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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9 23:10


대만이가 태섭이한테 고백한 건 한참 더운 여름이 끝나갈 무렵
앞뒤 생각하지 않고 한 번 품은 감정은 숨기지도 못하는 대만이, 딱히 어떤 기대를 갖고 고백한 건 아니었겠지. 그냥, 좋아졌으니까 좋아졌다고 고백했는데, 태섭이에겐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싶었을 듯. 대만이랑은 별별 일이 다 있었고, 그냥 선배라고만 할 수 없는 꽤 중요한 사람이라서 알게 모르게 속으로 의지했으니까 더더욱. 더군다나 태섭이는 매일 대만이랑 붙어다니면서도 곧 있으면 선배랑 이러고 노닥거리는 것도 떠나보낼 때가 오겠네 같은 생각 꽤 하는 타입이란 말이야.

오랜 시간 동안 애틋하게 생각해온 한나와도 더 이상의 진척 없이 그냥 딱 이대로도 좋다고 만족하고 마는, 어찌 보면 인간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인 송태섭. 그게 너무 소중한 사람들을 어린 시절 잃어본 경험 때문에 쉽게 바운더리를 넓히지 못하는 거라는 건 자각도 없을 것임

그래서, 대만이가 고백했을 때 태섭인 마치 장난인 것처럼, "선배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쳐요." 하고 무시하려고 했어. 근데 상대는 정대만이잖아. "장난 아니야. 그렇다고 받아달란 소린 아닌데.. 그래도 장난치는 건 아니다, 야." 하고 벅벅 뒷머리 긁고 헛기침하며 얼굴 붉어진 대만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렇게 대답했어. "받아달란 건 아니란 거죠? 그럼 됐네. 알았어요."

매몰찬 거절도 아니지만, 역시나 남자끼린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 자기가 이상한 거겠지 싶어서, 대만인 자기도 모르게 시무룩해졌고. 그러면서도, 기분 나쁘다든가, 역겹다든가, 자기 감정을 마구잡이로 혐오하지 않는 태섭이가 속으론 더 좋아졌을 거야. 인상이랑 다르게 송태섭 엄청 상냥한 녀석이니까 하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차인 건 차인 거라 대만이가 어떻게든 알아서 감정 정리를 하려는 와중에, 태섭인 그때부터 미친듯이 정대만을 의식하게 되겠지. 동성이니까 아예 생각하지 않았던 영역을 한 번 의식하니까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자애들이나 한나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정대만이랑 비교하고 있고 막.. '봐봐, 가슴도 납작하고, 키도 멀대같이 크고.. 잘 웃고, 웃을 때 입매가 시원하고..' 그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어느새인가 눈으로 대만일 좇고 있고, 당연히 눈이 마주치기도 하고, 그럼 또 시선을 피하고.

그러다 어느날은 라커룸에서 둘만 남았을 때 옷 갈아입느라 반쯤 벗은 대만이가 물기 때문에 살짝 미끄러져서 태섭이 어깨를 탁 잡았는데 그걸 팍 쳐내고 마는 거야. 태섭인 어쩐지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같이 샤워하는 것도 신경쓰여서 미칠 거 같아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건데, 정대만 상처받은 표정보고 아차 싶겠지

"야, 그냥 미끄러진 거야."
"...알아요."
"내가 널 좋아한다고 설마 덮치겠냐."
"아, 시끄러워요. 진짜."

덮친다니, 남자끼리도 역시 좋아하면 그렇고 그런걸 하고 싶겠지? 저 정대만이 자기를 그렇게 생각한다니 온 몸에 불이 날 것 같은 송태섭..
하지만, 대만이는 자기도 스스로 놀랄만큼 꽤 속상해서 그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농구부실을 나서겠지. 원래대로라면 집으로 같이 돌아갔을 텐데, 오늘은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아서 발걸음을 돌려서 익숙한 학교 옥상으로 향했어. 근데 다들 하교하고, 어지간한 부활도 끝났을 시간인데 거기 누가 있는 거야.

"..대만군?"

그것도 아는 사람이네. 진짜 혼자 좀 있고 싶었는데.
답답해진 대만이가 다시 발을 돌려서 내려가려는데, 호열이 목소리가 들려와

"아직도 내가 무서워요?"
"뭐래! 너 무서워한 적 없거든?"

사실 조금 무섭기도 하지만, 그것보단 빚진 것에 대한 불편함이 더 큰 거라서, 대만인 어줍잖은 기백을 부리며 다시 올라와서 호열이 옆에 턱 기대 앉을 거야. 어차피 이대로 집으로 가고 싶지도 않고, 친구들을 부르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럼 대만이 표정을 물끄러미 보던 양호열이 피식 웃으면서 말하는 거지.

"사랑 고민?"
"뭐?!"

그렇게 티 나나! 라고 속으로 외쳤지만 얼굴로도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는 정대만.. 흔들리는 눈동자를 한 번 들여다 보고 고개를 돌리면서 무심하게 호열인 아예 쐐기를 박을 것임

"송태섭이예요?"
"뭐뭐뭐뭐뭐뭐어!!!"

일단, 아니라고 해야겠지. 그렇잖아? 아무리 그래도 태섭이한테 피해가 갈 수도 있고. 아니지, 근데 양호열이 그런걸 떠벌릴 녀석이던가? 그럴리가 없잖아. 근데 그렇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들켜도 되는 건가? 근데 어떻게 알았지? 사실 다른 사람들이 다 알아차릴 만큼 그렇게 티를 냈나? 그래서 태섭이가 자꾸 까칠하게 구는 건가? 하고 그 짧은 순간에 겁나 많은 생각을 하는 대만이임.

"아, ... 아닌.. 아닌데."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거 생각보다 흔하더라구요."
"....뭐야 그게."
"그런 걸로 이상하게 보기엔 이쪽도 마찬가지라서."

그 순간, 대만인 귀를 의심하며 눈 동그랗게 뜨고 호열이 쪽을 바라보겠지.

"어때요, 대만군. 차인 사람들끼리 위로라도 할까요?"

위로라니 뭘 말하는 거냐고 대만이가 묻기도 전에 양호열 입술이 와닿는데, 대만이 몸 굳어서 피하지도 못하고 눈만 질끈 감을 거 같다. 호열이 입술 감촉이 생각보다 부드럽고, 키스도 무척 따뜻하고 조심스러워서 어쩐지 가슴이 찌릿하겠지. 좋아하는 건 태섭인데, 다른 사람이랑 이러고 있는 자기가 한심하고. 근데 또 이렇게 두 살이나 연하인 양호열에게 뭔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기분이 미안하고 어색하고 쓰라려서.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요. 미안하게 됐네요."

그럼, 대만이는 그제야 눈물 또르륵 흐른 거 슥슥 닦으면서 벌개진 눈가로 씩씩하게 말하려 애쓸 듯

"너가 사과할 게 뭐가 있어."

그리고 뭔가 결심한 듯 양호열 뒷목 다시 끌어당기면서 서투른 입맞춤 하는데, 양호열도 이건 의외였어서 멈칫할 거 같다.

"됐지? 나도 너한테 했잖아. 사과하지 마."


실은 꽤 오래전부터 백호한테 품었던 마음 접으려고 애쓰다 보니,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대만이를 누구보다도 빨리 눈치챈 게 양호열이고, 그래서 대만일 신경쓰게 된 거겠지. 자기도 자기 마음을 모르면서 백호는 아니지만, 백호처럼 빛나는 사람한테 솔직해지는 것으로 도피하고 싶어하는 양호열과, 이제 막 선배를 의식하면서 고민을 거듭하다가 몽정까지 해버리는 송태섭과, 태섭이는 자길 절대로 그런 식으로 생각할 리는 없다고 굳게 믿고 어떻게든 벗어나보려고 호열이한테 매달리는 정대만이면 좋겠다.


태섭대만 태대 료미츠
호열대만 호댐 요미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