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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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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노부는 햇살이 반사 돼 반짝이는 개울을 가리키며 마치다의 시선을 돌리려 했다. 온 마을에 퍼진 유산 소식에 주민들이 걱정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지만 스즈키 집안의 안주인은 그냥 멍하니 앞만 보고 걸었다. 대문 앞에 고용인들이 전부 나와 있었다. "사모님...! 어서오세요. 걷는 거 힘들지 않으셨어요?" 그제야 노부는 생각했다. 내가 업어서 왔어야 했는데. 하지만 마치다의 말수가 없어진 건 다리가 아파서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의사가 지어준 약을 먹어야 했기에 밥은 거를 수 없었다. 식탁 앞에 앉아 밥과 국을 몇 숟갈 떠먹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마치다를 노부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사치코. 2층 방에서 내가 지낼 수 있게 침구류 좀 옮겨놔. 무거운 건 내일 날 밝으면 남자들 시킬거니까." 그 말을 듣고 먼저 움직인 건 레나였다. 사치코는 전에 없이 차가워진 사모님의 말투에 얼어 붙었다. 기운이 없고 웃음기가 없는 것 이상으로 확실히 냉정해진 느낌이었다. 말투도 제법 명령조에 가까웠다.

노부의 사촌 일을 돕고 온 레나는 그 집에서 출발하기 직전 유산 소식을 들었다. 최근 보름 동안 겪었을 수모를 떠올리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골방에 갇혀서 헐벗고 굶주렸다는 것은 사치코를 통해 계속 전해 들었다. 사촌 집에 일손을 보태러 오기 전, 딱 한 번 그 골방 앞에 접근했다가 발길을 돌렸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어서였다. 그래도 주인님은 사모님을 아끼시는 분이니 크게 벌하지 않으셨으리라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사촌 집에 일을 하러 온 뒤에도 그런 벌이 계속 됐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네가 그렇게 동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받는 꼴을 보라는 의미로, 그런 의미로 했던 짓이라면 자신이 그 집을 떠나있을 땐 멈췄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인님과 사모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니까. 비록 자신이 훼방을 놓기는 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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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님이 두 발로 집 안에 걸어 들어와 다시 안주인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이 껄끄러웠다. 다시 그 골방으로 들어가 묶이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든 채 자신에게 명령하는 게, 솔직히 살 떨리게 무서웠지만 시간이 지나니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한 번 처지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다시 고상한 척 하기 쉽지 않을텐데. 역시 보통 철판이 아닌듯 했다.

주인님과의 잠자리는 좋았다. 앞으로 있을 다른 남자와의 잠자리와 미리 비교해 봐도 최고일 것이라 장담한다. 그렇게 많이 한 건 아니지만 세 번 다 좋았다. 한 번은 사모님을 처음 골방에 가둔 날, 안방에서 일기장을 보며 술을 드시고 계시기에 술 시중을 들다가 일이 그렇게 됐다. 경험이 없는 꽉 닫힌 속살을 찢으며 들어오셔놓고, 계속 사모님의 이름을 부르셨지만 비참할 정도는 아니었다. 두 번째는 작정하고 주인님에게 여우짓을 했다. 사모님이 화가 많이 나셨다고, 이깟 음식 필요 없으니 당장 꺼지라면서 손등을 깨무셨다고 거짓말을 했다. 물론 손등에 잇자국은 스스로 낸 것이었지만 가짜 눈물을 흘리며 기대니 쉽게 다리 사이로 손이 들어왔다. 세 번째는 주인님이 먼저 시작했다. 맨정신으로. 고용인들이 모여 잠을 자는 방에 찾아 오셨다. 모두가 잠든 시간이었고 최근엔 침실 앞을 지키는 고용인도 따로 두지 않았기에 깨어있는 사람이 없었다. 멀리 가지도 않고, 주인님은 나무로 된 바닥이 삐걱거리는 복도에서 성기를 꺼내셨다. 무릎을 꿇고, 그 잘난 사모님이 실컷 빨았을 물건을 입에 담았다. 너무 커서 입가가 찢어질 것 같았다. 목구멍을 깊이 찌르는 이물감에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주인님을 만족시키고 말겠다는 생각 하나로 최선을 다했고, 이젠 내 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쭉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 번째는 없었다. 뭐가 그렇게 괴로운지 방 안에서는 술병을 던지는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가라앉은 눈으로, 골방 앞에 가 레나인 척 말을 걸어 보라는 명령이 소름끼쳤다. 그렇게 사모님의 하혈을 목격하고 어느 정도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병원에 간 뒤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이대로 주인님의 첩이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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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는 2층 빈 방에 이부자리를 깔며 걱정스러운 말을 늘어놓았다. "이제 막 퇴원하셨는데 이렇게 먼지 잔뜩 있는 방에서 주무시면 안 돼요... 오늘은 안방에서 주무시고 내일부터 이 방을 쓰시면 좋을 텐데..." 자신을 두고 사치코를 콕 찝어 명령한 게 서운했지만 앞으로는 사모님이 어떤 행동을 해도 다 이해할 것이었다. 더 이상 함께 외출을 하지 않으셔도, 목욕 시중을 다른 고용인에게 시키셔도. 자신에게 모질게 대하셔도. "내일은 애들 시켜서 깨끗하게 청소하고 가구도 몇 가지 들일게요. 약 드실 물 떠올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대답은 커녕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꼿꼿한 모습에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참아야 했다. 그날의 바보 같은 입맞춤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사모님이 당했을 수모도, 끔찍한 유산도, 이런 뻣뻣한 관계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주인 부부 앞에서 혀라도 깨물고 죽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사모님 곁을 떠날 수 없어. 매질을 하고, 굶기고, 내게 수치스러운 일을 시키셔도 다 감당할 거야. 사모님을 두고 죽는 것 만큼은 할 수 없어. 뺨을 수천 대 갈기고 꺼지라고 욕하셔도 난 계속 무릎 꿇고 사모님 곁에 남게 해달라 싹싹 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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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커녕 침대에 누울 수 조차 없었다. 병원에서 돌아올 때 한 마디 말도 없었던 것이 피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주민들에게 받는 동정의 시선이 불편해서라고. 집에 돌아오면 일단 방에 누워 휴식을 취한 뒤 저녁 식사를 하고 자기 품에 누워 잠들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하지만 마치다는 오후 시간 내내 거실 소파에 앉아 허공만 보고 있다가 저녁 식사 후엔 고용인을 시켜 혼자 지낼 수 있는 방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왜 나를 미워하는 거지? 내가 너무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용서를 구해야 할 쪽은 내가 아니지 않나. 남자는 이렇게 어리석고 자기 중심적인 동물이었다. 이제 막 스물이 된 고용인의 처음을 가져가고도, 그러는 동안 제 부인은 골방에 갇혀 곧 다가올 유산의 통증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그의 얼굴에 죄책감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사치코와 잠자리를 가진 건 애정이나 연민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풀어야할지 모르겠는 분노와 혼란 때문이었다. 눈 앞에 나타난 사치코라는 자극은 술처럼 쉽고 독한 도피처였다. 그렇다고 이걸 부인이 이해해주거나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잘한 짓이 아니란 건 알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남은 일말의 배려였다. 이마저도 마치다가 알게 된다면 우스운 변명에 불과할 테지만.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