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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30 03:15
모를 수가 있나. 경기 중 멋진 슛을 넣으면 누구보다 먼저, 오래 뒤따라오는 시선. 훈련에서 넘어지기라도하면 누구보다 빨리 달려오는 사람을. 농구가 끝난 지 한참 후에도 기숙사, 락커룸, 하다못해 학교 복도에서조차 정우성에게 따라붙는 애정 어린 시선을.

처음 자각했을 땐 설마였고 그 다음은 경악이었고 그 다음은, 외면했음.
동성애자에 대해 대단한 편견이나 혐오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야 근데… 근데 그 애정이 자길 향했을 때의 느낌은 좀 다른 거잖아. 그것도 농구조차 좋아하는지 가끔 의심스러운 좋아하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주장이라면. 그래서 처음엔 안 믿었어. 연습게임 후에 주장이 건네는 시리도록 차가운 스포츠음료. 미지근하다고 짜증을 내길래 의문을 가졌던 시간. 이명헌이 정우성을 위해 미리 얼려둔 거라고 깨닫는데는 아주 오래 걸렸음. 시원한 음료를 반쯤 마셨을 때, 더위에 쪄죽어가는 현필이가 눈에 밟혀 남은 걸 몰래 줬거든. 근데 현필이가 ‘혀, 형! 고마워요. 근데 왜 선배 껀 차가워요?’ 라고 물었을 때 대답을 못하겠는거야. 그러게, 라고 할 순 없으니까. 그 때 그걸 듣고 뭐야, 정말? 하면서 다가온 최동오가 음료수통을 만져보다니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어디론가 돌려.

“명헌아, 너 음료 따로 얼려왔지? 여깄다. 실수로 우성이 줬나본데.”

그리고 무심하게 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이명헌은, 텅 빈 음료통을 흔들며 됐다는 듯이 손을 저었음. 됐으니 이번엔 너 다 마시라는 듯이. 동오가 웃으면서 우성이 땡잡았네. 하고 말했어. 그 전에도, 그 전전에도, 늘 정우성의 스포츠 드링크는 막 꺼낸 것처럼 차가웠는데.

어느 날 밤 기숙사에서 대체 왜 날 챙겨준걸까? 생각하다 경악하는거야. 내가 슈퍼에이스라서, 상태 안 좋아서 중간 교체 당한 날도 시원했음. 기각. 열사병 걸릴 것처럼 생겨서, 진짜로 실려나간 애도 있음, 기각.
훈련 이후에도 정우성이 따로 슛 연습을 하면 볼보이를 자처하며 시시콜콜한 조언을 해주는 이명헌. 연습 중에 피라도 보이면 구급상자로 직접 밴드를 갈아주던 이명헌. 그리고, 정우성에게만 시원한 음료를 주는 이명헌.
정우성이 벌떡 일어났어

이 사람 나 좋아하나?

말도 안돼, 안되는데… 처음 이 생각이 든 후로… 제일 그럴 듯해보이는 근거가 이거인거야. 이명헌이 하는 모든 자잘하고 상냥한 배려들은 정우성을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하는 거랑 비슷했어. 그 중에서도 공격적으로 마음을 드러낼 줄 모르는 조용한 애들의 방식. 스치듯이 녹차를 못 먹는다고 했을 때, 도감독이 돌린 아이스바에서 늦은 정우성에게 따로 초코맛을 전해주던 이명헌. 정우성은 그냥 초코도 남은 줄 알았지. 녹색 아이스를 깨물어먹는 이명헌의 손에 초록색 아이스크림 껍데기 뿐이었는데.

그 후로 한 삼일간 정우성은 이명헌 눈을 똑바로 못 봤음. 다른 주전들과 하하 웃다가도 이명헌과 눈을 마주치면 굳어버리고 말았음. 이명헌과 단 둘이 있었다가 형 저 좋아하냐고 물어볼까봐 절대 둘이 있을 상황도 안 만들었어. 아, 맨날 보던 몸인데 의식하고 나니까 샤워실에서의 순간에 얼마나 남사스러운지. 정우성은 온갖 핑계를 대며 이명헌의 샤워가 끝난 후에야 샤워실에 들어갔어. 정우성. 하고 불러세우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척 걸음을 빨리하며. 마침 그 즈음 원정에서 분실됐던 아이스박스가 새로 배송와서, 모두의 음료가 얼음과 함께 차갑게 유지됐지. 정우성만 시원한 음료를 받는 일은 없어졌음.

이렇게 계속 지낼 수는 없어. 정우성도 알아… 주전 에이스가 주장을 피할 수 있을리가 있나. 근데도 가까워지면 이상하게 배가 당기고 긴장되서 어색하게 행동하는거야. 포메이션을 설명하려고 이명헌이 옆에서 차트를 보여줄 때 팔이 닿으면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거나. 대화 중에 발끝만 보며 시선을 피하거나. 이명헌이 정우성을 호출하는 것도 예정된 일이었음. 그마저도 이명헌이 직접 전할 수가 없어서 신현철을 통해 정했지만.
훈련 시간 잠깐 체육관 뒤로 불려나온 정우성은 온갖 생각을 다했음. 고백인가 아니면 맞으려나. 이명헌은 정우성 앞에 서더니 허리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푹 쉬며 말해. 농구하기 싫냐? 뿅?
아, 아니요! 정우성이 바짝 놀라 대답했음. 그럼 산왕에서 농구하기 싫냐? 뿅? 이명헌이 시선을 올려 정우성을 바라봤음. 아주 오랜만에 마주친 눈은 존나 정우성을 찔러 죽일 듯이 열받아 있어서 자세에 힘이 바짝 들어갔음. 아닙니다.
근데 왜, 그런 놈처럼 굴지뿅? 니가 무슨 이유로 날 피하는 지 모르겠는데. 너 하나의 변덕때문에 산왕이 주장을 잃을 순 없다뿅. 대체되는 건 너다뿅. 정신차리고 임해.

뿅. 서슬퍼런 질책에 정우성이 넵. 짧게 대답했음. 그리고 이명헌은 그대로 체육관으로 들어감. 정우성도 잠깐 후에 그 뒤를 따랐음. 날 좋아할 리가 없지.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최근 심하게 긴장해서 잠도 잘 못 잔 것 때문에, 확 풀린 반동으로 정우성이 훈련 중에 잠깐 쓰러지기 전까지. 대단한 것도 아니었음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서 체육관 바닥에 살짝 뒹굴었음. 매니저가 달려오기도 전에 이명헌이 정우성을 부축하며 말을 붙였어. 괜찮냐뿅? 하는 말에 정우성이 고개를 돌리는데.
그 순간 마주친 이명헌의 눈이, 정말… 어떤 멍청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동요해서. 그 눈에 사랑과 걱정이 가득해서. 정우성 그대로 눈 감아버림.

몸에는 별 이상 없었음. 당연함. 쓰러진 이유를 정우성을 아는 걸. 감독에겐 너무 더워서 그런 것 같다고 능청스럽게 웃었음. 그리고 저녁 훈련은 다시 복귀했어. 현철을 비롯한 선배들이 괜찮냐고 어깨를 두드려줬지. 이명헌은 그러지 않고 멀찍이 서서 있었어. 언제나 그랬듯이, 정우성을 바라보며.

정우성이 천천히 발을 옮겨. 이건 분명하다. 분명해. 하지만 정우성은 그 마음을 받을 수도 없었고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없어. 애초에 이명헌은 고백도 안 했는데. 이명헌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감. 그리고 방긋 웃으면서 말함.

“형, 아까 부축해줘서 고마워요. 근데 형 하나도 안놀라더라? 부처인 줄 알았잖아요!”

그럼 어쩌겠어. 모른 척 해야지.



적어도 이명헌이 고백하기 전까진 유지될 터였음. 그 동안 정우성은 몇 번이고 거절의 순간을 연습함. 형, 전 형이랑 지내는 건 좋지만 그런 감정은 아니에요. 형, 죄송해요. 전 여자가 좋아요. 형, 전 형 안좋아해요.
상상의 시간에서 이명헌은 울었나, 화냈나, 창피해했나? 다양했음. 하지만 정우성이 그 결과를 확인하는 일은 없었음. 정우성이 미국으로 떠나는 순간까지 이명헌은 고백하지 않았으니까.
언제 고백 공격을 받을까 노심초사하던 시간이 무색하게, 이명헌은 정우성에게 어떤 호감 표시도 드러내지 않았음. 물론 행동으로는 수백 번을 그랬는데, 안달난 정우성이 장난스럽게 ‘아 진짜, 형 나 좋아해요?’ 하고 떠볼 때도 잠깐 응시하곤 제 갈길 갔지. 그럼 현철이 ‘이 도끼병.’ 이라며 서울구경을 선사했음.

그리고 미국으로 향하는 12시간짜리 비행에서 정우성은 자기가 내내 이명헌 생각만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음.

하루 뒤에도, 일주일 뒤에도, 한 달 뒤에도. 자기보다 조금 작아서 턱 아래가 잘 안 보이는 동그란 얼굴. 두터운 눈썹 밑에 맹한 눈. 하지만 또렷한 눈동자. 단단하고 옹골찬 몸. 다친 부위를 부드럽게 쓸고 지나가는 따뜻한 손.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정우성을 향해 달려오는 패스, 사랑.

한 일 년 뒤에도. 미국 생활에 적응해서 이젠 파이브가이즈에서 감자튀김을 적게 주면 인종차별이라고 따질 수 있을 정도가 된 정우성은 여전히 가끔 이명헌을 떠올렸음. 형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왜 고백하지 않았을까? 날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을까? 그러다가 신현철에게서 대학 리그에서 이명헌이 MVP를 받아서 한 턱 쏜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하는거야.

나 형이 보고 싶구나.





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