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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7 23:03
우성이 미국 간 지도 몇 년 지나고 거기서 대학 잘 다니고 있을 무렵 처음으로 산삼즈 선배들 미국 놀러온대서 잔뜩 들떴는데 뭔가가 좀 타이밍이 안 맞아서 공항엘 못 나간거야.
공고 시절 산왕이들 미국 연수 갔었을 때 영어 실력 어땠는지 익히 아니까...우성이 걱정이 태산 같은데 의외로 알아서 우버 잡아타고 드라이버랑 스몰톡까지 해가며 이 동네 산 지 2년 된 우성이는 여태 모르는 동네 추천 맛집까지 알아온 산삼즈.
뭐예요??? 띠용 해서 물어봤더니 이명헌이 영어를 좀 한대...에엥...??? 명헌이 형이....???
이명헌 시험은 얼추 요령으로 중간 정도 점수 나왔던 거 알지, 근데 형이 회화가 된다고? 미국 현지에서? 우성이는 난생 처음 듣는 소리임;
기억 속의 빡빡머리 명헌이 형은 저랑 별로 다르지 않게 예스 노만 겨우 말하고 아는 영단어의 90%는 농구 용어인 빡대가리였는데 도대체.
정우성 갑자기 이명헌이 되게 낯설어짐.
파르라니 깎아놓았던 빡빡머리는 온데간데 없이 살짝 염색을 했는지 부드러운 자연갈색에 웨이브가 살짝 들어간 머리가 양쪽으로 도드라진 눈썹뼈를 덮고 있는, 처음 만난 정우성네 집주인 아줌마 상대로도 영어로 스몰톡 자연스레 끌어가는 이 사람 누군데.
산삼즈 대충 한 일주일 정도 우성이네 신세지면서 관광 다니는데, 정우성 가능하면 가이드 해주려고 노력은 하지만 아무래도 훈련 일정이 있는지라 형들하고 계속 붙어 다니는 건 무리인 거.
오전에 잠깐 같이 어디 명소 하나 찍고 부랴부랴 오후 훈련 들어갔다가, 저녁에 얼른 형들 맛집 데려다주고 자긴 또 다시 트레이너 만나러 가고 하는 꼴을 보다가 이명헌 조용히 정우성 붙잡음. 안 그래도 된다고.

-아니, 그래두..형들 여기까지 와줬는데.
-와준게 아니라 우리가 오고 싶어서 온거삐뇽. 재워주는 걸로 이미 충분해, 우성아.

정우성 형이 먼저 배려해준 거 알아서 고마운 한편으로 이거 선긋긴가 싶어 또 조금 서운해지는데, 귀신같이 알아챈 이명헌이 정우성 달램.

-연습 게임 있을 땐 외부인 관람 가능하다면서용. 내일은 애들 데리고 너 보러 갈게삐뇽. 애초에 너 농구하는 거 보러 온 거기도 하고.

그 말에 정우성 서운했던 거 싹 녹아내려 신나서 방방 뛰면서 진짜요??? 꼭이예요???? 아, 형 보면 깜짝 놀랄걸!!! 나 요즘 장난 아니거든요, 형이 기억하는 정우성하고 완전 다를걸!!!
-하느라고 이명헌 웃는 표정이 쪼금 쓸쓸한 거 눈치 못 챔. 이 순간 정우성 눈에 자기 기분 말하지 않아도 파악하고 익숙하게 달래주는 명헌이형은 겉모습이 많이 달라졌어도 그 때 그 기억속 형 그대로라서.



그랬는데, 그렇게 신났는데...왜 이렇게 됐지.

형들이 보는 앞에서 연습 게임 훨훨 날아다닌 것까진 참 좋았는데, 경기가 끝난 다음이 문제였음.
고등학생 시절 팀메이트들이라고 산삼즈 소개했더니 이쪽도 농친놈들 투성이라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은거야.
한국 대학 리그는 어떤지, 다들 포지션이 어떻게 되는지, 신은 센터일 것 같은데 리는 포인트 가드? 묻는 말에 정우성 경기 후 아드레날린 뿜뿜 상태라 너무 흥분해서 답해준 게 문제였던 것 같기도.

-리는 한국 최고의 포인트 가드! 내가 처음 포인트 가드로 포지션을 변경할 때 교본으로 삼았던 동경하는 선수야!

그 말에 이명헌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정우성은 또 놓치고 말았을 거야.
분위기가 달아올라 순식간에 갑자기 3:3 게임 얘기가 성립됨 그 옛날 479 한 팀 먹고 우성이네 대학팀 셋이 상대가 돼서 코트 정리해야 한다고 쫓겨날 때까지 가볍게 붙는데 정우성 플레이 하는 동안 약간 위화감 느낌
그야 형들하고 안 뛴 지 오래 됐으니까...합이 조금씩 어긋나는 건 그럴 수 있는데.

...명헌이형, 원래 이렇게까지 이타적인 플레이를 했었나?
기회가 될 때마다 철저하게 제 손 안으로 빨려들 듯 들어오는 볼을 받으면서, 그게 좀 어색하게 느껴지는 정우성.
이렇게까지 나한테 다 밀어줄 필요는 없는데, 지금은 형이 직접 쏴도 됐지 않나..물론 내가 더 확실했을 수도 있지만...

왜, 이렇게까지 다 양보를 해.
거슬리게.

저도 모르게 경기 끝날 때쯤엔 미간 찌푸리고 있는 정우성. 결국 저쪽 승리로 미니게임이 끝나고 마는데, 정우성 인상 팍 쓰고 있으니까 우성이네 대학팀 동료가 어깨 툭 치면서 헤이, 재미로 한 거잖아. 재미로. 하고 슬슬 달래는데 그래도 쉽게 펴지지 않는 미간.

-나 아까 뛰던 도중에 기억났어. 리, A대라고 했지.

경기 끝나고 이것도 인연이라고 기념삼아 같이 근처 식당에서 저녁 먹는데, 프렌치 프라이에 케쳡 찍다말고 우성이네 대학팀 센터가 대뜸 그럼.

-어, 맞아. 리하고 초이는 A대, 신은 S대.
-그래, A대. 아니 고등학생 때, 우리팀에 센스는 괜찮은데 체격이 영 딸려서 벤치 신세를 못 면하던 놈이 하나 있었거든. 착한 애였는데. 집이 어려워서 자비로 대학은 힘들고, 스카웃은 꿈도 못 꾸고. 그러다 용병으로 데려가겠다는 곳이 있다고, 갑자기 대학을 한국으로 간다잖아.
-에, 정말? 그런 얘기 나는 처음 듣는데.

정우성 생전 처음 듣는 얘기에 입 떡 벌리는데 모브 센터 씩 웃음

-너 처음 왔을 때 기억 안 나, 정? 뭐 언어가 통해야 얘길 하지. 여튼 내가 널 챙긴 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고 요 녀석~
-헐, 챙기긴 누가 누굴 챙겨.

정우성 부리입 삐죽 내밀고 있는데 이명헌이 갑자기 대화에 끼어 듦.

-애이드리언? 애이드리언 노스, 맞죵. 포지션은 4번부터 5번까지고.
-그래. 거기선 그렇다니 다행이네, 여기선 센터론 무리란 소릴 들었거든.
-좋은 센터예용.

그러더니 이명헌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는데, 그게 이상하게 정우성의 어딘가를 무너뜨렸음.

-착한 애라는 것도, 맞는 말이고.



저녁 먹고도 흥이 안 가셔 펍에 가서 다들 몇잔씩 더 마시고, 집에 돌아와 다른 형들은 바로 다 뻗었는데 이명헌 혼자 베란다에 나가 있는 게 정우성 못마땅함.

-형이 이렇게 영어 잘할 줄 몰랐는데.

베란다 쫓아가 대뜸 말했더니 핸드폰 들여다보고 있던 이명헌이 정우성 돌아보면서 보일듯 말듯하게 웃는데, 정우성 그게 싫어. 왠지 모르게 그냥.

-그 얘긴 첫 날 이미 했다, 우성.
-알아요, 근데 이상해요. 왜...왜 이렇게 잘해요?

이명헌 표정이 그제야 약간 미묘해짐.

-형이...내가 모르는 사이 막...이렇게...영어도 잘하게 되고, 이게 난 싫어요. 싫은 것 같아요.
-우성아, 왜...
-왜 잘하는데요? 누구랑 영어로 대화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 형 예전엔 분명 영어 이런 거 못했잖아요.
-우성, 취했냐,뿅.

뿅이래...그거 한 번도 안 해주더니. 진짜 오랜만에 듣는 어미에 정우성 헛웃음 터짐.

-걔가 나보다 잘해요? 애이드리언인지 뭔지, 여기선 안 먹혀서 겨우 용병으로 간 걔가?
-정우성, 선 넘지 마.
-아니면, 나보다 착해요? 걔는 누구랑 달리 형 말을 잘 듣나? 고백하지 말라면 안 하고, 착각하지 말라면 안 하고?
-정우성.
-근데 아닐 거 같아서. 그쵸, 아니잖아요. 아닌 거잖아.

형, 그 새끼 만나지. 나더런 한 때의 잠깐 지나가는 감정이 어쩌고, 동료애하고 연애 감정은 다른 거니까 착각하지 말래놓고.





같은 우성명헌이 보고싶다면....
정우성 미국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고백엔 그러지 말라고, 너 그거 순간의 착각이라고 밀어내서 머슥하게 알겠다고 삐죽삐죽 가게 했으면서
아기 떠난 이후 쓸쓸해진 마음, 마침 타지생활로 고생하는 외국인 용병 아기한테 정우성 겹쳐보며 다 내어준 명헌이형 어떤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