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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5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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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물 포장하기 ■

 동거인 A의 부모인 E와 O는 금슬이 아주 좋은 부부이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상대에게서 새로운 점을 발견하기에 아직도 서로가 서로를 미지의 세계라고 일컫는 모습은 나로 하여금 무한한 애정과 부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이 상대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간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아마 그들이 같은 일에도 서로 판이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일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처음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말을 했을때, 모친인 E는 매우 기뻐하며 자신이 책을 출간했을 때의 경험과 원고 작업을 할 때의 멘탈 관리법을 세세히 알려주며 나에 대한 커다란 신뢰와 격려, 그리고 그만큼의 염려를 함께 보여주었다. 그에 비해 부친인 O는 어깨를 으쓱이며 왕자님이 왜 책따위를 쓰냐고, 불쏘시개가 필요하면 자기에게 연락하지 그랬냐며 심드렁하게 웃더니 며칠 뒤 내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을 선물로 보냈다. 나는 이들이 나를 아껴주는 서로 다른 방식을 매우 존중하고 사랑한다.

 만년필에 대한 보답과 곧 다가오는 O의 생일을 맞아 나는 그에게 멋진 선물을 하고자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고를 수 없었다. 무엇도 만년필에 상응할만한 것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하루하루 초조해져 갈 무렵 A와 짧게 방문한 파리에서 나는 아주 완벽한 레더샵을 발견했다. 파리에서의 시간은 온전히 우리 둘만을 위해 써야한다고 신신당부했던 사람은 바로 나였음에도 내 눈에는 에펠탑도 미국인도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두시간 넘게 샵에 죽치고 앉아 모든 제품을 체크하려드는 깐깐한 영국인에게 A는 어떠한 불만도 표하지 않았다.(물론 내 시선을 끌기 위한 몇 번의 귀여운 시도가 있었으나 미수에 그쳤다) 덕분에 나는 마음에 쏙 드는 지갑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이쯤되면 당신은 슬슬 이 챕터의 제목에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래서 포장은 언제 하는데? 애초에 왜 포장을 네가 하는데? 샵에서 해주잖아? 와 같은. 아마 당신은 이 철없는 금발 백인이 또 쓸데없는 호기를 발동하여 스스로 포장을 하겠다며 고집을 부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아니다. 줄곧 나의 지루한 활자를 따라와준 당신의 아량에 감사를 표하며 이유를 말하자면 '포장이 찌그러지는 바람에'라고 답하겠다.

 완벽한 선물에는 완벽한 포장이 필요하다. 파리에서 직원이 아주 능숙하고 아름답게 마무리해준 포장은 뉴욕으로 돌아오는 캐리어 속에서 처참하게 구겨져있었고 그걸 발견한 내 얼굴도 딱 그만큼 구겨졌다. 내 안색을 살피던 미국인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다소 들뜬 표정으로 포장지와 리본을 준비해왔다. 다행히 상자는 멀쩡하니 겉포장만 다시 하면 될 것 같다고, 자신은 아무것도 돕지 않을테니 직접 해보라며 나에게 기회를 넘겼다. 아마 A는 내가 그동안 가졌던 새로운 경험들에 '선물 포장하기'도 추가될 것이며 당연히 내가 이것을 매우 즐길거라 확신한 모양이다.
   젠장, 이것만큼은 너한테 부탁하려고 했다고!
 O에게 주는 첫 선물이다. 내 서툰 손길따위 닿지 않은 완벽한 포장이 필요하단 말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다급히 외쳤으나 나를 향한 A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하니 차마 나약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이게 다 눈이 예쁜 미국인을 선택해버린 나의 탓이다.

 그렇다고 정말 단 하나도 도와주지 않을줄이야. 자신이 내뱉은 말을 황금처럼 관철하는 A덕분에 나는 쓸데없이 긴 시간동안 알록달록한 포장지와 가위, 테이프를 손에 쥐고 진땀을 흘려야 했다. 포장지가 너무 커서 잘라내면 이번엔 너무 작아졌다. 한쪽이 너무 길어서 다른쪽을 당기면 다시 이쪽이 너무 짧아졌다. 간신히 한쪽 모서리를 맞추면 이번엔 다른쪽 모서리가 어긋났고, 겨우겨우 전체적인 모양을 잡았다가도 테이프를 뜯으려 손을 놓치면 다시 초기화 되기를 반복했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A는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이건 뭐지. 파리에서의 내 무관심에 대한 복수인가? 미국인에 대한 나의 과실을 돌아보는 성찰-과 분노-의 시간을 가진 끝에 나는 엉성한 포장을 해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쳤는지 모른다. 여기저기 들러붙은 테이프 자국과 아귀가 맞지 않는 모서리의 접합부가 매우 거슬렸지만 내 나름의 최선이었다. 그나마 리본 매듭은 제대로 묶을 줄 알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해냈다는 사실에 잔뜩 뿌듯해하고 있는데 그제서야 머그잔 두 개를 들고 온 미국인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이제 연습이 끝난거냐고 물었다. 연습이라니? 내가 의아한 얼굴을 해보이자 A는 더 의아한 얼굴을 하며 옆에 떨어져 있던 지갑을 들어보였다. 아뿔싸, 왠지 포장하는 상자가 너무 가볍더라니. 지갑이 멀쩡한지 살펴보고나서 다시 상자에 넣는다는걸 깜빡했던거다. 내가 얼굴을 감싸며 뒤로 쓰러지자 상황을 파악한 A가 아주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껴안고 입을 맞춰댔다. 웃지마. 귀여워하지마. 난 이 짓을 또 해야한다고! 괘씸함에 리본끈으로 양 손목을 꽁꽁 묶어버리자 그제야 이 건방진 미국인은 잔뜩 분노한 영국인에게 항복을 표했다.

 며칠 뒤 선물을 건네받은 O는 엉성한 포장이 나의 손을 탄 것임을 단박에 알아챘다. 가게 직원이 초등학생이었나봐?라고 물은 그는 장난스런 말투와 달리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었다. 그리고 상자 속 내용물이 지갑인 것을 확인하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자신도 애플페이가 뭔지 안다고, 이 시대착오적인 선물은 누구의 아이디어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던 그가 지갑을 열어 안쪽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나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파리에서 지갑을 골랐을 때, 각인을 넣겠냐는 직원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었다. 이니셜을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그에게 이름 이상의 의미를 전하고싶었다. 한참 고민하던 나는 숫자 몇 개를 적어 직원에게 내밀었다. 그가 사랑하는 이와 줄곧 살아왔고, 이제 곧 다시 돌아갈 텍사스 본가의 우편번호였다. O는 기쁘고 벅찬 얼굴로 내게 진심어린 감사를 표했다. 물론 바로 다음 순간 '나를 집주소도 모르는 중늙은이로 아는겁니까 전하'라며 심드렁하게 웃어보이는 것 역시 빼놓지 않았다.

 뒤늦게 나는 이 모든 과정에서 한발 물러서있던 A의 의중을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O에게 주는 첫 선물을 온전히 나의 힘으로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침대에 앉아 나를 기다리던 A에게 달려가 안기며 감사의 말을 전하자 그는 기특하다는 듯이 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그러더니 수고한 나에게 선물을 준비했다며 손을 내밀었다. 기대에 가득차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커다란 손바닥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뭐지. 복수의 연장인가? 내가 의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자 A가 입꼬리를 들썩이며 소매를 살짝 걷더니 손목을 흔들어보였다. 그의 단단한 손목에 묶인 빨간 리본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 영국인은 선물 포장은 서툴지만 푸는건 아주 잘 한다. 나는 미국인이 몸소 바치는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 영화관 가기 ■

 동거인과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차창 밖으로 유독 붉고 화려한 조명이 번쩍이는 커다란 간판이 보이기에 참 미국스럽다고 생각하며 빤히 쳐다보니 A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냐고 물었다. 요란하게 번쩍이며 시선을 빼앗은 간판의 주인은 AMC영화관이었다. 나는 대답대신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 말았다. 영화관은 내게 다소 거북한 공간이다.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나의 아버지는 영국의 배우였다. 어머니와의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전세계가 충격에 들썩였다는건 여러 뉴스 기사를 통해 나도 알고 있다. 아마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의 반려가 왕족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라, 결혼과 동시에 발표된 그의 은퇴 소식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당시 아버지는 역대 007 중 가장 호평받는 제임스 본드였고, 결혼 발표즈음에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가 개봉한 참이었다. 모두가 차기작을 기대하던 와중에 은퇴라니. 팬들의 상심이 얼마나 컸을지 나는 상상할 수 없다. 표면상으로는 가족에게 더욱 헌신하고자 영화계를 떠난다고 했지만, 글쎄. 내부자이자 최측근인 나는 그것이 온전히 아버지의 의견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배우라는 직업은 예나 지금이나 영국 왕실이 선호하는 직업군은 아니다. 20여 년 전이라면 더더욱 그러했을테지. 발코니에서 손 흔들기가 최대 업적인 주제에 무슨 권리로 다른 이의 커리어에 훼방을 놓았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아버지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누구나 첫 영화관에 대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대개 기억의 주인과 함께 아주 오래 살아간다. 나의 기억은 아버지와 함께 했던 한밤중의 영화관이다. 런던의 V&A는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어떤 개념없는 영국인과 철없는 미국인의 밀회 장소로 유명세를 탔지만(이 부분에 있어 모든 관계자들에게 깊은 사과를 전하는 바이다) 사실 이 곳은 나의 아버지와 어린 내가 종종 밤 산책을 즐겼던 곳이다. 
 어느 날, 아버지와 V&A에 갔다가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영화관에 가자며 아버지를 졸랐다. 당시 보안상의 이유로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는 공식 행사를 위한 방문 외에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일반 영화관에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고 어렸던 나는 tv에서만 보던 그 곳을 꼭 가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하려 했지만 늘 그렇듯 어머니를 빼닮은 내 눈빛을 이기지 못했다.
 아버지와 함께 모자를 눌러쓰고 좌석 맨 뒷자리에 몸을 숙이고 앉아 입을 틀어막으며 킥킥대던 순간이 아직도 또렷하다. 품 속에 커다란 팝콘통을 안은 나는 아버지와 함께 하는 이 비밀스러운 순간이 너무나 신났다. 팝콘을 먹어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손 안 가득 한웅큼 쥐고 최대한 입을 크게 벌려 마구 쑤셔넣자 반은 입에 들어가고 반은 허벅지 위로 후두둑 쏟아졌다. 어린 나는 그 굴러떨어지는 팝콘의 모양이 너무 재밌었다. 체통도 교양도 없다며 내 행동을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날 봤던 영화는 재개봉한 007이었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아버지의 얼굴이 보여서 나는 얼마나 신났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런던 파파라치들의 정보력을 얕봐선 안됐다. 그들은 우리가 영화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방처럼 몰려들었다. 나는 갑작스레 펑펑 터지는 카메라 셔터의 불빛과 소음에 놀라 급히 고개를 돌리다가 그만 코앞까지 다가온 카메라에 눈가를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지금도 내 눈썹에는 그날의 흉터가 남아있다) 아버지는 그 일로 왕실로부터 거센 문책을 당했다. 먼저 가자고 조른 것은 나인데 말이다. 아무도 내가 얼마나 신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지 관심 갖지 않았다. 그 후 영화관은 내게 그리 유쾌한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조금 더 성장하고나서 다시 영화관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영화를 선택해도 기삿거리가 됐다. 가벼운 영화를 보면 왕실의 저급한 취향에 대한 기사가 났고, 무거운 영화를 보면 로열패밀리의 어둡고 불안한 심리에 대한 분석글이 넘쳐났고, 로맨스 영화를 보면 만난 적도 없는 주연배우와 스캔들이 났다. 영화에 대한 나의 온전한 감상과는 전혀 상관없이 모든게 기삿거리로 전락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누가 더 자극적인 기사를 쓸 수 있는지 경기라도 하는 듯했다. 덕분에 나는 영화관에 발길을 끊고 넷플릭스의 충실한 회원이 되었다.

 그래서 A가 저녁에 영화를 보자고 했을 때, 나는 평소처럼 우리의 집 소파를 말하는 줄 알았다. 영화관에 가자는 말인줄 알았다면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내 눈 앞에 티켓 두장을 흔들어 보이는 미국인의 발랄한 얼굴을 보며 나는 난처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어플로도 예매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지류 티켓으로 끊어와 내미는 그의 정성과 낭만을 거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그닥 내키지 않았지만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언젠가의 기억처럼 커다란 팝콘통을 품에 안고 영화관 좌석 맨 뒷자리에 몸을 구기고 앉았다. 함께 모자를 눌러쓴 미국인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유없이 웃음이 났다. 나와 함께 킥킥대던 미국인은 조명이 꺼지고 주변이 어두워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 뺨에 입을 맞춰댔다. 그만하라고 머리를 밀어내도 계속 장난을 치는 그의 행동에 웃음이 터져서 나는 급하게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조금 아까 A로부터 티켓을 받아들었을 때,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미국인의 짧고 간결한 문화적 소양을 미루어 짐작했을 때 화양연화나 중경삼림같은 걸작은 아닐테고, 그저 최신 영화 중 하나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 생각 없이 받아든 티켓에 쓰여진 제목은 007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체통도 교양도 없이 입을 크게 벌리고 팝콘을 한웅큼씩 집어먹었다. 반은 입으로 들어가고 반은 허벅지 위로 굴러떨어졌다. 내 어깨에 팔을 두른 미국인이 킥킥대며 내 다리에 붙은 팝콘을 자기 입에도 넣고 내 입에도 넣었다. 나는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신이 나서 어쩔줄을 몰랐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사랑하는 사람이 보였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두 남자가.









레화블 알렉스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