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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1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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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은 식은땀을 닦으며 골목길 언덕을 올랐음. 날이 엄청 더운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몸 상태가 100%는 아니었던 거 같음. 그는 뻐근한 옆구리를 쥐고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다가 조금 더 걸음을 옮겼음. 그는 오래된 작은 마트 (요즘은 대부분 편의점이라 잘 볼 수 없는 그런) 앞에서 걸음을 멈췄음. 물론 마트가 아니라 그 윗층의 사무소에 용건이 있는 거였지만.

 

그가 잠시 서 있는 동안 마트의 문이 안쪽에서부터 밀려 열리면서 문에 열린 방울이 크게 딸랑거렸음.

 

"많이 파쇼, 영감!"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남자 셋이 가게에서 나왔음.

 

그 중 하나는 빨간 머리에 가게에 몸이 다 들어갈 수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키도 덩치도 좋은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제법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 턱에 상처를 달고 있었음. 그 뒤로 나오는 건 앞의 둘보다는 한참 작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느낌의, 패션에 신경을 많이 쓰는 듯한 남자였음.

 

"야, 포도맛 내놔."

"포도맛 내 거라고!"

"댁은 저기 가서 담배나 피우셔. 아까부터 피우고 싶다며."

 

작은 남자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턱에 상처를 단 남자가 투덜거리면서 걸어감. 아, 어떻게 된게 이 판은 위아래가 없어, 위아래가. 그렇게 투덜거리던 남자는 옆에 서 있는 정환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팍 좁혔음.

 

"뭐야 왜 사람을 꼬나..."까지 하던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환에게로 다가왔음.

 

"...되게 아는 사람처럼 생겼는데."

"오랜만이다, 정대만."

 

정환은 어이없다는 듯이 인사함. 사람을 뭐 수십년은 못 본 것처럼 얘기하고 있어. 대만은 정환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점점 경악하는 표정으로 바뀜.

 

"와, 이정환이 살아 있었네?"

"...아주 온 동네에 광고를 해라."

 

정환은 목소리를 깔고 차분하게 말함. 정대만은 여전히 충격받은 표정으로 정환의 어깨를 잡았음.

 

"옷이 너무 젊어져서 못 알아볼 뻔 했다."

"......"

 

정환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대만의 손을 떼어냈음. 대만이 하도 호들갑을 떨자 무슨 일이야? 하고 나머지 둘도 가까이 다가옴.

 

"와, 애늙은이 살아 있었네?"

"여긴 무슨 일이에요? 지금 치수 형 없는데."

"어디 갔길래?"

"오늘 소연이 오랜만에 옷 사준다고 갔어요."

 

이런. 정환은 속으로 혀를 참. 채치수의 여동생 사랑은 지극하기로 유명했음. 아마 오늘 하루는 꼬박 연락도 안 받을 거임. 정환은 턱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음.

 

"권준호는 있나?"

"안경 휴가 갔어."

 

태섭의 어깨에 턱을 괴고 듣고 있던 백호가 끼어들었음. 정환은 곤란함에 입을 꾹 다물었음. 지금 그럼 흥신소에는 이 바보 트리오밖에 없단 말인가. 이 중에서 가장 믿음직한 사람을 고르라면 송태섭이겠지만, 솔직히 말해 이정환이 이제까지 채치수와 권준호와 쌓아온 것만큼의 신뢰는 없을 수밖에 없었음.

 

"이런...그럼 다음에 와야겠군."

"그러게 연락하고 와야지. 우리 요즘 엄청 바쁘다고."

 

강백호의 말에 정환은 그랬어야 한다고 생각했음. 전화를 먼저 했으면 이런 헛걸음은 안했을 텐데.

 

"그나저나 칼에 찔리고 없어졌다고 해서 어디 바다에라도 던져졌나 했는데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태섭의 말에 정환은 어깨를 으쓱함. 명줄이 질긴 편이라 말이야.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하고 가라는 대만의 제안에 정환은 고개를 저었음. 메시지라도 남기지 않겠냐는 태섭의 제안도 거절함. 정환이 친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북산 흥신소는 어디까지나 사업체였음. 그의 조직에서 그의 소재를 찾기 위해 의뢰를 넣어 놨을 수도 있었음. 그를 괜히 붙잡아둬서 시간을 끌려는 속셈이 있을까봐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가 없었음. 채치수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겠지만, 그는 지금 없으니까.

 

정환은 '가는거냐~'하고 아쉬워하는 백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역 쪽으로 가면서 그에게 혹시라도 미행이 따라붙지는 않았는지 확인했음. 그를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난 후에야 그는 안심하고 지하철 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음.

 

 

 

 

"다녀왔습니다-"

 

대협은 현관으로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다 말고 멈췄음. 집안이 묘하게 고요한 것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음. 대협은 숨을 곳도 없는 집을 기웃거리면서 확인하고는 침실 가운데서 머리를 긁적였음.

 

"...간 걸까."

 

그는 잘 개어져 있는 이불을 씁쓸하게 바라봄. 적당히 나으면 당연히 떠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인사 한마디 없이 가는 건 좀 서운하다 싶음. 그는 한숨을 쉬며 더플백을 내려놓고 양말을 벗었음. 교복 자켓의 단추를 풀고 있는 찰나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음.

 

"아저씨?"

"...형이라고 불러주면 덧나냐?"

 

문앞에 서 있는 건 수겸이었음. 잠을 자기는 한 건지 얼굴이 좀 까칠하고 눈가는 퀭하게 내려앉아 있는 상태로.

 

"하하...형 지금 시체 같은 거 알죠."

"나도 알아."

 

수겸은 크게 한숨을 푹 내쉬며 버석버석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음. 그렇게 하면 얼굴에 남은 피로가 떨어져 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밥 먹자."

"어..."

"역 앞에 일식집 어때?"

"저 바지만 갈아입고 나올게요."

 

일식집이란 말에 화색이 돈 대협은 바로 현관문을 닫고 침실로 들어갔음. 그는 옷장에서 갈아입을 청바지를 찾다가 하나가 모자란 것을 확인했음. 바지 입고 갔나 보네... 대협은 빈 공간을 묘한 표정으로 보다가 곧 옆에 놓인 연한 워싱의 스트레이트 진을 입고 운동화를 신었음. 그가 복도로 나왔을 때 수겸은 난간에 기대서 노을 구경을 하고 있었음.

 

"됐어?"

"음. 지갑도 챙겼고..."

"지갑은 두고 가도 돼. 내가 너한테 사라고 하겠냐."

 

수겸은 대협의 코를 가볍게 꼬집고는 앞장서서 복도를 걸어갔음.




 

3번 출구 근처에 자리한 일식집은 작은 가게였지만 동네에서는 알음알음 소문난 맛집이었음. 양을 보면 비교적 싼 가격이라고는 하지만 대협의 지갑 사정으로는 자주 찾을 수 없었음. 그리고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는 거리가 좀 있어서 주로 자전거를 타야 했는데, 주변에 자전거를 세워둘만한 곳이 마땅치가 않아서 잘 안 가게 되었음. 그러니 수겸이 차를 끌고 가자고 했을때 신나서 달려나올 수밖에 없었음.

대협은 검은색 세단의 조수석에 타서는 야무지게 안전벨트를 맸음. 이거 그거죠? 경찰차. 대협이 대시보드에 올려진 폴리스 라이트를 툭 건드리며 물었음.

"어, 그거 오래되서 잘 망가지니까 건드리지 마라."
"그거 1년 전에도 똑같이 들은 거 같은데."

대협이 수겸을 안쓰러운 눈으로 봄. 경찰...정말 힘든 직업이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수겸은 세단에 시동을 걸고 엑셀을 밟았음. 10분 정도 지나서 가게가 있는 건물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대협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음.

"...누가 형 운전 실력 거지같다고 안 해요?"
"자주 들어."

수겸은 대협의 등을 한번 툭 치고는 차에서 내렸음. 대협은 마침내 땅에 두 발을 디딜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계단을 올라가는 수겸의 뒤로 쪼르륵 따라 붙었음.

어서옵쇼-!! 두 사람은 카운터에서 울리는 우렁찬 인사 소리를 들으며 가게로 들어갔음. 테이블은 4인석이고 2인석이고 할 거 없이 꽉 차 있었지만 바 쪽에는 자리가 있었음. 둘은 나란히 의자를 빼고 앉아서 음식을 시킴. 수겸은 맥주랑 가라아게, 그리고 광어초밥을 먼저 주문했고, 대협은 특대 연어회덮밥을 주문함.

"초밥 안 먹고?"
"초밥으로는 배가 안차요..."

대협이 시무룩하게 하는 말에 수겸이 하하 웃음. 하긴 윤대협이 평소 먹는 양을 생각하면, 그가 만족할 정도의 초밥을 사주기는 무리일 수도 있을 것 같았음. 그래도 수겸은 자기 앞에 나온 초밥 하나를 대협의 앞접시에 덜어줌.

"슬슬 지역 예선인가?"

하필이면 수겸이 질문을 던지는 타이밍에 초밥을 입에 넣어가지고, 대협은 그냥 고개를 크게 끄덕였음. 이번엔 전국 갈 수 있을 거 같아? 대협은 초밥을 꿀떡 삼킴.

"-작년에 비해서 다들 경험치가 좀 쌓여서 괜찮을 거 같아요. 해남 때문에 1순위는 어렵겠지만 뭐...일단 나가는게 중요하니까."
"시간 되면 응원 갈게."
"저번에 아저씨들이랑 같이 와요?"


대협은 지난 해에 수겸이랑 같이 왔던, 수겸의 팀원들을 떠올리면서 물어봄.

"여유가 있으면. 왜? 싫어?"
"아뇨. 전 좋아요."

대협은 미소국을 홀짝거리며 대답함. 지난번에 재밌긴 했지. 아저씨들 기합에 다른 관중들이 쫄아서 그 주변으로 결계라도 친 마냥 비어가지고, 코트에서 보면서 웃음 참느라고 혀까지 깨물었음.

"그럼 시간 내라고 할게."

수겸은 참치회초밥 두개를 주문함. 역시나 하나는 대협의 접시에 덜어주고. 대협은 특대 사이즈의 덮밥을 거의 다 비우고도 더 들어갈 곳이 있는지 냉큼 입에 집어 넣었음.

"그러고 보니, 집에 손님 있더라."

수겸의 질문에 대협은 잠시 얼을 탐. 그가 멍하니 있자 수겸은 말을 덧붙임.

"왜, 그, 인상 진하고 덩치 좋은 남자. 오늘 낮에 너희 집에서 나오는 거 봤는데. 고아원에서 알던 사이라고?"
"아."

대협은 정환을 떠올리며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임. 고아원에서 아는 사이라고? 그런 변명이 먹혀?

"예에- 저 고아원에 있을 때 좀 알던 형이에요."
"그래? 뭐하는 사람이야?"
"조..."

대협은 무의식 중에 조폭이라고 얘기할뻔 한 걸 깨닫고 급하게 입을 다물었음. 그렇지만 수겸은 항상 귀가 밝았고, 자신이 들은 걸 놓치지 않았음.

"조?"
"조...리사예요! 지망생!"
"조리사?"
"예에- 주방 알바 자리 알아보는데 잠깐 머물 곳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그렇다고 너네 집에 머무냐?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지."
"하하, 그러게요..."

대협은 머쓱하게 웃고는 남은 덮밥을 빠르게 해치우려는 듯 고개를 숙였음. 흐음... 수겸은 반쯤 빈 맥주잔을 기울이면서 대협을 보며 생각했음.

...이 녀석 거짓말 할 때 말버릇 나오는 거 아직도 모르는구나.
 


 



 

정환대협 수겸대협 슬램덩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