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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3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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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못ㅈㅇ





나 그냥 형이랑 혼인할래요.


명헌은 목검을 주워들던 손을 멈추었음. 굽혔던 허리를 일으켜 다시 마주한 얼굴은 방금 제가 무슨 말을 한 줄이나 아는지 모르는 지 그저 웃고만 있었지. 나이가 차며 성년을 앞둔 우성에게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혼담이 슬슬 오가고 있다는 것은 명헌도 잘 아는 것이었음. 우성의 아버지도 우성에게 조금씩 언질을 주는 모양이었지. 그럴때마다 우성은 명헌에게 와 불퉁하게 투덜거렸으므로 명헌이 모를 수가 없었음. 사실 우성의 결혼은 명헌에게 별 감흥이 없었음. 가문 좋고 인물 빠지지 않는 도련님은 결혼시장의 거물이었음. 이들의 혼인은 가문과 가문간의 결연이었으므로 당연한 것이었고... 우성이 누구와 결혼을 하든 제 입장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서 명헌은 저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


근데 그게 이런식으로 튄다고? 명헌은 느닷없이 저를 끼워넣은 우성의 사고방식에 잠시 멍해졌음. 어째서 생각이 그렇게 흐른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음. 스치는 농인 줄 알면서 명헌은 속 깊숙히 어딘가가 불편했지. 빤히 쳐다보는 얼굴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우성이 제 머리를 긁더니 말을 붙였음.


그렇잖아요. 어차피 해야 할 거라면 모르는 사람보다는 형이랑 하는 게 좋지. 나도 형 좋구요.


형은 계속 내 옆에 있을 거니까. 명헌은 여전히 우성의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할지 감도 오지 않았음. 계속 내 옆에 있을 거니까. 그게 무슨 의미인지나 알까. 애초에 가문의 무게 차이만으로도 어불성설이었지만 그걸 떠나 명헌은 결혼이라는 기제 없이도 우성의 사람이었음. 벗어나면 반역이고 배신이니 당연한 것이었지. 달리 말하자면 이 집안에게 명헌은 굳이 결혼이라는 수를 쓸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임. 그걸 모르지도 않을거면서 자기 싫은 거 피하자고 저를 끌어들이는 우성에 명헌은 퍽 웃었음. 지나치게 악의가 없는 말은 때론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뱉는 말보다도 예리하게 박히는 것이었음.


내가 네 옆에 있는 건 부부로서 있는 것과는 다르지, 뿅.


거르고 걸러 뱉는 말이 고작 그것 뿐이라서, 명헌은 우성의 시선에서 얼굴을 돌리며 입술을 감쳐물었음. 그러자 우성의 말이 곧장 명헌의 뒤통수에 와 꽂혔지. 뭐가 달라요 똑같죠, 뭐. 한참만에 골라서 뱉어낸 명헌의 말을 너무나도 빨리 부정하는 말이었음. 명헌은 짧게 한숨을 뱉으며 몸을 돌려 우성을 다시 쳐다보았음. 그리고 얼굴에 흐른 땀을 닦으며 손 아래 표정을 감추고는 무겁지 않게 목소리를 띄우며 말했음.


에이지, 농담 하지 마.


그리고 쳐다본 우성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조금 걷혀 있었음. 말을 알아듣기나 한 건가.... 명헌은 무엇인가 더 하려던 말을 삼켰음. 방금 전 우성과의 대련으로 체력이 꽤 소진되었으므로 더 긁어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 덥다. 들어가자. 돌아서는 명헌의 뒤로 빠르게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음. 금방 뒤따라온 우성이 아 형 농담 아닌데- 하며 말을 붙여왔으나 솔직한 마음으로 명헌은 지금 우성에게 적당히 대꾸해 줄 여력이 없었음.


*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우성의 혼인 타령은 어찌된 일인지 그 한번으로 끝나지를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이었음. 그게 영주님 앞에서까지 그럴 줄 명헌이는 정말로, 정말로 몰랐지. 알았다면 미리 저 애 입을 좀 꿰매어 뒀을텐데. 하필 우성이 제 아버지의 부름을 받을 때 옆에 있었던 것이 문제였음. 당연하다는 듯 명헌을 이끌고 아버지를 찾은 우성에 명헌은 그 곁에 앉아있게 된 것이었지.


이런저런 부자간의 담화 끝에 우성의 아버지는 슬쩍 지나는 말인 듯 이번에 어디 집안 자제가 그렇게 곱다더라 하는 말을 흘렸고 우성은 늘 그렇듯 대놓고 투덜거렸음. 나 혼인 안 해요. 여기까진 흔한 투정이라 그러려니 했음. 어떻게 모르는 사람이랑 평생을 살아요? 뭐 여기까지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온 말이었으므로 그러려니 했음. 그래도 아버지가 저 혼인 시켜야 속이 후련하겠다면, 이쯤에서도 명헌은 아, 덥다 하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나는 카즈 상이랑 할래요. 이 말에 명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우성을 쳐다보고 말았지. 우성과 눈이 마주쳤고, 뒤이어 저를 쳐다보는 우성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명헌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음. 숙인 고개 아래에서 명헌은 표정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음. 방금까지 덥게 느껴졌던 손끝의 체온이 차게 식은 것만 같았지. 명헌이 제 손끝을 말아쥘 때쯤, 상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음.


글쎄. 그건 카즈 생각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명헌은 저에게 발언권이 넘어오지 않기를 바랐으나... 어떠냐, 카즈. 하며 물어오는 말에 숨을 삼켰음. 명헌은 고개를 조금 더 낮추며 드러내는 기색 없이 답했지.


도련님의 농이실 뿐입니다.


명헌은 제게 주어진 분에서 넘쳐날 생각은 조금도 없었음. 그래? 나는 괜찮다만. 아쉽구나. 웃음소리 섞인 영주의 인사치레가 따라붙었고 명헌은 입 안쪽 살을 꾹 깨물었음.


*


형, 형. 잠시만요.


우성이 명헌의 팔을 잡아 세웠음. 아버지의 방을 나서서 돌아오는 길에 명헌은 우성을 단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음. 우성은 저를 처소까지 데려다 넣어놓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보인 뒤 그대로 돌아 나가려는 명헌을 붙잡았고... 평소에도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더욱 굳어 있었지. 글쎄 어쩌면 그게 하나의 표정일지도 모를 일이었음. 분노에 기반한. 명헌은 지금 당장은 우성의 얼굴을 보고싶지 않았지. 그러나 저를 잡아오는 우성의 팔을 뿌리칠 수는 없어 그대로 돌아 우성을 마주보았음. 말씀하십시오. 높낮이 없이 뱉어지는 말에 우성이 표정을 무너뜨렸음.


....화났어요?


명헌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우성을 마주본 그대로 서 있었음. 화가 났지. 화가 났는데. 이걸 어떻게 말로 뱉어야 할지 모르겠는거. 평소 우성에게 느끼는 감정들은 그냥 흐르는 대로 넘겨왔었음. 제 역할은 이 애를 훈육하는 게 아니라 지키는 것이었으니까. 근데 지금은 평소와 달리 갈무리한다고 했어도 끓는 속이 다 감춰지지가 않았지. 자기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만큼 어리지도 않고, 제 말의 무게를 모를 나이도 아니면서 면피용 농담에 가볍게 저를 끌어들이는 것이 명헌은 도대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음.


형, 나는.. 무엇인가 더 이어지려는 우성의 말을 명헌이 막았음. 에이지. 명헌은 말에 감정을 섞지 않으려 고르고 또 골랐음. 우성은 그런 명헌을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았고, 마침내 명헌이 입을 열었음.


농담은 둘만 있는 자리에서 끝내. 네 투정때문에 다른 사람 끌어들이지 말고.


형. 우성이 한발짝쯤 가까이 다가왔음. 명헌은 그 발걸음을 막아내듯 눈을 한번 깊게 감았다 떴음.


그런식으로 너는 니 기분 드러내고 끝이지만 상대방은 괜히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


우성은 말이 없었음. 둥그런 눈을 내리깐 채 입술을 감쳐 문 표정은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은 있는 것 같았고... 알았지, 하며 명헌이 확인하듯 덧붙이는 말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음. 그렇게 무엇인가 망설이듯 하던 우성은 고개를 들어 명헌과 눈을 마주쳐왔음. 형. 부르는 말에 명헌은 기다리듯 가만히 그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지. 그렇게 한참을 뜸을 들이던 우성이 뱉은 말은 뜻밖의 것이었음.


나 농담 아니예요.


우성이 말했고, 명헌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음.


뭐?
농담한 거 아니라구요.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 못을 박는 말이었음. 농담이 아니라니. 우성이 종종 장난을 잘 치긴 해도 예상을 벗어난 장난은 잘 치지 않았었음. 그러나 이건 지금 명헌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말이었지. 이건 또 뭔가 싶어서 눈썹께를 굳힌 채 우성을 쳐다봤지만 그 얼굴에는 장난기가 없었음. 명헌의 사고가 회로에서 이탈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성은 이어 말했음.


그렇지만 형이 곤란했다면 미안해요. 앞으로는 그런 일 없도록 할게요.


말을 마친 우성은 명헌의 앞에서 돌아섰고, 명헌은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 쳐다보고 서 있었음.


*


그날 이후 우성은 정말로 명헌과 결혼하겠다느니 하는 말은 꺼내지 않았음. 아버지가 넌지시 혼담 이야기를 꺼내도 아직은 받아들이기가 이르니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는 말을 할 뿐이었지. 일단락이 난 상황에 명헌은 우성에게 더는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음. 농담이 아니라던 우성의 발언이 조금 걸리긴 했으나... 우성의 말대로 모르는 사람과 결혼을 하느니 차라리 아는 사람과, 그것도 어차피 곁에서 저를 모셔야 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고, 명헌은 스스로를 납득시켰음. 어차피 애정 없는 결혼 아닌가. 그렇다면 아는 얼굴이 더 편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 그리고 무엇보다, 저렇게 멀리서 저를 보고 형! 하며 달려오는 것이 평소와 다름 없어서, 이쯤이면 되었다 생각한 명헌이었음.


*


우성은 돌아오는 생일에 관례를 치렀고 사와키타가에서는 모처럼 큰 연회가 열렸음. 아침에 조금 한가한 틈을 타 아버지와 함께 우성에게 축하 인사를 올린 명헌은 그러기를 잘했다 생각했음. 곧 손님들이 밀려들었기 때문이었지. 사와키타 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은 처음 봄. 차기 영주의 성년식이라 의미가 크긴 큰 모양이었음. 인파 속에서 명헌은 우성의 곁을 벗어나 있었음. 연회장의 한켠에서 이 성대한 잔치의 주인공인 우성을 지켜보았지. 이따금 우성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음.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는 우성에, 명헌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옅게 목례를 해 보일 뿐이었음.


만찬이 시작되었을 때 명헌은 자리에서 일어났음. 사와키타 가 사람들과 우성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대갓집 사람들만으로도 만찬장은 꽉 찰 것이었음. 제가 있을 자리는 아니었지. 아마도 우성은 이 만찬이 끝나면 집안 또래 사촌형제들과 술자리를 할 것이고, 큰 이변이 없다면 동정을 뗀다며 유녀와 어울릴 터였음. 오늘 명헌이 할 일은 없었음. 내내 사람들 틈에 긴장하고 있느라 진이 빠진 명헌은 배도 고프지 않았으며, 그저 처소로 돌아가 한숨이라도 자고싶다는 생각 뿐이었음.


그러나 긴장의 여파가 여태 풀리지 않은 건지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누워도 쉬이 잠이 들지 않아, 결국 명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맡에 둔 책을 끌어왔지. 어두운 밤중에 들려오는 풀벌레소리를 배경삼아 몇장이나 읽었을까, 뜻밖에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는 것이었음. 멀리서부터 다가온 발걸음소리가 명헌의 방 앞에서 멈추었고, 형, 하는 것은 우성의 목소리였지. 명헌의 답이 들려오지 않자 우성이 한번 더 불러왔음.


형, 자요?


이에 명헌은 책을 뒤집어 내려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음. 조금 급한 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열자 우성이 서 있었고.. 그는 아까 연회에서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였지. 이 시간에 우성이 찾아올 줄은 생각지 못했으므로 명헌은 잠시 우성을 멍하니 쳐다보았고, 그 와중에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옅은 술내음이 났음. 아마도 지금쯤 술자리가 한창이었을테지. 방금까지 흥청한 자리에서 사람들 틈에 있던 우성이 심심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 밤하늘을 등 뒤에 두고 서 있는게 무척 이질적이었으므로 명헌은 눈앞의 우성이 꼭 흔히 말하는 귀신이나 환상같다는 생각을 했음.


왜 처소로 가지 않고..


명헌의 말에도 우성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명헌을 쳐다보기만 했음. 길어지는 침묵에 명헌의 귓가엔 풀벌레 소리만 가득해지는 것 같았는데... 이내 입을 열어 우성이 뱉어낸 말은 멎지 않을 것 같던 고요한 소음들을 모두 삼켜버리는 것이었지.


나, 한번만 안아줘요.


갑작스런 말에 명헌은 되묻지도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음. 어린 시절 우성은 명헌의 품에 안기는것을 좋아했으므로 새삼스럽다거나 어려운 요청은 아니었음. 그러나 명헌은 느낄 수 있었지. 지금 이 애가 바라는 것이 어린 애들의 그런 몸짓이 아니라는것을. 지금 우성은 해맑게 웃으며 안겨들던 그때 어린 애가 아니라는 것을. 우성의 속내를 파악하려 명헌이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 깊은 숨을 내뱉은 우성이 한발짝, 두발짝 명헌에게 다가왔음. 그리고 마침내 두 팔이 앞에 선 명헌을 끌어당겼음. 명헌은 제 허리를 감고 어깨에 얼굴을 묻는 우성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그대로 받아들인 채였지. 숨을 들이키는 가슴께와 박동하는 맥박이 닿을만큼 두 사람 사이에는 틈이 없었고... 그러나 그것으로도 부족한 듯 우성은 명헌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았으며 고개를 묻은 채로 이내 중얼거렸지.


형, 나는, 형이...


문장은 완성되지 못했음.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몸이 풀썩 꺾였기 때문임. 바닥으로 쏟아지는 무게를 따라 앉으며 받치듯 붙들어 안은 명헌은 잠들었는지 고른 숨을 뱉는 우성을 한동안 끌어안고 있었음. 다시 고요해진 사위에 풀벌레 소리가 차올랐음. 그 소리는 미약하지만 마치 귀를 멀게 하는 것 같았지. 그것을 가만히 듣던 명헌은 긴긴 한숨을 뱉으며 생각했음. 이 애가 말을 다 끝맺지 못 해 다행이라고.










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