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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0 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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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는 협회장의 은신처에 오기 전에 꼼꼼하게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준비를 해 두었다. 그 중에 '케이가 다친다'는 없었다. 사실 케이는 아마 본인이 다칠 상황을 가정했을 것이다. 꼼꼼한 사람이니까 그런 상황을 그리지 않았을 리 없었다. 다만 노부가 화를 낼 거라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겠지. 노부는 정말로 눈치가 없는 게 맞겠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당한 뼈아픈 배신과 야오토메가 말했던 대로 죄책감 때문이든 뭣 때문이든 노부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을 언제나 뒷전에 두고 다른 사람만 챙기며 사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는 사람을 마음에 들인 탓에 매일 그 한 사람이 말해주지 않는 것을 추측하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니 아마 케이가 다친다는 시나리오를 케이는 상정했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아몬이 케이가 다치자마자 모두의 순간이동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아몬은 타카하시 료헤이가 떨어뜨린 쪽지를 확인한 순간 준비하던 순간이동을 취소했다. 

그리고 노부는 지금 순간이동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이번 계획의 주 목적은 노보루의 구출과 타카하시 료헤이의 납치였지만 일행은 기회가 된다면 협회장을 없애는 것도 준비했었다. 그러나 그간의 사정을 듣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따로 있었고 협회장이 노부에게는 가해자였어도 그 자신도 피해자라는 걸 들었기 떄문에 바로 처분하자는 계획에 반대한 게 노부였다. 그러나 상의가 번개에 의해 파지직 타오르고 있고 드러난 케이의 가슴이 함께 벌겋게 타들어가는 걸 보는 순간 눈이 돌아가 버렸다. 머리가 뜨거워지고 눈 앞이 흐릿해졌다. 케이가 노부의 눈앞에서 죽을 뻔했다. 그 사실만으로 타카하시 료헤이나 협회장에게 가졌던 일말의 연민이 모두 다 사라져 버렸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스승을 만나서 각성하고 화염의 소환사로 살아오면서 많은 일을 겪었다.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일도 있었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게 되는 순간도 있었다. 분노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순간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든 것을 태워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에 휩싸였던 적은 없었다. 심지어 노부를 사랑하는 줄 알았던 협회장이 오로지 노부를 죽일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며 각인을 망가뜨리고 노부의 목을 조를 때도 이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았었는데 지금은 이성이 모두 날아간 기분이었다. 머리가 지나치게 뜨거워져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눈 앞이 하얗게 점멸하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어느새 노부의 온몸에서 불꽃이 타닥타닥 튀어오르기 시작했다. 분노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품 안에 부상을 입은 케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몸에서 불길이 치솟는 걸 막으려고 했지만 분노는 모든 판단을 마비시켰다. 

피닉스도 협회장 때문에 노부와의 각인이 끊어져서 혼란에 빠져 있었던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협회장에게 분노가 쌓여 있었는지 발을 구르고 날개를 퍼덕이면서 흥분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노부가 한 손을 들자마자 입에서 불길을 뿜어내며 협회장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부의 공격이 뻣어나가기 전에 노부의 품에 기대 있던 마치다가 빠르게 주문을 외자 빙결 드래곤의 입에서 방 전체를 얼려 버릴 듯한 차가운 기운이 먼저 쏟아져 나왔다. 케이는 몸을 제대로 일으키지도 못하면서도 타들어가는 가슴보다 더 새빨개진 눈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네가 감히 또 노부를 죽이려고 해!"

그 얼음 공격은 그대로 협회장에게 떨어졌다.

"그것도 내 눈 앞에서 노부를!"

협회장은 그대로 꽁꽁 얼어붙었다. 료헤이를 외치며 벌어졌던 입술을 채 다물지도 못한 상태였다. 노부는 케이와 합을 맞췄던 공격술이 있었다. 드래곤의 얼음 공격 후에 노부의 피닉스가 화염 공격을 펼치면 그대로 얼음 내부에서 타 버리는 공격을 이겨낼 수 있는 몬스터는 없을 거라고 케이는 말했었다. 실제로 두 사람이 합동 공격을 펼쳤을 때 몬스터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얼어붙었다가 그 안에서 불타 버렸다. 몬스터도 이겨낼 수 없는 공격이라면 인간도 마찬가지일 터. 

그러나 노부가 미처 화염 공격의 주문을 외기도 전에 사쿠마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기다려!"

노부가 케이를 품에 안은 채로 고개만 돌려서 사쿠마를 돌아보자 사쿠마가 양 팔을 들며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욌다. 그리고 그 순간 사쿠마의 등 뒤에 둥둥 떠 있던 인큐버스가 둘로 분열되더니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로 나뉘어서 협회장이 얼어붙어버린 탓에 아무런 공격을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던 협회 소속 소환사들에게 날아갔다. 인큐버스와 서큐버스가 반짝반짝거리는 파스텔 톤의 구름 같은 걸 몸에 두르고 협회 소속 소환사들 사이를 빠르게 날아다니기 시작하고 얼마 뒤, 소환사들의 눈이 몽롱해지더니 바닥으로 털썩털썩 쓰러져 버렸다. 소환사들이 의식을 잃었기 때문인지 역시 소환수들에게 매혹의 힘이 미쳤기 때문인지 소환돼 있던 소환수들은 모두 자동해제돼 버렸다. 

"무슨 짓입니까?"

노부가 사쿠마를 노려보자, 사쿠마가 아몬이 들고 있던 쪽지를 보여 주었다. 
 
협회장이 전대 S급 질풍의 소환사를 살해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날 데리고 여기서 나가주십시오.

"이게 뭐?"

사쿠마가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케이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케이는 이제 타닥타닥 타는 작은 불꽃만 남기고 번개가 거의 꺼져 버린 상처 위로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는 손을 대서 상처를 덮어 버렸다. 손에서 흘러나온 찬 기운이 남은 불씨를 모두 꺼뜨렸으나 케이는 여전히 고통 때문에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여기서 저 자식을 죽여 버리면 우린 이 나라의 공적이 될 거야. 지금은 소환사 협회가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으니까."

케이도 분명히 협회장을 죽이려 한 것 같았는데 가까스로 이성을 찾은 모양이었다. 케이의 눈은 여전히 새빨갛게 보일 정도로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지만 케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냉정한 얼굴을 했다. 

"... 그래서요?"
"일단 저것들 묶어 놓고... 노보루, 괜찮아?"

그새 노보루는 츠지무라 덕분에 기운을 좀 차렸는지 여전히 얼굴은 파리했어도 똑바로 일어나 앉아 있었다. 

"네, 죄송해요. 마치다 형."
"됐어. 혹시 여기에 소환사 구속구 있을까?"
"네. 있어요. 어디 있는지도 알아요."
"그럼 타카토랑 같이 가서 좀 가지고 와 줄래, 아직 힘 없을 텐데 미안해."
"아니에요. 마치다 형."

그 후로 교고쿠와 노보루, 가루베와 고토가 우르르 달려가서 소환사들이 소환수를 소환하지 못하게 하고 힘을 묶어 버리는 소환사 구속구를 채우고 꽁꽁 묶기 시작했다. 케이가 가슴의 상처를 짚은 채로 여전히 얼어 있는 협회장 쪽으로 다가가려고 했지만 츠지무라가 더 빨랐다. 츠지무라는 케이를 붙잡아 바닥에 눕히고 치유의 은호를 소환했다. 은빛 호랑이가 두툼한 앞발을 케이의 가슴에 가볍게 올리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하자 츠지무라도 힐링 스킬을 쓰기 시작했다. 

"노보루 치료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미안해."
"당신이 다쳐서 돌아가면 소라가 날 죽이려 들 테니까."
"소라가 널 죽이려 들다니 그럴 리가 있나..."

케이가 피식거리고 웃어서 모두가 지금이 웃을 때냐고 케이를 타박하고 있을 때였다. 쿠로사와가 멍하게 얼어붙어 있는 협회장을 바라보고 있는 타카하시 료헤이에게 다가갔다. 

"그쪽은 다친 데 없습니까?"
"네..."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뭡니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녹음기입니다. 저 자가 그 사람을..."

타카하시 료헤이는 벌개진 눈으로 협회장을 노려보면서 말을 이었다. 

"죽일 때 녹음기가 켜져 있었습니다."
"당신, 그 현장에 있었습니까?"
"그 사람이 남긴 이상한 쪽지를 뒤늦게 봐서 쫓아갔습니다."
"무슨 쪽지?"
"협회장을 만나고 올게. 우리 둘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 미안해... 그런 쪽지였습니다."

타카하시 료헤이는 슬픔과 절망을 참기 힘든 것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괴롭게 말했지만, 쿠로사와와 노부는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괴롭게 우는 타카하시 료헤이를 보면서 동정심을 가질 수 없는 건 츠지무라의 치료를 받고 있는 케이도 마찬가지였는지 케이는 전보다는 조금 힘이 돌아온 듯한 목소리로 나른하게 말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텐데, 마지막까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나보군. 어지간히 이기적이네."
"말조심하십시오!"

타카하시 료헤이는 죽은 자신의 배우자를 함부로 말하는 케이를 한 대 칠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지만, 소용없었다. 타카하시 료헤이가 정말로 죽음을 코 앞에 두고 있는 병약한 자라는 건 둘째치고 타카하시 료헤이가 주먹을 쥐는 순간 일행이 모두 타카하시 료헤이를 향해 공격 스킬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케이도 그저 가볍게 비웃기만 하고 막 치료를 마친 은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협회장이 진짜 S급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현재 최강의 소환사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였고 단번에 나을 상처는 아니었기 때문에 츠지무라와 은호랑이는 응급처치만 하고 소독약을 바른 다음 깨끗한 붕대를 감아둔 상태였다. 케이는 가슴이 타 버려서 너덜거리는 상의를 대충 걸치기만 하고 가슴을 움켜쥔 채 노부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빙결 풀 테니까 저 자식 묶을 준비해."

아몬이 일행을 둘러싸는 보호막을 친 다음 타카토와 아마미야가 구속구를 들고 협회장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케이가 빙결을 푸는 순간 교고쿠가 재빨리 구속구를 채웠고 아마미야는 협회장을 꽁꽁 묶었다. 협회장이 온몸이 묶인 상태로도 케이를 죽이고 싶은 눈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노부의 몸에서 다시 불꽃들이 튀어오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너 타카하시 료헤이의 기억을 되돌리고 싶었지?"

타카하시 료헤이는 멍하게 '기억?'하고 중얼거렸지만 협회장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협회장이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케이의 말이 먼저 이어졌다.

"그런데 그거 알아?"

케이는 여전히 협회장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한 조각의 연민도 슬쩍 보였다. 그 한 톨의 연민도 협회 소속 소환사들 사이에 떨어져서 깨져 있는 샹들리에, 노부의 머리 위로 떨어지 뻔했었던 그 샹들리에를 보는 순간 사라졌지만. 

"사라진 타카하시 료헤이의 기억을 되찾아줄 수 있는 건 네가 아미 죽여 버린 그 사람뿐이었어."
"... 뭐...?"







#소환사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