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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4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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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섭은 아직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꾸준히 양육비란 이름으로 통장에 찍히는 입금 내역을 가만히 바라봤음. 아빠 자격이 없다는 말에 반발이라도 하듯 벌써 수십 번이나 찍힌 입금 내역에 송태섭은 한숨을 쉬었음. 다시 돌려줄 수도 없게 이러는구나. 이건 아이 몫이니까. 그걸 가만 보다 그냥 입금 알림을 꺼버렸음. 매번 알림을 보니 이명헌 생각을 안 할수가 없어서, 이렇게라도 해야 겠다 싶어서.

이젠 아이의 움직임이 꽤나 활발해져 태동이 있을 땐 배가 꿈틀 움직이는 게 보이기도 했음. 그리고 배가 꽤 부풀어 혼자 양말 신는 것도, 신발 끈 묶는 것도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자는 도중 발이 저리거나 배가 고파 깨는 일도 늘었고, 배가 무거워 걷다가 잠시 쉬어야 하는 일도 늘었고, 화장실도 전보다 자주 가게 됐음. 혼자여도 괜찮던 일상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음. 그래서일까, 그냥 길을 지나가기만 해도 사이 좋은 부부에게 본인도 모르게 시선이 가게 됐음. 병원에 내원해선 아내의 배를 사랑스럽게 만져주고, 불편한 곳은 없는지 세밀하게 살피는 남편과 그에게 의지하는 아내를 멍하니 보다 이름이 불리면 허둥지둥 진료실로 들어가기도 하고. 평소처럼 귤을 사러 과일가게에 들렀다가 임신한 아내가 찾는다며 복숭아나 사과 같은 것들을 두 손 가득 사 가는 남편의 든든한 뒷모습을 가만히 보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습관적으로 둥근 배를 쓰다듬는 송태섭. 금방 아주머니께서 건네주시는 귤 두 봉지를 손에 들고 혼자 뒤뚱뒤뚱 집으로 향하겠지.

그런 날이면 괜시리 우울해졌음. 송태섭 본인은 이유를 몰랐지만, 아마 본인도 모르게 그 사람들과 본인의 처지를 비교한 결과였겠지. 사랑받는 사람과, 사랑받지 못한 사람. 이럴 때일 수록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하는데, 몸이 힘드니 그러기가 쉽지 않았겠지. 억지로 모른 척하고 있는 마음 속에 한 사람도 있었고.

이번에 사 온 귤은 유난히 시었음. 오늘은 달달한 귤이 먹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아직 제철이 아니라 완전히 맛든 귤을 찾기가 힘든 것 같았음. 그런데 오늘만은 유독, 단맛이 강한 귤이 먹고 싶어서. 귀찮음 힘듦 무릅쓰고 근처 마트나 과일가게를 다 돌았겠지. 어딜 가도 신 맛 없는 단 귤은 찾기가 힘들어서 멀리까지 나오게 됐음. 가만히만 있어도 붓는 다리는 오래 걸어 더 퉁퉁 부어 아팠고, 배가 무거워 숨도 차고 허리도 아팠음. 잠시 앉을 곳도 없고, 귤은 먹고 싶고. 속상한 태섭의 입술이 삐쭉 나오기 시작했음. 원래 이 정도로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냥 적당히 찾다가 들어갈 걸. 근데 오늘은 꼭 먹고 싶었는데. 결국 힘들기만 힘들고, 귤은 먹지도 못하고. 해는 이미 다 졌고.

그깟 거 안 먹고 좀 참으면 될 걸. 한숨 푹 내쉰 태섭이 속상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집으로 가는 길을 되짚었음. 꽤 오래 걸어온 터라 다시 걸어가는 건 더 이상 무리였고, 그리 오래 걸리진 않으니 버스나 타자 싶었음.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태섭이 벤치를 발견하고 드디어 편하게 앉았겠지. 주물주물 다리를 가볍게 마사지하고, 허리를 쭉 폈다 다시 굽히길 반복하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음. 그때 주머니에 넣어뒀던 지갑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고, 조금 곤란해졌음. 팔이 안 닿는데. 몸을 다시 일으킨 태섭이 엉거주춤 몸을 몇 번 숙여보다 애써 지갑을 주웠음. 흙이 묻은 걸 털어내고 있으니 옆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음. 임신한 태섭의 자세가 웃긴 듯 이쪽을 힐끔대며 웃는 소리에 태섭은 얼굴이 확 붉어졌음. 내가 원해서, 이렇게 하는 게 아닌데... 평소 같았다면 맞서 노려보기라도 했을 태섭이 하루종일 쌓인 피로에 의기소침해졌음. 

사람들을 피해 버스 정류장의 뒤쪽으로 빠진 태섭이 신발 앞코로 바닥을 쿡쿡 찍었음. 애써 감정을 다스리는 중이었음. 오늘은 정말 날이 아닌 가보다. 누구나 하루쯤 정말 안 풀리는 날이 있기 마련이지, 오늘이 나한텐 그런 날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려 해도 속상한 마음이 쌓이고 쌓여 눈 앞이 흐려지길 반복했음. 그러는 중에 태섭의 집 앞으로 가는 버스는 놓쳤고, 이대로 사람들과 함께 버스 타기도 싫었음. 

차오르는 마음을 꾹꾹 누르며 다시 집을 향해 걷던 태섭은, 어느 새 익숙한 건물 앞에 서 있었음. 어쩌다 여기까지 나왔구나. 이명헌의 회사.

높은 빌딩을 한 번 올려다보곤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옮긴 태섭이 걸음을 뗐음. 안 그래도 복잡한 하루에 이명헌까지 비집고 들어오려네. 송태섭의 기분은 더 바닥을 쳤음. 

... 송태섭?

오늘 진짜 날이 아닌가 보다. 
설마 헀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바닥을 향해 있던 시선을 든 송태섭이 뒤로 고갤 돌렸음. 그 곳엔 뛰어온 듯 넥타이와 머리가 흐트러진 채 숨을 고르는 이명헌이 서 있었겠지.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터질 것 같아 태섭이 몸을 다시 돌려 서둘러 걸음을 뗐음. 그보다 빠른 이명헌이 송태섭의 손목을 잡았고, 송태섭은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였음. 

아닌가 했는데... 진짜네. 
지나가다 우연히 여기까지 온 거예요. 다른 의도 없어요. 저번에 당신한테 한 말도 유효하고요. 갈게요.
누가 뭐라고 했나.
... 오해할까 봐요.

왜 하필 이럴 때 이 남자를 마주치게 된 걸까. 오늘은 더 이상 누군갈 상대할 기력 같은 건 없는데.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작게 놔 주세요, 하고 웅얼대던 태섭이 조금 힘을 줘 잡힌 손목을 빼냈음. 

집에 가는 길이면 가는 길에 내려줄게.
괜찮아요. 택시 탈 거예요.
택시 탄단 사람이 멀리부터 그렇게 걸어왔나?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었던 건가? 놀란 태섭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명헌을 올려다봤음. 보려고 본 건 아니고, 퇴근하려다가 정류장에 있는 거.
명헌이 턱짓하는 곳을 보니 비서가 갓길에 비상 깜빡이 켠 차를 댄 채 조수석 옆에 서 있었음.
이상한 자세로 지갑을 줍고, 다른 사람들이 비웃는 것까지 다 봤으려나. 태섭은 또 확 얼굴이 붉어졌음. 더 이상 당신 앞에서 수치심 느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또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구나.

... 신경쓸 거 없어요. 저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잖아요.

쪽팔려 눈물이 날 것 같았음.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고, 입술을 세게 물어 참았음.

그새 배가 더 나왔네.
아기가... 좀 큰 편인가.

이명헌의 말에 송태섭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고, 그와 동시에 도르륵 눈물이 흘렀음.

귀찮게 안 한다면서. 계속 이러면 나 귀찮은데, 그냥 타고 가지.



명헌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