를 정돈하던 명헌이 물었다. 내일이면 귀국인데 또 쓰냐 삐뇽?

- 주려고요. 답장.

태웅은 다 적은 답신을 제 마음만큼이나 단단한 상자에 조심스레 집어 넣었다. 거기에 금메달이 함께 담겼다.



*



성큼성큼 옮기던 발걸음이 느려졌다. 혼자 병원 현관에 다다라서야 문득 생각이 났다. 너 돌아오면, 그때도 너희 부모님하고 다시 올 수 있어? 편지 마지막에 조심스럽게 묻던 필체가. 그 말을 잊은 게 조금 미안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급했으니까. 강백호를 제일 보고 싶어하는 건 서태웅이니까.

그래, 보고 싶었다. 그 사이 머리가 많이 자랐을지, 아니면 또 거추장스럽다고 박박 밀어 버렸을지. 이제 겨울인데 옷은 잘 챙겨 입고 지내는지. 어머니의 말대로였다. 아픈 건 많이 나았을지. 무얼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무슨 표정인지. 서태웅을 제일 보고 싶어하는 것도 강백호였을지.

지금, 나를 생각하는지.

"강백호."

마침내 발견한 백호는 머리가 조금 자란 것을 빼면 항상 그리던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입원실 문을 비스듬히 등지고, 침대 위에 앉아 등은 약간 구부정한 자세. 일부러 기척을 내도 돌아볼 기미가 없어서 태웅은 그립던 모습을 잠시 더 감상하다 가까이 다가갔다. 시선이 한 군데 꽂혀 있어서 봤더니 브라운관에 조금 전 공항에서 마치고 온 기자회견이 송출 중이었다.

[강백호, 이건 네 거야. 빨리 나아서 같이 뛰자.]
- 눗......

TV 속 태웅의 말에 백호가 놀란 소리를 냈다. 태웅은 화면 속 자신을 한 번 보고, 넋이 나간 백호의 옆얼굴을 한 번 쳐다봤다. 쟤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TV나 보고. 불쑥 심술이 솟아 버럭 외쳤다.

"멍청아."
"으악!"

백호가 펄쩍 뛰며 돌아보았다. 등이 아픈 기색은 없었다. 그 모습이 퍽 마음에 들어 태웅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왜 그러고 있어."

백호는 브라운관에 비친 얼굴과 문간에 선 태웅을 번갈아 손가락질하다 입을 떡 벌렸다.

"여,여우! 너,너너... 언제!!"
"회견 끝나자마자 왔어. 부모님은 내일 모시고 올게. 답장 가져왔어."
"부모님이 뭐? 다,답장?"

쉴 틈 없이 이어진 말에 백호가 얼이 빠진 얼굴을 했다. 태웅은 가방을 뒤적여 검푸른 벨벳으로 감싸인 묵직한 상자를 꺼냈다. 자. 한 손으로 척 내미는 걸 얼떨결에 받아든 백호가 금박 잠금쇠를 열었다. 팔랑, 사이에 끼워둔 엽서가 바닥에 떨어졌다. 어어...! 떨어지는 종이를 주우려던 백호가 엽서 아래 드러난 물건을 보고 입을 더 크게 벌렸다.

"금메달...!"

태웅은 엽서를 주워, 반짝이는 금빛 덩어리를 숨겨진 보물처럼 들여다보는 백호에게 건넸다.

"네 거야. 이것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손에 쥐어진 메달과 엽서를 번갈아보던 백호가 메달 상자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엽서를 받아들었다. 눈을 굴려 짤막한 글귀를 읽은 그는 곧 뺨을 발그레 물들였다. 거기에는 가장 단순하고도 뜨거운 마음이 담겨 있었다.

[멍청이 강백호.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
보고 싶었다. 종이학 천 개를 접어주고 싶을 만큼.]

태웅은 엽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백호를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물론 오래 가진 못했다. 태웅은 백호에 한해 인내심이 얕았다.

"다 읽었어?"
"이...이거 진짜냐. 여우 네가 쓴 거 맞아?"
"진짜지 그럼."
"어, 어어, 그렇구나. 고마워. 근데. 이,이런 거 받아본 건 처음이라......"

어,어떻게 해야 하지? 백호의 물음에 태웅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왜 처음이야, 내가 저번에도 엽서 보냈는데."
"그거랑 이건 다르잖아...!"
"뭐가 달라? 어차피 네가 먼저 했잖아, 고백."

태웅은 못생긴 종이학과 꾹꾹 눌러쓴 기나긴 편지를 떠올렸다. 유리창의 빗방울처럼 가슴에 맺히던 작은 알알의 마음들을. 그러자 백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파드득 몸을 떨었다. 아니야! 강한 부정에 태웅이 이번에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야?

"아니야."
"맞잖아."
"아니야!"

맞대도. 태웅의 고집에 백호가 언성을 점점 높였다. 아니라니까! 태웅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럼."
"뭐... 뭘?"
"그럼 내가 먼저 고백한 걸로 해."

뭐?!!! 둘의 소란에 결국 간호사가 찾아와 축객령을 내렸다. 싸우려면 나가서 싸우세요! 싸운 거 아닌데요. 퉁명스러운 태웅을 백호가 황급히 떠밀었다. 병원 밖으로 나와서도 백호는 얼굴이 빨갛게 익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생명이 자취를 감춘 무채색 해변에 백호의 얼굴만 태양처럼 붉었다. 네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간호사 누나한테 혼났잖아! 백호가 실랑이에 다시 시동을 걸 때였다.

"...어?"

새빨간 콧잔등에 하얀 입자가 솜털처럼 내려앉았다. 그 광경을 슬로우모션으로 목격한 태웅이 눈을 크게 떴다. 무심코 코를 더듬은 백호도 곧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눈 온다! 첫눈이야! 맞지?"

투닥대던 게 언제냐는 듯 백호는 움직임을 멈추고 우두커니 제자리에 섰다. 드러난 살결에 눈송이를 맞이하듯 가만히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태웅은 숨을 멈췄다. 하늘도 바다도 온통 회색이었던 배경이 따스한 흰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단연 뜨겁게 빛나는 것은, 단 하나뿐인 빨강.

성큼성큼 백호에게 다가갔다. 발소리에 문득 눈을 뜬 백호는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는 태웅에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태웅이 그런 백호를 단단히 붙잡았다.

"강백호."
"...왜, 왜!"
"보고 싶었잖아."
"......아니 진짜 아까부터!"
"네가 그렇게 말했어, 편지에서."
"...그,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좋아해, 강백호."

더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백호가 얼굴을 이마까지 빨갛게 물들였다. 태웅은 만족스럽게 그 모습을 눈으로 샅샅이 훑었다. 너는 어떠냐고, 대답을 종용하는 눈빛을 견디다 못한 백호가 눈을 질끈 감고 꽥 소리를 내질렀다.

"그,그래! 나도 보고 싶었다 이 망할 여우 자식아!"

왜 이제 오고 난리야! 기다렸잖아!! 홧김에 속내를 내지른 백호는 뒤늦게 제 머리를 싸매고 주저앉아 고통스러워했다.

"맙소사, 내가 여우자식을...?"

자조하듯 흘러나온 우스꽝스러운 감탄사에 하하, 태웅이 소리 내어 웃었다. 백호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여우 자식이, 웃었어...? 태웅이 그와 눈높이를 맞춰 쪼그려 앉았다. 뺨을 감싸 쥐었다. 가까이 마주한 얼굴에 붉은 머리가 진저리를 친 것도 잠깐이었다. 다음 순간, 두 소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줍게 눈을 감았다. 그리던 숨결이 가까워졌다.















* * *



태웅은 입술에 닿는 익숙한 감촉에 눈을 떴다.

"여우, 언제까지 잘 거야? 원온원 하기로 했잖아!"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였다. 발밑에 찰랑이는 에메랄드빛 바다, 머리 위의 청량한 햇살. 그 모든 것보다도 바로 눈앞에 드리운 눈부신 열정에. 태웅은 멍하니 제 연인을, 아니 반려자를 올려다보다 목에 팔을 감아 당겼다. 으왓! 백호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중심을 잃고 태웅의 품으로 쓰러졌다. 나 더워, 얼른 일어나! 말과 달리 어깨를 마주 껴안는 두 팔에 한껏 애정이 실렸다. 태웅은 백호에게 다시 입맞추고 그를 바짝 껴안았다.

안겨든 어깨 너머로 이젠 추억이 된 겨울바다가 겹쳐진다. 오래된 이야기였다. 언제나 쓸쓸한 잿빛이던 기억이 발리의 빛나는 하늘 아래에 아스라히 멀어졌다.

"...얼마나 잤지?"
"한 시간? 나 수영 실컷 했어. 이제 가자."

태웅의 상체에 털썩 엎드린 백호가 쇄골께에 턱을 대고 졸랐다. 품 안에 맞닿은 가슴에 배어나는 땀이 기껍다. 닿아 있어도 안달이 나던 날들이 옅어진다. 닿지 못해 그립던 날들도.

아니, 어디에 있건 그리움은 지금 더 큰 것 같지만.

"더 하지 왜, 언제는 밥도 안 먹고 수영만 하겠다더니."
"...사실은 그게 아니고,"

저기 어떤 여자가 자꾸 너 쳐다본단 말이다. 백호의 속삭임에 태웅이 도끼눈을 떴다. 곁눈을 흘겨보니 백호의 말대로 지척에 화려한 비키니를 입은 여자 두엇이 이쪽을 기웃댔다. 태웅은 백호를 다시 돌아보고 얼굴을 굳혔다. 멍청아, 너를 보는 거겠지. 수영복만 입어 육감적인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낸 백호에게 얼른 티셔츠를 던졌다. 목에 티셔츠를 끼운 백호는 여우 네가 문제라며 태웅을 잡아 일으켰다.

"...그럼 우리, 뛰어갈까."

아무도 우릴 보지 못하게.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백호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 좋아!

"저기 코트에 누가 먼저 도착하나 내기, 콜?"

콜, 하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태웅이 준비 땅을 외치며 달려나갔다.

"야 서태웅 비겁한 자식아!!"

가열차게 백사장을 가르는 두 사람의 달리기를 따라 파도가 몇 번이고 밀려왔다 멀어졌다. 앞서 달리던 태웅은 곧 저를 앞질러 힘차게 뛰는 백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발리의 파도도, 그 병원의 파도도 다를 것은 없었다. 백호와 함께라면 모두 같은 파랑이었다. 고등학생 때도,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리고 생이 끝날 때까지 가슴 속에 일렁일 사랑처럼.

"서태웅, 패배 선언이냐? 빨리 와!"

두 팔을 흔드는 환한 미소 뒤로 어느덧 파란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태웅은 호흡을 크게 들이쉬며 뜀박질을 늦췄다. 백호에게서 불어오는 바람에 그 집에서만 나는 향기가 실렸다.

느린 발걸음 뒤로 파도가 파랗고 빨간 빛으로 가득 일렁였다. 차올라 가슴을 꽉 조이는 물살에 기꺼이 잠겨들었다.

만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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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줘서 코맙읍니다. 해피 탱백절!!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