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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7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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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헌이 마음 열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몇 안 됐는데, 오랜만에 만나자고 연락해온 덕에 텅 빈 집으로 퇴근하는 걸 피할 수 있었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가볍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다, 자연스럽게 가족 이야기로 흘러갔겠지. 첫째 아이가 학교에서 상을 타 온 이야기, 둘째가 이제야 한글을 쓸 줄 알게 된 이야기, 유치원에서 귀여운 여자친구를 사귀어 온 이야기... 더 이어져 와이프 건강이 안 좋아져 걱정이란 이야기, 요즘 예민해져 자주 싸운단 이야기들까지.
그 중 조용한 명헌을 보며 넌 요즘 어떠냐고 물어왔음. 친구들은 이미 다들 각자의 가정이 있었고, 그 중 명헌이 가장 늦게 결혼한 상태라 아직도 이명헌의 신혼생활에 관심이 많았음. 

... 이혼했어.
저번에 만났을 때만 해도 그런 말 없었잖아. 갑자기 이혼했다고?

친구들은 꽤나 놀랐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자주 만나고 연락하진 못해도 안 좋은 일은 무조건 서로 나누던 친구들이었는데. 그때 명헌에게 조금의 서운함도 느꼈을 듯. 그렇지만 가장 힘들 사람이 이명헌일테니, 친구들은 묵묵히 등을 두드려줬음. 
그때 이명헌은, 애초에 결혼부터 거짓이었단 걸 말해야 하나... 생각하다 오랜만의 만남에 더 찬물 끼얹긴 싫어 그만뒀겠지. 
무어라 입 뗄지 몰라 조용한 술자리의 정적을 먼저 깬 건 명헌이었음. 너 요즘 사업 건 터졌다며. 주제가 바뀌니 친구들은 다시 신나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고, 술 자리에서의 이야기는 또 돌고 돌아 가족 얘기였음.

그땐 다들 꽤 취한 상태라 딱히 명헌의 눈치도 보지 않았겠지. 자녀계획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오고, 하나둘씩 아내가 임신했을 때의 이야길 꺼냈음.

야. 나 치즈 먹으러 임실 갔다왔다. 나 이길 놈 있냐?  
제주도 가서 귤 딴 사람 없으면 조용히 해라.
이새끼들아... 나 돈가스 먹으러 일본 갔다왔거든?

아내가 임신 중 먹고 싶어 하던 음식 먹으러 누가 더 멀리 갔는질 대결하던 친구들 사이로, 명헌이 문득 질문했음.

와이프 임신했을때, 어땠냐.

가만히 고민하던 친구들이 그때를 회상하며 대답해줌.

어땠긴. 입덧 때문에 죽어라 고생했지. 입덧약 먹어도 계속 울렁거린다고, 아무것도 못 하고 못 먹고 누워만 있어야 했고.
우린 먹덧으로 왔는데. 그게 입덧보단 낫긴 하더라. 근데 또 조금이라도 배 비면 입덧 올라와서 계속 먹어주면 좀 낫더라고.
울 와이프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거 알지. 근데 임신했을 땐 호르몬 때문인지 드라마 보고 울더라니까. 나 그런 거 처음 봤잖아.
엄청 사소한 거에도 되게 서운해 하더라고. 그게 그땐 그렇게 된대. 신경쓰느라 좀 힘들었는데... 그래도 애 엄마 만하겠냐. 그리고 애 보면 행복해서 다 잊어, 그런 거.
맞아. 첫째 심장소리 처음 들었을 땐 진짜... 난 솔직히 울었다.
울보새끼 이거... 난 임신 테스트기 보자마자 울었거든.

은근한 자랑으로 끝나는 대화를 듣고 있자니 명헌도 웃음이 났음. 그런 명헌의 머릿속엔 제 아이를 임신한, 송태섭이 스쳐지나갔겠지. 입덧 같은 거 했으려나. 우는 모습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드라마 같은 거 보고 운 적 있으려나. 내 행동에 서운했던 적 있을까. 혼자 진료받은 날은 어땠을까. 심장소린 들어봤을까. 테스트기를 처음 봤을 때는 어땠을까...

귀로는 친구들의 영양가 없는 잡담을 듣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로 한 번씩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이명헌을 뒤흔들어놓았겠지. 꽤 늦어진 시간에 친구들이 이제 슬슬 가자며 자리를 떴음. 오랜만에 봐서 좋았다며 인사를 나누고, 가게 앞에서 각자 대리를 부르고 담배를 피우며 짧게 어수선해진 시간. 현철이 명헌의 옆자리로 슬쩍 다가옴. 

원래 남의 가정사에 끼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명헌아. 우리가 남이라기엔 좀 그렇잖냐. 그때 제수씨 너 엄청 생각하고 챙기던데. 그게 그래봤자 고작 두 세달 전이다. 내가 널 모르는 줄 아냐. 며칠 전에 이혼서류 냈단 새끼가 이런 표정인 게 말이 돼. 니가 노력해라. 내가 봤을 땐 제수씨 너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러곤 다른 친구가 금방 다가왔기에 더는 진지한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겠지. 명헌은 현철이 했던 이야기를 조용히 곱씹었음.
친구들을 모두 배웅하고 마지막으로 차에 올라탄 명헌은 픽 웃을 수밖에 없었음. 사랑. 사랑이라. 그 애가 나를? 현철아, 니가 몰라서 하는 얘기다. 우린 애초에 사랑해서 결혼한 적 없고, 전부 거짓말이니까.
차마 못 했던 이야길 입에서 굴려보던 명헌이 목적지를 바꿨음. 회사 잠깐 들렀다 갈까.

사실은, 맞아. 요 며칠 신경쓰인 빈자리, 머릿 속을 잔뜩 헤집어놓은 얼굴, 임신, 아기, 사랑. 그 모든 키워드의 주인을 보면 뭐라도 정리 될까 싶어서. 취기가 올라 안 하던 행동을 하게 된 것도 맞음. 그냥. 지금 갔을 때 어떻게 마주치기라도 하면. 왜인지는 모르겠음. 깔끔하게 해결될 것 같은 기분 같은 게 자꾸 듦.


비서는 그 말뜻을 알아채고 회사로 향하는 길, 태섭의 집 앞으로 길을 조금 돌아갔겠지. 멍하니 창밖을 보던 명헌의 눈이 커졌음. 

진짜 있네.

낑낑대며 검은 봉지 두 개를 들고 뒤뚱뒤뚱 걷는 태섭의 뒷모습. 태섭을 막상 마주하니 무언가 해결되긴 커녕 또 짜증이 남. 차를 세우라 지시한 명헌이 금방 차에서 내려 뒤에서 태섭을 따라잡았겠지. 손에 들린 무거운 봉투 하나를 뒤에서 뺏어들곤 태섭의 앞을 막았음. 

명헌을 본 태섭은 눈이 동그래져서 몇 번이나 깜빡이다 천천히 검지를 들어 명헌의 어깨를 콕 눌러봄.

이게 무슨...
진짜다. 여, 여기 왜 있어요?

명헌이 눈 앞에 있는 게 잘못 본 게 아니란 걸 알아챈 태섭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쳤음. 명헌은 태섭의 말에 대답하기보다 다른 손에 들린 또 다른 검은 봉투를 빼앗아 들었겠지. 들어보니 무게가 꽤 많이 나갔음. 봉지 안을 흘긋 보니 노란 귤이 검은 봉지 두 개에 가득 들어있었음.

이런 건 택배로 시키는 게 낫지 않나?
... 택배로 시키면 상자가 바닥에 놓여져 있잖아요. 배 때문에 들기가 어려워요... 작은 걸 사면 너무 빨리 다 먹어서 금방 또 사러 나와야해서 번거롭다고요. 이렇게 사면 많이 살 수도 있고, 들고 집까지 갈 수도 있고...

명헌의 말에 주절주절 대답하던 태섭이 앗, 하고 입을 다물더니 명헌에게 손을 뻗었음. 이리 주세요. 제가 가져 갈게요. 들 수 있어요.
명헌은 가볍게 태섭의 손을 피해 몸을 물렸음. 몸이 가까워졌다 다시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미간을 좁힌 태섭이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함.

술 마셨어요?
무거운 걸 들고 다니는 게 취미는 아닐테고. 
네, 아니에요. 술 취한 사람 받아주는 것도 취미는 아니고요.
마신 건 맞지만 취한 건 아닌데.
지금 말 장난 하자는 거 아니거든요? 

급하게 표정을 굳힌 태섭이 몇 번 명헌에게서 다시 봉지를 빼앗아가려다,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쉬곤 걸음을 아파트쪽으로 돌림.

그럼 그건 그냥 이명헌 씨 드세요. 
전처 무거운 짐 들어준다는 게 그게 그렇게 못할 짓인가?
그건 아니죠. 근데 원하지도 않는 배려 자꾸 하는 거, 그건 못할 짓이에요. 지금처럼 술 마시고 찾아오는 것도요.

또, 또 그 상처받은 얼굴. 먼저 뒤돌아가는 태섭의 뒷모습을 가만 보던 명헌이 비서에게 귤 봉지를 맡김. 비서는 급하게 봉지 두 개를 들고 태섭의 뒤를 따라갔고, 명헌은 또 짜증이 났음.

그거 하나 들어주는 게 어때서. 내가 저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니고, 잠시 회사에 들리기 위해 지나가다 만난 건데. 그게 그렇게 못할 짓이었나? 그러게 왜 무거운 걸 혼자 들고 다녀. 자꾸 왜 혼자 짐을 지려 하지? 왜.

뒷자석에 올라탄 명헌이 머릴 쓸어올리며 고갤 비틀다, 검은 시트 틈새의 하얀 무언가를 발견함. 쓰레기 같은 건가 싶어 쓸어보니 종잇조각이 사이에 깊게 박혀있음. 꽤나 쉽게 뽑히는 걸 펼쳐보면, 구겨진 자국이 남은 까맣고 하얀, 초음파 사진.
사진 상단에 적힌 산모이름, 송태섭. 

빤히 사진을 들여다보다 접혀진 자국대로 적당히 다시 접은 명헌은 안주머니에 사진을 넣고 그냥 눈을 감아버렸음.


명헌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