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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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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ㅇㅁㅇ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야마토가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미야무라의 뒤에 서있던 기사들이 경계하듯 칼손잡이에 손을 올려두었다. 마치다는 습관적으로 기사들을 진정시키려다가, 미야무라의 손이 먼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참았다. 자신의 기사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습관이 무서웠다.



“말한 그대로. 노보루 군은 미야무라 가로 갈 예정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자세한 계획은 있지만… “



미야무라가 마치다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마토를 바라보던 때와 달리 조금은, 부드러워진 표정이었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아무래도 말할 수 없어서.”

“그런 수상한 속셈으로 사람을 데려간다고?”

“수상하지 않아. 노보루 군에겐 설명했으니까. 다만, 노보루 군의 친구,에게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어보이는군.”



미야무라가 부러 친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렇다. 야마토는 노보루의 보호자도, 반려도 아니었다. 각인이 이뤄졌다고는 하나, 이를 증명할 식을 올렸을 리도 만무했다. 그는 노보루의 결정에 어떠한 영향력도 끼칠 수 없는, 단지 친구였을 뿐이었다.


야마토도 그 속뜻을 알아차렸는지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진 채로,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이 처량하기 짝이 없어서, 미야무라는 굳이 자리를 피해주었다.


마치다는 고민 끝에, 야마토의 굳게 말린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미야무라 공께서 나를 황궁에 데려가실 거래.”



야마토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황궁? 왜?”

“자세히는… 모르겠어. 황제의 후궁들을 찾고 있고, 나 말고도 다른 후보가 많다고…”

“네가 왜 후궁을 해!”



야마토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인 건 처음이었다. 고개를 들어 본 야마토의 얼굴은 거의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다는 그를 가만 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차마 그를 마주할 수 없었다.



“정말로 후궁이 된다는 건 아니야. 내가 가당키나 하겠어? 하지만, 황궁에 다녀오기만 해도 돈을 주시겠대. 이만큼, 아니, 더 주실지도 몰라. 야마토, 이거 봐. 이렇게 많은 금화를 본 적 있어? 이 정도면 네가 사고 싶어했던 말도… 아니, 기사 수업도 받을 수 있을 거야.”

“노보루, 난 이런 거 필요없어… … 난… … 노보루, 난… ”



야마토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일순 마치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만약 야마토가 그를 잡으면, 그를 뿌리칠 자신이 없었다. 야마토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라, 노보루라는 몸에 의해서였다. 노보루의 기억이 전혀 없는 마치다마저도 본능적으로 야마토를 뿌리치고 싶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야마토가 노보루를 붙잡는다면, 마치다는 이를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다는 그 사이 야마토를 면밀히 살폈었다. 그는, 노보루의 부탁을 거절하질 못했다. 일전에 황제를 만나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노보루가 몇 차례 더 부탁했다면 어떻게든 그를 중앙으로 데려가려 했을 것이다. 야마토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치다는 그것을 이용하고자 했다.


마치다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야마토는 몇 번 더 훌쩍이며 마치다의 손을 꾹 잡았다, 놓았다.



“… … 네 선택이 옳은 거겠지, 넌 언제나 나보다 똑똑했으니까.”

“야마토…”

“노보루,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 난 정말 이 돈 필요 없으니까.”



야마토는 애써 웃었다. 마치다는 떨리는 입술을 겨우 열었다.



“… … 돌아올게, 꼭.”



미안해, 야마토. 마치다는 그 말을 꼭꼭 씹어 삼켰다. 자신의 욕심으로 결국 그를 이용하고 말았다.




*



“좋은 친구를 뒀네요.”



멍하니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던 마치다는 미야무라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미야무라가 웃어보이자 마치다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오메가의 경우엔 부모나, 친지에게 값을 치르는데 말이죠.”

“… …”

“친구에게 그 돈을 줄 줄은 몰랐습니다.”



아마 야마토는 그 돈을 못 쓸 것이다. 조금이라도 쓰면 다행이겠다. 야마토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들어도 모른다며, 얼른 다녀오라고 마치다의 등을 떠밀었다. 애초에 짐이랄 게 많지도 않았다. 마치다의 것이 아니라, 전부 노보루의 것이니 더더욱 챙기고 싶은 게 없어서 마치다는 거진 맨 몸으로 미야무라의 마차에 올라탔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했고, 미야무라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은연중에 마치다는 이 일을 미야무라가 아주 고심하여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이제는 어느 지위일지 모르겠으나, 황제 곁에서 일하고 있는 미야무라가 직접 움직였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미야무라 가에는 후궁으로 올릴 만한 영애가 없다. 마치다 가문도 10년 사이 달라졌을 리는 없다. 그러니 차선책으로 다른 가문의 영애를 입양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다 마침 마치다-아니, 노보루를 마주쳤을 테고.


그러나 아무리 후궁이라 하여도 황제의 오메가였다. 마치다 뿐 아니라 수많은 영애들의 초상화가 그려질 것이고, 또 많은 가문이 그 뒤에서 세력을 쌓고자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황후가 있다면 그 가문에서도 이를 견제하기 위해 어떤 수를 두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미야무라는 평민 출신의,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를 감히 황제 앞에 데려가고자 하고 있었다.


해서 마치다는 솔직히 큰 기대를 걸고 있지는 않았다. 야마토에게 돌아가겠다 말한 것은 진심이었다. 10년이나 지났다. 스즈키에게 있어 마치다의 얼굴이 옅어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금은 그저, 한 번이라도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창밖의 풍경이 변화하자 마치다는 입을 벌리고 광경을 감상했다. 그 모습을, 미야무라는 찬찬히 바라보았다.


예로부터 미야무라 가는 뛰어난 재상을 배출한 만큼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보는 것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그 너머의 계산이었다. 미야무라는 마치다 케이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눈앞의 노보루는 마치다 케이타와 묘하게 닮아있었다. 먼 남부에 친지가 있을 리가 없는데도, 그의 움직임이나, 말투, 눈빛이 마치다 가의 기사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미야무라는 이 외모에 승부를 걸어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와 물어본들 늦었지만…”

“네?”

“혹시 마치다 가문을 들어본 적 있나요?”



마치다는 가만 그 물음을 곱씹었다. 이대로 자신이 마치다임을 밝힌다고 해도, 미야무라는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미쳤거나 다른 음모를 꾸민다고 오해해서 마치다를 돌려보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급하게 마치다 가문의 먼 친척인 척 할 수도 없었다. 마치다 가의 누구와도 연이 닿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 꼼꼼한 미야무라가 먼저 살펴보기라도 하면 금방 들통날 거짓말이었다.


스스로가 마치다임을 밝히지 못하는 일은 정말 답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최대한 미야무라의 계획에 따라야 했다.



“…없습니다.”



미야무라는 그 대답에도 한동안 여전한 시선을 주었다.



“마치다 가문은 과거 스즈키 폐하의 곁에서 무수히 많은 공적을 세우던 훌륭한 기사 가문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치다 케이타, 그 분께서는 뛰어난 검술로 기사단장을 이끌던 분이셨죠. 지혜롭고, 솔직하고… 강단 있는 분이셨습니다.”

“… …”



갑작스러운 칭찬에 마치다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애써 진지하게 경청하는 척 미야무라의 말에 종종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색하게 굳은 얼굴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다행히 미야무라는 깊은 기억 속에 빠져있는지, 마치다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 분이 돌아가신지 벌써 10년이 흘렀나. 세월이 참 빠르군.”

“… 그렇,습니까…”

“노보루 군은 그 분을 많이 닮았어요.”

“제가요?”

“희한하게도 말이죠.”



미야무라는 여전히 신기한 듯 마치다를 가만 보다가, 이내 씁쓸히 웃었다.



“그러니 부디 좋은 방향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



그 이후로 미야무라는 다시 말이 없었다. 마치다는 그 말 뒤에 숨은 불길함을, 이때 당시엔 알 수 없었다.




*



미야무라의 저택은 ‘단정’했다. 정원도 과한 꾸밈이 없었고, 화려한 조각상도 없었다. 그러나 품위있는 외관, 무엇보다도 부산스럽지 않게 미야무라의 마차를 맞이하는 사용인들의 모습을 보며 마치다는 미야무라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분은 노보루 군. 내 손님이니 극진히 모시도록. 손님방에서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하고… 우선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는 게 좋겠구나.

노보루 군, 오느라 피곤했을텐데 저녁식사 시간까지 쉬어요.”



미야무라의 전두지휘 하에 마치다는 사용인들의 손에 이끌려 저택 내부로 이동했다. 성도 무엇도 없이 소개된 마치다였으나, 사용인들은 그를 무시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 잠깐의 평민 생활이 익숙해졌는지 그들의 시중이 어색한 건 마치다 쪽이었다. 미야무라가 준비한 옷은 평민이 입기엔 화려한, 귀족의 의상이었다. 사용인들이 물러나자 마치다는 잠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북부의 옷보다는 얇았으나, 이제는 정말 노보루보다는 마치다 쪽에 가까운 모습이 되었다.



‘노부가 보면 놀랄지도 모르겠는걸.’



철없게도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마치다는 아직도 10년 전의 시간에 남아있었다. 노보루의 얼굴은 죽기 전 마치다 또래의 나이대와 비슷해보였다. 만약 죽는 순간의 기억이 선명히 남아있지 않았다면, 마치다는 더더욱 자신이 10년 후 되살아났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식사를 하러 나오자, 넓은 테이블에는 미야무라 뿐 아니라 다른 남자도 앉아있었다. 금발 머리의 남자는, 마치다와 눈이 마주치자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가 미야무라가 팔꿈치로 그를 푹 찌르자 겨우 시선을 피했다. 마치다는 미야무라를 바라보았다.



“노보루 군, 이쪽은 시시오 공작입니다. 지금은 미야무라 가의 일을 함께 도와주고 있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전혀 처음 본 얼굴이 아닌데. 하지만 마치다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마치다가 천천히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시시오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기에 결국 마치다는 헛기침을 하며 시시오에게 주의를 줘야 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게… 음,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시시오.”

“아니, 그러니까… 아니, 그런 뜻은 아니구요. 그런 뜻이 무엇이냐 하면…”

“저는 괜찮습니다.”



시시오는 어쩔 줄을 모르고 마치다와 미야무라의 눈치를 번갈아 보았다. 공작이라고는 하나, 투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쩌면 그만큼 미야무라와 친한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미야무라는 시시오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결국 보다못한 마치다가 그를 도와 주제를 바꾸었다.



“음-..미야무라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그러고보니 제 소개가 너무 늦었군요.”



미야무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다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대공이던 시절부터 폐하를 보필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행정대신으로 일하고 있구요.”

“대신이라면… 엄청 높은 분 아니신가요?”

“하하… 과분한 자리이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야무라의 얼굴은 꽤 뿌듯해보였다. 권력을 쥔 자의 웃음보다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주군을 모시는 충신의 얼굴이었다. 스즈키의 곁에 좋은 이들이 보필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스즈키의 이야기가 나오니 마치다는 더더욱 스즈키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그… 폐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요?”



어떤 모습일까. 10년이 지난 지금의 스즈키는. 훨씬 더 어른스러워졌겠지. 황제에 걸맞은 얼굴을 하고 있을테고. 이제는 어렵다고 투덜댔던 재무 영역도 전부 살피고 있으려나. 마치다의 목소리에는 못내 설렘이 묻어나, 미야무라는 신기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저 귀족의 말에 거절하지 못한 줄 알았더니, 실은 황제의 후궁 자리에 관심이 있었나.’



미야무라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듯 성심성의껏 답에 응했다.



“권력에 걸맞은 모습을 하실 줄 아는 분이십니다. 매우 노련하시고, 또 단호한 분이기도 하시구요. 지금의 귀족들이 반대 세력 없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스즈키 폐하의 이런 성정 덕분이죠.”

“아… …”



의외의 대답에 마치다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노련하고 단호하다고? 그 스즈키가? 대공저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다른 귀족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았지만, 스즈키는 갈등 상황에 면역이 없었다. 마치다에게만 하더라도, 마치다에게 한 번도 명령처럼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 대공의 위엄이 부족하지 않은가 싶어 마치다가 걱정하였지만, 스즈키는 남을 찍어 누르는 성격이 되질 못했다.


아니면 정말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걸까? 어쩌면 황제 스즈키는, 마치다가 아는 스즈키와 정말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자 침울해지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마치다가 생각에 빠진 채 말이 없자, 미야무라는 뒤늦게 말을 덧붙여보았다.



“…아, 음… 엄하시긴 해도, 나쁘신 분은 아닙니다. 언제나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성군이시죠. 수려하신 외모는 제국에서 알려지지 않은 바가 없으니 말하지 않아도 이미 들어보셨겠지요?”

“무섭긴 하지만요.”

“시시오!”

“폐하를 뵈러 간다며. 그럼 알고 가는 게 낫지. 그래도 아무 이유 없이 화를 내시거나 하는 분은 아니니까,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노보루군, 이었나요?”



‘네에…’ 마치다의 목소리가 더욱 가라앉았다. 뒤이어 테이블 밑에서 소리가 나고, 시시오가 윽 소리를 내며 몸을 수그렸다. 미야무라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식사를 이어갔다.


아무래도 스즈키는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마치다는 이런 순간에도 묘한 섭섭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늘 함께하자던 말을 지키지 못한 벌이 이런 것일까. 마치다의 손은 더욱 더디게 움직였다.


마치다가 방으로 올라간 후, 미야무라는 조용히 서재로 향했다. 생각할 일이 많아 혼자 있고 싶었으나, 그 뒤를 따라 시시오가 달려들어와 그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진심이야?”

“뭐가?”

“누가 봐도 마치다 경께서 돌아가시기 전 나이대의 오메가잖아. 폐하와 비슷한 나이대도 아닌 남자를, 더군다나…”

“닮았지? 마치다 경과.”



너도 그렇게 느낀다니 내 눈이 잘못되진 않았나보네. 미야무라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시시오는 어색하게 눈을 깜빡였다. 분명 자신이 초상에서 본 마치다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머리색도, 피부색도 다른 남부의 남자였으니. 하지만 분명 그는 닮아있었다.



“어떻게…”

“찾았어. 남부에서.”

“정말 찾았어. 우연히 만난 거야.”



그래, 정말 우연이었다. 그저, 남부가 궁금하다는 황태자의 말에 가볍게 사찰을 다녀왔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미야무라는 자신의 계획에 꼭 필요한 사람을 만났다.


시시오가 조급하게 미야무라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혹시 마치다 가 사람인 건 아니야?”

“아니야. 아직은.”

“아직은?”



미야무라는 자신의 책상에 걸터앉아 시시오를 바라보았다.



“마치다 가의 양자로 추천하려 해.”

“소라!”

“후계자가 없는 집안에서 장성한 청년을 양자로 들이는 건 흔한 일이야. 전혀 어색하지 않아.”

“그게 아니라… 너도 알잖아. 그분은… ‘금기’야.”



미야무라도 그간의 일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미야무라가 스즈키의 곁에 있을 땐 이미 ‘그’가 죽은 후였다. 그럼에도 미야무라는 그가 현재의 스즈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나마 너그러워져, 귀족 세력 간의 견제를 위해서라도 후궁을 들이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었으나, 몇 년 전만 해도 황제의 반려는 감히 꺼낼 수도 없는 주제였다.


그럼에도, 미야무라는 이 일을 진행하려 했다.



“내일은 화가를 불러. 노보루 군의 초상화를 작업해야 할테니까. 그리고 연회에 입을 의상도 맞춰야 하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

“네가 이러는 걸 알면 폐하께서 정말 충격받으실 거야…”

“차라리 충격받으시는 게 나을지도 몰라.”



지금의 황제에게 필요한 일. 그것을 행하는 것이 충신으로서의 미야무라의 의무였다. 어두워진 방에는 둘의 소리를 가릴 벽난로 소리만 타들어가고 있었다.




*



황궁은 황금궁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빛나고 화려한 궁이었다. 넓은 창 어디 하나 빛이 들지 않는 곳이 없는, 그야말로 하늘의 은총이 내릴 듯한 아름다운 공간. 그러나 미야무라는 본궁 안쪽, 황제의 집무실에 들 때면 어두컴컴한 지하로 내려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뿐인가. 과거 북부의 대공저보다 서늘한 공기에 미야무라의 어깨는 절로 움츠러들었다.
 

집무실의 황제는 늘 그린 듯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서류를 바라보던 그는, 미야무라를 발견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야무라는 허락의 뜻을 읽고, 황제의 가까이 다가갔다.



“바쁘신 일정이 없는 줄로 알고 찾아 뵈었습니다만, 다른 업무가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제국의 황제가 바쁘지 않을 때가 어디 있나.”



급한 업무가 없다는 사실은 황실의 대신인 미야무라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제국은 그야말로 안정기였다.

스즈키가 황위를 찬탈한 지 10년이었다. 전쟁은 스즈키 가의 압도적인 무력으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할 만큼 빠르게 끝이 났다. 스즈키 가에서 사망한 이는 손에 꼽을 정도. 그야말로 신의 축복을 받은 가문이었다. 황가가 바뀌는 거대한 전쟁이었음에도 백성들의 삶이 곧 안정될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었다. 그리고 황궁은 황제의 사람으로 채워졌다. 그 사이 젊은 황제의 권력은 전에 없이 강대해졌다.
 

그에게 지금 가장 급한 일이 있다면, 지금까지 비어있는 황후의 자리를 채우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연회에 참석할 영애들의 초상화도 충분히 살펴보셨겠군요.”



미야무라는 황제의 책상 한켠에 가득히 쌓여있는 족자들을 살폈다. 보아하니 조금도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작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일을 미뤄두고 있으니, 역으로 황제의 의사는 명확했다.

 

“내 나랏일이 바빠 황태자의 생일 연회에 초대된 명단까지 확인할 새가 없군.”

“그래서 그 중에서 주요한 영애들의 초상화만 선별하여 드렸을텐데도요.”

“누가 오든 무슨 상관이 있나 모르겠군. 서궁엔 빈 방이 많으니, 몇이나 들여도 상관 없네. 필요하다면 더 지어도 상관 없어. 대신께서 정해준다면 내 업무의 부담이 훨씬 덜하겠네.”

“폐하… …”

“그대의 부탁으로 연회에는 참석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황제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서류를 읽어 내려가며 답했다. 미야무라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많은 이들이 황후가 없는 황제를 두고, 여러 후궁을 두어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움직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황제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누가 되어도 상관없으니, 정치적으로 이득이 될 이들을 미야무라 선에서 알아서 뽑길 바라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 볼모나 다름없이 서궁에 갇혀, 오지도 않을 황제를 기다리며 아무런 권력도 누리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 또한 정치적으로 틀린 방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야무라는, 그가 다른 선택을 하기를 바랐다. 그는 오늘 막 완성된 초상화 하나를 황제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황제가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미야무라는 그와 부러 눈을 마주친 채, 천천히 몸을 숙였다.



“오늘 제가 직접, 참석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의 초상입니다.”

“그대가?”

“네. 모든 초상화를 살펴보시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 분은 확인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직접, 초청한 분이시니까요.”



그럼. 미야무라는 떠나기 위해 인사를 올리고, 집무실을 나섰다.


사실 황제가 그를 확인해줄지는 알 수 없었다. 미야무라가 몇 차례 올린 청도 전부 거절한 그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연회에서 갑작스레 그를 마주할 경우의 황제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었다. ‘정말 충격받으실 거야…’ 시시오의 말은 감정적이어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니 미야무라를 위해서라도, 황제를 위해서라도 그가 초상화를 확인해주기를 바랐다.


그때, 정말 갑작스럽게 집무실의 문이 쾅 열렸다. 미야무라가 미처 뒤를 돌기도 전에, 황제는 그에게 달려들다 싶이 다가와서는 복도에 그를 밀어붙였다. 쿵, 하고 미야무라의 몸이 복도에 부딪쳤다. 주변의 호위병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폐하, 하며 황제를 불렀으나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황금빛 눈은 불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네가, 네가 감히 나를 이렇게 모욕해!”

“폐하, 진정을…”

“어찌 이럴 수 있어, 네 너를 당장 사지를 잘라 마차에 매달아버릴…”

“폐하! 마치다 가의 먼 친척 영애입니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마치다 가의, 영애입니다.”

“… …”

“이름은, 노보루라고 합니다.”



힘이 조금 풀렸다. 미야무라가 컥컥대며 벽에 기대어 쓰러지자, 황제는 스스로 벌인 일에 놀랐는지 미야무라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충직한 미야무라가 스즈키를 위해할 인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미야무라가 ‘직접’ 초대했다는 사실은 차마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 … 어째서. 마치다 가에는 늙은 가주와 그 친척들 외엔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입양된 이입니다. 말씀처럼, 마치다 가엔 남은 이가 없었으니까요.”

“이제와서, 무슨… 어떻게 이런…”

“폐하. 부디 숙고하여 주시옵소서. 이 또한 마치다 가와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황제가 미야무라를 노려보았다. 여전한 분노가 넘실대고 있었다. 미야무라가 마치다 가를 입에 올릴 때마다 더욱 그러한 것은 착각이 아닐 터였다. 그러나 미야무라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평민 출신으로 이번 연회에서 처음으로 사교계에 인사드릴 예정이십니다. 그래서…”



춤을, 배우고 계십니다. 미야무라의 마지막 말에 황제는 결국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로 돌아갔다. 쾅, 하고 닫힌 문에 그제서야 미야무라의 하인이 미야무라를 부축해 일으켰다. 퍽 놀란 모양이었다. 미야무라 입장에서는, 차라리 싸게 먹혔다고 할 수 있었지만.


미야무라가 알기로, 스즈키와 마치다는 딱 한 번 춤을 춘 적이 있었다. 미야무라가 아직 어렸던 시절, 둘의 결혼식 축하 연회에서였다. 그 이후로 갑작스러운 북부 귀족들의 전투로 인해 대공가는 이렇다 할 연회를 열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지금은 황태자이신, 공자의 탄신 연회도 조촐하게 열렸으니 말이다.


어쩌면 황제에게 너무 괴로운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야무라는 후회하지 않았다. 황제는 여태 충분히 괴로워했다. 이제는, 괴로움을 넘어서야 할 때가 왔다.





노부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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