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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0 22:56


저벅저벅 다가오는 훤칠한 발걸음.
그보다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삐죽삐죽 위로 힘을 잔뜩 세운 헤어스타일이다.

"한 학년 위였으니까... 대만 선배, 맞죠?"

너같은 후배 둔 적 없거든? 당장이라도 그렇게 쏘아주고 싶었는데, 지금 정대만 꼴이 말이 아니라 공격력 제로. 일단 애매하게나마 아는 사람한테 이런 꼴을 들켰다는 게 쪽팔려서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신경 꺼."

그래서 기껏 한다는 말이 이건가. 애써서 뱉은 것치고, 목소리에 물이 잔뜩 끼어서는 영 볼쌍사납다. 가오 빠지게.

"맞은 건 아닌 거 같고."

갸우뚱하면서 도통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놈이 184의 대만에게도 크게 느껴지는 키를 반으로 접는가 싶더니 고개 숙인 얼굴이 잘 보이는 각도로 바로 앞에 주저앉았다. 덕분에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대만은 숙였던 고개를 조금 들어 뒤로 젖혀야만 했다.

"뭐야."
"그럼 역시 사랑 싸움?"

원래부터 얼굴에 드러나는 걸 숨기는 게 서툰 대만이다. 하물며 이렇게 정신이 너덜너덜해져 있는 상태라면, 평소의 어설픈 방어력조차도 없을 수밖에. 정곡을 찔린 사람답게 눈을 피하며 투덜거린다.

"보통, 아는 사람이 울고 있는 거 보면, 대충 자리 피해주지 않나?"
"그런가요? 글쎄..."

대협은 고개를 까딱하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 생각엔 대만 선배도 그런거 그냥 넘길 타입은 아닌 거 같은데."

언제 얼마나 봤다고 아는 척이야. 그런 것치곤 맞는 말이라 대만은 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대협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그 나이 애들답지 않게 잘 각이 잡힌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그것을 대만은 익숙하게 받아 눈물을 닦고, 코까지 흥하고 풀어버렸다.

"그거, 좀 비싼 건데."
"시끄러."

누군지 모르겠지만 꽤 응석을 받아줬나보네. 대협은 재밌어 보이는 걸 발견해서 좋았던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물건에 애착은 딱히 없으니, 손수건 때문은 아니렸다.

"그래서, 얘기 안해줄 거예요? 왜 처량맞게 울고 있었는지?"
"널 뭘 믿고 그런 얘길 하냐."
"섭섭하게."

쭈그려앉았던 다리를 다시 쭉 펴고 선 대협은 부루퉁한 얼굴로 숨을 고르고 있는 대만을 한 번 내려다 보고 팔을 잡아 일으켜세웠다. 입은 잔뜩 날이 선 주제에 몸은 순순히 응하는 편인지, 대만은 쉽사리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그럼 손수건 값으로, 따라오세요."
"...뭐하게?"
"재밌는 거."


***

그 재밌는 게, 이런 거라니. 진짜 별난 놈이라며 대만은 궁시렁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가만히 앉아서 물고기를 기다리는 일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한동안은 낯선 풍경과 물결이 주는 평온함에 마음을 빼앗겨 조용히 앉아있던 대만이었지만, 슬슬 좀이 쑤시고 엉덩이가 아파왔다.

"야, 엉덩이 배겨."
"허벅지라도 빌려드려요?"

"낚시대를 치워야 앉지."

정말 앉을 셈이었나.

"그리고 배고픈데."

아직 낚은 게 없는 대협은 요구하는 것이 많아지는 대만을 흘깃 쳐다보며 농을 걸었다. 언제부터인가 숨쉬듯 이러는 게 버릇이 되서다.

"자꾸 시끄럽게 하면 키스해 버릴 거예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하든지."

이번에는 고개를 아예 돌려서 대만을 바라보았다. 보통, 이런 농담을 하면, 상대는 엣찌라든가, 바보라든가, 핀잔을 주거나 승낙하거나 결국은 기대하는 듯한 붉은 얼굴이 되어 있곤 하는데, 이 사람은 그런 것도 아니고 덤덤해보이는 게 재미있다. 대협은 손을 갖다 대어도 피하지도 않고 멍때리고 있는 대만의 목을 끌어당겨 진짜로 입을 맞추었다.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어쩐지 계속 예상을 깨는 점이 재밌기도 했고 남자든 여자든 집착하는 상대만 아니면 누구든 환영하니까. 그리고 꽤... 얼굴 반반한 편이고.
 

"으음.."

그러면 그렇지.
익숙하게 남자와 혀를 섞고 키스를 하는 걸 보니, 아까 그 눈물은 애인과의 트러블 때문이 맞는 것 같았다. 게다가 누구인지 몰라도, 꽤나 오냐 오냐 하면서 공주처럼 모셨나 싶은데..

"읍..!"

숨이 막혔는지 격렬해지는 키스를 밀쳐내며 대만은 입술을 닦았다.

"더럽게 못하네, 진짜."
"내가요? 그럴리가 없는데요."

황당해하는 대협의 대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만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뭐하는 거지, 진짜... 이런데서.."

약해질대로 약해진 마음을, 어떻게든 주워담으려 애쓰는 사람은 어쩐지 가엽고 위로하고 싶어진다. 몸의 위로라면 자신 있는데. 지금 노리면 아무래도 개새끼겠지 이거? 대협은 다시 대만의 옆에 앉아 등을 한 두번 토닥이고 낚시대를 거두어 들이기 시작했다.

"원하는데 내려줄게요, 어디로 가는 게 좋겠어요?"
"......"

차에 타고 나서도 한동안 꾸물거리던 대만이 마침내 어딘가를 말했다. 대협은 알지 못하는 곳이었지만, 그게 누군가의 자취방 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꽤 나중의 일이다. 정대만과 국대로 합숙하게 되었을 때,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대만을 마중 나온 얼굴을 보고서야 눈치챘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 한 번 무척 애를 먹였던 포인트가드여서 어른이 되고 난 후의 얼굴로도 금방 알아볼 수 있긴 했다. (관심이 없어서 대협은 잘 몰랐지만 물 건너에서 꽤 유명한 선수가 되었다는 것 같았다.)

챙기는 걸 잊은 짐을 가지러 대만이 후다닥 다시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을 때, 그와는 한 몇 분 말을 섞을 기회가 되었는데, 장난이 동한 대협이 그냥 넘어갈 리는 없었다.

"이젠 안 울리나 봐?"
"....? 뭔데."
"내가 좀 더 양심이 없었으면 뺏겼을거란 얘기."

맥락 없는 도발이었지만, 원래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상의 눈매가 더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곧 다시 나온 대만을 보자마자 그 눈이 순둥이처럼 풀어져버린다.

"미안, 찾았다 이거."
"타요, 늦겠어요."

익숙하게 착착, 문을 열어주고 벨트도 채워주고,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토닥여주고서야 운전석에 앉는 꼴이라니.
아주 오래된 습관처럼 대만을 향한 유별난 친절이 몸에 벤 남자는 이윽고 부드럽게 시동을 걸고 차 창문을 내려 고개를 까닥여 대협에게 인사를 건넸다. '너처럼 꼬인 게 한 둘이었는 줄 아냐, 빼앗긴 뭘 어떻게 빼앗어.'라는 자신감과 여유가 담겨 있어서 어쩐지 재미없는 표정이었다. 둘이 인사하는 것을 보고서야 불현듯 아.. 하고 안절부절하는 옆자리의 정대만쪽이 역시 배는 재밌었달까.

아, 아깝다. 그때 좀 더 저질러볼걸.



대협대만 태섭대만 센미츠 료미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