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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9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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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앉은 이의 숨소리에 억지로 참으려 하는 울음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자 마치다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노부의 다리 위에 올려놓은 주먹에 핏줄이 불쑥불쑥 솟아 있는 것이 그리고 그 주먹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는 것이 노부가 이 상황에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얼마나 답답해하고 절망하고 있는지 훤하게 보였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 

마치다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이혼서류를 조금 더 앞으로 밀어 주었다. 

"서명만 해. 서류 제출은 내가 할 테니까. 재산 분할은... 너 나 때문에 고생만 했는데... 우리 모은 것도 없잖아. 난 몸만 나갈게."

마치다가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었던 사람, 마치다가 목숨보다 더 사랑한 노부는 여전히 펜은 들지도 않은 채로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 줘요. 케이. 뭐든지 고칠 수 있어요."

네가 혼자서 고칠 수 없는 게 있대. 내가 네 옆에 있으면 고칠 수 없대... 그래서 내가 네 옆에 있으면 너는 결국... 결국 죽는대...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네 옆에 있겠다고 할 수가 있겠어.

그러나 그 말들을 해 줄 수 없다는 걸,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마치다는 노부가 자신만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서류를 더 앞으로 밀어주고, 오래됐지만 소중하게 아끼며 사용해 온 가방을 매고 일어섰다. 노부가 두 사람의 결혼 1주년 선물로 사 준 가방이었다. 마침 마치다도 노부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며 노부를 위해 준비했던 선물이 가방이라서 그때 두 사람은 둘 다 가방을 준비했다는 걸 알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었다. 노부는 마치다와 함께하기 위해 집안과 연을 끊었고 마치다가 꿈을 접지 않도록 해 주기 위해서 본인이 대학을 그만두고 일을 시작했다. 노부가 많이 무리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마치다는 몇 번이나 꿈을 미뤄두고 학원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일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평소에 마치다에게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 노부는 마치다가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할 때마다 화를 내고 그러지 말라고 애원했다. 노부는 대학도 졸업하지 못해서 월급도 많이 받지 못했지만 두 사람을 위해서 늘 열심히 일했고 그 와중에도 용돈을 아껴서 마치다에게 근사한 가방을 선물했었다. 마치다에게는 노부가 프로포즈를 하며 주었던 반지와 함께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물론 그 가방이나 반지보다 가방을 선물한 노부를 더 사랑하지만, 넌 나를 위해서, 내 꿈을 위해서 너무 무리해야 했기 때문에 결국...

마치다는 병색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고 있는, 창백한 노부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서명해 놔. 내일 가지러 올게."
"이러지 말아요, 케이. 제발. 제발. 케이."

결국 노부의 목소리가 눈물에 푹 젖어 버린 걸 들어버린 마치다는 떨어지지 않는 발에 힘을 주고 몸을 돌려서 지난 5년간 두 사람의 소중한 보금자리였던 작은 아파트를 나섰다. 당장 돌아가서 노부를 끌어안고 나도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선 안 됐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지만 발을 돌릴 수는 없었다. 

[마치다 상만 떠나면 우리 노부유키는 살 수 있어요. 기어이 우리 애를 죽이겠다는 거예요? 그게 마치다 상이 말하는 사랑이에요?]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만 떠나면 너는 산다는데 내가 어떻게 네 옆에 붙어 있겠어. 

만약에 입장이 바뀌어서 노부가 마치다를 떠나야 마치다가 살 수 있다면 마치다는 노부가 없는 길고 긴 삶 대신 두 사람이 이별을 준비할 여유도 없을 정도로 찰나의 짧은 삶이라도 노부의 옆에서 함께하다 가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너도 마찬가지잖아. 너도 네가 날 떠나야 내가 살 수 있다면 너도 날 떠날 거잖아. 우린 자라온 환경이 천지차이였기 때문에 많은 것이 서로 달랐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늘 같았잖아. 늘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했잖아. 너도 나와 같은 상황이었으면 날 살리기 위해 날 떠났을 거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우린 여기까지인 걸로 하자. 
건강해져야 돼. 행복해야 돼. 나의 노부. 





노부와 노부가 남아 있는 도시를 떠나 아주 먼 지역으로 옮기고 난 다음이었다. 며칠동안 몇 번이나 현기증을 느꼈던 마치다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병원을 찾았다. 처음엔 이혼과 이별, 이사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두통과 현기증, 메스꺼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마치다는 노부와 억지로 이혼해야만 했을 때, 노부의 어머니가 건네 준 자신의 검사 결과표를 아직 갖고 있었다. 그 결과지에는 마치다의 몸에 문제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마치다는 그 문제가 커진 게 아닐까 싶었기 때문에 힘든 몸을 안고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검사를 마친 후 병원을 나선 마치다는 아직 낯선 도시의 골목에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렸다. 

[나중에 우리 아기 낳으면 케이 닮은 아기가 찾아와주면 좋겠어요.]
[왜! 난 너 닮은 아기가 좋아. 난 이미 너 닮은 아기의 이름도 정해놨어.]
[벌써요?] 

마치다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눈이 동그래진 채로 웃는 노부 너는 정말 예뻤었는데. 

[응, 너 닮은 아기가 태어나면 류세이로 할 거야.]
[류세이? 유성?]
[응. 그날 우리가 봤던 유성우처럼 아름다운 세상만 보며 자라게 키울 거야.] 

마치다가 쑥스럽게 웃자 노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마치다를 꽉 끌어안았었다.

몇 년 전, 노부와 케이가 아직 부부가 아니던 그 해에는 여느 해보다도 화려한 유성우가 쏟아질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고 노부는 발빠르게 유성우를 잘 볼 수 있는 곳의 팬션을 예약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정말로 하늘에서 별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환상적인 광경을 보고 난 후 노부는 마치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밀었다. 

그날 밤은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비처럼 쏟아지는 별의 무리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나와 평생을 함께해 달라던 너도. 그래서 마치다는 청혼을 받아들이며 다짐했었다. 노부를 닮은 아기를 낳으면 류세이라는 이름을 붙여줘야지. 우리가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이 밤에 이 지구에 비처럼 쏟아지던 별들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아이를 노부와 함께 사랑으로 키워야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노부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은 건 햇볕이 아주 뜨겁고 공기 중에 가득한 습기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히던 어느 오후였다. 전화를 받은 마치다가 정신없이 병원으로 뛰어갔을 때 막 병원을 나서고 있던 노부는 땀범벅이 되어 달려온 마치다를 보고 미안한 얼굴을 했었다. 

[별 거 아니었어요. 더위를 먹었대요. 요즘 계속 더웠잖아요.] 

정말 괜찮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노부는 창백하고 핼쑥해진 얼굴로 물 많이 마시고 서늘한 곳에서 쉬면 된다고 했다고 마치다를 끌어안고 달랬었다. 노부와 마치다가 함께 살던 낡은 아파트에는 에어컨도 없었고 고작 선풍기 한 대밖에 없었지만 마치다는 그날 노부를 선풍기 앞에 눕혀 놓고 집 안의 얼음을 다 꺼내서 얼음팩을 대 주고 이온음료를 사다나르며 내내 간병을 했었다. 다행히 노부는 다음 날은 현기증도 사라지고 괜찮아졌다고 했지만 안색이 여전히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다는 내내 옆에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주 뒤, 노부의 어머니, 스즈키 그룹의 부회장이 마치다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노부의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했으니까. 그러나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노부의 어머니가 내민 끔찍하고 절망적인 자료들을 보고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의학용어들이 가득한 가운데 노부가 죽을 거라고, 마치다는 노부를 살릴 수 없을 거라고 선언하는 듯한 단어들을 보고나서는, 계속 내가 노부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고, 끝까지 함께 살아갈 거라고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내가 옆에 있으면 네가 죽는다는데 내가 어떻게...





마치다는 그때를 떠올리며 흔들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온 얼굴을 흠뻑 적신 눈물도 닦고 흐트러진 옷차림도 바로 한 마치다는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배에 가만히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노부... 우리 아이가 왔어... 우리 류세이가 왔나 봐..."

다시 눈물이 차올라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눈물을 닦아낸 마치다는 심호흡을 하며 울음기를 삼키고 케이에게 언제나 다정하고 든든했던 사람을 떠올렸다. 

"...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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