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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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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으니까 역시 다르네요. 어제 내가 잠깐 벗겨 보긴 했지만.
-안경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말해 줄래?

원래 외출할 땐 안경 보다 렌즈를 선호했지만 노부를 만나러 나올 땐 그냥 안경을 낄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꼭 꾸민 것 같잖아. 오후 5시쯤 노부가 사무실을 찾아왔었다. 공짜 영화표가 두 장 생겼는데 같이 영화 보지 않겠냐고. 오늘은 일본 온천에 사는 원숭이 가족 다큐를 봐야 했지만 사실 넷플릭스로 이미 봤던 시리즈라 공짜 영화를 택했다. 관객으로 붐빌 시간임에도 상영관은 희한하게 둘뿐이었다.

-이 영화 인기 많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그러게요.
-전세 낸 것 같고 좋네.
-좋아요?
-응.

상영관 조명이 전부 꺼지고 스크린마저 까매지는 그 짧은 2초 동안 옆에서 여러가지 일이 일어났다. 노부가 가운데 팔 걸이를 올려 버렸고, 몸을 들썩여 고쳐 앉는가 싶더니 마치다에게 더 밀착해 앉았다. 어깨에 팔 두르면 죽여 버릴 거야. 물론 진짜 죽일 수는 없지만 경멸하는 표정으로 쳐다봐야지. 하지만 팔까지 두르진 않았다.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오직 두 사람만을 비췄고 마치다가 울음을 참느라 애쓰는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표면적으론 고양이를 키우는 여자와 강아지를 키우는 남자가 동거하게 되는 이야기지만,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펑펑 울 수 밖에 없는 내용이다. 최근 상영작 중 손수건 필수인 영화 1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마치다는 그렇게까지 자세한 정보는 몰랐고 노부는 당연히 알았다. 애초에 공짜표도 아니었으니까. 동물 다큐 챙겨 보는 걸 보면 분명 좋아할 거야, 많이 슬프다던데 그 사람 괜찮으려나, 하지만 끝은 해피 엔딩이라니 조금은 울어도 괜찮겠지, 우는 얼굴을 남들에게 보이면 창피할 테니 상영관을 통째로 빌리자, 사실 이건 핑계고 그냥 둘이서만 보고 싶으니까 빌릴래. 노부는 스크린보다 마치다의 옆 얼굴을 훨씬 많이 봤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젖은 속눈썹이 빛났고 손을 뻗어 닦아주고 싶었다. 별로 있지도 않은 볼살을 타고 흐르는 눈물도, 뽀얀 손등에 묻은 눈물도 아직 손 댈 수 없는 사이라는 게 애탔다.

-영화 어땠어요?
-안경 쓰고 올 걸 그랬어. 눈이 퉁퉁 부었잖아.
-그 정도는 아니에요. 밥 먹고 들어가요.
-아... 밥은 그냥 방에서 먹으려고.
-왜요? 모처럼 나왔는데 맛있는 거 먹어요. 내가 살게요.
-됐어. 누가 돈 없어서 그래?

노부는 주변을 살피는 마치다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혼자 먹는 게 편하다느니 동물 다큐를 봐야한다느니 그런 소리를 하면 사람들과 어울려 살으라고 받아칠 생각하면서.

-기숙사에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어서... 그냥 일찍 들어가고 싶어.
-무슨 소문이요? 케이에 대한 거예요?
-응. 짓궂은 애들이 해코지할까 봐 신경쓰여 솔직히.

길게 늘어뜨린 소매를 다정하게 접어주면서 더 이상은 묻지 않자 마치다가 알아서 말을 이었다. 이틀 인원 점검 안 했더니 내가 아파서 병원에 있대. 여자 기숙사 사감이랑 잤고 여학생이랑도 잤고 누굴 임신 시켜서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거래. 남자 신입생을 사감 숙소로 불러서 강제로 해 버렸고, 또 내가 어떤 남교수한테 3년 동안 몸을 대주다가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해 자살 소동을 벌였대. 내가 엠뷸런스에 실려가는 걸 본 애도 있대. 너랑 방에서 코끼리 다큐 본 날인데. 내가 산책로를 걸어다니고 기숙사 안을 멀쩡히 휘젓고 다녀도 그 소문은 사라지지 않더라고. 눈에 보이는 실체보다 소문을 더 믿고 싶나봐.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 때문인지, 다들 내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다고 생각해. 내 일을 열심히 하면 쉽게 쉽게 가라고 욕 먹고, 내 일을 소홀히 하면 뭐 잘못 먹었냐고 무슨 일 있냐고 난리들이야. 이따위 소문까지 날 만큼. 지금까진 재수 없는 사감이었지만 이젠 우습고 만만한 사감이야. 아무도 내 말 안 들을 걸.

-내가 지켜 줄게요.
-뭘. 네가 뭘 지킬 수 있는데?
-아무도 케이한테 해코지 못하게요.
-해코지 당하는 게 무서운 게 아니야. 그건, 그냥 내 신경을 조금 건드릴 뿐이야.
-그럼 케이가 무서운 건 뭐예요? 알려줘요.
-난 사람들한테 우스운 존재가 되는 게 무서워. 그게 다야.

기숙사 건물로 향하면서 두 사람은 약간 떨어져 걸었다. 나란히 걸으려 해도 마치다가 의도적으로 걷는 속도를 늦추거나 아예 멈춰 서서 거리를 넓혔다. 1층 복도에 몇몇 학생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노부에게 잠시만 머물렀고 곧장 마치다에게 향했다. 덤덤한 얼굴로 2층에 올라가는 마치다의 뒤를 노부가 따랐다. 2층은 사무실에 용건이 있지 않은 이상 아무도 찾지 않기에 고요했다. 무서울 만큼.

-같이 있어줄까요?
-아냐. 내려가.
-정말이에요?
-응. 영화 잘 봤어. 고마워.

노부는 마치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숙소 문에 붙어있는 흰색 메모를 몰래 떼어냈다.

-잘 자요. 내일 공강이니까 일찍 올라올게요
-안 그래도 돼. 넌 네 할 일 해. 잘 자.

마치다는 숙소로 들어가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문 밖에 노부가 여전히 서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같이 자달라고 할 거야 어쩔거야. 오늘 밤은 아무도 싫었다. 그 누구도.

'따먹히고 싶으면 302호로 와. 늙은 여우는 취향 아닌데 한번쯤은 먹어줄 의향 있음.' 노부는 흰색 메모를 주머니에 넣고 3층으로 향했다. 1층 학생들이 다 나와 볼 만큼 큰 소란이 일었다. 마치다는 그 소란의 출처가 노부라는 것을 모르고 그냥 계속 누워있었다. 사감이라면 당연히 나가 봐야하겠지만, 오늘은 다 무시하고 싶었다. 오늘까지만.

302호 학생 중 누가 쓴 메모인지 몰라 그냥 두 놈을 다 두들겨 팼다. 누가 쓴 것이냐고 묻고 싶지도 않았다. 노부는 피떡이 된, 2학년인지 3학년인지 모를 어린 놈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한번만 더 사감님한테 건방지게 굴면 그땐 내가 따먹어 줄게. 일주일 동안 앉지도, 걷지도 못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원하면 언제든지 까불어. 몇 년 동안 별 사건 사고 없던 기숙사 건물에 엠뷸런스 두 대가 들어오니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전부 쏟아져 나왔다. 가해자를 찾을 게 뻔해 잠도 안 자고 2층 계단에 앉아 있었지만 다음날 새벽 6시가 될 때까지도 경찰에서는 아무 연락도 없었다. 사감 숙소 안에서 마치다의 기척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노부는 그제야 안심하고 109호로 내려갔다.







노부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