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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8 19:34
1.
처음엔 내가 대만 군을 떠난 줄 알았다. 대만 군과 연애한지 10년째. 이제 이 사람과 함께 있는 모든 것이 평범하게 느껴져서. 아침에 일어나 같이 아침밥을 먹고, 서로 배웅해주고,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한 침대에서 자는 일상이 지루하다고 생각한건 언제부터였지?

대만 군도 변한 것이 없다. 일이 끝나면 데려와달라 투정부리고, 유치한 장난도 치고, 말도 많고, 여전히 다른 남자들에게 인기 많고. 대만 군이 변하질 않아서 내가 달라졌나보다.


2.
아침에 같이 밥을 먹으며 당신이 하는 얘기를 듣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어쩜 그리 매일 다른 일들이 생기는지 쉬지않고 재잘대던 모습이 예뻐보였는데. 그 날은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만 군, 우리 조용히 하고 밥만 먹어요. 조금 시끄러워."

"어? 어어 그래 미안. 내가 너무 떠들었나보다. 밥 먹어."

당황해하는 당신을 보며 나도 머쓱해져서 괜히 티비를 틀었다. 반찬이 맛있다는 당신의 말에도 다행이네요 라고 대답했을 뿐. 처음에는 미안하고 불편했는데 조용히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아침식사가 나쁘지 않아서 그 상태를 유지했다. 그렇게 대만 군은 아침식사 때 말을 하는 일이 없어졌다. 당신은 어떤 표정으로 밥을 먹었을까.


3.
대만 군은 집에 뭘 두고가는 일이 잦았다. 덤벙거리는 사람이라 2주에 한 번은 꼭 나에게 전화를 걸어 호들갑을 떨며 잊고간 물건을 가져와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당신이 귀여워 어쩔 수 없네요 하고 가져다주었고. 멀리서부터 나를 발견한 당신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와 나를 꽉 끌어안고 나밖에 없다며 사랑한다며 입을 맞추고 사라졌다. 그게 참 기분 좋았었는데.

언젠가부터 그것도 귀찮아졌다. 왜 항상 두고갈까. 나도 내 할 일이 있는데. 나를 심부름꾼으로 써먹는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는 스스로 뺨을 쳤다. 대만 군이 그럴 리 없는데. 하지만 한 번 뿌리 잡은 생각은 걷잡을 수 없었고 결국 나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당신에게 가지 않았다. 대만 군은 그 뒤로 물건을 놓고가는 일이 없어졌다.


4.
대만 군의 또 다른 나쁜 버릇은 싸우면 집을 나간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마음에 안들면 그 자리를 떠나버리는건 고등학교 때부터 있던 버릇인가. 우리가 싸우면, 대만 군이 집을 나가고, 내가 뒤쫓아가고, 결국 내가 사과하면 당신이 따라 사과해서 같이 집에 돌아왔었다.

근데 이번에는 당신이 잘못했잖아. 그래, 비가 오는데 데리러가지 않은 건 사실이야. 그럼 택시를 타든 우산을 사든 했어야지. 왜 비에 쫄딱 젖은 새앙쥐 꼴로 와서 나를 괴롭혀? 그 일로 싸우다가 대만 군이 또 집을 나갔다. 이번에는 찾으러가지 않으리라 마음 먹고 소파에 앉았다. 그렇게 대만 군은 두 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까지 버티나 두고보자고 생각했던 나는 설마 사고라도 났나싶어 급하게 나가 온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렇게 발견한 건 낯선 남자가 당신을 부축하는 모습. 머리에 열이 올라 아무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당신을 뺏어와 집으로 돌아왔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냐고 따져도 대답도 않는 당신의 모습에 화가 나서, 당신을 거칠게 안았다. 싫다고 소리치고 반항하는 당신을 엎어두고 개처럼 박았다. 그만해달라며 엉엉 우는 소리도 듣기 싫어 당신 입을 막고 밤새 빗소리만 들리는 거실에서 그렇게 했다.

열이 펄펄 끓는 당신을 재우고 당신 동료한테 온 연락을 받고야 알았다. 갑작스레 쏟아져내린 비라 택시도 안잡히고 편의점에 하나 남은 우산은 동료에게 줬다고. 비를 몇시간 동안 맞은 당신은 열이 올랐고 비틀거리는걸 지나가던 행인이 부축해줬을 뿐이겠지.

내가 대만 군을 간호하는 동안, 아니 그 이후로도, 대만군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5.
나와 눈을 맞추지도, 입을 열지도 않는 대만 군에 화가 났다. 처음에는 속상해서 어떻게든 달래보려 했다. 그러나 나를 두렵다는 듯 쳐다보는 당신에 속이 끓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마주한 당신이 꺼낸 말은 헤어지자는 말이었다. 살이 조금 빠져있는 얼굴로 이제 그만하자고 말했다. 이상하다. 나는 멍청해서 이때야 깨달았다. 지겨웠던게 아니야. 싫었던 건 더더욱 아니야. 그냥, 그냥 당신과의 삶이 일상이 돼서, 한번도 겪지 못한 편안함이라서 내가 몰랐던거야.

뒤늦게 당신 옷자락붙잡고 울며 매달렸지만 당신은 가버렸지.



그리고 내 곁을 영영 떠났어.



음주운전하던 트럭에 치여서.




무슨 정신으로 당신 장례식에서 자리를 지켰는지 모르겠어. 화도 내고, 울고, 탈수로 응급실 갔다가, 또 울고. 집에 돌아와 당신 짐을 정리하다가 또 울었어. 이렇게 보낼 수 없는데. 어떻게 나한테 기회도 주지않고 떠나버릴 수 있어요. 당신도 농구 한 번 놨다가 다시 잡았잖아요. 나한테도 기회 한 번은 줄 수 있잖아요. 어떻게 그래 사람이. ....이번엔 내가 찾아갈게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사랑해요, 대만 군.











(철컥)
"다녀왔어요 대만 군~"
"흐어어어어어엉 호여라아아아아 흐어엉엉엉"
"대만 군?! 무슨 일이에요?"
"이거어어 흐어어어어엉 쿨쩍"
"아잇 그건 또 어떻게 찾았어요. 대만 군 이럴까봐 숨긴건데. 진정해봐요. 뚝 하고"
"이거 므야아아앙ㅠㅠㅠㅠㅠ"
"붕붕이가 회지 초고 쓴 거 훔쳐봤는데 대만 군 이렇게 울까봐 회지내기전에 강탈해왔어요. 버리기 전에 숨겨둔건데 이걸 또 찾았네. 하여튼 못말려요."
"흐잉ㅠㅠㅜ혹시 나 우는 거 지겨워?ㅠㅠㅠㅠ"
"그럴 일 절대 없어요. 몇년이 지나도, 대만 군이 뭘해도 내가 당신 그렇게 생각할 일 없어. 알아들어요?"
"웅...ㅠㅠㅠㅜ"
"알았으면 세수하고와요ㅋㅋ얼굴 엉망이야"
"쿨쩍...응...근데 이거 글씨체 너랑 되게 비슷하다"
"요즘 회지 쓰려면 그래야하나봐요"
"힘들겠네..."






"....죽어도 그럴 일 없어요. 다시는."








대만이 죽고 자기도 따라 죽으려다 권태기 전으로 회귀한 양호열. 저 회지라는 것도 실제로 호열이가 죽기 전 썼던 일기임. 버릴까하다가 혹시몰라 숨겨둔건데 대만이가 봐버려서 찐으로 버리겠지. 어차피 다시 안 할 후회라서

호열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