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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2 16:45
태섭이가 한 번 앓아누운 뒤로 대만이의 태도가 많이 누그러졌음. 걸핏하면 어깨를 물어뜯어 피를 보더니 이를 세우는 대신 흉이 진 어깨에 입을 맞췄고 막무가내로 아래를 찢는 대신 큰 혀로 조심스레 핥아줬음. 잠자리에서 조금 순해진 것쯤이야 새끼를 낳을 몸이니 너무 많이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음.
하지만 잠자리가 아닌 곳에서도 다정하게 구는 건 이해하기 어려웠음. 대만이는 바깥에서 먹이를 구해오면 맛있는 부위를 태섭이가 먹기 좋게 잘게 찢어주거나 엉킨 꼬리털을 핥아 정돈해주기도 했음. 태섭이는 그런 대만이가 어색하고 불편했음. 뭐 좋은 사이라고. 반려라면 모를까 씨받이인데 이런 다정함은 달갑지않았음. 새끼를 낳고나서 잘하면 쫓겨나고 여차하면 물어뜯겨 죽는 신세에 이런 다정함이 다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고 태섭이는 생각했지만 얼핏 보이는 첫사랑의 다정함에 자꾸만 심장이 뛰었지.

숲에 땅거미가 깔리자마자 대만이는 태섭이의 몸을 타고 올랐고 태섭이는 짜증을 내면서도 반항하지않았음. 며칠 굴 안에 있다보니 더한 반항은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 여기서 반항해 도망간다 하더라도 이 숲은 대만이네 늑대 무리의 영역이었음. 기껏해야 굴에서 도망칠 뿐이지 숲을 벗어나기도 전에 늑대들에게 물릴 제 신세가 뻔했음. 그래서 태섭이는 무사히 숲을 나가기 위해 대만이 원하는 걸 주기로 했음.
밤이 깊어 새벽이 되어서야 정사가 끝나고 태섭이는 무의식적으로 구석으로 가 자려했음. 울긋불긋한 허벅지로 어기적 걸어 구석으로 가는 태섭이를 못마땅하게 보던 대만이 다가가 태섭이의 목을 살짝 물고 중앙의 안락한 보금자리로 끌고왔음.
대만이는 싫다는 태섭이를 부득불 끌고 와 누웠음. 코요테에 비하면 거대하기 짝이 없는 늑대의 몸을 쭈그리는 한이 있더라도 대만이는 태섭이를 제 옆에 끼고 잤음. 태섭이는 그런 대만이가 이해가 안 갔지. 자기가 이 자리를 뺏자는 것도 아니고 구석에 가서 자겠다는데 왜 굳이 끌고 오는데? 불편하게 자면서? 하지만 대만이는 태섭이를 꼭 옆에 두고 잤고 아침이면 다리가 태섭이 위에 턱 하니 올라갈 때도 있었음. 비좁다 짜증내는 태섭이도 잠결이면 온기를 좇아 대만이의 품을 파고들기도 했음.


대만이는 태섭이가 가끔 굴 밖에 나갔다오면 집요할 정도로 털을 핥아댔음. 바깥 냄새를 묻히고 온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털을 핥다못해 온 몸을 부비적거리며 자신의 냄새로 뒤집어씌웠음. 그런 날이면 유난히 정사가 거칠고 길어져 태섭이 기절을 할 정도였음. 그럴거면 나가지말라고 할 법도 한데 대만이는 태섭이의 외출을 막지 않았음. 처음엔 굴 밖으로 나가도 언제든지 잡아올 수 있다는 기만적 아량을 보여주는건가 싶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딱히 그런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음.
사실 따지자면 그 이유가 맞긴 했음. 나가봤자 사방이 늑대 무리고 영역인 숲인데 니까짓게 나가서 뭐하겠냐는 비웃음으로 시작했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대만이는 불안해졌음. 분명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텐데 걔가 늘 묻히고 오는 바람 냄새처럼 그렇게 훌쩍 떠나버릴 것 같아서, 걔라면 이 숲을 떠나는게 가능할지도 라고 불안해했음. 태섭엔 늑대인 제게 짓밟히면서도 눈의 불꽃이 꺼지지않는 엄청난 코요테였으니까. 아무리 대만이가 다리를 못 쓰는 늑대라지만 코요테가 감히 대적할 만한 자 는 아니었음. 그렇지만 대만이는 종종 잠자리에서 제게 절대 지지않는 태섭이를 볼 때면 내가 얘를 덮치는 게 아니라 얘가 날 덮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태섭이는 강했음. 그런 태섭이니 이 늑대 소굴을 벗어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몰라. 대만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희뿌연 빛이 들어오는 굴의 입구를 하루종일 노려봤음. 하지만 노을이 질 때면 태섭이는 꼬박꼬박 굴로 돌아왔고 대만인 그제야 쌓여있던 불안을 태섭이에게 묻혔지.
마음 같아선 태섭이의 발을 씹어 굴 안에만 머물게 하고 싶었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만이는 바람 냄새가 나는 태섭이가 좋았음. 태섭이의 털결에 자신의 냄새를 덧씌우면서 제 혀로 옮겨붙는 바람 냄새를 맡을 때면 숲을 경쾌하게 뛰어다니는 태섭이가 그려졌음. 상상 속 태섭이는 자신 또한 기분이 고양될 정도로 즐거워보였음. 하지만 바람 냄새가 점점 옅어지면 자신은 영영 볼 수 없는 풍경이라는 현실로 돌아왔음. 그래서 그런 밤이면 원치않더라도 태섭이를 안는 게 거칠어졌음.
새벽녘이 되면 대만이는 녹초가 되어 기절한 태섭이를 끌어안고 긴 숨을 내쉬었음. 안도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 섞인 숨이었음.
늦여름에 시작된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는 가을로 접어들 때까지 이어졌음.


녹음으로 푸르던 숲이 태양을 닮아가는 계절이 오자 태섭이는 잠이 늘고 식사량이 줄어들었음. 먹이를 먹는게 영 시원찮자 대만이가 의사를 불러 괜찮다는 태섭이를 억지로 진료보게 했음. 아니나 다를까 매일밤 붙어먹은 보람이 있게 되었단 결과를 받았음. 임신 진단에 대만이는 멍하니 태섭이의 배를 바라보았음. 요며칠 먹은게 별로 없어서 홀쭉한 배에 새끼들이 있다는게 믿기질 않았음. 그러나 멍한 대만이와 다르게 태섭이는 침착한 태도였음.
"몸을 풀고 언제쯤 움직일 수 있죠?"
그 말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한 표정으로 대만이 태섭을 보았음. 태섭은 새끼를 가졌단 말에도 덤덤한 표정이었음. 아, 그렇지. 너는 반려가 아니라 씨받이였지. 새끼를 낳고나면 떠나버릴... 그 생각이 들자 대만이는 심장이 바닥에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음.

임신 사실을 안 이후로 태섭이는 외출을 삼가했음. 대만이는 그게 기쁘면서도 기쁘지않았음. 태섭이는 굴 안에서 항상 잠만 잤음. 대만이가 눈치를 보며 주위를 기웃거려도 귀조차 쫑긋거리지 않았고 먹이를 가져와도 먹는둥 마는둥이었음. 보다못한 대만이가 먹고싶은게 없냐고 물어도 태섭이는 없다는 말만 반복했음.
어느날 밤 대만이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음.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품 안의 허전함에 몸을 일으키니 굴 밖으로 나가려는 태섭이가 보였음.
"뭐해?"
잔뜩 잠겨 갈라진 목소리에 태섭이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음. 잠자느라 털이 눌린 꼴이었으나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어 태섭이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음.
"배가..."
"아파?"
태섭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음.
"배가 고파서..."
태섭의 말에 대만이의 형형하던 눈빛이 사그라들었음.
"날 깨우지."
"됐어요. 자는데 굳이......"
태섭이는 마치 대만이가 옆집 이웃인 것처럼 말했음. 제 새끼의 아비나 반려는 커녕 살 섞은 상대를 대하는 것 같지 않은 태도에 대만이 울컥했음.
"앞으로 나 깨워."
대만이 태섭의 목덜미를 물어 잠자리 위에 끌어다 놓았음.
"뭐 먹고싶은데."
나갈 채비를 하는 대만이에 태섭의 눈이 휘둥그레 졌음. 말을 않는 태섭의 볼을 코 끝으로 툭 치자 태섭이 우물우물 말했음.
"숲에 난 열매...빨간거..."
"그 엄청 신 열매?"
대만이 그게 정말 맞냐는 어투로 묻자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음. "기다려. 다녀올게."
부상을 입은 이후로 대만이는 처음으로 굴 밖으로 발을 내딛었음.
굴 밖엔 선선한 기운이 가득했음. 가을이 다가와 곳곳에 버섯이 피어있고 달짝지근하고 고소한 냄새가 밤인데도 향긋하게 흐르고 있었음. 내내 눕거나 앉아만 있어 오랜만에 뻗는 다리가 어색했음. 하지만 고요한 밤의 숲을 천천히 걷던 대만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음. 경보 수준으로 빨라지던 대만이는 이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음. 워낙 굴에만 있었더니 체력이 글러먹어졌지. 조금 걸었다고 이 꼴이라니, 대만이 씁쓸하게 발걸음을 늦췄음.
얼마 지나지않아 대만이는 태섭이가 원하던 열매를 찾았음. 잘 익은 열매 하나를 따서 입에 넣어보니 시큼한 맛이 잔뜩 퍼져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음. 걔는 이걸 왜 찾는거람. 맛있는 걸 천지에 놔두고... 대만이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열매를 한 아름 챙겨 굴로 돌아왔음.
굴에 돌아오자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조는 태섭이 보였음. 그냥 누워서 잘 것이지 자기 기다린다고 벽에 기대 있는 모습에 대만이 웃음을 흘렸음. 사랑스럽다 라는 감정이 목 끝까지 차올라 대만이 다정한 손으로 태섭을 안아 푹신한 잠자리에 눕혔음. 태섭이는 깊게 잠들어 대만이가 옮기는데도 잠투정조차 부리지 않았음.
"인마, 너 준다고 숲을 돌아다녔는데 너는 잠이나 자고..."
진심이 아닌 장난스런 목소리였음. 대만이는 태섭이의 옆에 천천히 누웠음. 그래도 아주 오랜만에 나간 밤산책이 기분 좋았으니까.. 봐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대만이는 눈을 감았음.




대만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