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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1 05:39



노부가 다가가 손을 잡자 케이타는 멍하게 그 손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서 노부와 시선을 마주쳤다. 노부는 케이타가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당장이라도 모두 털어놓길 바라지만, 주변에 돌아다니는 궁인들이나 대신들이 너무 많았다. 어차피 케이타가 더 이상 전쟁에 나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조만간 공표되겠지만 그래도 황궁에서 새어나가는 모든 이야기는 황제가 원하는 때에, 황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한다. 여기서 괜히 입을 놀려선 안 된단 말이었다. 그래서 노부는 케이타의 손등을 쓸어주며 속삭였다. 

"이제 우리 궁으로 같이 돌아갈까요?"
"우리 궁..."

케이타는 느릿하게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노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 궁."
"네, 우리 궁으로 같이 돌아가요."

케이타는 '우리 궁'이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노부와 손을 잡은 채 등왕궁을 향해 걸었다. 대화제국의 황궁 내에서는 황제와 황후를 제외한 그 누구도 가마나 마차를 탈 수 없었다. 심지어 황제의 자식들인 황녀와 황자들도 가마를 탈 수 없는데 황제는 케이타와 노부에게는 가마를 탈 수 있게 해 주었다. 노부가 황제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조금 난감해하자, 황제는 시큰둥하게 말했었다. 

그 아이들이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나가야 할 이들인 건 맞지. 하지만 그 애들이 지금까지 나라를 위해 한 게 뭐가 있다고 가마를 태워? 지들 외숙이 지금까지 나라를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얼마나 공을 세웠는지 모르고 외숙만 가마를 탄다고 투덜거릴 녀석들이면 어차피 평생 궁 안에서 가마 같은 건 못 탈 팔자야. 

그 일을 두고 투덜거리기라도 하면 절대로 황제가 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노부가 전쟁에서 돌아온 케이타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자, 케이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편하게 가마를 타셔도 됩니다. 
하지만 전하가 가마를 타게 하시려고 그렇게 조치하신 건데. 
나야 궁에 있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직 혜국을 비롯해서 남은 나라가 몇 곳 있으니.


그때 케이타는 다시 전쟁에 나갈 일이 없을 거란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자신은 가마를 탈 일이 없을 거라 했었다. 궁에 있을 일 자체가 얼마 없다고. 그리고 케이타는 이제 전쟁에 나가지 말라는 말을 듣고도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궁을 향해 걷고 있었다. 아니, 부지런히는 아닌가. 케이타는 여전히 멍하고 불안한 얼굴이었으나 그래도 노부의 손을 꼭 잡고 등왕궁을 향해 걸었다. 






노부는 케이타와 함께 궁에 들어온 이후 등왕궁의 궁인들 중 총관태감 하나만 남기고 전부 궁 밖으로 내보냈고, 호위들에게 정원을 꼼꼼히 감시하라고 시킨 후 케이타를 데리고 등왕궁의 정원으로 향했다. 봄을 맞아 막 피어나는 꽃들이 가득했지만 케이타는 꽃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멍한 얼굴로 노부를 따라 걷기만 했다. 

"많이 당황스러우셨습니까?"

케이타는 마음이 완전히 뒤집힌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노부의 목소리는 들리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제국이 정말로 대륙을 평정하기 전까지는 계속 전장에 나갈 줄 알았습니다."
"그동안 많이 애쓰시고 힘드셨으니 이제 놓아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노부가 그렇게 말하자 케이타는 그저 멍하게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었다. 이제 전장에서 벗어나게 돼서 기분이 어떤지, 이제 시간 여유도 많이 생겼는데 하고 싶은 것은 없는지, 이제 여기가 우리가 계속 살아야 할 우리 궁이고 우리집인데 우리 취향에 맞게 좀 바꿔보는 건 어떤지, 난 연못을 만들고 싶은데 나중에 아이들을 낳았을 때 아이들이 돌아다니다가 연못에 빠지면 위험하니까 어른이 아주 잠시 눈을 뗀 순간 아기들이 연못으로 슉 다가가 빠지지 못하게 길을 복잡하게 해 놓는 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질문들을 할 때마다 케이타는 꼬박꼬박 성실하게 대답을 했다. 그러나 노부의 손을 꼭 잡고 같이 걷고 있어도, 노부의 질문에 내내 성실하게 답을 하고 있어도 마음이 이리저리 휘저어지고 갑자기 익숙한 길에서 확 떠밀린 것 같은 불안과 혼란에 빠져 있다는 걸 노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노부는 총관태감을 불러서 몇 가지를 주문해 놓고 케이타의 손을 잡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에 만들어진 정자로 케이타를 데리고 갔다. 





계속 멍하던 케이타가 정신을 차린 건, 노부가 이렇게 물었을 때였다. 

"어린 시절에는 하고 싶은 거나 바라는 건 없었습니까? 난을 많이 치면서 자랐다고 들었는데 그건 폐하가 일부러 퍼뜨린 가짜 소문이었습니까?"
"어린 시절에는 밥을 끼니 때마다 잘 먹기만 해... 음?"

케이타는 무심코 대답을 하다가 입 안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살구 맛과 고소하고 짭짤한 건락의 맛에 눈을 크게 뜨고 노부를 돌아봤다. 그러다가 자신이 노부의 다리 위에 편안히 올라앉아 있다는 것도 이제야 발견했는지 눈이 더 커다래졌다. 노부는 한 손으로 케이타의 허리를 감고 한 손으로 말린 살구 안에 건락을 잘 끼우다가 케이타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전에 전하와 계왕 전하가 만든 밀떡건락감귤에서 약간 변형해 본 것입니다. 건과일은 생과일보다 더 달콤하니까 말린 과일 안에 건락을 끼워서 먹으면 더 맛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떻습니까?"

노부가 건살구에 끼운 건락을 다시 케이타의 입에 쏙 넣어주자, 케이타는 노부의 무릎에 앉은 채로 부지런히 입을 오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하고 짭짤하고 고소하고 맛있습니다. 건살구가 쫀득하고 건락도 쫄깃해서 씹는 맛도 좋습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내가 언제부터 여기에 앉아 있었습니까?"

케이타가 민망한 얼굴로 자기가 걸터앉은 노부의 다리를 바라봐서 노부는 민망함에 오물거리는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춰주고 웃으며 대답했다. 

"반 시간도 안 됐습니다. 너무 많이 걸어서 피곤하실 것 같고, 배도 좀 출출하실 것 같아서 건락과 건과일들을 좀 준비해 달라 했습니다."
"다리 안 아프십니까?"
"너무 가벼워서 전하가 앉아 있는 느낌도 제대로 안 나서 서운할 정도입니다."

물론 케이타는 온몸이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라서 보기보다 무겁기 때문에 아무런 느낌도 안 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다지 무겁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노부는 책상머리에서 일만 하던 사람이라고는 해도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해서 늘 뛰어다니며 놀았던 터라 원래도 몸이 튼튼하고 체력이 좋았다. 게다가 케이타가 전쟁에 나간 이후에는 황제에게 케이타가 다시 출정하지 않을 거란 말을 듣기 전에는 다음에 케이타가 출정하면 나도 나가서 보살펴주다고 해볼까 혼자 헛물을 켜면서 체력을 단련했고, 황제에게 다시 전쟁에 내보내지 않겠다는 확답을 들은 이후에는 케이타를 데리고 좋은 곳들을 다닐 욕심에 또 체력 단련을 열심히 해서 지금은 노부 인생에서 가장 튼튼하고 체력이 좋아진 시점이었다. 그래서 케이타가 걸터앉은 정도로는 정말로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케이타는 그렇게 말하며 민망해했지만 그래도 노부의 다리 위에 앉아 있는 게 좋은지, 건망고에 건락을 끼우더니 노부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맛있습니까?"
"네, 맛이 좋습니다. 전하가 과일과 건락을 같이 먹는 방법을 생각해 내신 덕분에 이렇게 응용도 하고 좋습니다."

노부가 그렇게 추켜세워주자, 케이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민망해하다가 노부를 폭 끌어안았다. 어차피 노부가 여러 사람이 들어서 좋을 것 없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궁인들을 다 내보내서 총관태감과 호위들밖에 없는지라 노부도 안겨오는 케이의 등을 토닥이고 있자, 케이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물었던 것 말입니다. 어린 시절에 원하던 바람."
"네."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아까 밥을 끼니때마다 잘 먹기만 해도... 까지 들었기 때문에 당시 왕자였던 쿄스케, 현 황제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로 수시로 굶었을 것이란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엔 쿄스케가 챙겨줬을 수도 있지만, 당시엔 쿄스케도 그냥 왕자였고 눈치를 보니 당시 왕이 왕후나 쿄스케를 딱히 총애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 데다, 쿄스케도 소년 시절부터 자주 전쟁을 나가 궁을 비웠고, 무엇보다 쿄스케가 케이타를 챙긴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선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 

많이 굶었겠지. 그래서 굶지 않기를 바라며 지냈겠지. 노부는 속이 상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었다. 

"이미 다 이루어졌다면 어떤 것이었는지 말씀해 주셔도 됩니까?"
"배를 곯지 않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과."
"네."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
"..."
"그대를 만나 내 모든 바람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케이타는 건락에 작은 건포도를 쏙 끼워넣어서 노부의 입에 넣어주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노보루가 3살 때 처음으로 노보루를 만났습니다. 모친은 저는 완전히 방치했지만 노보루에게는 엄청나게 집착했었습니다. 저를 낳으셨을 땐 모친이 너무 어리셔서 저를 이용해서 부친의 애정을 받거나 권력을 잡을 생각도 못하고 허송세월했는데 궁에서 지내면서 다른 후궁들과 황자녀들이 하는 걸 보고 뭔가를 배우셨는지. 기회를 잡아 노보루를 품고 낳은 이후로는 노보루를 왕으로 만들려고 어릴 때부터 잠도 제대로 안 재우면서 공부를 가르치고 검술을 가르치려 했다 합니다."
"네."
"그래서 노보루가 숨이라도 좀 돌리고자 유모의 손을 잡고 어머니의 궁을 도망쳐 나왔다가 저와 마주친 것입니다. 그때 노보루의 유모가 제가 노보루의 동복형이라 말해 주었는데 그 아이는 어려서인지 유모의 말을 바로 믿고 제게 형이라며 매달렸습니다."
"...네."
"노보루는 간식도 느긋하게 먹을 틈을 안 주는 어머니를 피해서 그날 작은 손에 떡을 들고 달아났었는데..."
"..."
"떡 냄새에 배가 꼬로록거렸습니다."
"계왕 전하의 배가요?"
"제 배가요. 그날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
"마침 형님께서는 그때 아몬 형님과 같이 전장에 나가 궁에 안 계셨습니다."
"네."
"그러자 노보루가 눈을 크게 뜨고 저를 보더니 아장아장 다가와서 제 무릎에 올라앉아 제 입에 떡을 물려 주었습니다."
"착하신 분 같았습니다."

진심이었다. 노부는 케이타의 인생을 검과 전쟁터에 묶어버린 동생, 그럼에도 케이타가 언제나 챙기는 동생을 좀 싫어했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노보루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고, 케이타를 정말로 아끼고 사랑하는 게 눈에 보였다.

"네, 착한 아이입니다. 그 이후로 노보루는 어머니의 눈을 피할 틈만 있으면 잘 숨겨 두었던 자기 밥이나 간식을 제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제가 좋아 보이는 다과가 있을 때마다 노보루의 것을 챙기는 것도 그렇게 1년간 받아먹은 것이 있고, 그때 노보루의 그 마음이 제게 정말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네, 우리 전하는 다정하고 상냥하신 분이시니까."

노보루도 착하지만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 그 마음을 아낄 줄 알고 갚을 줄 아는 거라고 당당히 말하자, 케이타는 작게 웃더니 건살구에 감은 건락을 노부의 입에 넣어 주었다. 노부는 건망고에 정성스럽게 감은 건락을 케이타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래도 사실 예뻐 보이는 거, 맛있어 보이는 거, 좋아 보이는 걸 가져다줄 뿐, 먹었을 때 정말 맛있다는 생각이 드는 음식은 잘 없었는데..."
"...그랬습니까?"
"네. 그런데. 제가 윤국에서 돌아온 후 그대의 집에 갔던 날 말입니다."
"네."
"그대가 뜨거운 물수건으로 내 손을 닦아주고, 설기를 먹으라 권해줬을 때, 전쟁터나 떠도는 나와의 혼인이 그대에게는 횡액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드디어 오래 전 작은 손으로 가죽팔찌를 채워주며 무사히 돌아오라 기원해 주던 그대와, 오래 전 그 날에 작지만 하늘의 해보다 더 따뜻하고 밝게 빛나는 것 같던 그대와 혼례를 치를 수 있어서 나는 너무 좋기만 했기 때문이었는지."
"..."
"그날의 그 설기가 너무 맛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대와 먹는 건 뭐든 맛있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린 시절에 품었던 소원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노부의 반려는 여전히 제 마음을 요령껏 가리고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마음에 품은 애정과 감사, 기쁨과 행복을 그대로 털어놓고 있었다. 노부는 늘 그랬듯 반려의 솔직한 애정에 가득 차오르는 벅찬 가슴을 안고 그 사랑스럽고 예쁜 반려의 입술에 입을 가볍게 맞추며 속삭였다. 

"그동안 대화제국을 많이 비우시고, 또 도성과 황궁을 많이 비우셔서, 이 나라와 이 도시, 이 궁이 전하에게 낯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음."
"그동안은 오가는 곳이라 생각해서 그저 낯설기만 한 것도 어쩔 수 없다 여기셨겠지만 이젠 자리 잡고 살아야 하는 곳인데 여전히 낯설기만 해서 두렵고 걱정스러운 것도 이해합니다."
"음."
"너무 급히 적응하려 하실 필요 없습니다."
"..."
"제가 늘 전하의 옆에 있을 테니, 제게 정을 붙이시면 제가 전하의 집, 전하의 궁이 돼 드리겠습니다. 제가 있는 곳이라 생각하면 조금 더 '우리집, 우리궁, 우리도성, 우리나라'같지 않겠습니까?"
"..."
"힘드시면 서두르지 마시고, 제게 먼저 정을 붙여 주십시오, 전하."

케이타는 여전히 노부의 다리 위에 올라앉은 채로 노부의 뺨을 가만히 쓸어내리다가 노부와 눈을 마주치고 작게 속삭였다. 

"이미 그대에게 너무 정을 많이 붙여서 그대가 부담스러울까 오히려 걱정입니다."
"... 부담스러울 리-"
"그대가 있으니 이 궁은 이미 '우리 궁'이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전하."
"진국과의 전쟁 때도 빨리 '그대에게 돌아오고' 싶어서, '우리궁에 돌아오고' 싶어서 마음이 내내 술렁였습니다."

내내 걱정햇는데 이 사람에게 노부가 정 붙일 곳이, 마음 둘 곳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 기뻐서 빙긋 웃자, 케이타도 예쁘게 입술을 끌어올리며 속삭였다.

"그대는 이미 나의 궁, 나의 집입니다."






#사신마치다사신의반려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