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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0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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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압해인데 좀 짜잘스하게 달라지는 것도 있을거라.. 그냥 큰 틀만 같다고 생각하면 될거같음




이런 산골에는 겨울을 나기 위해 숲에 가서 나무를 해야한다. 장작을 충분히 쌓아놓지 않으면 얼어죽기 십상이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충분한 양의 나무를 하기 위해 태섭 또한 형과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숲은 벌써 눈이 쌓이기 시작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나 형과는 달리 태섭은 나무열매를 담기 위한 작은 가방을 들고 숲으로 들어가는 길에도 먹을만한 열매가 보이면 따서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버지는 최근에 숲에서 곰의 습격을 받은 사람들이 있어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버지가 어깨에 맨 총을 고쳐잡느라 나는 철그럭 소리를 들으며 태섭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입김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며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다 넘어진다."

형이 태섭의 손을 잡고 세게 당겼다. 바쁘게 형을 따라가다 머리에 쓴 모자가 흐트러졌다. 형 준섭은 걸음을 멈춰 태섭의 모자를 다시 씌우고 목도리도 정돈해주었다. 찬 공기에 동생의 뺨과 코가 붉게 물들어있는 것을 보니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사춘기라고 형의 손길에 투정을 부리는 것도 귀엽기만 했다.
태섭은 요즘 나무에 도끼질을 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 이번에도 자세를 아버지가 봐주고 있었다. 평소에도 손이 야무지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던 태섭이라 자세에 대해서는 칭찬을 들었지만 역시 아버지와 형보다는 힘이 부족했다.

아버지와 형이 나무를 마저 하는 동안 태섭은 나뭇가지를 주우러 다녔다. 그러다 작은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태섭은 토끼라고 생각하고 저녁에 가족이 넉넉하게 토끼고기를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해 그 발자국을 따라갔다. 어려서부터 숲을 다녀 낯설지 않은만큼 당연히 예상대로 토끼를 보긴 했으나 선혈을 뚝뚝 흘리며 늑대의 아가리에 축 쳐져 매달려있었다. 태섭은 그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늑대와 눈을 가만히 마주치고 있었다. 이럴 때 등을 보이고 도망가면 습격을 당할 것을 알기에 늑대가 먼저 시선을 피해 제 갈길을 가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늑대는 토끼를 물고 돌아갔다. 태섭은 혹시나 늑대가 다가오면 휘두를 작정으로 쥐고 있던 나뭇가지에 손바닥이 찔려 피가 나는 것을 보았다. 늑대가 코를 씰룩이며 냄새를 맡는 것을 보았는데 아마 이 피냄새였을 것이다. 그래도 상처가 나 약한 개체라 생각하고 덤비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있는 곳에 돌아가는 길에 겨울잠을 자는 곰도 마주쳤다. 보통 겨울잠을 자는 곰은 깊이 굴을 파고 웅크리고 있던데 그 곰은 몸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보였다. 자연스레 시선이 그리로 향했는데 언뜻 눈을 슬며시 뜬 곰과 눈이 마주친 기분도 들었다. 어쩌면 겨울잠을 자지 않는 곰이라 잠시 눈만 붙이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돌아갔다.
형은 태섭의 손바닥에서 피가 나는 것을 보고 손바닥을 살펴 박혀있는 가시를 빼내고 냇가로 데려가 손을 씻겼다. 짐승들이 피냄새를 맡고 마을로 내려올 수 있으니 조심해야한다고 무명천을 꺼내 손바닥에 둘러 꽉 묶어주었다. 형의 허리춤에는 끈에 묶인 토끼 두 마리가 매달려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장작용 나무를 쌓아두고 태섭이 주워온 나뭇가지는 바로 안으로 가져가 벽난로 근처에 던져놓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손질한 토끼의 가죽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태섭은 아버지가 가죽을 손질하는 것을 보기 위해 그 뒤를 따라나섰다. 형은 어린 여동생과 놀아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러한 산골에는 무두장이의 집이 따로 없고 마을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가죽으로 옷이나 신발을 해입었다. 그래서 무두장이만큼 출중하지는 않아도 가죽을 손질하고 무두질을 할 줄 알았는데 이 마을의 어엿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아들들은 아버지들에게 무두질을 배웠다. 태섭은 손이 야무진만큼 공예에 제법 소질이 있었기에 무두질만큼은 형보다도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태섭은 아버지의 옆에서 이건 이렇게 하는 거 맞죠? 라고 계속 물어보며 손을 꼼지락대며 시늉을 했다.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큰 소리로 칭찬을 했고 토끼 가죽 하나를 태섭에게 직접 손질하도록 시켰다. 아버지는 동생인 아라의 옷을 만들기 위해 다음에 여우를 사냥해와야겠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고기를 포식하고 벽난로 앞에 모여앉아있는데 쾅쾅거리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이봐, 송 씨. 얼른 총을 챙겨. 지금 늑대 무리가 내려와서 가축을 사냥하고 있어."

아버지는 무거운 얼굴로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옷을 갖춰입고 벽 한켠에 세워놓은 총을 챙겼다. 형이 따라가겠다고 외투를 입으려고 하자 아버지가 형의 어깨를 잡고 자기대신 나머지 가족들을 지키고 있으라고 말했다. 형은 뜨개질을 하고 있는 어머니와 그 무릎을 베고 색색거리며 자고 있는 여동생, 그리고 불안하게 저를 쳐다보는 태섭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가 가축을 사냥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태섭은 어쩐지 큰 불안함을 느꼈다. 낮에 숲에서 보았던 피를 흘리는 토끼를 물고 있던 늑대, 몸을 웅크리고 있던 곰을 떠올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버지는 크게 다치지 않고 돌아왔고 늑대는 대부분 쫓아버렸다고 말했다. 다만 평소보다 많은 수의 늑대가 내려온 탓에 소와 양이 너무 많이 죽어 마을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며칠 간격으로 마을 사람들이 실종되거나 숲에서 뜯어먹힌 시체로 발견되는 일이 발생했다. 피를 완전히 빨린 시체도 있어 사람들이 흡혈귀가 나타난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아버지는 아무래도 겨울잠을 자지 않고 활동하는 곰이 있는 게 맞는 것 같다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고, 형과 태섭에게 당분간 숲으로 들어가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마침내 옆집에 사는 신 씨 아저씨가 마을 입구에 사지가 찢긴 채로 발견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어지간해서는 집 밖으로도 나가지 마라고 했다.

사람들의 불안감이 극도로 커지자 이장은 경관을 비롯해 곰을 사냥하기 위한 군인과 사냥꾼을 데려오겠다며 산을 내려갔다. 마을 남자들은 총을 들고 불침번을 서기 시작했다. 태섭과 동생 아라는 계속 밖에 나가지 못해 답답함을 느꼈다.
아버지가 불침번을 서기 위해 총을 들고 집을 나선 날, 태섭은 바깥에 널어둔 토끼 가죽이 생각나 해가 넘어가고 어스름한 때에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처음부터 자신의 손으로 손질한 가죽은 그것이 처음이었기에 가죽을 괜히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들떠있는데 문득 아무리 이런 때여도 마을이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려 몸을 돌려 쳐다보니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태섭아! 어서 숨어!"

다급하게 달려온 아버지는 태섭의 팔을 거칠게 잡고 집을 지나쳐 마을의 우물로 향했다. 태섭은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며 아버지를 계속 불렀으나 아버지는 태섭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태섭이 있는 힘껏 소리를 쥐어짜 집에 어머니와 형, 동생이 아직 있다고 외치니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듯 멈추고는 팔을 스르르 놓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의 눈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태섭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처음 보아서 너무 무서웠다. 아버지는 손에 들고 있던 사냥총을 꽉 쥐었다. 태섭에게 이대로 우물로 달려가 그 안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기라고 말하고는 다시 집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섭은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다행히 집과 가족은 아직 무사했다. 아버지는 집으로 뛰쳐들어가 아이들에게 옷을 입혔고 아버지의 몰골을 확인한 어머니도 외투를 걸치고 손도끼를 들었다. 그렇게 가족들을 데리고 나가려던 아버지가 문 너머 저 멀리서 자기를 따라온 둘째 아들이 무어라 소리치는 것을 발견하고 경악했을 때 집의 외벽이 굉음을 내며 부서졌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아버지는 집을 부순 검은 형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커다란 것이 마을을 쑥대밭을 만들고 아버지와 동시에 집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을 발견한 태섭은 아버지를 향해 돌아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들리지 않는지 오로지 집, 집을 향해 돌진하기만 했다. 그리고 거대한 그것이 집과 가족을 덮쳤을 때 태섭은 본능적인 공포에 질려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다 아버지가 낸 총성을 듣고 정신을 차려 다시 가족을 향해 달려갔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졌는데 그것은 배가 뚫려 처참하게 살해당한 마을 사람이었다. 이미 극도의 긴장과 흥분상태인 태섭은 그에 아랑곳하지않고 옆에 떨어진 총을 주워들었다.
총을 쏘는 법 또한 이미 배웠기에 태섭은 가족을 덮치려는 그것을 향해 총을 쏘았다. 검은 형체가 주춤한다. 태섭은 그대로 집으로 뛰어들어가 가족들을 불렀다. 아버지는 왜 우물에 들어가지 않았냐고 불같이 호통을 쳤다. 형체가 다시 움직이려는 조짐이 보이자 아버지는 태섭의 발 근처에 바닥이 부서진 것을 확인하고 총자루로 태섭을 밀어 바닥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몸을 날려 주변에 널부러진 것들을 끌어와 그 위를 덮어 아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자신의 체중으로 눌러 버텼다.

태섭은 마루 아래에서 바닥을 계속 주먹으로 두드리며 악을 썼다. 어머니가 형과 동생을 대피시키는 목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끔찍한 비명소리와 살점이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바닥의 틈으로 보이는 태섭의 눈 앞으로 어머니가 들고있던 손도끼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며 피가 튀었다. 형이 창틀로 동생을 넘기며 도망치라고 외치는 것이 들렸다. 태섭은 계속 주먹으로 두드리며 아버지에게 비키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총성과 저 괴이한 것의 울음소리, 그리고 숨이 끊긴 아내와 비명을 지르는 어린 자식들의 목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태섭은 엉엉 울며 가족들의 비명과 찢기는 소리를 들어야했다.

이윽고 모든 소리가 사라졌을 때 태섭은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 숨을 얕게 몰아쉬었다. 아버지가 쓰러지며 위에 덮인 것들이 살짝 걷어져 태섭의 얼굴이 약간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곰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형체가 작게, 아주 작게 웅크리더니 쑥 일어서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했다. 여전히 어두운 상태였기에 그것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눈이 마주쳤다. 뚫린 지붕으로 들어온 달빛에 서슬퍼렇게 빛나던 괴이한 눈동자와 시선이 닿았다. 그것은 여태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학살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하고 차분한 상태로 태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장이 경관과 사냥꾼을 데려온 것인지 어수선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 그것이 소리도 내지 않고 재빠르게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사람들의 비명과 총성이 들렸고 끝내는 잠잠해졌다.

태섭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켜 바닥 밑에서 올라왔다. 밤새 참극이 벌어진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태양이 찬란하게 빛을 내며 마을을 비추었다. 벽난로는 밤새 장작을 넣지 못했음에도 아직도 타닥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시뻘게진 눈으로 벽난로를 쳐다보니 형의 상반신이 난로 안에 처박혀있었다. 말 그대로 걸레짝이 된 부모님도 보였다. 태섭은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가 토를 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어젯밤의 그것에게 밟혀 몸이 으스러져 죽은 동생이 보였다. 태섭은 동생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태섭은 집 뒤쪽에 가족들을 나란히 눕혀두었다. 그들을 묻어주기 위해 삽을 들고왔지만 차마 가족의 얼굴에 흙을 뿌릴 자신이 없어 그만두었다. 아버지가 우물에 몸을 숨기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 다른 누군가 거기 숨어 살아있지는 않을까 싶어 우물로 달려가 내려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자신처럼 어딘가에 숨어 살아있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온 마을과 집을 돌아다니고 바닥을 부숴 밑을 살펴보았다. 옆에 사람의 시체가 널부러져있는데도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 떼가 미워보였다. 정말로 마을에 숨을 쉬고 있는 생명체라고는 가축들과 태섭뿐이었다.
이런 산골마을로 떠난 경관이 모두 살해당해 복귀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겨 분명 사람을 더 보낼 것이다. 군인도 보내겠지. 태섭은 그 때까지만 버티자고 마음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직 꺼지지 않은 벽난로에 나뭇가지와 장작을 던져넣었다.




태섭은 추위에 잘 썩지 않아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는 가족들의 시신에게 매일 아침 인사를 건네고 혼자서 식사를 하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었다. 집의 식량이 떨어진 후에는 다른 집에 들어가 식량을 조달했다. 어차피 이 마을에 남은 것들은 모두 태섭의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을 폐허가 된 마을에서 혼자 떨었다.
혼자 남겨진 것에 대한 외로움과 죄책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북받쳐 무릎을 끌어안아 얼굴을 묻고 우는 날도 많았다. 사람이 제대로 돌보지 않으니 가축들도 이미 제멋대로 마을을 벗어난지 오래였다. 여느 때처럼 슬픔에 잠겨 웅크리고 있는 태섭에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사람이 그리워 환청이 들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다시 들리며 태섭의 어깨를 건드렸을 때 태섭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키가 큰 남자가 태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을이 곰에게 습격당했나봐요. 살아남은 건 혼자 뿐이에요?"

다정한 목소리였다. 태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을 나그네라고 소개했는데 한동안 마을을 찾지 못해 이곳에 마을이 있는 것을 보고 바로 달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태섭의 등을 토닥이며 마을 곳곳에서 곰에게 뜯어먹힌 시신을 보고 생존자가 없는지 둘러보고 있었다고 했다.

"이 근처에 영주님의 성이 있는 걸로 알아요. 그곳으로 가서 도움을 청하거나 몸을 의탁해보죠. 이런 참혹한 일을 겪은 영지민을 그냥 두지는 않으실 거예요."

나그네는 태섭에게 자신의 여분의 외투를 입혀주고 가족을 묻는 것을 도와주었다. 태섭은 가족이 함께 묻힌 무덤 앞에서 그들이 더이상 고통없이 편히 잠들기를 기도했다.
그는 제법 능숙하게 성으로 향했는데 길을 어찌 그리 잘 아냐고 물으니 원래도 떠돌이라 이곳저곳을 많이 다녔고 이 근처도 와본 적이 있어 아는 것이라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태섭에게 건넸다. 태섭은 군말없이 그것을 받아먹었다.


성의 문지기는 나그네의 설명과 태섭의 몰골을 보고는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성 안은 어둡고 스산한 분위기가 풍겼다. 태섭은 나그네의 옷자락을 잡고 그에게 가까이 붙었다.

영주는 부드러운 듯 서늘한 인상의 사람이었다. 그는 풍채가 상당히 좋은 남자였고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나그네와 태섭을 번갈아보았다. 나그네가 사정을 설명하니 영주는 고민도 없이 흔쾌히 성에서 머무르라고 했다. 그리고 마을을 습격한 곰을 비롯한 해수구제를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성으로 오는 며칠동안 나그네를 의지하게 된 태섭을 배려해 둘의 방을 가까운 곳으로 배치해주기도 했다. 태섭은 영주가 첫인상과 달리 상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커다란 욕조에 담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기분이 좋았다. 목욕을 마친 뒤 가운을 입고 욕실을 나서려던 태섭은 세면대 위에 놓인 비누를 발견한다. 높으신 분들은 비누를 이용해 손과 몸을 씻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태섭은 홀린듯이 물기가 남은 손으로 비누를 움켜쥐었다.
손가락에 따끔한 느낌이 들어 비누를 놓쳤다. 비누가 바닥에 떨어지며 뭉개지고 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태섭의 작은 비명소리를 들은 나그네가 욕실문을 두드렸다. 태섭의 허락을 받고 욕실로 들어온 나그네는 피가 흐르는 손을 움켜쥔 태섭을 발견하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비누를 살펴보았다.

"비누 안에 면도날이 들어있네요. 간혹 하인 중에 이런 못된 짓을 하는 놈들이 있어요."

날이 바닥을 향하게 놓아두었다며 나그네가 비누를 뒤집어 보여주니 면도날이 아주 적나라하게 비누에 꽂혀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피가 묻은 비누를 그대로 세면대 위에 올려두고 태섭의 손을 살펴보았다. 태섭은 나그네가 은근히 손에 힘을 주어 피가 더 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손가락의 상처를 가만히 쳐다보던 나그네가 태섭의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집어넣었다. 화들짝 놀란 태섭이 손을 빼려 했지만 팔을 붙잡은 손과 손가락을 빠는 힘이 어지간히 세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나그네가 태섭의 겁에 질린 눈과 마주치고는 아차싶은 얼굴로 입을 벌렸다.

"미안해요. 물에 씻으면 되는데 버릇처럼 저도 모르게. 철에 베이거나 찔렸을 때는 침으로 소독한다고 하잖아요."

그는 어딘가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라 그랬다는 것이다. 태섭은 며칠 간 나그네가 보여준 인정과 다정함을 알기에 그의 말을 믿어주었다. 나그네는 친절하게도 태섭의 손을 잡아끌어 세면대에서 손을 씻겨주었다.

"참, 도와주신 분인데 제가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네요. 저는 송태섭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태섭 씨. 제 이름은 정우성이에요."
"우성 씨는 언제까지 여기 머무르실 건가요?"
"제가 마을까지 별탈없이 도착한 것은 운이 좋았던 것이니 영주님께서 해수구제를 마치실 때까지는 있으려고 해요. 저도 제 목숨이 귀한 줄은 아니까요."

피가 멎은 태섭의 손을 우성이 수건으로 부드럽게 닦아주며 웃었다. 그는 수건으로 아직 물기가 남아 마르지 않은 태섭의 머리카락도 털어주었다.

"영주님의 성이라 그런지 욕실에서도 무척 좋은 냄새가 나네요."
"그런가요?"
"네. 아주 달콤한 냄새가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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