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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5 00:06
근데 얘가 왜 안 오지.

뉴스가 정우성의 이력을 주욱 읊었다. ‘XX연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앤OO 미OOOO와 트레이드되어 현 소속 팀으로 이적한 이래 정우성 선수는... (중략) ... 올스타전 이벤트에서 신인 올스타전 MVP에 오르고 ...(중략) 개막전에서부터 33득점을 올리면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었죠?’

채널을 돌리자 홈쇼핑에서도 정우성을 언급하고 있었다, ‘이번 시즌에 결장 없이 전 경기를 출전한 것도 너무 멋있습니다. 정우성 선수의 체력 관리 비결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자사 상품이 정우성 선수의 에이전시에 계약되어 공급되는 상품이라는 것도 명심해 주시구요...’

이제 올 때가 된 것 아닌가? 태평양을 건너오기에 스태미나가 딸릴 놈도 아니고.

스포츠 해설 채널의 화제도 역시 정우성이었다. ‘정우성의 자세한 플레이는 NBA 공식 채널에서도 볼 수 있고요, 저희 홈페이지에서도 하이라이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예, 맞아요! 명실상부한 국민적인 스타로 등극한 정우성 선수를 저희 채널이 항상 응원합니다... (중략) ...이번에 대학리그 MVP가 된 김XX 선수도 가장 존경하는 선수도 ‘정우성 선배님’이라고 하는데요.’

나도 정우성을 응원하긴 하는데 그사이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정우성이 이제 어엿한 선배 소리를 듣는다. 네가 약속을 기억한다면 이제는 정말로 올 때가 된 것 같다, 우성아.

‘정우성 선수가 국내로 복귀할지는 실은 3~4년 전부터 화제였어요. 그렇지 않나요? 올해야말로 귀추가 주목됩니다.’

명헌은 TV를 껐다. 기자들이 국내리그 복귀 소식을 물을 때면 정우성은 의젓하게 대답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갈 겁니다. 아직은 아니지만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항상 쾌활하게 들렸다. 그럼 도대체 언제가 적시란 말인가. 십대에 이별했건만 이제는 이명헌이 스물아홉이었다. 정우성은 자기가 미국에서 이명헌을 못 보는 동안 이명헌의 시간은 멈추는 줄로 아나 보다. 이명헌도 나이가 들어서 커리어의 제2막을 모색할 타이밍이 왔다. 심지어 주변 사람로부터 슬슬 짝을 찾으라는 압박도 받고 있었다. 그가 NBA 스타 정우성과 함께 굳은 약속을 하고 이별한 사이라고 믿어줄 사람은 찾을래도 없다.

성구와 현철이 이명헌 앞에서 정우성을 추억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진 지 이미 오래였다. 동오는 말을 적당히 받아주기만 했다. 낙수가 몇 년 전에 신년 인사를 주고받은 것이 마지막이라고 심드렁하게 대화를 종료했다. 이명헌을 배려하는 친구들이 너는 아직도 연락하냐?고 눈치 없이 묻는 일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그게 지난 동창회의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3년이 더 흐른다.





“형! 보고 싶었어요. 잘 지냈어요?”


드디어 왔네.


“안녕, 우성.”

“이쪽은...?”

“인사해, 내 남자친구야. 지금 내가 뛰는 팀 에이스.”

“...뭐?”





*





정우성은 이명헌의 눈에서 엷은 복수심이 충족되는 것을 읽어냈다. 잘생긴 입꼬리가 떨리는 것을 차마 숨기지 못한 것과는 별개였다. 정우성은 가늘게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세월이 흐르고 공적인 자리에서 당황하지 않고 처신하는 법을 잘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강도가 너무하다.

“안녕하세요, 근데 많이 어려 보이시네요.”

“얘 진짜 어려.”

나랑 8살 차이.

이명헌은 정우성을 경악하게 할만한 정보를 하나씩 풀고 그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에서 사악한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 친구는 이제 겨우 대학 졸업했지. / 연하가 좋아서 사귀었는데? XX아, 형 물 좀 줄래? ...봐, 착하지? / XX도 등번호 9번이야. 공교롭네. / 왜 여기에 왔냐니, 이 친구도 산왕이니까. / 아, 말했나? 난 다음 시즌에 은퇴할 거야...

정우성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명헌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서 귀국하고 참석한 산왕 동문회 모임만 아니었다면 진작 그랬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정석적으로 프로로 진출한 이명헌과 달리 재학 중에 먼저 제안을 받은 우성은 자기보다 앞선 족적이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홀로 90년대 동양인 농구 선수로서의 길을 개척했다. 외롭고 힘들 때 들려오는 왕도제패(王道制霸) 이명헌의 소식, 국내 농구 성골로서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는 형의 소식은 좋으면서도 이기적이게도 슬펐다.

국내에서 함께 같은 길을 걸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에도 국내 나름의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생존이 고달파서 정신이 지쳤을 때에는 이명헌의 승전보 하나하나가 정우성이 포기하고 놓친 갈림길이나 다름없다는 비이성적인 감정에 일부러 고국의 지인들과 연락을 끊고 고립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미디어에서는 쾌활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건 지독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정우성은 견디고 발전했다. 그에게는 즐거운 농구, 상승심, 발전욕과 더불어 좋은 선수가 되어 돌아오라는 이명헌의 말이 주는 힘도 있었다. 그의 눈에 찰 만큼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 견뎠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 시절 십대 이명헌의 은은한 의지 표현을 믿고 타지에서 고군분투하여 지난 몇 시즌 동안 역사적인 자리를 굳히기까지 성공한 정우성이다. 막상 돌아왔더니 이명헌의 대접이 개같다.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러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일정상 먼저 자리를 비워야만 한다는 그의 남자친구를 배웅하는 길을 따라나가서 정우성이 억울함을 토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강한 힘이 어깨를 쥐어당겼다. 그가 따라나올 것을 예상했던 이명헌은 이를 악물고 정우성을 맞대면했다. 따라주는 술 한 잔도 받아주질 않더니 대뜸 붉게 상기되어서 울듯한 얼굴을 하는 꼴에 다시 빡이 쳤다. 정우성은 정말 모른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하자마자 그 이명헌도 머리끝까지 피가 쏠려서 객관성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정우성은 화낼 곳이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분노를 풀어야 할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명헌은 정우성이 많이 참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걸 풀어주기에는 이미 그 자신부터 야마가 돌아 버렸다. 갈피없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명헌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것도 설명할 것이 없는데 설명을 요구하는 그의 얼굴에 더 기분이 나빠져 버린 거다. 이명헌은 정우성의 얼굴에 침을 뱉는 심정으로 말을 쏘았다.

대화는 점점 격해져서 마치 이명헌이 농구와 연애 양측에서 정우성에게 칼빵을 놓아버린 분위기다. 이명헌은 서른 살을 기점으로 은퇴를 고민하다가 결국 조금만 더 현역 선수로 뛰기로 결심했었다. 그때에라도 정우성이 돌아오면 패스할 기회를 남겨두고 싶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공교로워서 정우성이 들어오자마자 비로소 눈앞에서 이명헌이 은퇴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생겼다.

“나를 어지간히 엿먹이고 싶었다는 소리는 그만 해요. 형이 얼마나 신중하게 저딴 놈을 고르고 골라 사귀었는지도 진심으로 알 바가 아니야. ”

난 진짜... 어떻게 형이 내게 이럴 수 있는지... 어떻게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내가 형에게 아직... 충분히 좋은 선수가 되지 못한 것 같아서 얼마나 무섭고 외롭고 불안했는지... 확신을 주는 곳이 아무데도 없어서 나, 나는.....

그런데 어떻게 형이 나를 버릴 수 있어요.

거기서 이명헌은 도저히 못 참고 스타의 멱살을 잡았다. 나를 버린 건 너잖아. “내가... 내가 돌아오라고 했잖아, 용.” 먼저 눈물을 죽죽 흘리는 쪽은 정우성보다 이명헌이다.






우성명헌 릷

뭐 이런 게 보고싶다 정우성의 방점은 ‘좋은 선수’에 찍히고 이명헌의 방점은 ‘돌아와’에 찍혀서 둘은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