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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4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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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노부유키가 이전 황권을 몰아내고 새 황제로 자리하기까지가 평탄하였다면 거짓말이었다. 아무리 무능력한 황가였다 하여도 황제의 기사단을 둔 권력의 최고봉이었다. 그들의 정통성을 이겨낼 강력한 권력을 다지기까지, 스즈키는 단 하루도 편히 쉬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스즈키는 단연코 그 시절보다 요 사이의 마음이 더 거칠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미야무라가 건넨 초상화를 받아든 순간부터 스즈키는 머리 속이 매일 뒤집히는 듯 하고 감정이 미친듯이 날뛰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스즈키가 집권한 이래로 강력한 황권을 다잡기 위해 중앙은 물론 지역의 귀족들을 만나는 일은 다소 줄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황금궁을 돌볼 일은 충분히 많았다. 업무에 익숙해진 마치다는 처음에는 집사장과 함께 자신을 찾더니 이윽고 홀로 스즈키를 만나러 왔다. 매번 일정한 시간에 오는 탓에 마치다가 자신을 찾아올 때가 되면 스즈키는 집무실의 사람을 물리고 시계를 가만 바라보았다.

 

“황비는 배움이 빠르군.”

“감사합니다.”

 

황비가 웃을 때 입가의 끝이 옴폭 패였다. 작은 웃음이 입가에 고인다. 스즈키의 시선은 마치다의 눈에서 입가에 잠시 머물렀다.
 

미야무라가 어떤 뜻으로 노보루를 보냈는지 알고 있다. 미야무라는 마치다를 만난 적이 없지만, 스즈키가 마치다를 잃고 제정신이 아닌 순간부터 그를 보필했다. 그러니 10년이 지났음에도, 이제는 마치다를 기억하는 이가 없음에도, 미야무라는 굳이 노보루를 보낸 것이다. 미야무라는 현명한 눈을 가졌다. 과연, 고작 10년은 스즈키의 상처가 아물 수 없는 시간이었다.

 

“혹여라도 업무가 부담이 된다면 말하게.”

“아니에요. 이제 손에 익어서 금방 끝낼 수 있는 걸요. 더 도울 일은 없을까요? 아니면…”

“충분해.”

 

스즈키는 저도 모르게 확연히 선을 긋는 말투로 답했다. 황비는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가 곧 말끔히 인사를 올리고, 뒤를 돌아 방을 나섰다. 놀란 감정을 숨키듯 씩씩하게, 마치 기사 같은 걸음걸이로.
 

그의 걸음을 보고 있으면 스즈키는 케이의 유령이 황궁을 떠도는 듯 했다. 차가운 북부의 땅에, 시체조차 찾지 못하고 이름모를 눈산에 묻혀 외로웠을까. 그래서 영혼이 남아 돌아다니나.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움직임 하나 하나에 케이가 떠오를 수가 있을까.
 

불현듯 치밀어오르는 감정이 분노와 닮아 있었다. 스즈키는 애써 감정을 눌러담았다. 펜을 쥔 손은 한동안 잉크로 종이를 더럽힐 뿐 아무런 글씨도 쓰지 못했다.
 

황비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스즈키는 되뇌었다. 황비는 케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황비는 케이의 자리를 뺏은 게 아니다.


*

 

“휴, 큰일 날 뻔 했네.”

 

자신도 모르게 일을 더 청할 뻔 했다. 신하된 버릇이 어디 안 가는 걸까. 스즈키가 그를 빨리 내보내 다행이었다. 오늘은 마치다에게 중요한 약속이 있었으니.
 

아름답게 자수와 프릴이 수놓인 의상에 불만은 없었지만, 움직이기 편리한 훈련복을 입자 마치다는 전에 없는 상쾌함을 느꼈다.
 

간단히 운동을 하는 줄 알았던 고토는 마치다가 연무장으로 향한다고 하자 눈에 띄게 놀란 눈을 했다. 귀족 가문에서 어느 정도의 소양을 위하여 검을 배우는 일은 흔했다. 물론 오메가에게 검을 잡게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마치다 스스로도 검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에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은 그만큼 중요했다. 유이치와 이런 일들을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해 가면 좋겠지. 마치다는 들뜬 걸음으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무색하게, 마치다와 유이치는 연무장 입구에서 한 남자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왜 들어갈 수 없다는 거지?”

“황태자께서 검에 가까지 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입니다.”

 

명령까지? 이것은 단순히 검을 가르치길 미루는 정도가 아니었다. 연유는 알 수 없었으나, 스즈키는 유이치가 아예 검의 근처에도 갈 수 없도록 했다.
 

마치다의 옆에서 혹시나 하는 기대로 발갛게 뺨을 물들이던 유이치의 고개가 떨어졌다. 티는 내지 않아도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스즈키 노부유키의 피를 타고난 아이이다. 대륙을 제패한 아버지와 같이, 검을 선망하는 마음이 어떻게 없을까.
 

마치다는 유이치의 손을 꼭 쥐었다. 다시 자신을 가로막은 이를 바라보았다. 귀족들은 잘 알지 못해도, 오랜 기사 생활로 인해 여러 타입의 기사들을 봐 온 마치다였다. 가령, 눈 앞의 단정한 차림의 남자는 기사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고지식한 타입의 기사로 보였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지?”

“황실 근위대장 아몬 코타로입니다.”

 

아…! 마치다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탄성을 뱉었다. 그렇다면 이 자가 아몬 가의 장자인 모양이구나. 이미 홀로 친밀감을 느낀 마치다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그를 떠보았다.

 

“아몬 경, 폐하께서 나까지 들이지 말라고 명하시진 않았겠지?”

 

아몬은 눈에 띄게 당황한 눈으로 마치다를 바라보았다.

 

“… …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검을 잡지 않더라도, 연무장엔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닌가? 황태자가 이 궁에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있나?”

“… 없으십니다.”

 

마치다는 당당히 웃어보였다.

 

“그렇다면 경께서 여기서 우릴 막아 세울 이유는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 …”

“태자께 검을 드리진 않을 테니, 걱정 말게. 내가 곁에 있는데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아몬은 묵묵히 마치다의 말을 듣더니 결국 몸을 틀어 비켜주었다.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남자이니만큼, 역으로 원칙에서 어긋난 점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명령을 고수하진 못할 터이다. 황비라는 지위를 무시하지 못하는 그의 성미 역시 마치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마치다는 태자에게 싱글 웃어보이며 그와 함께 연무장 안으로 향했다.
 

아이는 훈련하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이미 들떠 보였다. 사실 들뜬 것은 마치다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는 익숙한 풍경들이었다. 여태 혼란스러운 일 천지였는데, 마치 죽기 전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기사 가문이었던 마치다는 아이를 가진 순간부터 혼자 간직해온 작은 꿈이 있었다. 자신의 가문의 검법을 자신의 아이에게 가르치는 일이었다. 마치다 가의 검술은 검무와 같이 부드러우면서도 날렵한 매력이 있어, 일찍이 공식적인 대련이 있을 때마다 수많은 환호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니만큼 마치다 가문의 검법을 길이 남기는 일은, 마치다에겐 큰 의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르치기 위해선 우선 흥미를 느끼는 일이 중요하니, 마치다는 유이치의 앞에서 검을 잡았다. 다만 마치다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은, 노보루의 몸은 늘상 단련해오던 마치다의 몸과 비교하면 연약하다는 점이었다. 검을 든 순간 느껴지는 예전과 다른 무게감에 마치다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천천히 하면 괜찮겠지…’

 

마치다는 우선 간단한 기본기를 보이기 위해 힘을 다졌다. 익숙한 자세가 나오자 유이치의 눈이 반짝였다.
 

몇 차례 검을 휘두르자 노보루의 몸에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의 몸은 연약해도 젊은 힘이 있었다. 공중을 베어내는 기분은 모처럼이라, 마치다는 점점 신이 나기 시작했다. 무리겠거니 싶었던 동작들도, 힘이 나기 시작하니 곧잘 이어졌다. 태자는 물론이거니와, 알려진 것이 전혀 없는 소문의 황비가 의외의 검술 실력을 보이자, 훈련 중이던 기사들의 주목도 느껴졌다.
 

한 차례 움직임을 멈추자, 태자가 신이 나서 뛰어왔다.

 

“대단하세요, 전하! 칼이 바람처럼 날아다니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대단치도 않은걸.”

“전하께서는 겸손하시군요. 이런 멋진 검법은 폐하가 선보이신 이래로 처음 보는 걸요!”

 

마치다는 신나서 조잘거리는 아이를 뿌듯이 바라보았다. 역시나 유이치는 검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검을 보는 눈도 있으니 배움에 속도가 붙을 것이다. 황제의 명이라 하니 검을 쥐게 할 수는 없지만, 아이가 흥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언젠가 황제에게 청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마치다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황제가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마치다보다 일찍이 황제를 알아챈 유이치가 인사를 올렸다. 막상 그를 이곳에서 만나니 불안한 모양이었다. 마치다 역시 유이치의 곁에서 인사를 올리며 흘금, 스즈키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그저 가만히, 마치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황금빛 눈은 여전히 차가울 뿐,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내비치지 않았다. 황제의 위엄이 느껴지는 동시에, 이곳이 아닌 아득히 먼 곳을 살피는 듯한 얼굴이었다.
 

조용한 긴장이 이어지자 발목이 조금씩 저려왔다. 여태 들떠 잊고 있었는데 무리하긴 한 모양이었는지, 마치다 자신도 모르게 옅은 신음성을 뱉으며 자세가 조금 흔들렸다. 그제서야 황제가 고개를 들라 말하였다.

 

“근위대장.”

 

황제의 부름에 아몬은 황제의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벌어진 일에 마치다는 자신도 모르게 헉, 하고 소리를 냈다. 스즈키가 스스로의 손으로 직접 아몬의 뺨을 때려 체벌한 것이다. 엄청난 소리가 날 정도로 센 타격이었는데 아몬은 흔들림 없이 그의 체벌을 받아들였다.

 

“폐,폐하!”

“몸도 성치 않은 황비가 무리하도록 두다니, 신하가 되어서 어찌 가만 지켜보기만 했지?”

“아닙니다, 폐하! 전적으로 제가 …”

“황실을 보호하는 근위대장의 의무를 잊은 건가, 아니면 황비를 무시하는 건가?”

“폐하, 제 말을 들어주세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아몬은 아무런 변명도 없이 상체를 깊이 숙였다. 그런 아몬을 가만 노려보던 스즈키는 마치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다는 억울함을 항변하려 하였으나, 그 사이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듯 변한 스즈키의 눈에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이곳은 황비께서 올 만한 곳이 아니니, 앞으로 발걸음 하지 말게.”

“폐하…!”

“이건 걱정이기도 하지만, 명령이기도 하니.”


새겨듣도록 하고. 그 말만 남긴 채 황제는 연무장을 나섰다. 몰아친 사건에 정신을 못 차리던 마치다는 괜찮으시냐는 유이치의 물음에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누구보다 놀랐을 아이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마치다를 챙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제일 먼저 안쓰러움이 차올라서, 마치다는 아이를 품에 끌어안아 그를 가만 다독였다.



*

 

“세상에, 전하! 얼마나 무리를 하신 건가요?”

“그런 건 아닌데…”

“얼른 차를 내올게요!”

 

마치다는 유이치를 달래 돌려보낸 뒤 겨우 몸을 가누어 동궁에 도착했다. 그가 돌아오자 고토는 호들갑을 떨며 딱 알맞은 온도로 차를 내왔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나자 그제서야 마치다는 자신의 몸이 놀랐었음을 깨달았다.
 

마치다는 스즈키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다정했으니까. 북부의 추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태양을 닮은 남자였으니. 그의 따뜻한 시선에 익숙해졌던 탓에, 불같은 분노의 눈은 두렵기까지 했었다.
 

스즈키가 두렵다니. 스즈키가 무서운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여러 사람을 통해 들어온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껏 마치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믿지 못했다는 편에 속했다. 이제서야 마치다는 다른 이들이 말한 무서운 황제의 실체를 알게 된 기분이었다.
 

10년이 흘렀으니, 자신이 알던 스즈키와 다른 사람이 되었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마치다는 스즈키의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을지 두려웠다. 자신이 알던 스즈키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사실 마치다 역시 스즈키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우울한 생각에 빠져있던 마치다가 제 뺨을 내리쳤다. 고토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우신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시려구요!”

“세게 때린 것도 아닌걸. 봐, 빨개지지도 않았잖아.”

 

감히 황비의 얼굴에 손을 대지는 못하는 대신, 고토는 가까이서 마치다의 뺨을 꼼꼼히 살피고서야 겨우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고토의 엉뚱함은 마치다의 기분을 전환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보다 발목이 조금 아픈데, 따뜻한 물에 담글 수 있을까?”

“지금 얼른 물을 가져올게요!”

 

고토가 후다닥 소리가 날 정도로 튀어나갔다. 마치다는 작게 웃으며 제 뺨을 내리쳤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검을 쥔 적 없는 손이 빨갛게 일어나 있었다.


'역시 검은 케이가 가르치는 게 좋겠어.'
'케이의 검은 보기만 해도 따라하고 싶을 만큼 예쁘니까.'
'분명 아기도 배우고 싶어할 거야.'


그땐 좋아해줬으면서. 마치다는 그대로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