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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8 15:07
https://hygall.com/550546545 이거 어나더




누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 한편에는 몇백 종의 공룡 이름을 달달 외우던 열정이 끼어 있지 않는가? 도대체 몇만 년 전 멸종한 도마뱀이 뭐가 좋다고 정신없이 빠져들었을까. 잘 배우신 양반들의 견해에 따르면, 유소년기의 취미는 취향보다 본능의 영역과 더 관계가 깊다고 한다. 작고 약한 어린아이들은 본능적으로 크고 강한 존재를 동경하기 때문에 지구상 가장 거대했던 육상동물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후카츠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어린 후카츠의 관심사는 공룡이 아니라 철도에 있었다. 일본 전역을 관통하는 철길을 따라 힘차게 내달리는 기차들.

그때부터 어디든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들을 동경했다.


지도와 노선도만 있으면 방구석에서도 일본의 방방곡곡을 다 갈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철길을 따라가며 작은 여행을 떠난다. 때로는 이바라키현으로, 때로는 사이타마현으로, 때로는 오사카까지... 목적지는 매번 바뀌지만, 여행의 시작과 끝은 항상 같았다.
아키타역. 세계에서도 굴지의 이용객 수를 자랑하는 신주쿠역 등에 비하면 한적한 역이지만, 아키타현 내에서는 가장 크고 붐비는 역이고, 후카츠의 "진짜" 여행에 관한 모든 추억을 실어 날라준 역이다. 전국대회 등으로 원정을 갈 때도 항상 이곳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대회의 승패가 어찌 되든 항상 이곳으로 돌아온다. 아키타 역사에서 맞는 고향의 풍경이며 공기, 적당한 소란스러움은 눈 감고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다.

언젠가 아키타를 떠나 살게 되더라도 그 풍경은 영원히 선명할 것만 같다.
평생 그리울 고향 아키타. 후카츠 카즈나리의 근간. 풍요로운 논밭과 굳센 마타기*들의 땅. 언제 어디로 여행을 떠나든 후카츠의 마음 속에는 아키타가 있다. 그리고 결국은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오리라. 그의 고향에선 겨울마다 폭설로 기차가 끊기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 그런 척박함마저 불평 대신 낭만으로 추억할 수 있기 때문에 고향이라 불리는 땅.
*일본 동북부 산간지대에서 독자적인 수렵 문화를 발전시킨 사냥꾼들. 아키타현 유형민속문화재.

짝사랑을 시작하고 첫 번째로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사와키타에게는 그런 고향이 없다는 점이다.




사와키타는 도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온갖 도로며 철도가 빽빽하게 모여드는 대도시에 손가락을 올린다.
그러나 초등학교 입학 전에 부모님의 고향인 효고현으로 이사. 아들을 위한 농구 코트가 딸린 주택으로. 오사카 아래까지 손가락이 죽 내려간다.
중학교까지 효고에서 나왔으나, 고등학교는 기차로 편도만 8시간 거리인 아키타로 진학. 손가락이 한참 북쪽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익숙한 이름 위에서 멈춘다.
아키타역. 사와키타와 후카츠의 유일한 교차점.

사와키타는 본가가 워낙 멀어서 방학에도 기숙사에 남곤 했다. 애초 농구부의 방학은 전국대회가 끝나고 2주가 채 안 되는 기간이 전부. 그중 하루를 기차에서 통째로 버리라니 비효율적이긴 하다.
그래도 부모님을 일 년에 한 번이나 겨우 보는 셈인데, 그립지 않느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었다. 사와키타의 답변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렇긴 한데, 방학에 쉬어봤자 뭐해요. 어차피 계속 연습할 거면 학교 체육관이 시설도 훨씬 좋잖아요."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기억나는 거다. 어딘가에 진정으로 그리움을 품어 본 사람의 말투가 아니라서.
사와키타에게는 눈꺼풀 아래에 문신한 듯 선명히 떠오르는 풍경이 없다. 도쿄도, 효고도, 심지어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부모조차도 그 풍경에 들어가지 못한다. 사와키타는 눈을 감고 추억에 잠기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라서 그렇다. 모든 순간 눈을 똑바로 뜨고 앞만 보며 달려나간다.
그 맹렬한 질주가 닿지 못할 목적지는 없으리라. 그게 미국이 됐든, 어디가 됐든.

2학년 겨울의 미국 원정.
그곳에서 후카츠는 사와키타의 눈을 똑똑히 목격했다. 아키타에서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주체할 수 없는 흥분과 환희로 반짝이는 눈. 아직 유학에 관한 무엇도 결정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후카츠는 순간 직감했다.
사와키타는 머지않아 이 정류장을 떠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와키타는 그런 인간이다. 어디든 거침없이 나아가는...


미성년의 마지막 해, 사랑을 시작한 이유와 정확히 같은 이유로 사랑이 끝난다.






후카츠는 애초 이 마음을 어디에도 발설할 계획이 없었다. 세월이 지나 정말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때 가서나 농담거리로 삼을까. 그러나 떠나는 기차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납득하기에 열여덟은 아직 좀 어리다는 걸 핑계 삼기로 했다.


"쭉 사와키타 군을 좋아했습니다."


이 말이 그를 막을 수는 없다. 그와 동행할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나와 함께 머무르지 않을 거라면 내 마음을 태우고 가라. 내 마음에는 언제나 이곳 아키타가 있다.
사와키타는 상냥한 녀석이니까. 아키타로 돌아와야만 하는 내 마음을 고향에 내려주기 위해 다시 이곳으로 올 것이다.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돌아와서 들려주는 대답이 거절이든, 수락이든 하나도 중요치 않다. 아니, 중요치 않아지기 위한 노력 쯤이야 기꺼이 할 수 있다.

그냥 언젠가 한 번이라도 이곳으로 돌아와.
한 번이라도 좋으니 얼굴이나 다시 보자.




클락션 소리에 쫓기듯 걸음이 빨라진다. 체육관 문을 지키고 서 있던 매니저가 놀란 표정으로 괜찮냐며 묻는다. 그제야 울고 있었던 줄을 깨닫는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