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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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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팠지만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허기짐과 식욕이 별개의 문제라는 걸 처음 알았다. 창문도 없고 시계도 없어 지금이 몇 시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사치코가 아침 식사를 하시라며 들렀기에 하루가 지난 걸 알 수 있었다. 생일날 밤, 레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키스를 받고 남편에 의해 지하실로 끌려 왔다. 거의 24시간을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혼자 갇혀 있다가 이튿날 아침에 사치코가 온 것이다. 남편이 보낸 건지, 그냥 고용인들이 알아서 식사를 차려 보낸 건지도 몰랐다. 바닥에 쟁반을 내려놓고 그냥 나가려던 사치코가 멈칫했다. 등 뒤로 묶인 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제가 그걸 풀어드릴 수는 없고... 식사하실 수 있게 도울게요." 벌거벗은 사모님과 마주 앉아 밥을 한 숟갈 떴다. 하지만 마치다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어제 종일 굶으셨잖아요. 조금이라도 드세요." 밥숟갈을 내미는 손목에 멍이 있었다. 옷깃 사이로 보이는 쇄골에도. 그 사람의 손길이란 걸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됐구나. "안 먹을래... 갖고 나가..." 사치코는 한숨을 쉬며 쟁반을 들고 일어났다. 왠지 걸음에서 경쾌함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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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코가 다녀가고 하루가 지났는지 이틀이 지났는지 구분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저 몇 시간 지났을 뿐일지도. 아까부터 배가 쿡쿡 찌르는 것 같더니 등줄기에 식은땀까지 나기 시작했다. 묶인 자세로 할 수 있는 건 옆으로 눕거나 앉는 것뿐이었고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계속 한 자세로 있으니 온몸의 관절이 그 모양으로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사치코가 다시 찾아왔을 때, 침실에서 일기장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미 그 일기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치코는 정확한 위치도 묻지 않고 되돌아 나갔다. 10분도 안 돼 들고 온 일기장은 알 수 없는 액체에 한 번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있었다. "주인님께서 실수로 술을 쏟으셨어요. 며칠 전에." 그걸 잘도 알고 있구나. 침실에서 네가 술 시중을 들었구나. 별로 입 밖으로 내고 싶은 말도 아니었다. 일기장을 갖고 와달라 부탁한 이유는 그걸 감상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사치코... 내 일기들 다 찢어줄래? 내가 직접 하고 싶지만, 손이 이래서..." 사모님이 좋았던 적은 없지만 일기를 찢어달라는 부탁은 뭔가 망설여졌다. 몇 번이나 같은 말씀을 하시기에 결국 찢기는 했지만, 그 종이를 갈기갈기 찢을 때만큼은 사모님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었다. "됐어... 이제 갖고 나가서 버리든 태우든 마음대로 해." 사치코는 그것을 갖고 방을 나서면서, 문밖에서 자물쇠를 걸어 잠그면서 주인님의 화난 얼굴을 떠올렸다. 사모님이 시켜서 찢은 거지만 그 사실을 알면 몹시 화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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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레나가 찾아왔다. 너 때문에 내가 겪는 이 수모를 좀 보라며 소리치고 싶었다. 행복하게 잘 살던 중이었는데 네가 저지른 바보 같은 실수 때문에 남편이 날 미워한다고 뺨이라도 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마치다는 무력하기만 했다.

"사모님... 저 레나예요. 제가 풀어드릴 테니까 같이 도망쳐요. 문 앞으로 와 보세요." 정신을 차린 뒤에도 그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다는 무릎걸음으로 겨우겨우 문 앞에 갔다. 도망치려고 그런 게 아니라, 레나와 눈물의 재회라도 하려던 게 아니라. 레나가 무사한지 궁금해서였다.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사실은 레나의 것이 아니라는 걸 왜 그렇게 늦게 알았을까. 문이 열리고, 사치코가 서 있고, 그 뒤에 제 남편이 서 있는 장면을 두 눈으로 본 뒤에야 깨달았다. 레나 목소리는 이렇지 않잖아. 사치코가 왜 레나인 척한 거지? 아, 그렇구나. 남편이 시킨 거구나. 내가 레나와 함께 도망칠 거라고 생각해서 시험한 거야.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요... 당신은... 당신 질투심이 더 중요해요? 날 사랑하는 마음보다 집착하는 마음이 더 큰 거예요? 난 당신 물건이 아니에요..." 배 속을 누가 위아래로 잡아 뜯는 것 같았다. 5초 뒤? 10초 뒤? 이러다 기절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내 다리 사이가 뜨거워졌다. 사타구니로 얼핏 피가 비치는 것 같더니 계속 더 많은 양이 묻어났다. 꿇고 있는 무릎 사이로 검붉은 피가 뚝 떨어짐과 동시에 노부가 사치코를 밀치고 방 안으로 들어와 마치다를 안았다. 다시 척추뼈가 만져졌다. "케이, 정신 차려요."

사모님이 임신했었다고, 그런데 이젠 없다고. 30분도 안 돼 고용인들 사이로 소문이 쫙 퍼졌다. 온천을 오가며 일하는 고용인 때문에 온천 직원들까지 모두 알게 됐다. 노부의 사촌 형수가 출산해 일손을 보태러 간 레나는 마치다의 유산 소식을 한참 늦게 들었다.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