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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7 23:59
헤어질 뻔하는 거 보고 싶다


원래 평생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 날 마침 송태섭 처음 나간 정식 대학리그 시합에서 좋은 성과 보임+그래서 술 좀 마심+태섭이 쪽은 새벽임+사랑하는 애인이랑 조곤조곤 통화하고 있으니까 기분이 막 고양되는 거임.. 그래서 그냥 말해버림..
술 마셔서 두서도 없음 걍
내가 중학교 때 지인짜 힘들었는데.. 그때 진짜 농구 그만둬야 되나 했거든요..? 이사 와서 그 동네 애들한텐 밉보였지, 공 튀기는 소리만 내도 주변에서 싫어하고, 엄마도 탐탁치 않아하시는 것 같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 자신이 없는 거예요 내 실력에.. 형처럼 무슨, mvp를 받은 것도 아니고..
그래도 그냥..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냥..연습하고 있었는데.. 그때 형 처음 만났어요. 아 혼자 하고 있었거든요? 안 끼워주더라고요 애들이.. 혼자 하고 있었는데 형이..같이 하자고... 아, 나 그때 진짜 쌀쌀맞은 꼬맹이였는데. 막 까칠하게 굴었는데도 이것저것 상냥하게 알려주고.. 나더러 진짜 잘한다고.. 아까운 실력이니까 혼자 하지 말라고 그리고, 또 하자고.. 다음엔 이겨보라고 그랬어요. 가나가와 이사 온 후로 나한테 그렇게 해준 사람 한 명도 없었는데... 진짜 형밖에 없었어요 그때는. 그래서.. 그때 형이 그렇게 해줘서 농구 계속 할 수 있었던 거고...어떻게 보면 지금 이렇게 미국까지 와서 잘 하고 있는 것도..형 없었으면......

그렇게 한참 얘기하고 있는데 초반에는 응, 그랬구나, 그래서? 하고 반응하던 정대만이 어느 시점부터 아무 말도 없음

....형?

하는데 전화 뚝 끊김. 잘못 걸었나 싶어서 다시 걸어보는데 받지도 않고.. 두어 번 더 전화했다가 혹시 잠들었나 싶어서 일단은 본인도 자러 감. 잠들었을 리가 없지.. 저쪽은 낮인데. 근데 취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송태섭
그리고 다음 날. 연락 안 됨.. 그렇게 일주일 내내 연락 안 돼서 송태섭 신경줄 타들어가는 게 보고 싶다. 주변 통해서라도 정대만한테 연락해보려고 하는데 북산 지인들 송태섭보다 훨씬 전부터 연락 안 됐었다고 함. 그 얘기 들을 쯤엔 거의 미쳐가고 있는 송태섭이라.. 진짜 자기 형편에 말도 안 되는 결정인 거 아는데 방학 되면 쓰려고 모아놨던 비행기 표값 털어서 한국으로 갔음 좋겠다
편지 주고 받으며 수십 번은 썼던 정대만 자취방 주소로 찾아감. 다행히 정대만이 여기 살고 있는 게 맞아보이기는 해.. 하기사 이제 고작 2주 지났는데 그새 이사를 가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안에 사람도 있는 것 같아.


형.
형 얘기 좀 해요.
문 안 열어주면 나 안 가요.
아니 안 가는 게 아니고 못 가요.... 나 가진 돈 다 털어서 온 거예요,
형이랑 얘기하려고... 그니까 대화 좀 해요, 문 좀 열어줘..

하는데
훨씬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금방 끽 하고 문 열림.. 사실 비행기에 앉아있을 때만 해도 지금이야 연락이 안 되니까 애 타는 거지 막상 얼굴 보면 화 날 것 같았는데..

화나긴 개뿔.. 살 내려서 바싹 마른 얼굴에 어딘가 무너질 것 같은 형 표정 보니까 그냥 안쓰럽기만 함. 심지어 머리 자를 정신도 없었던 건지 뭔지 두 번째로 만난 그날처럼 길게 치렁치렁 늘어진 머리카락에 혈색 안 돌아 창백한 얼굴 때문에 더 울고 싶어짐..




정대만.. 윈터컵에서 괄목할 만한 성적 보여줘서 국내 최고 라인에 드는 대학 갔고, 1학년 2학기에 바로 주전&스타팅 꿰참. 근데 그게 못돼먹은 선배들 눈에 잘못 찍히는 계기가 됨. 정대만 체력 이슈 있었던 거 인터하이 때 얘기고 윈터컵 때 다 극복한 거 비디오 조금만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거고 꼭 안 찾아봐도 이미 대학리그에서 괴물신인 소리 들으며 증명하고 있는데, 그걸 가지고 고딩 때 체력도 안 좋아서 헥헥거리던 앤데 돈 많은 부모 빽으로 들어왔다느니 하며 뒷말 돌고 갈구기 시작함.. 정대만 집 딱히 돈많은 집 아니고 그냥 평범한 가정집인데 없는 얘기까지 붙인 거임.
선배들도 선배들인데, 2학년으로 올라오면서 새로 바뀐 감독이 좀 답없는 타입임.. 벤치 빵빵한 강호 대학인 만큼 주전 선수들 무리 안 하게 제때제때 교체해줄 수 있는데, 정대만 교체를 안 해줌.. 벤치에 3점 슈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너만큼 정밀하게 쏘는 애는 없지 않냐느니, 걔네는 딱 3점슛 하나만 되고 너처럼 다 커버할 줄을 모른다느니 하면서 컨디션 안 좋은 날에도 무조건 무식하게 풀코트 출전시킴.. 근데 이게 이런 날이 너무 계속되니까 분명 강호 학교에서 뛰고 있는데도 옛날 무석중 시절에 원맨팀으로 뛰던 시절같은 컨디션이 된 거임.
이게 진짜 무서운 게.. 자기 고1 때 다리 다친 게 고등학교 부활동 첫 날이었단 말임. 그니까 사실상 무석중 시절 오버워크가 쌓여서 다친 거였음. 그래서 정신적으로 불안해지는 와중에.. 선배들은 또 어디서 정대만 무릎 얘길 들었는지 무릎 발로 차는 시늉해가면서 더 위협적으로 갈굼. 아직 진짜로 찬 건 아닌데 그걸로 인한 스트레스가 너무 심함.
근데 말했듯이 정대만 자취하던 중이라 주변 상황이 이런데 어디 기댈 데가 없는 거임.. 북산 친구들 부모님 다 가나가와에 계시는데 너무 멀기도 하고.. 갈굼 스트레스+빡센 출전 일정으로 진작에 연락도 끊겼음. 그나마 연락 계속 유지하고 있던 게 애인인 태섭이었음.. 그냥 걔 목소리 들으면 하루 힘들었던 거 다 녹고, 주변에서 아무리 갈구고 뭐라고 해도 송태섭이랑 통화하면서는 그래도 얘를 알아가기로 한 것만큼은 옳은 결정이었다 그거 하나는 분명히 내가 잘했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어서 위안이 됐음.
그런 와중에 태섭이가 첫 만남 얘기를 해준 건데..
초반 태섭이가 처음 가나가와에 왔을 때 많이 힘들었단 얘기 할 때는 그게 꼭 지금 자기 상황같아서 눈물도 핑 돌음. 근데 태섭이가 그때 자기랑 처음 만난 거란 얘기 듣고는 완전히 머릿속이 하얘지는 거..

자기가 관심있는 거나 사람에 대해서만큼은 눈치 빠르고 머리도 좋은 정대만.. 송태섭이 '우리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원온원하자고 한 것도 그 첫 만남 때문이다'까지 아직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바로 눈치 채버림.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원온원하자고, 지면 삭발이라고 했구나. 나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이걸 버튼으로 아슬아슬하던 대만이 멘탈 바스라지기 시작한 거임.. 왜냐면 정대만 기준 첫 만남은 송태섭이 소문의 다리 다친 mvp 알아보고 극딜 넣음-자기도 버튼 눌려서 과하게 보복함<<이었단 말임. 다리 부상 조롱한 건 악질적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쨌든 여러 사람 끌고 가서 한 명 괴롭히려고 한 시점에서 자기 잘못이고, 송태섭도 원래 그런 녀석이 아닌데 그때 무슨 힘든 일이 있었던 거겠지.. 지금 다 극복하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 됐다, 다 잊고 친해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음
근데 송태섭 말대로면 송태섭은 그냥 옛날의 좋았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용기내서 자기한테 친절을 베푼 건데 자기가 폭력으로 답했다는 거잖아. 그것도 지금의 본인처럼 외딴 곳에 떨어져 있던, 벼랑 끝에 있던 애한테.. 정대만은 그게 너무 끔찍한 거임.
이 얘기를 정신적으로 온전한 상태에서 들었으면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럼 우리 다시 만났을 때 네가 많이 속상했겠네.. 미안하다." 이런 식으로 반응할 수 있었을 텐데 스트레스 맥스에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황이라 사고가 그렇게 안 흐름. 안 그래도 대학 생활 점점 꼬이는 상황에서 그래도 내가 잘 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게 태섭이와의 관계였고 통화였는데 그것조차 기반부터 엉망이었다고 생각하니까 버티기 힘들어서 연락 끊어버린 대만이었으면 좋겠음.. 정신적으로 몰린 상황에서 너무 큰 정보가 떨어지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그냥 패닉이 와버린 거였으면
그때 송태섭 기억 못 한 것도 자기 잘못 같고, 그 '원온원하자'가 시비가 아니라 장난기 섞인 호의라는 걸 감지하지 못한 것도 자기 잘못 같고, 빤히 쳐다보는 눈이 마치 다리 저는 거 보는 것 같아서 괜히 키가 작네 어쩌네 괜한 상처 주는 말 했던 것도 그냥 그때 자기의 그 심보가 너무 싫고.....


그래서 정대만 송태섭 얼굴 보자마자 눈물 뚝뚝 흘리면서 한다는 말이

너는 내가 밉지 않아..? 나는 내가 미워... 끔찍해..

여서 연하 억장 와르르 될 것 같음.. 바로 와락 끌어안고 그날 하루종일 토닥토닥해줄 것 같음

진짜 하나도 안 밉다고.. 선배 알고 그런 거 아니고 모르고 그런 거 아니냐.. 오해할 만했다 그렇게 오해했으면 나라도 화났을 거다.. 그리고 어쨌든 결국 다시 돌아와주지 않았냐고, 나는 그거면 충분하다고.. 때린 거라면 이미 사과도 하지 않았냐, 나 진짜 다 잊었고 괜찮다고.. 오히려 돌아와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바로 미국으로 안 돌아가고 정대만 상황 안정될 때까지 한두 달 같이 있어줄 것 같음. 무리하는 거 알고는 매일 무릎 마사지 해주고, 북산 지인들한테도 연락 돌려서 자기가 미국 돌아간 다음에도 정대만이 의지할 곳 있게 해주고.. 상황 괜찮아지고 괴롭힘 줄어든 거 자기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야 돌아감. 갑자기 두 달이나 자리 비운 탓에 막 잘 풀리기 시작했던 송태섭 대학 농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후회 없고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거라고 생각하는 송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