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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었조....급전개 주의
86.
위무선과 강징은 그렇게 어리고 서툴렀던 시간을 함께했다. 자꾸 도망가는 강징을 살살 어르고 달래 끌어당겨 품에 가두는 나날의 반복. 간지러운 기념일에 유일하고 요란하게 강징을 먼저 챙기고 강징과 다른 사람들의 위무선 마음속 자리는 비교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일. 강징에 한해서 위무선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았다. 마음을 고백하는 일은 위무선이 늘 생각하던 것과 다르기는 했다. 눈치 빠르고 뭐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위무선도 사실은 어린애였으므로. 어머니는 몇 년이 지나도록 강징이 정략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뛰쳐나간 위무선을 놀리셨다. 덕분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며느리를 들이시지 않았냐고 태연하게 반문하는 위무선도 사실은 괜히 뒷목을 긁적였다. 그 말을 듣고 더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바로 옆에 있었지만. 강징은 위무선의 부모님 앞에서 유독 쑥쓰러워했다.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는지를 묻자 강징은 네 부모님이니 잘 보이고 싶다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부모님이야 고등학교 때 강징이 위무선을 깨우며 등짝 때리는 소리도 다 들으셨던 분들인데. 꼼지락거리는 머리 꼭대기를 내려다보며 위무선이 웃음을 참았다. 운전중만 아니었어도 당장 달려들었을 텐데. 강징은 아직도 어머니의 연애조작단 사건을 알지 못했다. 지금이야 웃어넘기지만 그때의 위무선에게는 멋없게 질질 짜며 고백을 쏟아낼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의지하던 누나에 이어 강징까지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 결혼 따위보다 더 절망적이었던 것은 강징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체념했다는 사실이었다. 강징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했던 그 모든 일이 소용없었나. 지금의 위무선은 싫은 일도 티내지 못할 만큼 강징이 부모의 기대와 위압에 억눌려 지쳐있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그냥 무서웠다. 눈물 짜내며 강징을 곁에 둔 위무선은 그날 밤 강징을 끌어안고 다짐했다. 강징이 아무것도 걸리는 것 없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강징을 사랑하는 일이야 위무선이 제일 잘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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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강징이 청혼했을 때 위무선의 기분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다 가졌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세상을 가지는 것보다야 강징을 가지는 게 더 좋으니까. 위무선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였다. 서로 눈만 마주쳐도 실실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것이라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이 몹시 달았다. 강징 또한 그래 보였다. 사랑을 확인한 강징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주변에서 뭐라고 떠들던 당사자들과 가족들만은 두 사람의 결정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강징이 버진로드를 따라 걸어오던 순간을 위무선은 눈과 머리와 마음에 새겼다.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듯 했다. 눈부신 조명이 기립하는 하객들 사이로 부유하는 먼지를 비추고 흩어졌다. 강징이 고른 행진곡에 맞춰 걸어올때마다 위무선의 마음에 쿵쿵 하는 소리가 울리는 듯 했다. 그제서야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강징. 강징은 위무선이 온힘을 다해 눈물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죽어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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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3년 반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투닥대던 때가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그 후에 들이닥칠 폭풍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했었어야 했을까? 위무선은 수십 수백 번이고 자문했지만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답을 알려줄 강징 역시 없었다. 알려주지도 않았겠지만. 아니, 사실은 강징도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시발점이 되는 기억만큼은 확실했다. 강징이 갑자기 병원에 다녀온다고 했다. 아침 식탁에 앉아 비몽사몽으로 눈을 감고 있던 위무선은 그 한마디에 눈이 번쩍 뜨였다. 뭐? 무슨 병원? 왜? 어디 아파? 진정해. 그냥 산부인과 정기 검진이야. 아... 위무선은 산부인과에 대해서는 아마존강에 서식하는 물고기 종류에 대해서 만큼이나 지식이 없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위무선은 교수와 면담이 있었으므로 동행하지 못했고 우자연이 함께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만을 들었다. 그 날 강염리 부부와 저녁을 할 때 강징은 두 살 난 아릉을 유독 오래 안고는 말이 없었다. 하루종일 기분이 가라앉은 강징을 살피던 위무선이 이유를 묻자 강징은 한참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상에 금을 낸 한마디를. 아이를 가지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했다. 초경을 시작할때부터 생리 불순이 심했고 병원에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들었다고 했다. 그때 위무선은 일단 강징이 어딘가 아픈 게 아니라는 안도부터 느꼈다. 위무선은 자식계획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했다. 물론 부부로 맺어진 사이에서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강징을 닮은 애라면 귀엽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신혼을 좀 더 즐기고 싶었고 아직 학생이니 졸업하고 자리잡히면 천천히. 그 정도였다. 위무선이 아픈 데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전하자 강징이 고개를 훽 들었다. 큰 눈에 들어찬 분노에 위무선의 입이 다물렸다. 다행이라고? 내가 한 말을 제대로 듣기는 했어? 그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이어 쏟아지는 날카로운 말을 받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강징은 말할수록 화가 치미는 듯 했다. 결혼 후 2년동안 자연임신이 되지 않으면 불임을 의심해야 한다던가, 이 집을 꾸밀 때도 아기방을 안중에 두지도 않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는 말들.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말 몰랐으니까. 신혼집을 보러 다닐 때 남는 방을 보며 얼굴이 부드러워지던 강징을, 백화점에서 게임기에 정신이 팔린 위무선 옆에서 어린이용 가구에 시선을 뺏기던 강징을, 염리가 혼전임신 소식을 전했을 때 복잡한 얼굴이었던 강징을. 위무선이 강징을 제일 잘 안다고 자신했던건 오만이었다. 그 사실이 주는 충격에 위무선이 휘청였다. 강징이 위무선을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충고했고, 위무선은 입을 열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 우린 아직 젊고... 그리고 그건 강징에게 최악의 수였다. 하! 코웃음을 친 강징이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방을 나섰다. 쾅 닫히는 화장실 문과 물소리. 위무선은 강징이 울고 있음을 알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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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부터였다. 아무리 싸워도 다음날이면 풀렸던 과거가 거짓말 같았다. 하필 바빠지던 시기가 겹쳤다. 함께 앉은 식탁에 대화 대신 침묵이 찾아들었다. 강징의 등을 보고 자는 날이 늘었다. 강징의 눈을 마주하는 일이 줄었다. 강징은 점점 예민해졌고 위무선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위무선은 강염리의 식사 제안을 갖은 핑계로 거절하는 일이 늘었다. 필시 강징이 아릉을 보고 더 우울해질테니까. 강징이 듣지 못하도록 다른 방에서 전화를 마치고 침대로 향하면 강징은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불을 덮고 있었지만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위무선은 안다. 숨소리조차 죽이고 침대에 누우면서 필사적으로 해결방법을 찾는다. 위무선은 강징에게 전하려고 했다. 무심했던 지난 날에 대한 사과, 그가 얼마나 강징을 사랑하며 그녀와의 미래를 소중히 생각하는지, 강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돌리고 돌린 낙관까지. 침대에 앉은 강징의 눈이 깜빡였다. 곧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위무선의 목을 끌어안았다. 위무선은 오랜 시간 꿇은 한쪽 무릎이 아프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강징을 이렇게 안아보는 게 얼마만이던가.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들었던 안도는 곧 박살났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저녁을 먹고 아주 오랜만에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 날, 위무선의 마음이 얼마나 부풀었던가. 위무선이 내뱉는 시시콜콜한 말에 미소짓는 강징은 아름다웠고 더할 나위 없었다. 집에 도착해 입을 맞추며 허리를 더듬는 위무선을 강징이 밀어냈다. 오늘 배란일 아니야. 그때 위무선이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굳은 위무선을 강징이 지나쳤다. 그 이후로 이어지는 검사, 속설, 충고. 목적을 가진 관계와 임신 테스트기. 욕실에 홀로 앉아 우는 강징의 울음소리. 그럴때면 위무선도 문 앞에 앉아 속으로 울었다. 강징이 힘들 때면 언제나 위무선이 곁에서 달래주고 힘이 되었는데.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심상찮음을 눈치챈 강염리가 강징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잘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의 강징에게는 누구의 무슨 말도 들리지 않았다. 속절없이 시간만 흘렀다. 점차 지쳐갔다. 피곤했다. 일상에서 유리된듯한 기분. 위무선은 더이상 웃지 않았다. 겨우 물꼬를 튼 대화도 싸움으로 끝을 맺었다. 결국 아이를 원하는 강징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성장 과정의 차이였다. 그렇게 사랑해 가족으로 이어졌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둘만으로도 괜찮잖아. 서서히 눈물이 차오르던 강징의 눈에서 적개심을 읽어냈을 때 위무선은 발밑이 무너진 절망을 느꼈으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진심을 숨기거나 꾸며내는 종류의 남자가 아니었다. 강징은 위무선과 말을 섞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매번 싸움으로 끝나던 대화라도 있을 때가 나았는지 지금이 더 나은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물기가 바싹 마른지 한참이라 흉하게 자국이 남은 싱크대에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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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재는 겹친다고 했나. 어떻게든 이 상황이 끝나기를 바라던 무의식적인 바람은 최악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진심으로, 온 마음과 양심에 맹세코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위무선은 그 모든 상황을 지나오면서도 강징과 헤어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 위기를 이겨 낼 것이다. 그렇게 또 한 번 오만했다. 응급실로 향하는 발이 자꾸만 꼬였다. 무슨 정신으로 도착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스쳐지나는 사람들, 끔찍한 병원 냄새, 뜻을 알 수 없는 고함과 날이 바짝 선 분위기, 울음소리. 울음소리. 강징의 울음소리였다. 열 발자국 앞에 그의 부인이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벗겨진 구두와 구겨진 옷자락. 팔에 묻어 굳은 피, 피, 피! 위무선이 휘청이며 걸어가 강징을 감싸 안았다. 강징의 몸이 힘없이 위무선에게 무너졌다. 형편없이 말라 딱딱한 몸이 낯설었다. 어깨에 올라온 금자헌의 손도 위무선은 눈치채지 못했다. 금자헌의 다른 손은 침대 옆 보호자용 의자에 주저앉은 강염리가 붙잡고 있었다. 그 앞에 누운 사람은 흰 천으로 얼굴이 덮여있었으나 위무선은 누구인지 알았다. 강징과 닮은 얼굴을 한 그의 왼손에는 늘 끼고 다니는 팔찌가 걸려 있을 것이다. 우자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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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라고 했다. 운몽의 회장 부부가 사고를 당해 부인은 사망하고 회장은 의식불명이라는 뉴스가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모든 것이 너무 빨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충격과 슬픔에 젖은 셋을 대신해 금자헌이 장례식 절차를 도맡았다. 강풍면의 수술 동의서 역시 금자헌의 서명이 적혔다. 강염리는 상을 치르는 내내 상주실에서 거의 나오지 못했다. 강징은 언니를 대신해 꼿꼿이 서서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절을 받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비행기에 오른 위무선의 부모님이 한참을 강징의 손을 붙잡았다. 말없이 안긴 어머니의 품이 새삼 작다고 느꼈다. 위무선은 틈틈이 병원으로 올라가 강풍면의 상태를 살폈다. 응급실에서부터 장례 첫날까지 강징은 하루를 넘게 깨어 있었다. 조문객이 모두 빠진 새벽 위무선은 강징의 어깨를 감싸 상주실로 향했다. 뒤에서 너도 좀 쉬라는 금자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끄덕인 위무선은 이불을 펴고 강징을 눕혔다. 인형처럼 움직이는 몸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제서야 강징은 울었다. 가슴팍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위무선도 왈칵 울음이 치밀었다. 너무 울어 휘휘 하는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돌아누워 자는 줄 알았던 강염리도 울었다. 우자연의 첫째 사위의 배려로 세 남매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어떻게 이렇게 가세요. 둘을 두고 어떻게. 그때 위무선은 죽음이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건 적당한 때를 골라서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다. 장모와의 마지막 기억이 무엇이더라. 장인이 깨어나면 현장에서 사망한 부인의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눈앞이 깜깜했다. 딸 둘을 시집보낸 뒤 한때는 전쟁 같았던 둘의 사이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뒤라 더더욱 그러했다. 위무선은 무력과 오만에 집어삼켜졌다. 위무선은 아직도 강징을 다 알지 못하고 아마 그건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참으로 끔찍한 가정이지만 위무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유로 그를 떠날 수도 있었다. 장모의 죽음으로 깨닫는다는 것이. 위무선은 우자연에게 용서를 빌고 맹세했다. 강징을 지키겠다고. 강징과 똑같이 미간을 찌푸리는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위무선, 알겠느냐? 강징을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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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주춧돌을 잃은 운몽이 위기에 처했다. 그날 장인 부부와 동승 했던 비서는 경찰 조사를 받고 있었다. 둘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말이 많았던 탓이다. 그는 강징이 걸음마를 할 때부터 보아왔던 사이였다. 병상에 누운 강풍면이 깨어날 기미가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나라를 좌지우지한다는 기업의 수장 자리를 노리는 인사가 너무 많았다. 강징은 애도할 시간도 없이 이를 악물어야 했다. 부모의 사고에 제기되는 온갖 루머에 반박기사를 내고 침을 흘리는 능구렁이들 앞에 서서 능력을 증명했다. 부모가 평생을 바친 회사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난릉이 나서 강징에게 힘을 보탰다. 안타깝게도 위무선은 그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스스로의 무력함에 화가 치밀었다가도 가장 힘든 것은 강징이라는 생각에 주먹만 쥐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치들은 장례식에서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던 강징이 얼마나 독한지, 자리에 누운 아버지를 두고 바로 경영권 승계에 뛰어든 강징이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는지 떠들어댔지만 위무선은 강징이 전에 없이 위태로운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강징을 지켜야 했다. 비록 밤낮 없이 일하는 강징의 얼굴조차 보기가 힘들다고 해도, 겨우 얼굴을 마주한 강징의 눈이 텅 비어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잠들지 못하는 밤이 이어져도. 위무선은 발버둥치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강징의 답은 이혼 서류였다. 눈이 잘못된 줄 알았다. 처음엔 그 서류에 적힐 것이 자신의 이름인지, 강징이 ‘우리’의 결혼을 깨자고 하는 것인지조차 몰랐다. 다른 누군가의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비상하게 돌아가는 머리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손끝부터 싸늘해졌을 때, 위무선의 동요를 전부 천천히 눈에 담은 강징이 미동도 없을 때, 강징은 한번 정한 일은 뒤돌아 보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위무선은 절망했다.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강징도 그걸 알았다. 그렇다고 네 얼굴을 보는 것이, 너와 함께 하는 것이 힘들다는 말을 듣는 게 더 낫지도 않았다. 위무선은 배신감에, 분노에, 실망에 치를 떨었다. 어떻게 가장 힘들 때 제일 먼저 놓는 것이 내 손일 수가 있냐고.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함께하자는 맹세가 너한테는 도대체 무엇이었던 거냐고. 내 그 모든 것들이 정말 너한테는 조금이라도 와닿지 않은 거였냐고. 추하게 무너져 쏟아내고 울부짖는, 절대 이혼해 줄 수 없다는 위무선에게 강징은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대답했다. 눈물이 멈췄다. 강징, 나 울잖아. 이러지 마. 그러나 강징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눈물을 닦아주지도, 작은 손으로 위무선을 끌어당겨 안아주지도 않았다. 위무선은 멍하니 강징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눈앞의 여자가 낯설었다. 강징은 어디 있지. 내...내 동생. 친구. 부인. 강징이 걸어오기에 마음속 부름에 대답한 줄 알았으나 강징은 그저 위무선의 앞에 앉아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눈동자에 무저갱 같은 피로가 비쳤다. 위무선은 문득 깨달았다. 그 무저갱 속에 언제부터인가 그도 함께 빠져 있었음을. 동시에 언젠가 얻은 깨달음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위무선과 강징이 서로를 전부 이해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며, 강징은 위무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유로 위무선을 떠나갈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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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옛날 꿈을 꿨다. 한번 둑이 터진 생각은 물밀 듯이 밀려들어 위무선의 잠자리까지 찾아들었다. 혼자 쓰는 침대와 싸늘한 옆자리는 이미 지긋지긋하게 익숙해졌는데도. 강징이 숨 쉬는 땅을 떠나있는 동안 위무선은 불면증을 얻었다. 관자놀이를 쑤시는 두통을 참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면 울고 싶었다. 강징과 같은 땅을 밟고 있다는 것을 견디지 못해 떠나놓곤 강징과 같은 땅을 밟고 있지 않다는 것도 견디지 못했다. 위무선은 저가 이렇게나 회피를 잘하는 인간인 줄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강징을 봐야 했다. 지긋지긋하고 구질구질해도. 이제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94.
운전대를 잡은 위무선이 입술을 짓씹었다. 해가 뜨고서야 겨우 잠드는 생활을 고쳐야 하는데. 고질적인 불면증과 시차적응으로 늦게 일어났다. 강의 첫날부터 지각하는 교수라니 환상적이다. 조급한 마음이 눈을 가려 위무선은 바뀌는 신호등을 보지 못했다. 정지하는 차를 보고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늦었다. 쿵. 접촉사고까지!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이런 씨발. 잘 하지도 않는 욕이 절로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위무선이 갖다 박은 차는 외제차였다. 이대로 핸들에 머리를 박고 죽은 척을 할까 하는 고민을 잠깐 하던 위무선이 심호흡을 하고 차에서 내렸다. 입술에는 사회생활용 사람 좋은 미소를 걸친 채였다. 조금 늦게 앞차에서 내린 남자는 스치면 베일 듯 각이 잡힌 정장 차림이었다. 못마땅한 얼굴의 남자는 가타부타하지 않고 괜찮으니 그냥 가라는 말을 전했다. 그건 안될 말이었다. 나중에 뺑소니로 신고당할 줄 어떻게 알고. 안 그래도 피곤한데 되도록 신경 쓰는 일을 피하고 싶었던 위무선이 전화번호라도 주십사 했지만 거절당했다. 명함을 내밀고 싶었지만 아직 없었다. 거듭되는 거절과 실랑이에 슬슬 짜증이 난 위무선이 블랙박스도 있으니 그냥 갈까, 하던 찰나였다. 뭐 하는 거야? 그 시끄러운 도로 한복판, 한뼘도 안될 정도로 내려간 앞차의 창문 틈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가 칼날처럼 귀에 박혔다. 위무선은 방금까지 짓던 허허실실한 미소도 집어치우고 굳은 얼굴로 짙게 선팅된 창문에 시선을 꽂았다. 마찬가지로 그 작은 목소리를 포착한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됐으니까 그냥 가시라고요. 안에 계신 분이 얼마나 바쁘신....이봐요! 위무선은 거침없이 걸어가 차체에 손을 얹고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강징이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강징이 놀란 얼굴을 한 것과 동시에 몸이 돌아갔다. 뭐 하시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옆에서 떠드는 남자에겐 관심이 없었다. 위무선은 그저 강징이 있을 창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장비서. 그냥 가. 한번 더 강징의 목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지체없이 몸을 돌려 운전석에 올랐다. 암. 강징이 두 번 말하게 하면 큰일나지. 강징의 차가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뒷차들이 클락션을 울리다 지나갈때까지 위무선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차에 올랐다. 저도 모르게 미친놈처럼 웃고 있었다.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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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징은 놀라 아직까지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갈무리했다. 분명 위무선이었다. 6년이나 지났음에도 놀랍도록 그대로였다. 얼굴을 마주한 건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시선에 아직 붙잡힌 것 같았다. 도대체 언제 귀국한걸까. 왜 돌아온걸까. 떠오른 생각을 고개를 저어 쫓아냈다. 이제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진정해. 그때 작은 손이 강징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엄마, 왜 그래? 흠칫 어깨를 떤 강징이 딸을 내려다보았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강징이 대답했다. 아니야, 괜찮아. 병원으로 차 돌리세요. 가벼운 접촉사고라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위무선이 봤을까? 창문은 아주 조금밖에 내리지 않았지만. 위무선이 봤을까. 그를 꼭 닮은 이 아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