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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4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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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의 수사들은 비어있는 선독의 자리를 누군가가 빨리 채워주길 바랐다. 그 자리를 욕심을 내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선문의 모든 가문을 통솔해야 하는 자리이니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하는 가운데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선독을 자처하고 나섰다. 함광군, 망기가 선독의 자리를 맡겠다고 하니 어느 누구 하나 토를 달지 못했다. 그는 여지껏 쌓아온 공과 덕이 많고 무엇보다 금광요를 처단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여 다른 불만이 나오지 않았다. 망기가 선독의 자리에 오르자 일각에선 그가 권력욕이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으나 망기가 선독이 되기로 결심한 건 오로지 무선 때문이었다. 무선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었을 때 망기는 젊고 어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수사 취급을 당했고 그가 목소리를 낸다 한들 귀담아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타고난 성정 또한 명예나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지만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지자 망기는 욕심을 내야만 했다. 그가 힘을 가지고 있어야 앞으로도 무선을 지켜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망기는 선독이 되자마자 궁기도의 참변과 혈세불야천 모두 배후에 금광요가 있었음을 밝혀 무선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주었다. 금광요의 악행으로 인해 선문이 떠들석해진 건 고작 며칠이었다. 얼마 못가 세간이 뒤집어질만한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함광군이 밖에서 데려왔다던 아들, 고소 남씨 말썽쟁이 도련님의 생모가 바로 이릉노조라는 것이었다. 함광군과 이릉노조가 이미 십육 년 전에 정을 통해 아이까지 있었다는 소식에 선문의 사람들은 어디서 누굴 만나든 망기와 무선, 그리고 사윤의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얘기로 세상이 떠들썩하건만 정작 당사자인 무선과 사윤은 떨어져 있던 시간들의 회포를 풀기 바빴다.
"부친은 오늘도 바빠요. 적봉존과 염방존의 시신을 어디에 묻을지 정해야 한대요."
"응, 그렇구나."
"그래도 이 일이 해결되면 좀 한가해진다고 하셨어요."
기력이 많이 쇠했다는 의원의 진단에 따라 무선은 며칠 푹 쉬기로 하였고 선독의 일로 바쁜 망기를 대신해 사윤이 그의 곁을 지키며 간호 중이었다. 할일 없이 누워있는 것도 처음 며칠이나 편했지 이젠 가만히 있자니 좀이 쑤셔 사윤과 가지고 놀 종이부적을 오리던 무선은 어쩐 일인지 부산스러운 덧창 밖으로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허락 받은 이들만 드나들 수 있어 늘 한산하던 영죽당의 담장 너머로 반짝이는 눈 여러 개가 애타게 무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 선배! 여기에요! 여기!"
경의가 반갑게 손을 흔들자 무선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고소 남씨 어린 제자들이 항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소식을 모를 리가 없었고 소문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평소엔 얼씬도 않는 정실까지 온 것이었다. 감히 영죽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진 못하고 담장에 매달려있는 고소 남씨 제자들을 발견한 사윤은 '탁' 소리가 나게 덧창문을 닫아버렸다. 창문이 닫히자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쉬움에 탄식을 내뱉었다.
"아윤, 뭐하는 거야?"
"모친, 잊으셨어요? 의원이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요. 시끄러운 것은 멀리하세요."
사윤이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에 아이의 의중을 알 것 같아 무선이 웃으며 사윤의 콧잔등을 툭툭 쳤다.
"아윤, 어째서 동문수학하는 형장들을 투기하는 거야?"
"투기라니요..."
"네가 하는 짓이 투기가 아니면 무엇인데?"
"형장들이 모친의 휴식을 방해할까봐 그런 거예요."
어린 마음에 사윤은 무선이 오롯이 제게만 관심을 가져주고 자신만을 돌봐주길 바랐다. 열여섯 해만에 다시 만난 어미를 다른 이에게 뺏기기 싫은 어리광이었다.
"난 저 녀석들이랑 노는 게 재미있어."
"모친!"
"잘 돌봐주어야지. 남잠의 제자들이니까. 하지만 그게 다야. 어떻게 저 녀석들이 너와 같아?"
"그래도 싫어요."
"아윤, 언제까지 내게 붙어있으려고?"
"모친은 제가 귀찮으신 거예요?"
"그런게 아니라... 네가 내 곁에 하루종일 붙어있으면 네 정인이 섭섭해할까 그렇지. 그러고보니 밖에 있는 녀석들 중에 네 정인이 안보이네. 그 아이 이름이 뭐였지?"
"정인 아니에요."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진하게 접문을 해놓고 정인이 아니긴."
"정말 아니에요. 그 얘긴 그만해요."
사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며 얘기를 돌리자 무선은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 같아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오려놓은 부적에 숨을 불어넣어 장난을 치자 사윤은 금방 기분이 풀려 무선의 옆에서 함께 종이인형을 오렸다.
"기력을 회복하면 저랑 뒷산에 놀러가요. 뒷산에 부친이 심어준 비파나무가 있어요."
"비파나무?"
"네. 제가 비파를 좋아해서 부친이 심어주었어요. 부친이 나무를 심어주면서 저는 모친을 닮아 비파를 좋아한다고 하셨어요."
"남잠은 별걸 다 기억하네."
"어릴 때 툭하면 그 나무에서 놀았어요. 제가 없어지면 부친은 늘 그곳으로 찾아와서 저를 데리고 가셨죠."
"하여튼 말썽쟁이."
"부친이 전 하나부터 열까지 모친을 닮았대요."
"내 얼굴에 침 뱉게 만들지 마."
"사실이잖아요."
"같이 뒷산 나무에 올라가서 놀았으면 재미있었을텐데. 그렇지?"
사윤이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무선은 저도 모르게 한탄을 했다. 그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 사윤은 망기의 책장을 뒤져 책 한 권을 가지고 왔다.
"이게 뭐야?"
"펼쳐보세요."
첫장을 펼치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사윤의 이름과 생년월일, 생시였다. 이는 온정이 사윤에게 남긴 서신에 적힌 것을 희신이 그대로 적어놓은 것이었다. 다음장을 넘기자 아이의 손과 발을 탁본 뜬 것이 나왔다. 제 손바닥보다 한참이나 작은 손을 무선은 손가락으로 덧그려보았다.
"부친이 저를 맡겼을 때 백부가 기록한 것이에요."
"이리 작았는데. 이리 작았었는데."
한장씩 넘길 때마다 사윤이 언제 목을 가누고, 몸을 뒤집고, 걸음마를 떼었는지 상세히 적혀있어 무선은 그 모습이 생생하게 제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세 살 때까진 백부께서 적어주셨고 그 이후론 부친이 적어주었어요."
"이거 봐. 너 다섯 살 때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대. 다섯살 짜리가 어떻게 지붕에 올라간 거야?"
"글쎄요? 전 기억 안나요."
"남잠은 아마 밤새 네 걱정에 잠 못 이뤘겠지. 이 날은 아원이랑 같이 토끼 밥을 주러 갔다가 개울물에 빠져서 고뿔이 들었네. 가서 밥만 주면 될 것이지 뭣하러 개울에 들어가?"
"날짜 좀 보세요. 여름이잖아요. 날이 더워 물놀이가 하고 싶었나보죠."
유치가 빠졌다가 새로 난 것 하나까지도 기특하고 예뻐서 무선은 사윤이 자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꼼꼼하게 읽어내렸다.
"부친! 오셨어요?"
"음."
"남잠, 어서와."
정실에 돌아오면 무선과 사윤이 함께 자신을 반겨주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고 벅차기만한 망기는 무선의 곁에 자리잡고 앉아 하루종일 무얼 했는지 물었다. 남가 제자들이 찾아오자 사윤이 덧창을 닫아버린 일에 대해 무선이 얘길 꺼내자 사윤은 이 김에 그들을 영죽당 근처에도 얼씬 못하게 하자며 망기에게 졸라댔다.
"택무군은 좀 어떠셔?"
무선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자 망기는 괜찮다는 뜻으로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오늘 얘길 나누고 왔어. 전 보단 좋아지셨어. 아직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내키지 않은 거 같지만."
"응... 아무래도 그렇겠지."
"아윤, 네가 좀 뵙고 오거라. 널 보면 형장께서도 좋아하실 거야."
"예, 부친."
사윤이 제 백부에게 차나 한 잔 얻어 마셔야겠다며 자릴 비우자 정실엔 망기와 무선 둘 밖에 남지 않았다. 무선이 자연스럽게 망기에게 기대자 망기는 그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고작 반나절 떨어져있었을 뿐인데 망기는 그 시간이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는 듯 무선의 살내음을 한껏 들이켰다.
"남잠, 괜히 선독을 맡아서 피곤한 일만 늘어난 거 아니야?"
"괜찮아."
"아참, 적봉존과 염방존의 시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적당한 터를 찾았어. 최대한 깊이 묻고 또 진법으로 내리누른 뒤에 파헤치지 못하게 지켜야 할 것 같아. 게다가 관 안엔 음호부도 있으니까... 그걸 노리는 사람도 적지 않을 거야."
"응. 그래야겠지."
"적봉존의 시신을 묻는 일이라 섭 종주가 도와주기로 했어. 터를 찾는 것도 섭 종주가 제일 열심히 찾더군."
"남잠, 앞으로 섭회상은 멀리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음."
"염방존에게 복수를 한 것에 대해선 우리가 관여할 게 아니야. 하지만 그 복수에 아이들을 끌여들였어. 그 중엔 우리 아윤도 있었잖아. 그리고 모현우도. 헌사주술을 시행한 건 모현우 스스로의 의지지만 그걸 모현우가 어떻게 알았겠어. 알려준 사람이 있었겠지. 직접 알려주진 않았어도 알게 만들었거나."
"음."
"이번 일이 끝나면 좀 한가해지겠지?"
"음."
"남잠은 앞으로 뭘 하고 싶어?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숙부님께 말씀드린 게 있어."
"응?"
"빠른 시일 내로 길일을 뽑아달라고."
"길일은 왜?"
무선이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망기는 가볍게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혼례."
"혼례? 누구의 혼례? 남가에 혼기가 찬 아이가 누가 있지? 설마 아원?"
"위영, 너와 나의 혼례."
망기의 대답에 무선은 놀란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그의 반응에 망기는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아니... 우리 사이에 아이까지 있는 걸 선문 사람 모두가 알게 되었는데 굳이 혼례를 올릴 필요가 있나 싶어서 그렇지... 남잠, 난 괜찮아. 난 그냥 여기서 너와 아윤과 함께 살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무선이 고갤 저어가며 한사코 거절을 하자 망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혼례는 제게 무선에게 해주려는 일의 시작에 불과했다. 헌데 이 시작마저도 무선이 바라지 않으니 망기는 애가 타는 것이었다.
"위영, 내가 바라던 것이야. 십여 년 전에 이미 해줬어야 하는 일이잖아. 네가 다시 돌아온 뒤로 늘상 바라고 또 바랐어. 네게 혼례복을 입혀주고 남씨 사당에서 조상님들에게 우리가 부부의 연을 맺었음을 고하는 걸. 족보에 당당하게 네 이름을 올리고 온 세상에 네가 내 도려라 알리고 싶어. 그러니 위영, 그리하게 해줘. 나와 혼인해줘, 위영."
담담하게 얘기하고 있었지만 망기의 심장은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걸 망기의 품에 기대 있는 무선이 모를 리 없었다.
"남잠."
"음."
"나 거렁뱅이인 거 알지?"
"음."
"남잠, 그렇게 바로 대답하면 어떡해? 내가 민망하지 않게 망설이는 티라도 좀 내야지!"
"미안해."
"어쨌든 고소 남씨 둘째 공자님과 혼인하는데 난 은자 한 푼 없어서 어쩌지? 예물 하나 줄 것이 없는데."
"내 것이 네 것이야."
"남잠, 난 할 줄 아는 음식도 없어."
"내가 하면 돼."
"사실 난 아이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도 잘 몰라. 난장강에 있을 땐 아원의 할머니와 온정이 아윤을 돌봐줬는걸."
"아윤은 다 컸어."
"에잇! 어쩔 수 없지. 선문에 이미 함광군이 이릉노조에게 코가 꿰였다는 소문이 쫙 퍼졌는데 누가 함광군과 혼인해주려하겠어? 본 노조께서 선심 써서 구제해주는 수 밖에 없겠어."
"음. 고마워."
망기의 고맙다는 말에 무선은 웃음이 터져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는 큭큭 웃어댔다.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왜 둘째 오라버니가 하는 거야?"
"고마우니까."
"고마우면 내 혼례복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걸로 맞춰줘. 신발도 새로 맞춰줘야 해. 선문세가 사람들 모두가 부러워서 배가 아파 죽을만큼 예쁜 걸로."
"음. 제일 좋은 걸로만 해줄게. 제일 좋은 것만 줄게."
제일 좋은 것만 주겠다는 망기의 약속이 빈말이 아니라는 걸 무선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기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춰주었다. 사윤이 한실에서 돌아올 때까지 무선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던 망기는 아이가 돌아오자 무선의 옆자리를 내어줘야만 했다. 무슨 얘길 하고 왔냐는 무선의 물음에 사윤은 그저 선문에 떠도는 얘기들에 대해 알려주고 왔다고 답했다. 물론 지금 선문을 소란스럽게 하는 소문은 팔할이 무선에 관한 얘기였고 나머진 금광요에 대한 얘기였지만 사윤은 희신에게 제 어미과 금광요의 얘긴 빼고 시답잖는 소식들만 전하고 왔다. 망기나 무선이 굳이 시키지 않아도 사윤은 하루에 한 번은 꼭 한실을 찾아가 제 백부와 얘길 나누고 왔다. 날이 갈수록 상태가 좋아지긴 했으나 그는 종종 말을 하는 도중에 넋을 놓거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남계인의 복장이 터지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희신으로 인해 머리가 아픈 와중에 남계인은 신경 써야 할 일이 또 있었다. 지난 며칠 간 무선의 사정을 고려하여 사윤이 그의 곁에서 간호를 하는 것을 허락해주었지만 이젠 무선이 기력을 회복하여 운심부지처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는데도 사윤이 수업에 들 생각은 않고 제 어미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게 남계인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뿐인 손자 녀석이 눈 뜬 순간부터 눈 감을 때까지 하루종일 제 어미 곁에서 떨어지려하지 않으니 앉으나 서나 고소 남씨의 미래만 걱정하는 노인네가 골머리를 앓을 법도 했다. 눈에 보이기라도 하면 억지로 끌고라도 갈텐데 어디서 뭘하고 노는지 몰라도 무선과 사윤이 제 눈에만 보이지 않아 남계인은 매번 성을 내며 수업에 들었고 애꿎은 남가의 제자들만 눈치를 보기 바빴다.
"아윤, 날이 늦었다. 이만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부친, 새삼스럽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여기서 자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윤, 어리광부릴 나이는 지나지 않았더냐."
망기가 이만 방으로 돌아가 자라고 해도 사윤은 맡아놓은 자리인냥 무선의 옆자리에 누워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선도 사윤을 떼어놓을 생각이 없는 건지 사윤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아이의 가슴을 토닥여주었다.
"남잠, 뭘 그리 매정하게 굴어?"
"위영, 아윤은 다 컸다."
"다 크긴, 아직도 이렇게 아기 같은데."
무선이 사윤을 감싸고 나서니 더는 말을 덧붙일 수 없어 망기는 하는 수 없이 사윤을 사이에 끼고 자리에 누웠다. 운심부지처에 돌아온 뒤로 사윤은 매일같이 망기와 무선 사이에 누워 잠을 청했다. 처음 며칠은 어린 것이 어미품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싶어 그냥 두었으나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고 어느새 한 달 가까이 셋이서 같이 잠을 청하니 돌부처 같은 함광군의 인내심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망기는 무선을 보고 있으면 입을 맞추고 싶고, 닿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둘 사이에 아이가 있으나 사윤은 복마동에서의 단 하룻밤으로 생긴 아이였고 망기는 그 이후로 한번도 무선과 몸을 섞지 못한 터라 애가 닳던 참이었다. 하지만 사윤이 항상 같이 잠을 청하고 무선이 사윤을 내보낼 마음이 없는 탓에 망기는 매일밤 애꿎은 제 허벅지만 쥐어뜯어야 했다.
"형장, 무얼 보고 계십니까?"
"아이들이 노는 걸 보고 있었다. 그 오랜 세월 운심부지처엔 늘 아이들이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고요하기만 했어. 아이들이 있는 집은 응당 웃음소리가 넘치기 마련인데... 망기야, 위 공자가 운심부지처에 오고 난 뒤로 아이들 웃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구나."
누각에 올라서서 무선과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희신의 얼굴엔 따스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간 망기와 사윤이 번갈아가며 대화 상대가 되어준 덕분인지 희신의 상태는 아주 많이 좋아졌다. 요즘엔 종종 한실을 나와 운심부지처를 거닐기도 하니 망기는 그가 더 좋아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자들이 위영을 잘 따릅니다."
"예전에도 그러지 않았더냐? 그가 이곳에서 수학을 하던 시절에도 세가의 자제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고 그와 노는 것을 좋아하였지."
"예."
"망기야, 좋은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다. 감사할 일이야."
"예, 형장."
"헌데 넌 어찌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냐?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을 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희신이 다 알고 있다는 듯 물어오자 망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아윤이 위영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습니다."
"아윤을 투기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형장.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농이다. 농이야."
"아윤이 얼마나 제 어미를 그리워했는지 압니다. 떨어져있던 시간만큼 곁에 있고 싶다는 것도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수업도 들지 않고 제 어미 뒤만 졸졸 따라다녀 숙부님이 역정을 내셨다지?"
"아윤의 나이 아직 어리고 배워야 할 것들이 태산 같이 많습니다. 위영을 닮아 총명하고 영민하나 이를 믿고 공부를 게을리하면 어려움이 닥쳤을 때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걸 가지고 고민을 하는구나."
"형장께선 이를 해결할 방도를 아십니까?"
"아윤이 붙어있을만한 다른 사람이 있으면 해결 될 일이 아니더냐?"
"다른 사람..."
"그러고 보니 이상하구나. 내 아윤에게도 정인이 있다 들었는데 낮이고 밤이고 어미 곁에만 붙어있으면 정인은 언제 만난단 말이더냐?"
"아윤은 제게 정인에 대한 얘길 꺼낸 적이 없습니다."
"그간 여러번 나를 찾아왔음에도 이상하게 그 얘긴 꺼내지 않더구나. 허나 너도, 나도, 위 공자도 모두 알고 있지 않더냐? 아윤이 유독 좋아하고 아끼는 문하생 하나가 있다는 걸."
희신이 꺼낸 얘기에 망기는 바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머리를 한쪽으로 예쁘게 땋고 다니는 아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접문까지 했으나 운심부지처에 돌아온 뒤로 망기는 사윤이 그 아이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벌써 다 자랐다고 이 백부에게 숨기는 게 생긴 건지... 섭섭하구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너무 대놓고 물어보진 말거라. 아이들은 어른이 저희들 일을 캐묻고 다니면 싫어하기 마련이니까."
"예, 형장."
희신의 조언에 망기는 사추와 경의를 서재로 불러들였다. 가규를 어기고 귀장군과 야렵에 나간 것을 들킨 줄 알고 도둑이 제발 저려 망기의 서재에 들어오자마자 무릎부터 꿇은 사추와 경의는 그가 엉뚱한 것을 물어오자 멋쩍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윤의 정인이요? 설마 수애를 말하시는 거예요?"
"음."
망기의 대답에 경의는 한참을 고민하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수애를 아윤의 정인이라고 하기엔 좀..."
"경의."
"왜? 사실이잖아."
사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의는 사윤과 수애에 대한 얘길 망기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관음묘에서 접문까지 해놓고는 운심부지처에 돌아와선 수애가 아윤을 피해다녔어요. 아윤은 위 선배를 간호하다가도 시간이 날 때마다 수애를 찾았는데 말이죠... 저희는 그 둘이 마음이 통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서로 모르는 사이마냥 굴어대니 보는 입장에선 어이가 없다니까요. 마지막으로 둘이 같이 있는 걸 본 게 사추였어요. 그렇지?"
"응... 무슨 얘길 하는 지 듣지는 못했지만 분위기가 심각해보였습니다. 몇 번 고성이 오가고는 그 뒤론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음."
"아윤의 앞에서 수애 얘길 꺼내면 못 들은 체를 하거나 다른 얘기나 하자고 성화를 부리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못했어요. 수애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하니 저희가 무슨 수가 있겠어요. 하여튼 걔넨 정말 이상해요. 전엔 서로 죽고 못사는 사이인냥 붙어다니더니 지금은 원수라도 진 것 마냥 눈도 마주치지 않아요. 둘 다 변덕이 죽 끓듯 하니 무슨 장단에 맞춰야 할 지 모르겠다니까요."
경의가 툴툴 거리자 사추는 더 물어볼게 없으면 가보겠다며 다급하게 그를 끌고 나갔다. 확실히 사윤과 수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된 망기는 서재를 나와 뒷산으로 향했다. 망기가 와서 앉자 제 주인을 알아본 토끼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토끼들이 제 옷을 물고 늘어지는 것에 익숙한 망기는 그저 토끼들의 작고 말랑말랑한 코를 툭툭 치며 손장난을 쳤다.
"함광군?"
토끼들의 먹이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던 수애는 망기를 발견하자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한번도 그와 단둘이 얘길 해본 적이 없는데다 망기는 선문의 어린 제자들에겐 어려운 선배였으니 수애에겐 이 상황이 어색할만도 했다.
"토끼들에게 밥을 주러 온 것이냐?"
"예..."
"물어볼 것이 있어 기다렸다. 네가 계속 토끼들 밥을 챙겨주고 있다길래."
"저... 저한테요?"
"음. 앉거라."
망기가 제 옆자리를 툭툭 손으로 치자 수애는 긴장된 표정으로 바구니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아윤과 네가 각별한 사이라 들었는데..."
"아니에요! 저흰 그냥 친우일 뿐이예요."
"허나 지난 번 관음묘에서 접문까지 하지 않았더냐."
망기가 꺼낸 얘기에 수애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 그건..."
"아윤과 싸운 것이냐?"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면 어찌 아윤을 피하는 것이야?"
"피한 적 없어요!"
"네가 피하지 않았으면 아윤이 하루종일 위영에게 붙어있진 않겠지."
"그토록 그리던 모친을 만났으니 위 선배랑 붙어있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음. 하지만 아윤은 위영을 좋아하는만큼 너를 좋아한다."
망기의 말에 수애는 입을 꾹 다물고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복잡한 사연이 있을 것 같아 망기는 재촉하지 않고 토끼 한 마리를 집어들었다.
"이 토끼들은 위영이 내게 주고간 토끼가 낳은 새끼들이 또 새끼를 낳아서 이렇게 늘어난 것이다."
"그 애가... 그렇게 얘기 했던 거 같아요."
"언제 이렇게 늘어났는지 토끼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아윤은 어느 한 녀석이 다치거나, 아프거나, 죽게 되면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런 아이다. 한 번 정을 주면 온 마음을 다하는."
"알아요. 정말 정이 많은 녀석인 거."
"그런 녀석이 네게 유독 더 많이 정을 주었지."
"그 애 주변엔 늘 사람이 넘쳐나요. 저는 그저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 걸요. 특별하지 않아요."
수애의 넋두리에 망기는 문득 제 어린 시절을 떠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눈길이 닿는 곳엔 늘 무선이 있었다. 그의 시선 속의 무선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고 망기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사랑이 넘쳐나서 사람이 넘쳐나는 아이. 망기의 눈에 비친 무선은 반짝반짝 빛이 났고 가끔은 그 빛에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었다. 수애의 마음이 어떤지 알 것도 같아 망기는 아주 작게 웃어보였다.
"그런 것 마저도 위영을 닮았어. 아윤은 하나부터 열까지 제 어미를 빼다 박았지."
"맞아요. 그 애가 위 선배의 아들인지 몰랐을 때도 두 사람 하는 행동이 정말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 지냈는데 어떻게 그렇게 닮았는지 모르겠어요. 주변에 사람이 끊이질 않잖아요. 대체 얘가 무슨 얘길 하는지 궁금하고, 뭘 하려고 하는지 알고 싶고...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나봐요."
"무서웠구나."
생각지도 못한 망기의 말에 수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사윤을 좋아하는데도 사윤을 자꾸만 피하게 되는 이유를 몰랐던 수애는 망기의 그 한 마디에 제 감정이 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네가 그저 아윤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일까봐 두려웠던 것이지?"
"아마도... 그런 거 같아요. 남사윤은 특별해요. 고소 남씨 도련님이잖아요. 게다가 함광군과 위 선배의 아들이니까 남부러울 거 없죠. 그에 반해 전 너무 평범한 걸요. 돈도 명예도 그럴싸한 가문도 없어요. 부모님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남은 가족도 없고요. 남사윤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데 그에 비해 전 너무 초라하니까 그 애가 금방 질려버릴 것만 같아서... 함광군 말씀 맞아요. 무서웠어요. 상처 받을까봐 무서워서 제게 다가오지 못하게 했어요."
"그래도 아윤이 좋은 것이지?"
망기의 물음에 수애는 고갤 끄덕였다.
"그럼 망설이지 말거라. 머뭇거리다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테니까. 직접 겪어보아 하는 얘기다."
"위 선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음."
"그래도 두 분은 다시 만났잖아요."
"음. 허나 너무 오래 걸렸지... 너와 아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여전히 전 잘 모르겠어요."
"아윤이 특별하다 하였지?"
"네."
"그런 아윤이 특별하게 여기는 너는 얼마나 특별하겠느냐? 아윤이 너보다 먼저 알아본 것이다, 너의 특별함을. 아직도 모르겠다면 도망치지 말고 아윤에게 알려달라 하거라."
결국엔 당사자들끼리 풀어야 하는 일이라 제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을 마친 망기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뒷산에서 뛰어놀다 내려오는 무선과 사윤을 발견한 망기는 두 사람에게 향했다.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는지 나뭇잎이며 풀잎이 머리와 옷에 잔뜩 달라붙은 줄도 모르고 무선과 사윤은 망기에게 달려와 그 품에 안겼다.
"남잠,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어?"
"토끼밥."
"아, 토끼에게 밥을 주려고?"
"음. 헌데 내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래? 이왕 온 김에 내가 도와주려 했는데."
무선의 말에 망기는 마음만으로도 고맙다는 듯이 그의 뺨을 쓸어주고는 사윤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윤."
"예, 부친."
"수애 혼자 토끼밥을 주기 힘들 것 같구나. 네가 도와주거라."
"저 녀석 혼자서도 잘하던 일인 걸요."
사윤이 답지않게 퉁명스러운 말대답을 하자 무선은 깜짝 놀라며 망기의 어깨너머, 토끼밭에 홀로 서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머리칼을 한 쪽으로 예쁘게 땋고 다니는 문하생, 사윤의 정인이라는 걸 알아본 무선은 곧장 사윤의 등을 떠밀었다.
"서로 돕고 살아야지! 어서 가!"
"아, 모친!"
"어서!"
무선이 막무가내로 등을 떠미는 탓에 반항도 못하고 토끼밭에 내쳐진 사윤은 천천히 수애에게 향했다. 몇 발자국 못가서 마음이 바뀐 모양인지 사윤은 제 부모에게 돌아가려했지만 망기와 무선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 하는 수 없이 수애에게 다가간 사윤은 별말 없이 바구니에 담긴 채소들을 토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부친이 시켜서 하는 거야.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라고."
"응..."
"아직 남았어?"
"거의 다 줬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걸 가지고... 간다."
"남사윤!"
수애가 옷깃을 붙잡아 걸음을 멈춰 세우자 사윤은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또 화내려고 불러세웠어?"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얘긴 지난 번에 끝난 거 아니였어? 우리 둘이 이러고 있는 거 보면 형장들이 또 오해할 거야. 넌 내 정인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을 테고 난 그런 너 때문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안해 해야하겠지.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면서. 나는 네 그 한 마디에 곤란한 일 생기지 않게 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넌 참 너 편할대로 굴어서 좋겠다."
"아까부터 왜 자꾸 화를 내는 거야?"
"먼저 화낸 건 너잖아."
"그게 며칠 전 일인데... 그리고 내가 오해 받을만한 일 만들지 말자고 했지 언제 얘기도 하지 말자고 했어?"
"나랑 말도 섞기 싫어서 도망다닌 사람이 누군데?"
"남사윤! 너 진짜..."
"이거 봐. 또 화내잖아. 난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갈게."
망기의 조언에 좋게 얘기해보려고 한 것인데 어쩐지 일이 전부 꼬여버린 것 같아 수애는 애가 탔다. 제 진심은 그게 아닌데 솔직하게 말하려 해도 이젠 사윤이 들어주지 않을 거란 생각에 덜컥 겁이 난 수애는 눈물이 터져나왔다. 제가 너무 심하게 말한 거 같아 돌아가는 발걸음이 천근, 만근 무겁게만 느껴지던 사윤은 등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자 당황하며 곧장 수애에게 달려갔다.
"왜... 왜 우는 거야! 울지 마... 울지 마, 임수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뭐가 됐든 다 내 잘못이야."
방금 전까지 퉁명스럽게 굴 땐 언제고 전부 제 잘못이라며 싹싹 빌어대는 사윤 때문에 수애는 오히려 눈물을 멈추기가 더 힘들었다. 상처 받기 무섭단 핑계로 제가 사윤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울지 말라는데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말을 너무 못되게 했어."
사윤이 소매를 끌어다 눈물을 닦아주자 수애는 무작정 그의 품에 뛰어들어 사윤을 꼭 끌어안았다.
"남사윤."
"응."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난 네가 좋아."
"알고 있어. 네가 아니라고 우겨도 그건 숨길 수 없는 거야."
"너에 비해 내가 너무 초라한 거 같아서 네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어. 넌 정말 특별한 사람인데 난 평범, 아니 평범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거든."
"평범하다니? 넌 정말 너를 모르는구나."
"그러니까 나도 묻고 싶어. 넌 대체 내게서 어떤 특별함을 찾았길래 날 좋아하는 건지."
"임수애, 넌 아주아주 특별해."
수애를 감싸안으며 사윤은 그의 귓가에 대고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이었어. 나한테 강하다고 해준 사람. 이렇게 잘 자란 내가 아주 강하다고 해줬잖아. 나한텐 그게 정말 큰 위로였어.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뭔가 엄청난 게 숨어있었는데 네가 그게 뭔지 알려줬어. 나의 강함과 용기는 네가 발견해줬기 때문에 반짝거릴 수 있게 되었어. 나의 특별함을 찾아준 사람이라 넌 너무 특별해. 너무 소중해. 그래서 널 좋아해. 그러니까... 밀어내지마. 마음 여린 이 남자의 순정을 지켜달라고."
사윤이 마지막으로 농담처럼 던진 말에 수애는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임수애,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대."
"넌 애도 아니고 아직도 그런 걸 믿냐?"
"야, 우리 모친이 그랬어. 그럼 우리 모친도 애야?"
"위 선배가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으시지..."
"맞아, 그렇긴 해. 그래서 귀엽잖아."
"너도."
"응?"
"너도 귀엽다고..."
수애가 수줍게 건네는 말에 사윤은 날아갈 듯이 기뻐서 그대로 수애를 안아올리고는 몇 바퀴나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댔다. 결국 발이 꼬여 넘어지는 바람에 바닥을 구르면서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사윤과 수애는 연신 웃으며 토끼밭을 뒹굴었다. 수애의 머리칼에 달라붙은 토끼풀을 떼어주던 사윤은 저도 모르게 수애의 입술에 눈이 갔다. 말이 없어진 사윤이 제 입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수애의 얼굴은 점점 붉게 물들고 파르르 떨리는 사윤의 입술이 수애의 입술에 포개졌다.
"뭐야 너희? 어제까지는 서로 죽어도 안 볼 것 같이 굴더니 오늘은 왜 또 같이 뒹굴고 있는 건데?"
"경의, 모른 체 하고 가자니까..."
"역시 변덕이 죽 끓듯 한다니까!"
뒷산 계곡에서 수련을 하기 위해 길을 지나다 사윤과 수애를 발견한 고소 남씨 제자들은 저마다 두 사람을 놀리기 바빴다. 여전히 수애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댄 채로 품 안에서 무선이 그려준 부적을 꺼낸 사윤은 사람을 쫓아 다니는 용 모양의 불꽃을 소환해 방해꾼들을 쫓아버렸다.
"아윤이 늦네..."
무선이 덧창에 매달려 영죽당 대문만 바라보고있자 망기는 무선을 끌어당겨 품에 가뒀다.
"기다리지마."
"하루 아침에 찬밥 신세가 될 줄은 몰랐어."
무선이 입을 삐죽이며 말하자 망기는 살풋 웃더니 툭 튀어나와있는 무선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질투하는 거야?"
"질투가 아니라 아쉬운 거야. 내 품에 다시 안아본지 얼마나 됐다고 훌쩍 날아가 버릴 거 같으니까."
"아윤은 나일 먹어서도 오래오래 내 곁에서 살겠다 약조했어."
"제 색시 놔두고?"
"제 색시랑 같이."
"그런 얘길 언제 했대?"
"아윤이 일곱살 때."
"남잠, 일곱살이 뭘 안다고..."
"내게 그리 약조했으니 지킬 거야."
망기가 당연하다는 듯 내뱉는 말에 무선은 못말린단 표정으로 웃어보이고는 덧창을 닫았다. 사윤이 너무 늦어도 무선은 기다리지 않기로 하였다. 이젠 아이가 제 품에 없다고 불안해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할말이 그리 많은지 날이 저물 때까지 토끼밭에 앉아 수애와 얘길 나누다 수애를 문하생들의 처소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온 사윤은 오늘도 제 방이 아니라 정실에 들어와 무선의 옆자리를 꿰찼다.
"아윤."
"예, 부친."
"어찌하여 이리 일찍 돌아온 것이냐?"
"날이 벌써 저물었잖아요. 내일부터는 수업도 빠지지 않고 수련도 열심히 하겠다고 수애와 약조하였어요. 그러니 일찍 잠들어야 해요. 그리고 생각해보니 부친이 선독이 되셨는데 하나뿐인 아들인 저도 모두의 모범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제가 함광군과 이릉노조의 아들이란 게 다 알려졌는데 두 분 명성에 미치지 못할 지언정 먹칠은 하지 말아야죠."
사윤이 생각보다 일찍 돌아와 또 무선을 빼앗긴 망기의 서운한 마음도 모르고 무선은 어찌 그리 기특한 생각을 하였냐며 사윤을 칭찬하기 바빴다. 사윤이 제 정인과 화해를 하면 자연스레 어미에게 소홀할 거란 망기의 예상과 달리 사윤은 낮동안엔 바삐 돌아다니다가도 날이 저물면 꼭 정실에 돌아와 무선의 곁을 지켰다. 애타는 아비의 속도 모르는 사윤은 매일밤 부친과 모친 사이에 제 몸을 끼워넣고 잠을 청했다.
망기무선 망선 사윤수애
머쓱;;
선문의 수사들은 비어있는 선독의 자리를 누군가가 빨리 채워주길 바랐다. 그 자리를 욕심을 내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선문의 모든 가문을 통솔해야 하는 자리이니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하는 가운데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선독을 자처하고 나섰다. 함광군, 망기가 선독의 자리를 맡겠다고 하니 어느 누구 하나 토를 달지 못했다. 그는 여지껏 쌓아온 공과 덕이 많고 무엇보다 금광요를 처단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여 다른 불만이 나오지 않았다. 망기가 선독의 자리에 오르자 일각에선 그가 권력욕이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으나 망기가 선독이 되기로 결심한 건 오로지 무선 때문이었다. 무선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었을 때 망기는 젊고 어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수사 취급을 당했고 그가 목소리를 낸다 한들 귀담아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타고난 성정 또한 명예나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지만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지자 망기는 욕심을 내야만 했다. 그가 힘을 가지고 있어야 앞으로도 무선을 지켜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망기는 선독이 되자마자 궁기도의 참변과 혈세불야천 모두 배후에 금광요가 있었음을 밝혀 무선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주었다. 금광요의 악행으로 인해 선문이 떠들석해진 건 고작 며칠이었다. 얼마 못가 세간이 뒤집어질만한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함광군이 밖에서 데려왔다던 아들, 고소 남씨 말썽쟁이 도련님의 생모가 바로 이릉노조라는 것이었다. 함광군과 이릉노조가 이미 십육 년 전에 정을 통해 아이까지 있었다는 소식에 선문의 사람들은 어디서 누굴 만나든 망기와 무선, 그리고 사윤의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의 얘기로 세상이 떠들썩하건만 정작 당사자인 무선과 사윤은 떨어져 있던 시간들의 회포를 풀기 바빴다.
"부친은 오늘도 바빠요. 적봉존과 염방존의 시신을 어디에 묻을지 정해야 한대요."
"응, 그렇구나."
"그래도 이 일이 해결되면 좀 한가해진다고 하셨어요."
기력이 많이 쇠했다는 의원의 진단에 따라 무선은 며칠 푹 쉬기로 하였고 선독의 일로 바쁜 망기를 대신해 사윤이 그의 곁을 지키며 간호 중이었다. 할일 없이 누워있는 것도 처음 며칠이나 편했지 이젠 가만히 있자니 좀이 쑤셔 사윤과 가지고 놀 종이부적을 오리던 무선은 어쩐 일인지 부산스러운 덧창 밖으로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허락 받은 이들만 드나들 수 있어 늘 한산하던 영죽당의 담장 너머로 반짝이는 눈 여러 개가 애타게 무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 선배! 여기에요! 여기!"
경의가 반갑게 손을 흔들자 무선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고소 남씨 어린 제자들이 항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소식을 모를 리가 없었고 소문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평소엔 얼씬도 않는 정실까지 온 것이었다. 감히 영죽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진 못하고 담장에 매달려있는 고소 남씨 제자들을 발견한 사윤은 '탁' 소리가 나게 덧창문을 닫아버렸다. 창문이 닫히자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쉬움에 탄식을 내뱉었다.
"아윤, 뭐하는 거야?"
"모친, 잊으셨어요? 의원이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요. 시끄러운 것은 멀리하세요."
사윤이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에 아이의 의중을 알 것 같아 무선이 웃으며 사윤의 콧잔등을 툭툭 쳤다.
"아윤, 어째서 동문수학하는 형장들을 투기하는 거야?"
"투기라니요..."
"네가 하는 짓이 투기가 아니면 무엇인데?"
"형장들이 모친의 휴식을 방해할까봐 그런 거예요."
어린 마음에 사윤은 무선이 오롯이 제게만 관심을 가져주고 자신만을 돌봐주길 바랐다. 열여섯 해만에 다시 만난 어미를 다른 이에게 뺏기기 싫은 어리광이었다.
"난 저 녀석들이랑 노는 게 재미있어."
"모친!"
"잘 돌봐주어야지. 남잠의 제자들이니까. 하지만 그게 다야. 어떻게 저 녀석들이 너와 같아?"
"그래도 싫어요."
"아윤, 언제까지 내게 붙어있으려고?"
"모친은 제가 귀찮으신 거예요?"
"그런게 아니라... 네가 내 곁에 하루종일 붙어있으면 네 정인이 섭섭해할까 그렇지. 그러고보니 밖에 있는 녀석들 중에 네 정인이 안보이네. 그 아이 이름이 뭐였지?"
"정인 아니에요."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진하게 접문을 해놓고 정인이 아니긴."
"정말 아니에요. 그 얘긴 그만해요."
사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며 얘기를 돌리자 무선은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것 같아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오려놓은 부적에 숨을 불어넣어 장난을 치자 사윤은 금방 기분이 풀려 무선의 옆에서 함께 종이인형을 오렸다.
"기력을 회복하면 저랑 뒷산에 놀러가요. 뒷산에 부친이 심어준 비파나무가 있어요."
"비파나무?"
"네. 제가 비파를 좋아해서 부친이 심어주었어요. 부친이 나무를 심어주면서 저는 모친을 닮아 비파를 좋아한다고 하셨어요."
"남잠은 별걸 다 기억하네."
"어릴 때 툭하면 그 나무에서 놀았어요. 제가 없어지면 부친은 늘 그곳으로 찾아와서 저를 데리고 가셨죠."
"하여튼 말썽쟁이."
"부친이 전 하나부터 열까지 모친을 닮았대요."
"내 얼굴에 침 뱉게 만들지 마."
"사실이잖아요."
"같이 뒷산 나무에 올라가서 놀았으면 재미있었을텐데. 그렇지?"
사윤이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무선은 저도 모르게 한탄을 했다. 그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 사윤은 망기의 책장을 뒤져 책 한 권을 가지고 왔다.
"이게 뭐야?"
"펼쳐보세요."
첫장을 펼치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사윤의 이름과 생년월일, 생시였다. 이는 온정이 사윤에게 남긴 서신에 적힌 것을 희신이 그대로 적어놓은 것이었다. 다음장을 넘기자 아이의 손과 발을 탁본 뜬 것이 나왔다. 제 손바닥보다 한참이나 작은 손을 무선은 손가락으로 덧그려보았다.
"부친이 저를 맡겼을 때 백부가 기록한 것이에요."
"이리 작았는데. 이리 작았었는데."
한장씩 넘길 때마다 사윤이 언제 목을 가누고, 몸을 뒤집고, 걸음마를 떼었는지 상세히 적혀있어 무선은 그 모습이 생생하게 제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세 살 때까진 백부께서 적어주셨고 그 이후론 부친이 적어주었어요."
"이거 봐. 너 다섯 살 때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대. 다섯살 짜리가 어떻게 지붕에 올라간 거야?"
"글쎄요? 전 기억 안나요."
"남잠은 아마 밤새 네 걱정에 잠 못 이뤘겠지. 이 날은 아원이랑 같이 토끼 밥을 주러 갔다가 개울물에 빠져서 고뿔이 들었네. 가서 밥만 주면 될 것이지 뭣하러 개울에 들어가?"
"날짜 좀 보세요. 여름이잖아요. 날이 더워 물놀이가 하고 싶었나보죠."
유치가 빠졌다가 새로 난 것 하나까지도 기특하고 예뻐서 무선은 사윤이 자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꼼꼼하게 읽어내렸다.
"부친! 오셨어요?"
"음."
"남잠, 어서와."
정실에 돌아오면 무선과 사윤이 함께 자신을 반겨주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고 벅차기만한 망기는 무선의 곁에 자리잡고 앉아 하루종일 무얼 했는지 물었다. 남가 제자들이 찾아오자 사윤이 덧창을 닫아버린 일에 대해 무선이 얘길 꺼내자 사윤은 이 김에 그들을 영죽당 근처에도 얼씬 못하게 하자며 망기에게 졸라댔다.
"택무군은 좀 어떠셔?"
무선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자 망기는 괜찮다는 뜻으로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오늘 얘길 나누고 왔어. 전 보단 좋아지셨어. 아직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내키지 않은 거 같지만."
"응... 아무래도 그렇겠지."
"아윤, 네가 좀 뵙고 오거라. 널 보면 형장께서도 좋아하실 거야."
"예, 부친."
사윤이 제 백부에게 차나 한 잔 얻어 마셔야겠다며 자릴 비우자 정실엔 망기와 무선 둘 밖에 남지 않았다. 무선이 자연스럽게 망기에게 기대자 망기는 그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고작 반나절 떨어져있었을 뿐인데 망기는 그 시간이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는 듯 무선의 살내음을 한껏 들이켰다.
"남잠, 괜히 선독을 맡아서 피곤한 일만 늘어난 거 아니야?"
"괜찮아."
"아참, 적봉존과 염방존의 시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적당한 터를 찾았어. 최대한 깊이 묻고 또 진법으로 내리누른 뒤에 파헤치지 못하게 지켜야 할 것 같아. 게다가 관 안엔 음호부도 있으니까... 그걸 노리는 사람도 적지 않을 거야."
"응. 그래야겠지."
"적봉존의 시신을 묻는 일이라 섭 종주가 도와주기로 했어. 터를 찾는 것도 섭 종주가 제일 열심히 찾더군."
"남잠, 앞으로 섭회상은 멀리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음."
"염방존에게 복수를 한 것에 대해선 우리가 관여할 게 아니야. 하지만 그 복수에 아이들을 끌여들였어. 그 중엔 우리 아윤도 있었잖아. 그리고 모현우도. 헌사주술을 시행한 건 모현우 스스로의 의지지만 그걸 모현우가 어떻게 알았겠어. 알려준 사람이 있었겠지. 직접 알려주진 않았어도 알게 만들었거나."
"음."
"이번 일이 끝나면 좀 한가해지겠지?"
"음."
"남잠은 앞으로 뭘 하고 싶어?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숙부님께 말씀드린 게 있어."
"응?"
"빠른 시일 내로 길일을 뽑아달라고."
"길일은 왜?"
무선이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망기는 가볍게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혼례."
"혼례? 누구의 혼례? 남가에 혼기가 찬 아이가 누가 있지? 설마 아원?"
"위영, 너와 나의 혼례."
망기의 대답에 무선은 놀란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그의 반응에 망기는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아니... 우리 사이에 아이까지 있는 걸 선문 사람 모두가 알게 되었는데 굳이 혼례를 올릴 필요가 있나 싶어서 그렇지... 남잠, 난 괜찮아. 난 그냥 여기서 너와 아윤과 함께 살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무선이 고갤 저어가며 한사코 거절을 하자 망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혼례는 제게 무선에게 해주려는 일의 시작에 불과했다. 헌데 이 시작마저도 무선이 바라지 않으니 망기는 애가 타는 것이었다.
"위영, 내가 바라던 것이야. 십여 년 전에 이미 해줬어야 하는 일이잖아. 네가 다시 돌아온 뒤로 늘상 바라고 또 바랐어. 네게 혼례복을 입혀주고 남씨 사당에서 조상님들에게 우리가 부부의 연을 맺었음을 고하는 걸. 족보에 당당하게 네 이름을 올리고 온 세상에 네가 내 도려라 알리고 싶어. 그러니 위영, 그리하게 해줘. 나와 혼인해줘, 위영."
담담하게 얘기하고 있었지만 망기의 심장은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걸 망기의 품에 기대 있는 무선이 모를 리 없었다.
"남잠."
"음."
"나 거렁뱅이인 거 알지?"
"음."
"남잠, 그렇게 바로 대답하면 어떡해? 내가 민망하지 않게 망설이는 티라도 좀 내야지!"
"미안해."
"어쨌든 고소 남씨 둘째 공자님과 혼인하는데 난 은자 한 푼 없어서 어쩌지? 예물 하나 줄 것이 없는데."
"내 것이 네 것이야."
"남잠, 난 할 줄 아는 음식도 없어."
"내가 하면 돼."
"사실 난 아이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도 잘 몰라. 난장강에 있을 땐 아원의 할머니와 온정이 아윤을 돌봐줬는걸."
"아윤은 다 컸어."
"에잇! 어쩔 수 없지. 선문에 이미 함광군이 이릉노조에게 코가 꿰였다는 소문이 쫙 퍼졌는데 누가 함광군과 혼인해주려하겠어? 본 노조께서 선심 써서 구제해주는 수 밖에 없겠어."
"음. 고마워."
망기의 고맙다는 말에 무선은 웃음이 터져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는 큭큭 웃어댔다.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왜 둘째 오라버니가 하는 거야?"
"고마우니까."
"고마우면 내 혼례복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걸로 맞춰줘. 신발도 새로 맞춰줘야 해. 선문세가 사람들 모두가 부러워서 배가 아파 죽을만큼 예쁜 걸로."
"음. 제일 좋은 걸로만 해줄게. 제일 좋은 것만 줄게."
제일 좋은 것만 주겠다는 망기의 약속이 빈말이 아니라는 걸 무선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기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춰주었다. 사윤이 한실에서 돌아올 때까지 무선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던 망기는 아이가 돌아오자 무선의 옆자리를 내어줘야만 했다. 무슨 얘길 하고 왔냐는 무선의 물음에 사윤은 그저 선문에 떠도는 얘기들에 대해 알려주고 왔다고 답했다. 물론 지금 선문을 소란스럽게 하는 소문은 팔할이 무선에 관한 얘기였고 나머진 금광요에 대한 얘기였지만 사윤은 희신에게 제 어미과 금광요의 얘긴 빼고 시답잖는 소식들만 전하고 왔다. 망기나 무선이 굳이 시키지 않아도 사윤은 하루에 한 번은 꼭 한실을 찾아가 제 백부와 얘길 나누고 왔다. 날이 갈수록 상태가 좋아지긴 했으나 그는 종종 말을 하는 도중에 넋을 놓거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남계인의 복장이 터지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희신으로 인해 머리가 아픈 와중에 남계인은 신경 써야 할 일이 또 있었다. 지난 며칠 간 무선의 사정을 고려하여 사윤이 그의 곁에서 간호를 하는 것을 허락해주었지만 이젠 무선이 기력을 회복하여 운심부지처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는데도 사윤이 수업에 들 생각은 않고 제 어미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게 남계인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뿐인 손자 녀석이 눈 뜬 순간부터 눈 감을 때까지 하루종일 제 어미 곁에서 떨어지려하지 않으니 앉으나 서나 고소 남씨의 미래만 걱정하는 노인네가 골머리를 앓을 법도 했다. 눈에 보이기라도 하면 억지로 끌고라도 갈텐데 어디서 뭘하고 노는지 몰라도 무선과 사윤이 제 눈에만 보이지 않아 남계인은 매번 성을 내며 수업에 들었고 애꿎은 남가의 제자들만 눈치를 보기 바빴다.
"아윤, 날이 늦었다. 이만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부친, 새삼스럽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여기서 자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윤, 어리광부릴 나이는 지나지 않았더냐."
망기가 이만 방으로 돌아가 자라고 해도 사윤은 맡아놓은 자리인냥 무선의 옆자리에 누워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선도 사윤을 떼어놓을 생각이 없는 건지 사윤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아이의 가슴을 토닥여주었다.
"남잠, 뭘 그리 매정하게 굴어?"
"위영, 아윤은 다 컸다."
"다 크긴, 아직도 이렇게 아기 같은데."
무선이 사윤을 감싸고 나서니 더는 말을 덧붙일 수 없어 망기는 하는 수 없이 사윤을 사이에 끼고 자리에 누웠다. 운심부지처에 돌아온 뒤로 사윤은 매일같이 망기와 무선 사이에 누워 잠을 청했다. 처음 며칠은 어린 것이 어미품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싶어 그냥 두었으나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고 어느새 한 달 가까이 셋이서 같이 잠을 청하니 돌부처 같은 함광군의 인내심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망기는 무선을 보고 있으면 입을 맞추고 싶고, 닿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둘 사이에 아이가 있으나 사윤은 복마동에서의 단 하룻밤으로 생긴 아이였고 망기는 그 이후로 한번도 무선과 몸을 섞지 못한 터라 애가 닳던 참이었다. 하지만 사윤이 항상 같이 잠을 청하고 무선이 사윤을 내보낼 마음이 없는 탓에 망기는 매일밤 애꿎은 제 허벅지만 쥐어뜯어야 했다.
"형장, 무얼 보고 계십니까?"
"아이들이 노는 걸 보고 있었다. 그 오랜 세월 운심부지처엔 늘 아이들이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고요하기만 했어. 아이들이 있는 집은 응당 웃음소리가 넘치기 마련인데... 망기야, 위 공자가 운심부지처에 오고 난 뒤로 아이들 웃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구나."
누각에 올라서서 무선과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희신의 얼굴엔 따스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간 망기와 사윤이 번갈아가며 대화 상대가 되어준 덕분인지 희신의 상태는 아주 많이 좋아졌다. 요즘엔 종종 한실을 나와 운심부지처를 거닐기도 하니 망기는 그가 더 좋아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자들이 위영을 잘 따릅니다."
"예전에도 그러지 않았더냐? 그가 이곳에서 수학을 하던 시절에도 세가의 자제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고 그와 노는 것을 좋아하였지."
"예."
"망기야, 좋은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다. 감사할 일이야."
"예, 형장."
"헌데 넌 어찌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냐?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을 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희신이 다 알고 있다는 듯 물어오자 망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아윤이 위영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습니다."
"아윤을 투기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형장.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농이다. 농이야."
"아윤이 얼마나 제 어미를 그리워했는지 압니다. 떨어져있던 시간만큼 곁에 있고 싶다는 것도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수업도 들지 않고 제 어미 뒤만 졸졸 따라다녀 숙부님이 역정을 내셨다지?"
"아윤의 나이 아직 어리고 배워야 할 것들이 태산 같이 많습니다. 위영을 닮아 총명하고 영민하나 이를 믿고 공부를 게을리하면 어려움이 닥쳤을 때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걸 가지고 고민을 하는구나."
"형장께선 이를 해결할 방도를 아십니까?"
"아윤이 붙어있을만한 다른 사람이 있으면 해결 될 일이 아니더냐?"
"다른 사람..."
"그러고 보니 이상하구나. 내 아윤에게도 정인이 있다 들었는데 낮이고 밤이고 어미 곁에만 붙어있으면 정인은 언제 만난단 말이더냐?"
"아윤은 제게 정인에 대한 얘길 꺼낸 적이 없습니다."
"그간 여러번 나를 찾아왔음에도 이상하게 그 얘긴 꺼내지 않더구나. 허나 너도, 나도, 위 공자도 모두 알고 있지 않더냐? 아윤이 유독 좋아하고 아끼는 문하생 하나가 있다는 걸."
희신이 꺼낸 얘기에 망기는 바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머리를 한쪽으로 예쁘게 땋고 다니는 아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접문까지 했으나 운심부지처에 돌아온 뒤로 망기는 사윤이 그 아이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벌써 다 자랐다고 이 백부에게 숨기는 게 생긴 건지... 섭섭하구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너무 대놓고 물어보진 말거라. 아이들은 어른이 저희들 일을 캐묻고 다니면 싫어하기 마련이니까."
"예, 형장."
희신의 조언에 망기는 사추와 경의를 서재로 불러들였다. 가규를 어기고 귀장군과 야렵에 나간 것을 들킨 줄 알고 도둑이 제발 저려 망기의 서재에 들어오자마자 무릎부터 꿇은 사추와 경의는 그가 엉뚱한 것을 물어오자 멋쩍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윤의 정인이요? 설마 수애를 말하시는 거예요?"
"음."
망기의 대답에 경의는 한참을 고민하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수애를 아윤의 정인이라고 하기엔 좀..."
"경의."
"왜? 사실이잖아."
사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의는 사윤과 수애에 대한 얘길 망기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관음묘에서 접문까지 해놓고는 운심부지처에 돌아와선 수애가 아윤을 피해다녔어요. 아윤은 위 선배를 간호하다가도 시간이 날 때마다 수애를 찾았는데 말이죠... 저희는 그 둘이 마음이 통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서로 모르는 사이마냥 굴어대니 보는 입장에선 어이가 없다니까요. 마지막으로 둘이 같이 있는 걸 본 게 사추였어요. 그렇지?"
"응... 무슨 얘길 하는 지 듣지는 못했지만 분위기가 심각해보였습니다. 몇 번 고성이 오가고는 그 뒤론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음."
"아윤의 앞에서 수애 얘길 꺼내면 못 들은 체를 하거나 다른 얘기나 하자고 성화를 부리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못했어요. 수애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하니 저희가 무슨 수가 있겠어요. 하여튼 걔넨 정말 이상해요. 전엔 서로 죽고 못사는 사이인냥 붙어다니더니 지금은 원수라도 진 것 마냥 눈도 마주치지 않아요. 둘 다 변덕이 죽 끓듯 하니 무슨 장단에 맞춰야 할 지 모르겠다니까요."
경의가 툴툴 거리자 사추는 더 물어볼게 없으면 가보겠다며 다급하게 그를 끌고 나갔다. 확실히 사윤과 수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된 망기는 서재를 나와 뒷산으로 향했다. 망기가 와서 앉자 제 주인을 알아본 토끼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토끼들이 제 옷을 물고 늘어지는 것에 익숙한 망기는 그저 토끼들의 작고 말랑말랑한 코를 툭툭 치며 손장난을 쳤다.
"함광군?"
토끼들의 먹이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던 수애는 망기를 발견하자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한번도 그와 단둘이 얘길 해본 적이 없는데다 망기는 선문의 어린 제자들에겐 어려운 선배였으니 수애에겐 이 상황이 어색할만도 했다.
"토끼들에게 밥을 주러 온 것이냐?"
"예..."
"물어볼 것이 있어 기다렸다. 네가 계속 토끼들 밥을 챙겨주고 있다길래."
"저... 저한테요?"
"음. 앉거라."
망기가 제 옆자리를 툭툭 손으로 치자 수애는 긴장된 표정으로 바구니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아윤과 네가 각별한 사이라 들었는데..."
"아니에요! 저흰 그냥 친우일 뿐이예요."
"허나 지난 번 관음묘에서 접문까지 하지 않았더냐."
망기가 꺼낸 얘기에 수애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 그건..."
"아윤과 싸운 것이냐?"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면 어찌 아윤을 피하는 것이야?"
"피한 적 없어요!"
"네가 피하지 않았으면 아윤이 하루종일 위영에게 붙어있진 않겠지."
"그토록 그리던 모친을 만났으니 위 선배랑 붙어있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음. 하지만 아윤은 위영을 좋아하는만큼 너를 좋아한다."
망기의 말에 수애는 입을 꾹 다물고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복잡한 사연이 있을 것 같아 망기는 재촉하지 않고 토끼 한 마리를 집어들었다.
"이 토끼들은 위영이 내게 주고간 토끼가 낳은 새끼들이 또 새끼를 낳아서 이렇게 늘어난 것이다."
"그 애가... 그렇게 얘기 했던 거 같아요."
"언제 이렇게 늘어났는지 토끼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아윤은 어느 한 녀석이 다치거나, 아프거나, 죽게 되면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런 아이다. 한 번 정을 주면 온 마음을 다하는."
"알아요. 정말 정이 많은 녀석인 거."
"그런 녀석이 네게 유독 더 많이 정을 주었지."
"그 애 주변엔 늘 사람이 넘쳐나요. 저는 그저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 걸요. 특별하지 않아요."
수애의 넋두리에 망기는 문득 제 어린 시절을 떠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눈길이 닿는 곳엔 늘 무선이 있었다. 그의 시선 속의 무선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고 망기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사랑이 넘쳐나서 사람이 넘쳐나는 아이. 망기의 눈에 비친 무선은 반짝반짝 빛이 났고 가끔은 그 빛에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었다. 수애의 마음이 어떤지 알 것도 같아 망기는 아주 작게 웃어보였다.
"그런 것 마저도 위영을 닮았어. 아윤은 하나부터 열까지 제 어미를 빼다 박았지."
"맞아요. 그 애가 위 선배의 아들인지 몰랐을 때도 두 사람 하는 행동이 정말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오랜 시간 떨어져 지냈는데 어떻게 그렇게 닮았는지 모르겠어요. 주변에 사람이 끊이질 않잖아요. 대체 얘가 무슨 얘길 하는지 궁금하고, 뭘 하려고 하는지 알고 싶고...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나봐요."
"무서웠구나."
생각지도 못한 망기의 말에 수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사윤을 좋아하는데도 사윤을 자꾸만 피하게 되는 이유를 몰랐던 수애는 망기의 그 한 마디에 제 감정이 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네가 그저 아윤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일까봐 두려웠던 것이지?"
"아마도... 그런 거 같아요. 남사윤은 특별해요. 고소 남씨 도련님이잖아요. 게다가 함광군과 위 선배의 아들이니까 남부러울 거 없죠. 그에 반해 전 너무 평범한 걸요. 돈도 명예도 그럴싸한 가문도 없어요. 부모님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남은 가족도 없고요. 남사윤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데 그에 비해 전 너무 초라하니까 그 애가 금방 질려버릴 것만 같아서... 함광군 말씀 맞아요. 무서웠어요. 상처 받을까봐 무서워서 제게 다가오지 못하게 했어요."
"그래도 아윤이 좋은 것이지?"
망기의 물음에 수애는 고갤 끄덕였다.
"그럼 망설이지 말거라. 머뭇거리다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테니까. 직접 겪어보아 하는 얘기다."
"위 선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음."
"그래도 두 분은 다시 만났잖아요."
"음. 허나 너무 오래 걸렸지... 너와 아윤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여전히 전 잘 모르겠어요."
"아윤이 특별하다 하였지?"
"네."
"그런 아윤이 특별하게 여기는 너는 얼마나 특별하겠느냐? 아윤이 너보다 먼저 알아본 것이다, 너의 특별함을. 아직도 모르겠다면 도망치지 말고 아윤에게 알려달라 하거라."
결국엔 당사자들끼리 풀어야 하는 일이라 제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을 마친 망기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뒷산에서 뛰어놀다 내려오는 무선과 사윤을 발견한 망기는 두 사람에게 향했다.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는지 나뭇잎이며 풀잎이 머리와 옷에 잔뜩 달라붙은 줄도 모르고 무선과 사윤은 망기에게 달려와 그 품에 안겼다.
"남잠,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어?"
"토끼밥."
"아, 토끼에게 밥을 주려고?"
"음. 헌데 내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래? 이왕 온 김에 내가 도와주려 했는데."
무선의 말에 망기는 마음만으로도 고맙다는 듯이 그의 뺨을 쓸어주고는 사윤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윤."
"예, 부친."
"수애 혼자 토끼밥을 주기 힘들 것 같구나. 네가 도와주거라."
"저 녀석 혼자서도 잘하던 일인 걸요."
사윤이 답지않게 퉁명스러운 말대답을 하자 무선은 깜짝 놀라며 망기의 어깨너머, 토끼밭에 홀로 서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머리칼을 한 쪽으로 예쁘게 땋고 다니는 문하생, 사윤의 정인이라는 걸 알아본 무선은 곧장 사윤의 등을 떠밀었다.
"서로 돕고 살아야지! 어서 가!"
"아, 모친!"
"어서!"
무선이 막무가내로 등을 떠미는 탓에 반항도 못하고 토끼밭에 내쳐진 사윤은 천천히 수애에게 향했다. 몇 발자국 못가서 마음이 바뀐 모양인지 사윤은 제 부모에게 돌아가려했지만 망기와 무선은 이미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 하는 수 없이 수애에게 다가간 사윤은 별말 없이 바구니에 담긴 채소들을 토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부친이 시켜서 하는 거야.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라고."
"응..."
"아직 남았어?"
"거의 다 줬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걸 가지고... 간다."
"남사윤!"
수애가 옷깃을 붙잡아 걸음을 멈춰 세우자 사윤은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또 화내려고 불러세웠어?"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얘긴 지난 번에 끝난 거 아니였어? 우리 둘이 이러고 있는 거 보면 형장들이 또 오해할 거야. 넌 내 정인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을 테고 난 그런 너 때문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안해 해야하겠지.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면서. 나는 네 그 한 마디에 곤란한 일 생기지 않게 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넌 참 너 편할대로 굴어서 좋겠다."
"아까부터 왜 자꾸 화를 내는 거야?"
"먼저 화낸 건 너잖아."
"그게 며칠 전 일인데... 그리고 내가 오해 받을만한 일 만들지 말자고 했지 언제 얘기도 하지 말자고 했어?"
"나랑 말도 섞기 싫어서 도망다닌 사람이 누군데?"
"남사윤! 너 진짜..."
"이거 봐. 또 화내잖아. 난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갈게."
망기의 조언에 좋게 얘기해보려고 한 것인데 어쩐지 일이 전부 꼬여버린 것 같아 수애는 애가 탔다. 제 진심은 그게 아닌데 솔직하게 말하려 해도 이젠 사윤이 들어주지 않을 거란 생각에 덜컥 겁이 난 수애는 눈물이 터져나왔다. 제가 너무 심하게 말한 거 같아 돌아가는 발걸음이 천근, 만근 무겁게만 느껴지던 사윤은 등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자 당황하며 곧장 수애에게 달려갔다.
"왜... 왜 우는 거야! 울지 마... 울지 마, 임수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뭐가 됐든 다 내 잘못이야."
방금 전까지 퉁명스럽게 굴 땐 언제고 전부 제 잘못이라며 싹싹 빌어대는 사윤 때문에 수애는 오히려 눈물을 멈추기가 더 힘들었다. 상처 받기 무섭단 핑계로 제가 사윤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울지 말라는데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말을 너무 못되게 했어."
사윤이 소매를 끌어다 눈물을 닦아주자 수애는 무작정 그의 품에 뛰어들어 사윤을 꼭 끌어안았다.
"남사윤."
"응."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난 네가 좋아."
"알고 있어. 네가 아니라고 우겨도 그건 숨길 수 없는 거야."
"너에 비해 내가 너무 초라한 거 같아서 네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어. 넌 정말 특별한 사람인데 난 평범, 아니 평범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거든."
"평범하다니? 넌 정말 너를 모르는구나."
"그러니까 나도 묻고 싶어. 넌 대체 내게서 어떤 특별함을 찾았길래 날 좋아하는 건지."
"임수애, 넌 아주아주 특별해."
수애를 감싸안으며 사윤은 그의 귓가에 대고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이었어. 나한테 강하다고 해준 사람. 이렇게 잘 자란 내가 아주 강하다고 해줬잖아. 나한텐 그게 정말 큰 위로였어. 내 안에 나도 모르는 뭔가 엄청난 게 숨어있었는데 네가 그게 뭔지 알려줬어. 나의 강함과 용기는 네가 발견해줬기 때문에 반짝거릴 수 있게 되었어. 나의 특별함을 찾아준 사람이라 넌 너무 특별해. 너무 소중해. 그래서 널 좋아해. 그러니까... 밀어내지마. 마음 여린 이 남자의 순정을 지켜달라고."
사윤이 마지막으로 농담처럼 던진 말에 수애는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임수애,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대."
"넌 애도 아니고 아직도 그런 걸 믿냐?"
"야, 우리 모친이 그랬어. 그럼 우리 모친도 애야?"
"위 선배가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으시지..."
"맞아, 그렇긴 해. 그래서 귀엽잖아."
"너도."
"응?"
"너도 귀엽다고..."
수애가 수줍게 건네는 말에 사윤은 날아갈 듯이 기뻐서 그대로 수애를 안아올리고는 몇 바퀴나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댔다. 결국 발이 꼬여 넘어지는 바람에 바닥을 구르면서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사윤과 수애는 연신 웃으며 토끼밭을 뒹굴었다. 수애의 머리칼에 달라붙은 토끼풀을 떼어주던 사윤은 저도 모르게 수애의 입술에 눈이 갔다. 말이 없어진 사윤이 제 입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수애의 얼굴은 점점 붉게 물들고 파르르 떨리는 사윤의 입술이 수애의 입술에 포개졌다.
"뭐야 너희? 어제까지는 서로 죽어도 안 볼 것 같이 굴더니 오늘은 왜 또 같이 뒹굴고 있는 건데?"
"경의, 모른 체 하고 가자니까..."
"역시 변덕이 죽 끓듯 한다니까!"
뒷산 계곡에서 수련을 하기 위해 길을 지나다 사윤과 수애를 발견한 고소 남씨 제자들은 저마다 두 사람을 놀리기 바빴다. 여전히 수애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댄 채로 품 안에서 무선이 그려준 부적을 꺼낸 사윤은 사람을 쫓아 다니는 용 모양의 불꽃을 소환해 방해꾼들을 쫓아버렸다.
"아윤이 늦네..."
무선이 덧창에 매달려 영죽당 대문만 바라보고있자 망기는 무선을 끌어당겨 품에 가뒀다.
"기다리지마."
"하루 아침에 찬밥 신세가 될 줄은 몰랐어."
무선이 입을 삐죽이며 말하자 망기는 살풋 웃더니 툭 튀어나와있는 무선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질투하는 거야?"
"질투가 아니라 아쉬운 거야. 내 품에 다시 안아본지 얼마나 됐다고 훌쩍 날아가 버릴 거 같으니까."
"아윤은 나일 먹어서도 오래오래 내 곁에서 살겠다 약조했어."
"제 색시 놔두고?"
"제 색시랑 같이."
"그런 얘길 언제 했대?"
"아윤이 일곱살 때."
"남잠, 일곱살이 뭘 안다고..."
"내게 그리 약조했으니 지킬 거야."
망기가 당연하다는 듯 내뱉는 말에 무선은 못말린단 표정으로 웃어보이고는 덧창을 닫았다. 사윤이 너무 늦어도 무선은 기다리지 않기로 하였다. 이젠 아이가 제 품에 없다고 불안해 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할말이 그리 많은지 날이 저물 때까지 토끼밭에 앉아 수애와 얘길 나누다 수애를 문하생들의 처소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온 사윤은 오늘도 제 방이 아니라 정실에 들어와 무선의 옆자리를 꿰찼다.
"아윤."
"예, 부친."
"어찌하여 이리 일찍 돌아온 것이냐?"
"날이 벌써 저물었잖아요. 내일부터는 수업도 빠지지 않고 수련도 열심히 하겠다고 수애와 약조하였어요. 그러니 일찍 잠들어야 해요. 그리고 생각해보니 부친이 선독이 되셨는데 하나뿐인 아들인 저도 모두의 모범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제가 함광군과 이릉노조의 아들이란 게 다 알려졌는데 두 분 명성에 미치지 못할 지언정 먹칠은 하지 말아야죠."
사윤이 생각보다 일찍 돌아와 또 무선을 빼앗긴 망기의 서운한 마음도 모르고 무선은 어찌 그리 기특한 생각을 하였냐며 사윤을 칭찬하기 바빴다. 사윤이 제 정인과 화해를 하면 자연스레 어미에게 소홀할 거란 망기의 예상과 달리 사윤은 낮동안엔 바삐 돌아다니다가도 날이 저물면 꼭 정실에 돌아와 무선의 곁을 지켰다. 애타는 아비의 속도 모르는 사윤은 매일밤 부친과 모친 사이에 제 몸을 끼워넣고 잠을 청했다.
망기무선 망선 사윤수애
머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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