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연갤 - 애니
- 애니
약속했던 각설탕은 어디로 갔는지. 대협은 아리고 쓴맛이 남아 있는 입안에 인상을 구겼음. 안경 고양이는 먼저 앞장서서 길을 가고 있었고, 그를 들처업고 그 뒤를 따라 걷는 고양이들은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음. 대협은 그들이 하는 대화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는데, 대체 자신들이 왜 이렇게까지 수고를 해야 하는가 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음. 이렇게까지 인간을 데려가서 뭐한대? 뻔하지, 결혼하려고 하는 거잖아…
윤대협은 그 소리에 눈을 크게 떴음? 결혼? 내가? 얼굴 한번 본 것이 고작인 고양이랑? 뭐라고 항의를 하려는 순간, 앞장서서 걸어가던 안경 고양이가 말함.
"자, 여기서부터가 고양이 왕국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엄청나게 밝은 햇빛이 하늘을 보는 자세로 들린 대협의 눈을 찔렀음. 대협은 그 강한 빛에 눈을 깜빡이다가 간신히 다시 초점을 맞추고 주변을 둘러봤음. 녹색 잔디밭은 바람을 따라 흔들리며 파도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고, 좀 멀리 떨어진 곳에는 호수가 있는지 햇살이 물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며 빛났음. 예쁜 풍경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대협은 자신의 주변의 고양이들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람.
분명 집앞에서 봤을 때만 하더라도 진짜 고양이였는데, 고양이 왕국에 들어서면서는 그 모양이 많이 사람과 닮게 바뀌어 있었음. 솔직히 귀와 꼬리가 아니라면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였지. 대협이 놀란 걸 알았는지 안경을 쓴 고양이가 설명함. 아무래도 인간들과 같이 한 역사가 길다보니까 자기들의 모습에도 어느정도 반영이 될 수밖에 없다고. 그래도 여전히 저희는 자랑스러운 고양이랍니다, 하고 마무리를 지은 고양이가 계속해서 길을 안내해 나갔음.
윤대협을 납치해서 고양이 왕국으로 데려온 고양이들은 곧장 왕궁으로 향했음. 왕궁의 문 앞에는 꽤 덩치가 큰 고양이 한마리가 서 있었음. 그는 묶여 있는 윤대협을 보고 잠시 어이가 없어진 것 같았음.
"이 자식들아, 누가 은인을 이렇게 묶어와!?"
"안 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어떡해!"
빨간 머리 고양이가 같이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머리를 한대 쥐어박힘. 잠시간의 소란 끝에 윤대협은 간신히 땅에 내려졌지만 묶인 리본은 여전히 그대로였음. 그가 리본을 이리저리 당겨보고 있는 사이, 덩치가 큰 고양이-채치수는 윤대협을 보고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함.
"애들이 거칠어서 미안하게 됐군."
"…아, 뭐…괜찮아요. 이거나 좀 풀어주면-"
"그나저나 태웅이는?"
"아마 방에 있을 걸."
대체 여기의 위계질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윤대협은 이젠 왕자님이라고 부를 생각도 하지 않는 고양이들을 보며 이해하기를 포기했음.
고양이들의 왕궁은 전통 동양식의 건물이었는데 담 안의 길이 복잡하게 엮여 있어서 마치 그 자체가 하나의 미로 같았음. 대협이 어질어질한 정신으로 길을 기억해보려고 하다 이런 곳을 대체 어떻게 다니는거지, 하고 작게 투덜거리니까 옆에서 안경고양이-권준호-가 작게 웃었음. 그야, 웬만해서는 다들 담 위로 다니니까요. 대협은 잠시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걷다가 생각함. 그거 반칙 아냐?
이리저리 방향을 틀고 돌아 왕자가 머문다는 동궁에 도착했을 때 준호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면서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동궁 마당에 홀로 남은 대협은 차분하게 계획을 세웠음. 일단 얼굴을 보여줬으니 자신이 고양이와 결혼할 수 없는 사정을 설명하고 다시 돌려보내 달라고 해야겠다. 아무리 고양이라도 잘 설명하면 이해하겠지. 안되면 도망가고.
일단 어떻게 설명을 하면 좋을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안에 들어갔던 준호가 조금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옴. 그러고는 대협이랑 다른 고양이들을 보며 말했음.
"얘들아, 태웅…아니 왕자님 안 게신다."
지금 장난해? 아니 지가 보고 싶다고 해놓고! 날카롭게 야옹거리며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음. 어딜 간다고 쪽지 하나도 없이 그냥 자리를 비웠다는데, 이건 윤대협도 황당할 지경임. 아무튼 북산 고양이들이 사납게 항의하는 사이에 대협을 묶고 있던 리본의 끝이 살짝 풀렸음. 어라. 윤대협은 몸에 느껴지던 압박이 조금 느슨해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비틀어봄. 슬슬 풀어지는 구속을 벗어낸 대협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그 자리를 벗어났음. 담으로 다니면 쉽다고 했겠다. 대협은 준호의 말을 떠올리며 담 위로 폴짝 올라감. 담은 폭이 좁았지만 고양이의 운동신경으로는 딱히 어렵지 않게 이동할 수 있었음.
북산 고양이들이 대협이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대협은 이미 궁을 벗어나서 마을의 거리를 달리고 있었음. 궁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고 난 후에야 간신히 숨을 돌리던 윤대협은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음.
…나가는 길을 몰라.
고양이 신준섭의 일과는 항상 같았음.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 한잔을 마시고, 사무실 밖에 묶어뒀던 자전거를 타고 시장으로 향함. 시장에서 신선한 과일과 치즈 조각, 그리고 갓 구운 빵을 사서 자전거 바구니에 넣고, 마지막으로는 차로 끓일 향긋한 개다래나무잎한 장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음. 그렇게 장을 보고 돌아오면 같은 해결사 사무실의 고양이들도 슬슬 일어나 있었음.
아침을 준비하는 건 항상 준섭의 몫이었음. 그는 주전자에 개다래나무잎을 조금 잘라 넣고 물을 올려둔 뒤에 장 봐온 것들로 아침을 차렸음. 살짝 구운 빵에 꿀을 잔뜩 올리고 과일 몇가지와 치즈를 준비한 뒤 그 사이 끓은 찻주전자를 가져다 놓음.
"오늘도 부지런하네."
"이제는 몸에 익어서요."
정환은 들고 있던 신문을 접고 식탁에 앉았음. 그는 아침을 든든히 먹는 편이라 접시에 골고루 가득 채웠음. 반면에 호장은 따뜻한 차에 꿀만 좀 섞어서 홀짝거리다가 준섭이 덜어준 과일을 깨작거림.
"익현이한테서는 연락이 없나?"
"요즘은 의뢰가 잘 안 들어오나 봐요."
홍익현과 고민구는 해결사 사무소의 또 다른 직원으로, 인간들 세계에서 생기는 의뢰를 받아오는 일을 하고 있었음. 그러다보니 그들은 사무실이 아니라 인간 세계에 주로 살고 있었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면 정환은 코트를 입고 밖으로 나갔음. 많은 경우는 의뢰에 대한 정보 수집을 위한 거였는데, 그럴 때는 조수인 호장을 데리고 갔기 때문에 사무실에는 준섭 혼자 남아 있었음. 그럴 때면 준섭은 베란다에 앉아 나른한 햇살을 즐기며 자기만의 작은 티타임을 가졌음.
그날도 역시 간단한 디저트 몇가지를 옆에 놓고 긴 썬탠용 의자에 느긋하게 늘어져 있었는데, 베란다 아래 골목을 누군가가 빠르게 달려가는 것이 보였음. 어, 그 쪽은 막다른 길인데.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에 다시 달려온 고양이가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봄. 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벽에 기대어 있는 쓰레기통을 밟고 위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준섭이 있는 베란다로 들어왔음.
"이봐요-"
"저, 진짜 잠시만요."
어쩐지 간절해보이는 것에 준섭은 잠시 두기로 함. 어쩐지 흥미도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골목 밖에서 들려옴. 야, 어디 갔는지 봤어? 저쪽으로 간 것 같아. 골목들마다 한번씩 들여다 봐! 그러고는 또 우르르 몰려가는지 목소리들이 멀어짐. 이 어딘가 지성이 살짝 부족한 듯한 목소리는… 백호 군단인가. 준섭은 흥미롭게 베란다 밖으로 고개를 빼서 구경함. 그러다가 골목 입구 쪽에 서 있던 양호열과 눈이 마주침. 이크. 준섭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자 호열은 그냥 흘겨보고는 고개를 돌림. 이 골목은 없어. 그러고는 어슬렁어슬렁 가버림.
"갔어요."
호열이 간 것을 확인한 준섭의 말에 난간 뒤에 숨어있던 고양이가 몸의 긴장을 풀며 한숨을 내쉬었음.
"아아, 고마워요. 완전 생명의 은인이야."
"무슨 일로 쫓기고 있는 거죠?"
"그게 말이지…"
윤대협은 자신도 아직 다 받아들이지 못한 정보를 어색하게 설명함. 자신이 전날에 도와준 고양이가 알고보니 고양이 왕국의 왕자라는 거, 그래서 다른 고양이들에게 여기까지 납치를 당했고, 결혼이라는 소리를 듣고 탈출을 감행했는데, 어디로 가야하는지 몰라서 헤매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다. 그렇게 설명하는 대협의 얘기를 듣는 준섭의 귀는 계속 쫑긋거렸음. 이거 의뢰다. 완전히 의뢰감이지. 이런 건 역시 정환이 형이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일이지. 대협의 설명이 끝나고 판단을 마친 준섭이 상냥한 비즈니스의 미소를 장착한 얼굴로 대협을 마주봤음.
"정말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신 거 같은데, 일단 안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 하시죠."
정환대협 태웅대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