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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7 01:09

송태섭은 북산의 평범한 농구부원이다. 전에는 제주도에 살았지만 몇 년 전 인천으로 이사왔다.

 

이사온 계기는 형, 송준섭의 진학 때문...도 있지만 8년 전에 있었던 사고가 이유가 크다. 태섭에게 다음에 원온원하자고 약속을 남기고 배를 타는 준섭에게 태섭은 다시 돌아오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고, 하마터면 그 말은 이루어질 뻔 했다.

 

사흘 뒤 바닷물에 흠뻑 젖어 비틀거리며 돌아온 준섭은 발소리에 득달같이 뛰쳐나온 태섭을 보자마자 긴장이 풀린 듯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울 틈도 없이 놀란 태섭이 달려가 준섭을 받쳐안자 준섭의 팔이 태섭을 끌어안았다.

 

바닷물이 배여 짜고 비린내가 풍기고 끈적거리는 품이었지만, 그래도 형이었다. 태섭을 끌어안은 채 준섭은 중얼거렸었다.

 

"영 못 보는 줄 알았어..."

 

그 말에 자기도 와앙, 울어버렸던 기억이 있다.

 

 

 

 

 

 

인천으로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형을 위한 이사라는 걸 납득은 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더군다나 태섭은 붙임성이 좋거나 적응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사투리를 감추기 위해 무뚝뚝하게 뱉은 어투는 반에 꼭 몇 명쯤은 있던 일진 무리의 거슬림을 불렀고 결국 오늘은 그 녀석들에게 불려가 몇 대 얻어맞은 참이었다.

 

가족들에게 들키기는 싫었다. 특히 형에게는. 새로운 학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힘들텐데 굳이 더 걱정시키기는 싫었고... 어쩐지, 형에게는 들키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농구나 할까.

 

태섭은 농구공을 집어들고 코트를 찾아 나갔다.

 

민원이 들어올까봐 그런가, 주택단지 근처에는 농구코트가 없어서 태섭은 꽤 멀리 나가서야 농구코트를 찾아낼 수 있었다.

 

농구코트에는 선객이 있었다. 자기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소년. 소년은 삼점슛을 연습하고 있는 듯 했다. 넋을 놓고 쳐다볼 정도로 깔끔한 폼.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공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림 안으로 떨어졌다. 보고 있자 소년도 이쪽을 눈치챈 듯 했다. 단정한 얼굴이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설마 넋놓고 있던 거 들킨 건가? 어째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시선을 피하자 소년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와락, 끌어안겼다.

 

?!?!?!

 

뭔데?! 처음 본 사이에 다짜고짜 끌어안겨 소리도 못 지른 채 굳어 있는 태섭을 안은 채 소년은 태섭을 내려다보았다. 지근거리에서 본 소년의 눈동자는 햇빛이 비쳐 녹황빛으로 빛났다. 소년이 다시 웃었다.

 

"온원할래?"

뭬?”

 

그 후 몇 년간 첫만남 때의 일을 가지고 놀려먹을 걸 알았으면 그런 얼빠진 말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때의 태섭은 그걸 몰랐고 그래서 그렇게 말해버렸다. 소년은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태섭을 끌어안은 팔을 풀고 코트로 돌아갔다. 소년이 활기차게 외쳤다. 자 그럼 나를 뚫어봐! 더 압박을 걸어보고!

 

그날 소년과 태섭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원온원을 했다. 원온원을 하며 알게 된 것도 많이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정대만이고 자기보다 한 살 많고, 현재는 무석중에 다니고 있음. 중학 MVP가 첫번째 목표고, 다음에는 북산고에 입학해서 전국 제패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 특히, 산왕공고를 꼭 타도할 거라고.

 

몇가지 공통점은 처음에는 경계심이 있던 태섭의 입도 열게 만들었다.

 

“...우리 형도 지금 북산고 다니는데.”

 

타도 산왕이 목표고요.

 

태섭의 말에 대만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으며 태섭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럼 내가 북산고에 입학하면 형님의 후배가 되는 거네! 잘 부탁한다고 미리 말해주라. 준섭을 존중하며 간접적으로는 태섭을 치켜세우는 말이 불쾌하지 않았다. 꾸닥. 약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대만은 소리내어 웃었다. 너는 진짜, 왜 이렇게 귀엽냐.

 

대만은 급기야 태섭을 집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나섰다. 남자애가 뭔 위험할 게 있다고…툴툴대긴 했지만 태섭은 순순히 대만과 같이 갔다. 낯선 곳을 혼자 다니기에는, 아무리 태섭이라도 약간은 무서웠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건 태섭 하나만이 아니었는지 태섭은 집 근처까지 왔다가 준섭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운동부라지만 집에 이미 와 있을 시간인데 준섭이 밖에 나와있다는 건 아마…자신을 걱정한 거겠지. 태섭의 생각이 맞은 듯 준섭은 태섭을 보고 잠깐 화난 표정을 했다가 옆에 있던 대만을 보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대만이 넉살좋게 웃었다.

 

태섭이 형님 되시나요? 정대만이라고 합니다. 오후에 농구 코트에서 만나서 같이 농구하고 놀았는데 너무 재밌어서 제가 그만 늦게까지 붙잡아 버렸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야. 태섭이가 걱정되서 데려다 준 거지? 고마워.”

별 말씀을요.”

태섭아,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대만이였나? 너도 이제 시간이 늦었는데 조심해서 들어가. 가자, 태섭아.”

“…고마어요.”

잘 가 태섭아! 또 보자!”

 

태섭을 데리고 들어가는 준섭의 등 뒤로 대만이 붕붕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태섭은 대만이 신경쓰였지만 자신을 감싼 준섭의 손이 약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형, 걱정했어? 준섭은 한참 후 약하게 대답했다. ……응.

 

“…미안해.”

아냐,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태섭아.”

 

오히려 대견한 걸. 친구도 사귀고.

 

금방 장난기를 되찾은 준섭의 말에 태섭은 어쩐지 부끄러워져 펄쩍 뛰었다. 친구 아냐!

 

그 후 태섭의 생활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인천은 제주도와는 많은 면에서 달랐지만 그래도 익숙해지고 나니 괜찮은 곳이 많은 동네였다. 학교에서 친구도 한 명 사귀었다. 이달재. 순하지만 강단 있는 친구 덕분에 태섭은 새로 다니게 된 학교에서도 잘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자기를 괴롭히던 녀석들의 모습들이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데.

 

태섭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금새 잊어버렸다.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랴, 낙제하지 않으랴, 학교에서 농구하랴, 학교가 끝난 후 농구하랴.

 

그런 일에 신경쓰기에는 태섭은 너무나 바빴다.

 

 

 

 

 

능남에서 스카우트가 왔지만 태섭은 북산을 선택했다. 형이 다녔던 학교에서 형이 이루지 못했던 목표-북산은 작년 인터하이에서 산왕을 만나지 못하고 2회전에서 아쉽게 패배했다-를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코 대만이 너도 북산으로 오라고 농구 코트에서 만날 때마다 귀찮게 달라붙어서는 아니다. …진짜로.

 

뭐, 그래도 선배에게 패스 줄 수 있는 건 좋네.

 

좋은 슛으로 이어지는 패스를 주는 것은 포인트가드로써 꽤나 뿌듯한 일이다.

 

농구부원끼리 팀을 나눠 하는 간이 팀전이 끝나고 태섭은 자기 팀이 이겼다며 상대편이었던 센터-이름이 채치수였다-를 놀리는 대만을 보며 픽 웃었다. 팀전은 태섭이 준 패스를 받아 대만이 넣은 버저비터가 결정적인 역할이 되어 대만의 팀이 승리했다. 땀을 닦는 태섭을 보며 역시 상대팀이었던 안경을 쓴 선배가 물을 건넸다. 수고했어.

 

네가 송태섭이지?”

네? 네.”

준섭 선배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 대만이도 그렇고... 네가 들어오기만 하면 북산은 전국 제패도 노려볼 만 하다고. 기대 많이 했는데 진짜 그렇네. 좋은 선수가 들어와서 기뻐.”

 

올해는 진지하게 노려보자, 전국 제패. 치수도 나도, 물론 대만이도 힘낼 생각이니까.

 

태섭은 조금 부끄러워졌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도내 제일의 포인트가드가 될 생각이니까요.”

 

 

 

 

 

돌아온 인터하이에서 북산은, 드디어 산왕을 만났다. 결과는 77-76. 북산의 아쉬운 패배. 북산이 몇 년만에 이렇게 올라온 것도 대단한 일이라고, 내년이 되어 인재들이 많이 들어오면 그때는 진짜 산왕을 꺾고 전국제패를 노려볼 수도 있을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태섭도 그렇게 생각은 한다. 자신은 아직 1학년이고, 치수와 대만을 포함한 북산의 주력들도 2학년이다. 기회는 충분히 있다.

 

하지만 진 게 분하지 않은 건 아니지.

 

입술을 삐죽이며 복도에 있는 자판기에서 포카리를 뽑고 있을 때였다. 강렬한 충격이 태섭을 덮쳤다. 순식간에 시야가 하얀 것으로 가려졌다. 누군가가 태섭에게 달려들어 안긴 것이다.

 

몸에 실린 묵직한 무게에 태섭이 휘청거리자 상대는

 

히”

 

웃더니, 태섭을 안아 일으키고는 반바퀴 빙 돌린 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안겨든다. 태섭은 그제서야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산왕의 하얀 선수복, 등 번호 9번. 분명 이름이…

 

저, 정우성?”

응 태섭아.”

 

경기에서는 이명헌과 함께 자신을 그렇게나 무섭게 압박해댔으면서 경기가 끝난 후에는 마치 주인이 너무 좋아 꼬리를 흔들며 달려들어 결국 주인을 쓰러트리고 마는 대형견이다. 아니, 근데 개는 주인이라 이러기라도 하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 얘 원래 이런 애야?

 

태섭은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적의가 향해졌으면 한 대 때리기라도 하는데, 올려다 본 정우성의 얼굴에는 무한한 호의가 반짝였다. 지금도, 태섭의 눈썹이 삐딱해지는 걸 보면서도 감격에 차 눈빛을 빛내고 있다. 우성이 뭐라 말하려 입을 여는 순간, 독특한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먼저 끼어들었다.

 

함께 있었네뿅.”

 

저 특이한 말투는, 분명… 태섭은 정우성의 등 뒤로 고개를 쭉 빼고 앞을 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저편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여기 있는 정우성과 같이 40분 내내 자기를 프레스했던 산왕의 주장, 이명헌이다. 이 쪽은 제대로 저지로 갈아입고 있었다. 태섭과 명헌의 눈이 마주쳤다. 명헌의 눈꼬리가 약하게 휘어지더니 까닥, 고개를 숙여보인다. 태섭도 허둥지둥 목례한 후 명헌을 바라보았다.

 

경기가 끝나고 우성이 송태섭 선수와 유니폼을 교환하고 싶다고 뛰쳐나가 버려서뿅. 찾고 있었는데 함께 있었어서 다행뿅.”

아, 예…”

 

한 번 프레스를 돌파하긴 했었지만 그건 안 감독님의 전술 탓이지 태섭 자신의 역량은 아니었는데도 정우성에게는 꽤나 인상깊게 남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상대 선수에게 자신의 실력에 대해 인정받는다는 건 나쁜 기분은 아니라 치솟아 있던 태섭의 눈썹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우성이 그 모습을 보고 즐겁다는 듯 웃는다. 웃으며 바로 유니폼을 벗어 태섭에게 건넸다. 태섭도 유니폼을 벗었다. 태섭의 맨몸에 둘의 시선이 잠깐, 머무른다 싶다가 우성이 태섭의 유니폼을 받고 자신의 것을 건넸다. 자기의 유니폼은 우성에게는 작을 텐데 개의치 않아하는 눈치다.

 

있자나, 태섭아.”

 

너 역시 빨간색보다는 흰색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어 듣고 있으니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한다. 아까 발견하자마자 바로 달려와 끌어안은 것도 그렇고 정우성이란 놈의 성격은 원래 이런가? 태섭이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명헌이 태섭을 불렀다. 불려 뒤돌아보자 단정히 접은 유니폼이 내밀어진다. 누구의 것인지는 등번호가 보이지 않아도 뻔했다. 태섭이 놀라자 명헌이 웃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입가까지 올라가는 웃음이다. 코트에서는 무슨 감정이 없는 것 같았는데. 의외의 모습에 태섭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명헌이 다시 웃었다. 아까보다 더 진한 웃음.

 

우성을 찾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태섭도 찾고 있었거든뿅. 나도 유니폼을 주고 싶어서뿅.”

어, 그러면 제가 드릴 게 없는데.”

내년 인터하이 때 만나서 네 유니폼을 주면 되지.”

 

기다리고 있을게.

 

명헌의 말에 태섭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1학년 때부터 산왕의 주전이었던 이명헌. 그런 이명헌이 다음 인터하이 때 다시 만나자고 하고 있다. 맞수라고 인정받은 것 같은 기분에 가슴이 부풀었다. 손이 약하게 떨렸지만 태섭은 손을 주머니에 쑤셔넣은 채 씩 웃어보였다.

 

물론이죠. 다음에는,“

 

다음에는 우리가 이길 거니까.

 

둘이 싱긋, 웃었다.

 

응. 기대할게.

 

 

 

 

송태섭의 일상은 그 후로도 평범하게 흘러간다. 다음 해 인터하이 때 다시 산왕과 만나 그때야말로 산왕을 이기고, 주장을 물려받고, 미국 유학 제의를 받고, 미국으로 떠나고.

 

 경기를 보러 온 준섭과 집으로 돌아가며 그 날 있었던 경기에 대해 얘기하고, 대만과 어떻게 윈터컵을 대비할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갑자기 인천으로 찾아온,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농구를 그만 둘 예정인 명헌과 마지막 원온원을 하고, 여러가지 어려움 끝에 도착한 미국에서 정우성을 만나 어쩌다 보니 룸셰어를 하게 되고.

 

그럼에도 평범하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 나갔다가 풍랑에 휩쓸려 실종되는 일 없이.

 

미국에서 인종차별 디나이얼의 총기난사에 휩쓸려 총을 맞고 죽는 일 없이.

 

미국으로 가다가 태평양으로 추락 산산조각 난 비행기 잔해들 사이에서 시체도 찾지 못하는 일 없이.

 

혹사당한 몸이 천천히 망가지다, 그렇게 좋아하던 농구는커녕 스스로 걷고 숨쉬기도 어려워하다 숨이 멎는 일 없이.

 

그저, 행복하게.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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