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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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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ㅈㅈㅇ ㅇㅌㅈㅇ







집을 보고 돌아 온 이후 내내 가라앉아 있는 크리스였다. 브래들리는 생전 해본 적 없는,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며 조심히 행동하는, 말도 안 되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찬바람 쌩 불게 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조금 건조해진 것 뿐인데 브래들리는 왜인지 안달을 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워지기 전에도 늘 부드럽기만 했던 크리스라.

저녁을 먹고 약속하지 않아도 거실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다 각자 방으로 들어가던 패턴이 깨졌다. 말 없이 사라진 크리스는 주말에 있을 공연 연습을 하는 모양인지 안 쪽 복도의 센서등이 켜져 있었다.

브래들리는 막다른 벽 앞에 선 것처럼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5분이었던가, 등이 자동으로 꺼질 때까지 복도 끝 방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보고 있으면 크리스가 나와주기라도 할 것 같아서.




- 어. 왜.
"목소리가 왜 그래?"
- 아냐, 왜.
"폴한테 연락왔더라. 집 보러 다닌다며."
- 응...

브래들리가 말꼬리를 죽 늘여 대답을 한다. 형님 된 도리로 무슨 일 있냐, 안 물어 볼 수 없게 티를 내는 막내다.

"뭔데. 이사하려고?"
- 당장은 아니고 사서 고쳐 놓을까 했지.
"그래서 사기로 했어?"
- 크리스가 싫대서 당분간 보류.
"왜, 같이 살기 싫대?"
- 지금 우리 집이 좋대. 큰 집도 싫고, 그걸 지금 받는 건 옳지 않대.

지금 우리 집이라니. 벌써 같이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받는다는 말은 무슨 맥락에서 나왔을까.

- 오메가는 원래 다 저렇게 어려워?

이건 또 무슨 소리? 에드워드는 처음부터 차근히 말해보라 일렀다.

- 어차피 걔한테 줄 것도 있고, 요즘 하는 짓이 이뻐서 그 집을 제 앞으로 사준다고 했더니 딱 잘라 싫다잖아. 내가 말을, 너 이뻐서 주는 거 아니고 절세 때문이라고 하긴 했는데.

얘 또 브레이크 끊겼네. 중간 어디갔어. 에드워드는 그나마 크리스가 상식적이라 다행이다 생각하며 이마를 짚었다.

- 그렇게 질색 하는 거 처음 봤어. 뭐 싫다고 한 적도 없는 앤데. 아, 아침에 내가 좀 성질을 내긴 했어.. 그것 때문인가? 조엘이 주물거리는 걸 가만히 받아주는데 그걸 그냥 넘어 가는 게 맞아? 나랑은 내외하느라 저 만지지도 못하게 하면서.
"......"
- 조엘한테 한마디 하려다 크리스가 우리 결혼 비밀로 하고 싶어하는 거 생각해서 참았어. 기분도 풀 겸 주겠다는 것도 싫다지, 거절은 지가 해놓고 뾰루퉁 해 있어.
"조엘이 아무렴 주무르기야 했겠냐."
- 내 눈으로 봤다고.

브래들리가 평소에 미주알고주알 제 일을 이르는 녀석도 아니고, 웬만하면 다 듣고 도와주려던 에드워드였지만 듣다보니 점점 제 전공 밖의 문제가 되어갔다.

- 안 그러던 애가 저러니까 진짜.. 속을 모르겠다. 형 생각은 어때.
"글쎄. 나도 연애는 별로 안 해봐서."
- 내가 지금 연애 얘기 하는 걸로 들려??
"어. 완전."
- 하, 됐어. 끊어.

뚝 끊긴 전화가 황당하다. 그 덕에 진짜 용건은 전하지도 못했다. 제니퍼 출국 앞당겨 졌다고 몰래 말해주려 했는데. 뭐 냅다 끊은 건 브래들리 쪽이니 알아서 하겠지.




에드워드와 통화를 끊고 한참이 지났음에도 크리스는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혹시 제 방으로 돌아갔나 싶어 노크 없이 문을 열었는데, 기타를 끌어 안고 발 끝 언저리를 보던 고개가 반짝 들렸다 떨어진다.

"미안. 방해 했어?"
"아.. 아니요, 아니에요."
"너무 안 나오길래 자러 간 줄 알았어."

숨을 들이키는 소리에 분명 흐느낌이 남아 있는 걸 들었다. 크리스는 고개를 고집스레 숙이고 있더니 아예 뒤돌아 주변을 정리한다. 브래들리는 문간에 발이 붙어버렸다. 제 앞에 다시 한 번 투명한 벽이 세워지는 느낌이다. 울고 있었을까. 정리가 끝났음에도 크리스는 뒤를 돈 채로 밍기적거린다. 얼굴 보이고 싶지 않은 거구나.

"크리스."
"네.."
"아냐. 잘 자."

물러나는 게 맞겠지. 감추고 싶어하는 표정을 굳이 들춰보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날을 세우면 받아주기라도 할텐데. 혼자 울만큼 마음이 상했다 생각하니 가슴 한 쪽이 아렸다. 아침의 크리스처럼 내가 뭘 잘못 했는지 알려주면 안 그러겠다 말하고 싶은 심정이 됐다. 그 말 조차,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브래들리는 잠을 설쳤다. 일이라던가, 호르몬 때문이 아니었다. 답이 제대로 안 나와 잠도 안 오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래, 물어보자. 혼자 추측하고 행동하다 크리스를 더 상처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깊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었고, 아침에 늦게 눈을 떴다. 그래봐야 평소 기상시간과 별 차이 없었지만 보통 아침 식사를 크리스와 같이 준비했기에 브래들리는 아직 몽롱한 정신이나마 주방으로 나갔다.

저를 반긴 건 기척 없는 집 안과 식사가 차려져 있는 테이블이다. 디쉬 커버 위를 더듬으니 따뜻했다. 아침을 먹으면서 풀어보려 했던 계획도 무산이다. 크리스가 차려 놓고 나간 식탁 앞에 홀로 앉았다. 브래들리는 비어 있는 앞 자리를 낯설어 하는 자신이 더 낯설다. 먼저 나가는 사람만 들을 수 있는 특권이었던 다녀오세요 라는 말도 없다. 딱 오늘 하루임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허전했다.




크리스의 기분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하루가 더 지났지만 두 사람 주변에 고인 공기는 푸석해져만 갔다. 따지고 보면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하루고, 감정 곡선은 오히려 차분하지만 브래들리는 알 수 없는 갈증을 느낀다. 꼭 산소 포화도 부족으로 갑갑한 것도 같은.

묻는 말에 대답도 하고 밥도 꼬박 같이 먹지만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표정에 드러나던 순수한 감정들이 온데간데 사라졌다. 브래들리는 그간 자신이 크리스의 얼굴과 표정을 살펴 보는 걸 꽤나 즐기고 있었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집을 주겠다 했을 때, 브래들리가 기대한 건 놀랐지만 쑥쓰러워 하면서도 기쁘게 받아주는 그 표정. 귀엽게 붉어지는 얼굴. 그것 뿐이었는데. 어딘가 많이 잘못 되었다. 초조해 하는 제 꼴이 우스울 따름이지만, 그를 다그쳐 묻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대책이 시급하니 머리 한 쪽에 메모해 두었던 걸 떠올린다. 선물이랑, 맛있는 음식. 그 돌멩이랑 오리 요리 따위를 그렇게 좋아 했었지. 답이 안 나오는 이유는 내려두고 다른 개선 방법을 찾는다.


"어머니."
- 무슨 일이니. 전활 다 하고.
"그 때 크리스가 좋아했던 오리 요리 레시피 가르쳐줘요."

"내가 해보려고." 제 말에 전화 저 편에서는 잠깐의 정적에 이어 웃음소리가 들렸다. 브래들리는 짜증이 팩 솟는 걸 참는다. - 아서라. 해서 보낼테니까. "내가 해야 의미가 있어." - ....별 일이구나.

재료와 함께 레시피를 받기로 하고 통화는 끝이났다. 다음은 선물인데, 그 선물 때문에 이 꼴이 났으니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크리스의 취향 파악이 덜 된 것도 문제다. 진짜 괜찮은 건지, 브래들리에게 맞추느라 괜찮다고 하는 건지. 조금 더 관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싫다는 말도 못하는 착한 심성인 애가 저렇게까지 마음이 상한 이유가 무얼까. 브래들리는 특별한 선물을 하기보다 그냥 평상시 크리스가 필요할 법 한 것들을 사두고 마음에 드는 것만 가지라고 할 작정이었다.




다음 날 브래들리는 크리스로부터 아침 인사를 받았다. 기를 써 받아냈다는 말이 맞다. 그는 자신이 아주 객관적으로 그 상황을 계산하고 선택했다 생각한다. 꼴이 우스워지는 것보다, 인사 없는 아침으로 선뜩한 그 순간이 더 신경을 당겼기 때문이다. 작정한 만큼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다녀오겠습니다아.." 대답과 함께 눈가를 접는 웃음은,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게 달았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자신도 기꺼이 입 속으로 넣을 달콤함이었다. 닫힌 문 앞에서 문득 욕심이 들었다. 저 웃음이 제게 이벤트가 아닌 일상이었으면 하는 욕심.

데이빗에게 늦은 출근을 통보하고 차를 돌리면서 각오를 다졌다. 오늘 안에 크리스의 기분을 풀고 말겠다는. 기실 유난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걸 부정할 마음이 들지 않는 것부터가 어머니 말씀대로 별 일이었다.

어머니께 삐딱하니 굴고 돌아오면, 네 엄마 며칠 잠을 설친다며 니 덕에 나도 못 잔다 불평하시는 아버지께 이제 그만 각방을 쓰시라 투덜댄 적이 있었다. 다른 방을 써도 사랑하는 사람이 잠을 설칠 일이 있으면 같이 못 자는 거라고, 넌 결혼 안 해봐서 모른다 하셨지. 브래들리는 그것 참 계속 모르고 싶다 대꾸했더랬다. 그렇게 공간 뿐 아니라 사유와 감정도 공유하게 되는 것. 그 언젠가의 대화가 왜 하필 지금 떠오르는지 모르겠다가도, 또 알 것 같았다. 가슴에 이상한 파동이 일었다.

생각의 환기를 위해 켠 카오디오에서 베르디의 오페라가 흘러나왔다. 리골레토의 Caro Nome. 젠의 취향이었다. 젠은 주말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 브래들리도 잊고 있었던 사실이다. 속절없이 희미해지는 관계를 마치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자신이 허망하면서도 묘한 후련함이 들었다. 내리막의 시작이 된 다툼에서부터 장기 출장이 바로 다음 주인 지금까지, 그녀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확인한 브래들리다.

내 마지막 숨결까지, 그리운 이름, 당신의 것이에요. 남자에게 속아 사랑에 빠진 가엾은 여인은 결국 그 대신 목숨을 빼앗긴다. 브래들리는 더 듣지 않고 아리아를 멈췄다. 정말로 자신들 사이에 제 고집만 남았는지는, 끝까지 가보면 알겠지. 재생목록을 아예 넘겨 버리며 그녀와의 줄다리기도 내일로 미룬다.




자동차 뒷좌석을 쇼핑백이 채웠다. 잃어버렸다는 시계는 페이스가 적당히 크고 부드러운 가죽 스트랩의 매니시한 디자인을 골랐다. 왜인지 발목 위로 짧게 올라오는 파자마를 입고 있던 게 생각 나 겨울용으로 한 세트, 이전 집에 두고 와 침대가 허전 했을테니 기린 모양 바디필로우, 허니가 준 셔츠보다 더 잘 어울릴 연노랑과 푸른색 셔츠 두 벌, 녹색 이파리가 작게 수놓아진 남색 타이, 둘이 나눠쓰고 있는 것을 대신 할 같은 디자인의 색만 다른 앞치마 두 개, 브래들리와 같은 브랜드의 폰 케이스, 마지막으로 잎 모양이 특이한 관엽식물 화분은 앞좌석에 실었다. 너무 사소해 이런 걸 누군가를 위해 고른 것도 처음이었다. 선물이라 말하기 우습지만 저 생각해서 산 것들이니 그런 말로 포장은 필요할 성 싶다. 사실 바꿔주고 싶은 것들이야 많았는데 또 갑자기 안겨주느니, 크리스의 취향 존중을 위해 함께 고르는 게 나을거라 판단했다.

늦은 출근에 반차까지 쓰겠다니 직권남용이 지나치시다며 데이빗이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브래들리가 혀를 차며 크리스에게 메세지를 전송했다. [퇴근하고 집에서 저녁 먹자.] [네 :)] 텍스트 끝의 웃음 표시에 아침의 크리스를 떠올린다. 제 다급한 행동에 크게 떠졌다가 사르르 접혀 내리던 눈꼬리가, 영화적 장치 처럼 느리게 재생 되었다가, 또 멈춰 있다가. 내내 어른거리며 따라다니는 게, 브래들리는 자신에게 묻고 싶기까지 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원하는 게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냐.

실물을 문 하나 너머에 두고 이러고 있는 게 괜히 심술이 나 내선 전화로 호출했다. 부르셨어요? 하며 들어오는 순한 눈과 목소리에 짐짓 심각한 척 가까이 오라 손짓한다. 긴장하며 입술 끝을 모으고 다가 온 얼굴에 브래들리의 연기는 얼마 못 버틴다. "그냥. 이거 먹으라고." 어리둥절한 기색을 다 지워내지 못한 크리스가 데스크 바로 앞까지 왔다. 약간의 홍조를 띈 뺨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알지만, 크리스의 기분이 다 풀릴 때까지 참아야 하는 것도 안다. 초콜릿 박스를 넘겨주며 나눠주지 말고 너 혼자 먹으라는 말을 덧붙인다. 크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는 걸, 그렇게 내보내기 싫어졌다.

다시 반복되는 물음. 그래서 어쩌고 싶은데. 머리가 가슴한테 묻는 건지, 가슴이 머리에게 묻는 건지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저녁에 뭐 먹을까."
"파스타 할까요?"
"그러자."

파스타 쯤이야, 오리를 구워 놓고 충분히 할 수 있지. 평소라면 괜히 고민하는 척 하며 크리스를 놀렸겠지만 브래들리는 여즉 아침의 그 눈웃음에 미련이 남아 빠르게 긍정한다. 그걸 다시 볼 때까지 자문은 반복 될 것만 같았다.




브래들리의 실패를 대비해 어머니는 재료, 레시피와 함께 완성된 요리도 보내셨다. 허.. 이런 대비와 철저함으로 회사는 어머니 손에서 열 배 이상 몸집을 키운 거겠지. 레시피만 잘 따르면 실패할 이유가 없는 요리 아닌가. 보란듯이 성공할 생각이었다. 선물들은 대충 크리스가 둘 법한 자리에다 가져다 놓았다. 선물을 전하는 기쁨이야 익히 알고 있는 브래들리지만 이런 건 또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크리스가 앞치마를 두른 브래들리의 뒷모습을 보고 벌어지는 입을 가렸다. "브래들리??" 브래들리는 구운 오리를 오븐에서 꺼내느라 현관에서 그를 맞지 못 한 걸 아쉬워 했다.

"어, 다녀왔어?"
"와....네... 다녀왔어요..."

식탁 위를 본 크리스는 가방을 벗는 것도 잊고 브래들리와, 막 굽혀 나온 오리를 번갈아 가며 보고 있었다. "옷 갈아 입고 손 씻고 와." 브래들리의 말에 크리스는 방으로 거의 달려갔다. 침대 위와 방 곳곳에 못 보던 물건들이 있었지만 일단은 지나친다.

브래들리가 파스타를 할 때면 크리스도 옆에서 재료를 써는 등 돕곤 했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할 게 없었다. 크리스는 안절부절 브래들리 옆을 맴돌았다. "브래들리 오늘 무슨...날이에요?" "날이지." 브래들리는 완성된 파스타를 크리스가 내미는 접시에 옮겨 담으며 대답했다. "무슨 날이에요?" "너 기분 풀어야 하는 날."

"네에??" 놀랐는지 높아진 목소리 끝이 튀었다. "어때." 브래들리가 식탁 위를 턱짓한다. 크리스는 잠깐 머뭇거리다 비장하게 말했다. "완전 맛있어 보여요."

오리는 겉모습만 보기엔 아주 성공적이었다. 크리스는 자청해서 사진을 찍고 어머니께 전송했다. 브래들리는 큼지막히 잘라낸 조각을 접시에 옮겨주며 당부한다. "오늘은 진짜 억지로 말고 적당히 먹어." 크리스가 좋아하는 샴페인까지 곁들여진다. "오늘 제 생일 해야될까봐요.."


남자 두 명이서 거뜬히 모든 접시를 비워냈다. 크리스는 먹는 내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브래들리도 대놓고 뿌듯한 티를 냈다. 식탁을 정리하며 냉장고 속의 다른 오리를 발견한 크리스에게 브래들리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나야, 엄마야?" 크리스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고민하는 척 해본다. "너무 박빙인데요.. 아무래도 오리지널리티가 있어서..." "이럴수가." 크리스가 히히 소리를 내며 웃는다. "농담이에요, 저 진짜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건 줄 알았어요." 나란히 서서 주방 정리를 했다. 새로 산 앞치마를 크리스에게 둘러주니 저와 똑같은 디자인인 걸 보고 민망한지 눈을 슬쩍 피한다. 극구 혼자 도맡겠다는 걸 브래들리는 오븐만 닦기로 합의를 봤다. "어떻게 요리도 잘하세요?" 크리스의 물음에 브래들리가 기름이 튄 내부를 닦으며 이야기를 풀었다. 요리를 시도하게 된 건 파리에서부터 였는데, 유명한 파인 다이닝에서 해산물 요리를 먹고 배앓이를 크게 했었다. 그 일대 레스토랑들을 불신하게 되면서 하나둘 씩 직접 해 먹는게 늘어났고, 재미를 붙여 한동안 심취해 있었다, 는 사연. 크리스로부터 대단하다는 말이 돌아온다. "저라면 그냥 다른데서 사먹었을거에요." "나름 스트레스 해소가 됐어." "진짜 생산적이네요." 더 추켜 세워주는 말에 브래들리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별 게 다 귀엽기만 해서.

정리를 끝내고 뒤늦게 디저트라며 홀케익을 내밀었다. 샴페인이 세 잔째 따라지니, 케익 끝을 쪼개던 크리스가 정색까지 해가며 감사하다 말한다.

"저 생일때 보다 잘 먹었어요. 케익까지 있구.."
"그럼 다음 생일이 부담스러워지는데. 더 맛있는 거 해야겠네."
"앗, 아니 그런게 아니라요..!"
"알아. 사실 나도 할 말 있어서 잘 봐달라는 의미의 뇌물이었어."

브래들리의 말에 크리스가 물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는다. 되려 긴장한 표정이다. 대충 넘길 생각은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이렇게 진지해질 줄도 몰랐기에, 말을 고르려다 침묵이 길어졌다. 달지 않으니 먹어보라며 크리스가 잘라준 케익을 맛본다. 제 입에는 달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저번 일, 미안해."
"........"
"네 마음이 왜 그렇게 상했을까 계속 생각해 봤는데. 취향이 아니었나, 너 예뻐서 주는 거 아니라고 한 말 때문에 그랬나. 아직까지 잘 모르겠어."

오늘도 약 때문에 샴페인은 건너 뛰었다. 자신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지만, 혹 술기운을 빌렸다면 크리스가 좀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 말 때문은 아니에요. 안 예쁜데 집을.. 주려고 하진 않으셨겠죠."

고개를 작게 저은 크리스가 눈을 조용히 마주치며 대답했다. 저 맑은 시선이 닿아 올 때면 브래들리는 가끔 양가감정을 느낀다. 투명하게 자신을 다 내보이고 싶은 마음과, 순수한 만큼 변하기 쉬운 저 빛을 잃게 될까 전부 감추고 싶은 마음.

"아! 저를 예뻐 하신다는 거는 아니구요.."
"예뻐 하는 거 맞아."
"........"
"너 예뻐서 주려고 한 거야."

황급히 덧붙이는 말에 브래들리 또한 확실히 대답한다. 좋은 말로 구슬릴 줄도 모르는데, 적어도 마음에 없는 말로 오해를 불러 일으키진 말아야지. 크리스가 퍼뜩 손을 식탁 아래로 내렸다. 시선은 케익 위로 떨어진다. 크리스는 의외로 칭찬이나 좋은 말에 약했다. 남한테는 잘도 예쁜 말을 하면서, 저는 매번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귀여우면서도 의아했다.

"저는 미리 준다 하셔서.. 그 계약에, 이혼 때 보상을.. 선물로 미리 받으라는 줄 알고.. 마음이 상한 건 아니구요.. 그냥, 조금 어지러웠어요.."
"이혼?"

주저하며 겨우 꺼내는 말이 기가 막혔다. 브래들리는 자신을 왈칵 덮친 감정에 이성이 잠시 비틀거렸다. 아주 예상 밖의 답이었다. 괘씸함? 배신감? 아니, 코드가 달랐다.

"아직 세레모니도 안 했는데, 이혼 생각을 벌써 해?"
"그...계약서에요..."
"아니. 너 잘못 이해했어. 계약 기간 이후에 대한 조항은 없어. 전부 그냥, 필요할 때 받는거야."

딱딱해진 브래들리의 음성에 크리스가 샴페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눈치를 봤다. 브래들리는 혀를 차지 않으려 입 안에서 깨물었다 놓는다. 에드워드 말처럼 일반적인 연애면, 이런 어려움은 없을터였다. 어렵기 짝이 없었다. 난이도를 꼬아 놓은 건 자신이고 감정이 끼여드는 걸 예상 못한 것도 자신이다. 그리고 이 울렁이다 못해 넘치려는 감정은 분명, 서운함이겠지.

제 표정을 살핀 크리스의 눈썹이 끝도 모르게 쳐졌다. 조마조마해 하며 눈을 깜빡이는 표정에 브래들리는 또 맥이 빠진다. 말썽을 잔뜩 부린 후에, 야단 맞는 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워 계속 두고 보고 싶은, 아, 젠장.

감정이 통제권 밖으로 튀어 나가 기어코 표정이 흐느적 풀려 버린다.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린 브래들리가 숨을 크게 뱉어냈다. 어차피 제어 되지 않을 거, 감출 필요도 없어졌다.


"내 눈치 안 봐도 돼."
"......."
"크리스, 정말이야."
"화나실까봐. 제가 조심하려고..."
"화 안 났어. 그리고 화난 사람이 조심 해야지 네가 왜 조심해."
"그냥.. 저는 화내는 사람도 괴로울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조심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
"브래들리가 화를 내면 저는.. 걱정돼요."

화내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나를 걱정한다고. 믿고 싶지 않지만 진심이란 걸 안다. 착한 척 꾸미래도 저렇게는 못 할 테니까. 아무리 봐도 자신과 겸상하기엔 너무 선한 영혼 아닌가.

"너무 물러."

부드럽다 못해 물렀다. 그렇게 자기가 조심하고 끌어 안아서 받는 충격은 어쩌고. 대상이 모호한 거슬림이 신경을 갉작였다.

"다른 사람한테도 그래?"
"그건 아니지만.. 브래들리는.. 제 생각에 원래 그런 사람 같지 않아요."
"원래 그래."
"아니에요. 사실은... 마음은 안 그러세요. 다정하시니까."

살면서 성격 나쁘단 소리는 숱하게 들어봤어도 그 반대는 처음이다. 네가 사람 보는 시선이 지나치게 너그럽고 예쁜 거지. 자조가 입 안에 맴돌았지만 브래들리는 더 간지러운 소리가 나오기 전에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한다.

"그래. 남편이 좋게 봐줘서 다행이네. 너만 잘 봐주면 돼."

크리스는 또 무언가 말하려고 오물거리던 입술을 꼭 깨문다. 네가 망설이다 못한 말을 내가 항상 아쉬워 한다는 걸, 너는 알까.


"아무튼 이혼은 당분간 생각하지 마. 지금은 떠올릴 문제가 아냐."

말하고 보니 또 서운함이 사무친다. 크리스가 그런 생각으로 복잡했을 줄은 짐작도 못 했다. 시작과 끝이 다 제 몫일거라 여겼던 오만함에 허를 찔렸다. 아무렴 크리스도 지금 자신만큼 서운하진 않았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서운하네."
"네?"
"어떻게 이혼 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냐."
".....근데, 보통..집을 선물로 주고 받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그런 크고 비싼 집은...누구나 특별한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할걸요..."

우물쭈물 하면서도 억울함은 숨기지 않고 말하는 크리스를 보며 브래들리는 오늘 한 모든 일이 옳은 결정이었음을 알았다. 물론 받아준 크리스 때문에 풀린 거지만.


"그 때, 너도 나처럼 서운했어?"

대답 없이 선선히 끄덕이는 고개에 어쩐지 쓸쓸한 기색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다.

"아침에 인사 없이 출근하고 회사에서 마주치면 도망 갈 만큼?"
"도망...아닌데.."
"이혼 보상일까봐 기타 끌어안고 울 만큼, 서운했었단 거지."
"....울진 않았어요. 그냥 연습하다가.."

"그래. 그럼 됐어."


첫 단추를 잘못 꿴 탓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 풀어내야 하는 것이 맞았다. 아직 제 자리 아닌 곳에 꿰인 단추가 남아 있을지언정 이혼에 대한 반응으로 보아, 크리스와 자신이 어느정도 비슷한 시작선에 있단 걸 알았다. 페이스 조절은 제 쪽에서 하면 된다. 브래들리는 이만함도, 상대가 크리스인 덕에 꽤 빠른 발전이라 여겼다. 이기고 지는 레이스가 아니라 얼마나 함께 뛸 수 있느냐가 관건이니까.

마주 앉은 이에게 시계가 든 케이스를 내미는 손은 더 이상 조심스럽지 않다.

"이런 건 '보통' 선물이지?"

브래들리는 어떤 실패의 가능성도 염두하지 않는다. 자신이 짠 이 레이스의 진짜 완주 목적은 잊어버린 듯 순간에 만족하고 있었다.
















프랫이 몇 바퀴 앞서 있는지도 모르는 눈새... 뿌팀장 에고가 너무 강해서 눈새력에 버프받는 타입인

뿌꾸프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