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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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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헌 side라 내용 겹치는 부분 있음

 


 

대학교 3학년의 여름. 이명헌은 송태섭과 헤어졌다. 이별을 실감할 새도 없이, 아키타의 모교에서 인터하이 대비 OB와의 연습 경기를 요청해왔다. OB들 중에서도 무패 신화에 흠집을 내버린 동기들은 참석율이 꽤 높았다. 그 해의 윈터컵에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가 곧바로 왕좌를 탈환했음에도 그랬다. 그 당시의 산왕은 꽤나 끈끈한 팀이었으므로, 연습 경기를 핑계로 매년 따로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모임의 대표는 당연하게도 주장 이명헌이었다. 하지만 그는 첫 이별을 맞이했으므로 태섭과 관련된 기억이 있는 것들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 도쿄의 대학 농구팀에 소속되어 있는 동오가 이번에는 어디서 모일까 물어왔지만, 명헌은 대만을 괴롭히며 다른 대답을 했다.

 

“난 이번에 패스 삐뇽.”

“…? 너가 포인트 가드하는 건 당연하지…?”

“아니. 이번엔 연습 경기 안 간다고용.”

 

뭣…! 안 간다고? 그럼 우리 모이는 거에도 안 오는 거야? 동오가 화들짝 놀라며 물어왔지만 명헌은 대만을 괴롭히는 강도를 높이며 긍정의 삐뇽을 말할 뿐이었다. 그럼 우성이는? 우리 늘 그때 전화했잖아. 걔가 엄청 삐질텐데…. 일단 알겠다. 현철이한테 말해볼게. 동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열었다. 바로 문자를 보낼 모양인 듯 했다. 동오는 참 사람이 순순하다니까용. 현철이였으면 강제로 끌려갔삐뇽.

 

결과적으로, 명헌은 산왕 OB 연습 경기에 끌려갔다. 주장의 역할을 다하라는 신현철의 전완근과 이두근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뿅흐흑, 베흐흑. 너넨 섬세함도 없삐뇽... 뭐래냐. 준비 운동이나 해. 명헌이 뿅흑 베흑 울었지만 산왕 OB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산왕' 과 '인터하이'는 송태섭과의 추억이 깃든 곳이다. 비록 연인으로서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어쨋든 첫만남을 가졌던 곳이었다. 송태섭의 첫 전국 공식전에서 명헌은 관객석에 앉아서 그를 관찰하고 분석했었다. 명헌에게 송태섭의 첫인상은 도발에 잘 걸려드는 다혈질에, 얼굴에 성격이 다 드러나는 타입이라는 게 다였다. 당시 풍전의 포인트 가드는 트레쉬 토크로 유명한 편이었는데 태섭은 꽤나 욱했던 거였는지 경기 도중 주먹을 꽉 쥐곤 휘두르기 직전에 멈췄던 전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작고 옹골찬 주먹이었다. 그 작은 손으로 농구는 어떻게 했지. ...그때의 기상을 보면 태섭은 미국가서 맞고 다니진 않을 것 같았다. 입이 방정인 우성이도 미국에서 아직 잘 살아있는 걸 보면 태섭은 주장까지도 했고 문제는 없겠지. 그래도 미국은 총기 소유가 합법인 국가니까, 웬만하면 싸움은 피했으면 좋겠다.

 

 

 

산왕과 북산의 경기에서, 직접 송태섭을 마주했을 때의 감각은 아직 잊을 수 없다. 애초에 태섭이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선사해주기도 했고.

 

명헌은 최강의 왕좌가 주는 압박감을 즐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견딜만 했다. 강한 패를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이었으니까. 비록 최강이라는 수식이 연달아 붙으면서 그것을 반드시 이어나가야한다는 제 3자의 기대는 점차 부담스러워졌지만 말이다. 그 부담은 자신들을 상대하는 다른 농구 팀도 그러했다. 최강의 자리에서 받는 도전들은 언제나 즐거움을 가져다주었지만, 쉽게 돌파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쉽게 겁을 먹고 무너지곤 했다.

 

북산은 쉽게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위기가 다가올 때 한층 성장해갔다. 송태섭은 쉽게 겁을 먹었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몇 번의 위태로움이 있었지만 그 몇 배로 의연한 척 하며 경기를 이어나갔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는 분해하기는 했지만 몇 번이고 틈을 만들고 포착하여 돌파해나갔다. 오합지졸의 변화무쌍한 팀에게 맞추어 신체적 한계를 장점으로 이용해 먹었다. 전국 대회 첫 진출의 무명이 최강을 상대로 끈질기게 추격해왔다.

 

 

산왕 재학생들과의 연습 게임에서 명헌은 도중도중 울컥했다. 170센치 언저리의 단신 선수가 송태섭을 떠올리게 해서, 드리블을 낮게 잘하는 선수가 송태섭을 생각나게 해서, 고교 최고의 가드였고 현재 대학 리그에서 탑3에 손꼽히는 자신을 앞에 두고 불타는 투지를 가진 포인트 가드가 송태섭을 그립게 해서. 그들은 각자 170센치의 벤치 멤버였고, 드리블을 잘하지만 패스는 부족한 선수였고, 무패 신화를 깨트린 자신에게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승부욕이 과한 다소 건방진 포인트 가드였다. 명헌은 빠르게 태섭과 그들을 분리하여 경기를 조립해 나갔다. 현철, 현필. 골 밑을 더 압박 해. 자리를 내주지 마. 낙수는 저쪽의 슈터 잘 견제하고. 아직 폼이 깔끔하지 못해서 군더더기가 많아. 네가 흔들면 재빨리 대응을 못 할거야. 동오. 그 사이에 네가 점수를 벌어야 해. 네가 화려하게 할수록 애들의 시선이 너에게 집중되니까. 헛점을 찌르기도 쉬울거야.

 

경기를 진행하면서 시끄럽던 명헌의 머리가 고요해졌다. 눈 앞의 상대를 관찰하고 분석해 정보를 입력한다. 가장 선호하는 위치, 폼, 동료, 슛 스타일을 파악하고 쓸데없는 페이크는 버린다. 간혹가다 예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발생할 수 있으니 주의. 너네는 최강의 산왕, 이쪽은 그 최강 산왕 중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았다는 평을 받는다. 비록 그 당시의 전멤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 타이틀 지어진 것은 그것이 빛이 바래도 영원하다.

 

마치 태섭과의 관계가 연인이라고 타이틀 지어졌던 것처럼.

 

결국 산왕 재학생 팀은 더욱 노련해진 OB 팀에 이기지는 못했다.

 

 

 

명헌은 그 연습 시합 이후로 꽤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비밀 연애를 하자고 말한 태섭과 달리 명헌은 연애하는 티를 내고 다녔었다. 상대만 말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명헌과 달리 태섭은 자신이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뭐 자신은 괜찮았다. 덕분에 이렇게 헤어져서 힘들다는 티도 낼 수 있었으니까.

 

헤어졌을 당시, 명헌은 화가 났었다. 연인 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의지를 존중받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태섭은 늘 자신의 진심을 꽁꽁 숨기고 어느 순간처럼 명헌을 제치고 도망가버린다. 뭐? 해봤는데 사람을 기다리는 게 할 만한 게 못돼? 그렇다고 기다리겠다는 사람을 이렇게 매정하게 끊어내도 되는 것일까? …사실은 알고 있다. 송태섭은 오히려 자신을 쉽게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넌 생각보다 정이 많고, 좋고 싫음이 확실하니까. 싫었다면 그렇게 미안하다는 듯이 헤어지자 하지 않았겠지.

 

이별의 순간에서 명헌은 겨우 태섭이 숨겨놨던 마음 한 조각을 볼 수 있었다. 빈틈이 많아 보이면서도 늘 몇 겹씩 가림막을 쳐놓던 태섭이 보인 조각이었다. 대체 넌 누굴 그렇게 기다려왔던 것일까. 네가 마시던 레몬에이드의 얼음처럼 나라는 얼음이 녹아 그 마음의 농도를 낮추고 싶다. 계속 얼음을 넣어서 녹이다 못해 결국 물로 가득 채워버리고 싶다. 네가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을 나로 가득 채워버리고 싶다. 네가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나였으면 한다.

 

 

명헌은 얼음을 까득 씹어 먹으며 달력을 바라봤다. 오늘은 태섭과 사귄 지 700일이 되는 날이었다. 한 달쯤 뒤면 2주년이고. 태섭과 헤어진 지는 2주가 조금 넘었다. 하필이면 그 헤어진 기간 사이에 태섭의 생일도 껴있어서 챙겨주지도 못했다. 정대만한테 듣기로는 생일에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고는 달이 바뀌자마자 미국으로 넘어갔다고 했다.

 

기념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오키나와라던가. 마침 종강도 했겠다, 대학 팀도 휴가를 줬겠다, 나쁘지 않아 보였다. 명헌은 곧바로 오키나와 여행에 대해 찾아봤다. 대학 도서관에 들려 여행 책자를 빌려보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확한 고향 동네에 대해서 물어볼걸. 명헌은 책장을 덮었다. 일단 오키나와행 티켓을 끊었다.

 

오키나와에 도착해서 명헌은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보기로 했다. 최대한 관광지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걷고 버스를 타고 또다시 걸었다. 외지인을 위한 관광 상품들이 늘여져 있던 매대에서 점점 주민들을 위한 일상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초등학교를 지나고, 주택가를 지나고, 동네 마트를 지나 도착한 곳은 해변이었다. 이곳은 어디일까. 철썩, 철썩. 파도치는 소리를 명헌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웅, 우웅-. 웅, 우웅-.

 

명헌은 폴더폰을 열고 전화한 이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신현철이었다.

 

 

“왜 삐뇽.”

‘너 어디냐?’

“오키나와.”

‘오키나와? 말도 없이 거긴 왜 갔어. 여행?’

“700일 기념 여행 삐뇽.”

‘…헤어졌다고 안 했냐?’

“헤어졌어도 700일은 700일이니까용.”

 

또라이 새끼 아냐 이거. 명헌아, 난 도대체가 니 속을 모르겠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을 하고, 속상하면 속상하다고 말을 해.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말고. 애들 데리고 네 자취방 갔는데 없어서 놀랬다. 며칠이나 있다 오게? 혼자서 심심하면 나라도 가고. 현철이 툴툴대면서 걱정의 말을 쏟아냈다. 명헌은 삐뇽거리며 조용히 듣고 있다가 오겠다는 현철의 말에 이건 커플 여행 뿅. 현철이 오면 셋이서 사귀게 되는 거에용, 이라고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말을 둘러 말했다.

 

“한 달 뒤엔 2주년 기념으로 놀이공원도 갈 거야 삐뇽”

‘진짜 미친놈인가. 그것도 혼자서 가게?’

“삐뇽.”

‘하아… 다시 도쿄로 돌아올 때쯤 연락해라. 공항에 픽업 갈게.’

 

명헌은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근처에 민박집이나 모텔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해변 쪽에 숙박 업소가 있지 않을까 싶어 명헌은 해변을 따라 쭈욱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숙박 업소의 ‘숙’자도 보이지 않자, 명헌은 계획을 수정해 관광지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통-, 통-. 공을 튀기는 익숙한 소리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길거리 농구 코트에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친구들이 팀을 나누어 농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태섭에게 어떻게 농구를 하기 시작했는지에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오키나와는 미군 부대가 있는 곳이라, 길거리 농구 코트가 많았다고 했다. 집 근처에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시작했다고 말했었지. 명헌은 학생들이 뛰어다니는 걸 보면서, 내일부터 이틀간 오키나와에 있는 농구 코트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오키나와는 크니까 다 찾지 못하면 다음에 또 와서 찾아보면 된다.

 

명헌은 숙소를 찾는 것을 그만두고 그 길로 오키나와 시내로 향했다. 다행히도 쉽게 필름 카메라를 구매할 수 있었다. 서점에서 명헌은 오키나와 관광 가이드북도 구매했다. 그리고 아까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그 농구 코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시간이어서 학생들도 집으로 돌아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찰칵- 빈 농구 코트를 사진 찍고 가이드북에 위치와 들린 날짜를 표시했다.

 

명헌은 가이드북을 참고해 숙소를 찾고 농구 코트를 찾았다. 때로는 아저씨들이 농구를 하고 있을 때도 있었고, 작은 아이가 어린이용 농구공을 들고 드리블 연습을 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찾는 이들이 꽤 되는 것인지 잘 관리된 코트가 있었고, 바닥이 갈라져 공을 튀길 수도 없을 만한 코트도 있었다. 명헌은 그 모든 것을 빠짐없이 사진 찍고 기록했다. 2박 3일간의 오키나와 여행에서 명헌은 총 7개의 농구 코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현철이 타박하든 말든 명헌은 매 기념일을 챙겼다. 주년 때는 오키나와나 카나가와에 갔고, 몇백일 때는 혼자서 연인들이 갈 만한 곳을 다녔다. 송태섭과 헤어진 날도 기념일로 지정했다. 그날은 하고 싶은대로 했다. 태섭이 그리우면 인터하이 경기를 찾아가서 보기도 했고, 태섭이 보고 싶으면 NBA 리그 영상을 찾아보기도 했다. 종종 쉽게 자신을 포기한 태섭이 미울 때면, 정대만을 괴롭혔다. 별 건 아니고, 그냥 체력 이슈를 극복해야 한다고 운동량이랑 훈련량을 늘려줬다.

 

대만과 같은 대학 팀에 있었고, 구단 위치가 가까운 프로팀에 있는 것은 이때 참 도움이 됐다. 태섭은 북산 선배들과 편지를 주고받았기에 넌지시 대만에게 물어보면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그중에는 이미 우성에게 들어 알고 있는 것들도 있었고 아닌 것도 있었다. 종주국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단신의 동양인에 대한 소식은 기사에 실려있기도 했다. 명헌은 송태섭에 관한 소식이면 박박 긁어모았다. 송태섭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농구계에서는 유명 인사여서 열심히 모으지 않아도 소식은 잘 들려왔다.

 

미국에서 나름의 활약을 하고 있는 태섭에게도 늘 국가대표 선발전 제의가 들어갔으나, 단 한 번도 국내로 들어오지 않았다. 일부는 본토에서 활약한다고 콧대가 높은 게 건방지다고도 했고, 일부는 국내에도 좋은 가드들이 많아서 굳이 제의를 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혹시 태섭과 만날 수 있을까봐 늘 국가대표 선발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명헌은 그 점이 진짜 미웠다. 고작 저 자신 하나 피하겠다고 이러는 게 진짜 독하다, 송태섭. 남들이 못마땅하게 여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안 들어온다. 유학 가서는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국내로 들어오는 적이 없다. G 리그 계약금도 꽤 될 거면서 심지어 가족도 안 만나러 온다. 그 독한 점이 좋은 거지만 진짜 너무했다.

 

그럴 때면 미국에서 들어온 우성이나, 북산 후배들인 태웅과 백호도 괴롭혔다. 이것도 별거 안 했다. 국가대표 주장으로서 미국에서 활동 중인 선수들을 국내 선수들과 조화롭게 만들겠다는 핑계로 연습 경기를 빡세게 시켰다. 미국 유학까지 갈 농친놈들은 그것도 좋아해서 명헌은 힘이 빠지긴 했다. 고등학교 후배랑 대학 동기의 후배를 챙긴다는 핑계로 데리고 다니면서 미국 생활에 대해 물어봤다. 국가대표 주장의 편애 논란이 생길 뻔했지만 부주장인 이정환이 논란을 잠재웠다.

 

 

미국으로 돌아간 우성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줬다. 태섭이 미국에서의 선수 생활을 청산하고 국내 리그에서 뛸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국내 리그에서 뛰겠다는 의지가 그전부터 확고했었다고. 이건 기회였다.

 

초심을 찾기 위해 말투도 뿅으로 돌아갔다. 태섭보다 조금 늦게 들어올 것이라는 우성을 설득해 같은 날에 들어오도록 했다. 우성아, 선배된 도리로 미국에서 너랑 잘 지내준 친구 대접 한번 해야 하지 않겠나용. 아직 구단도 안 정했다면서. 후보 중에 현철이가 속한 곳도 있고 동오가 속한 곳도 있다며 한 번 만나봐야 태섭도 좀 더 편하게 고르지 않을까 뿅. 이번에 들어오면 너가 좋아하는 고깃집 가자. 우리 동창회도 한번 해야지.

 

우성은 너무 좋다고 말하며 태섭에게 의사를 물어보겠다고 했다. 명헌은 그것을 막았다. 우성, 산왕 OB들이 식사 대접한다고 하면 태섭이 순순히 따라오겠나용? 부담스러워서 도망칠지도 몰라 뿅. 태섭에겐 말하지 말고 데려와용. 현철이 보고 픽업 가라고 할게. 우성이 그래도 태섭의 의사는 물어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는 것을 명헌은 동창회에 뚜벅이로 참석하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잘하라고 답해줬다. 우성은 후배 소중한 줄 모른다며 잉잉 울다가 알겠다고 했다.

 

그 다음 타자는 정대만이었다. 태섭은 도쿄 쪽의 구단으로 후보지를 정했다고 했는데, 하필이면 카나가와 본가와 도쿄가 꽤 가까운 편이었다. 본가에서 지내다가 계약 관련해서 날을 잡고 한 번 나올 수 있는 거리였다. 명헌은 대만에게 우성이한테서 네 후배가 국내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운을 띄웠다. 대만은 어떻게 알았냐며 걔가 들어오기만 하면 북산 OB들에게 죽었다고. 아주 술로 절여줄 것이라 말했다. 때를 맞춰서 다른 지역의 프로 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채치수도 도쿄 쪽으로 올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걔 숙소는 어떡한대 뿅? 대만은 대단한 계략이라도 세웠다는 듯이 웃더니 말했다. 어, 도망 못 가게 울 집에서 재울려고. 방도 남고 걔가 생각하는 구단이랑 거리도 가까워서 계약 전까지 지내기엔 편할걸? 걘 뒤졌다 진짜… 그러게 누가 한 번도 안 들어오랬냐.

 

명헌은 대만의 말에 공감했다. 그러게 말이에용. 누가 한 번도 안 들어오랬나 뿅. 대만을 설득할 필요도 없이 태섭의 숙소가 정해졌다.

 

 

태섭과 우성이 국내로 들어오는 당일, 현철이 단톡방에 우성이와 태섭을 픽업했다는 톡을 보냈다. 고깃집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0분. 동오는 성격상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할 것이다. 동오의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과 대만의 대학 동기라는 연관성으로 태섭은 쉽게 자리를 뜰 수 없을 것이다. 낙수와 현필이랑 성구도 자리에 앉아버리면 빠져나갈 핑계가 없어서 자리를 지키고 있겠지. 자신이 처음부터 간다면 도망갈 가능성이 있으니, 명헌은 일부러 늦게 출발했다.

 

조금 늦어진 성구와는 식당 문 앞에서 마주쳤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얼굴들 사이에 보고 싶었던 갈색 브로콜리가 하나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는 다른 애들을 내버려 두고 무작정 뒤에 가서 섰다. 옆에 오던 성구가 우성이와 인사를 나눌 때에, 그제서야 자신을 발견한 태섭이 움찔했다. 입을 열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을까 봐, 명헌은 그저 뿅 하고 한마디만 했다.

 

불편해 보이는 모습에 명헌은 우성이와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 배치까지는 생각 못 했었는데, 운이 좋았네용…. 그 순간 앞에 있던 현철과 눈이 마주쳤다.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들켰던 거네 뿅. 명헌은 생각을 수정했다. 태섭이 산왕끼리 놀라며 빠지려고 할 때, 바로 붙잡는 현철과 낙수를 보고 확신했다. 낙수한테까지 들켰어용…. 나중에 한 소리 듣겠군.

 

명헌은 고기를 굽는다는 핑계로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 어색해진 태섭이 종알종알 미국에서의 정우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퍽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귀는 태섭을 향해 열어놨으면서 눈은 고기 불판 위를 향했다. 힐끗힐끗 자신을 바라보던 태섭이 다시 술잔에 손을 뻗자, 명헌은 구웠던 고기를 집게로 가득 집어 태섭의 앞 접시에 놨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현철과 동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근육 키우는 사람에게 단백질 섭취는 중요하니까용.

 

명헌은 이 술자리에서 송태섭이 자신을 잊지 못했다는 확신을 가졌다. 산왕 티셔츠도 고교 농구 톱의 기운을 받아 가기 위해서였다는 핑계를 댔지만 명헌은 알 수 있었다. 분명 그 티셔츠의 택 뒷부분에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을 것이라고. 당시 우성이 산왕 농구부 단체복을 여러 장 구해달라고 할 때는 그냥 흰 티에 ‘SANNOH’ 라고 매직으로 적어서 입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구해다 주길 잘했다. 후배 사랑, 나라 사랑.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은 진리 뿅.

 

태섭이 잠깐 편의점에 갔다 온다고 자리를 비웠을 때. 태섭이 화제를 돌리려 꺼냈던 우성의 얼굴값 얘기는 돌고 돌다가, 미국에서의 연애 일화까지 나왔다. 우성이 자신도 미국에서 고백 많이 받았다고, 낙수에게 섭섭하다며 치대다가 태섭의 이야기까지 나왔던 것이다. 태섭이 걔도 꽤 인기 있었는데, 안 사귀더라구요? 전애인을 못 잊었다는데. 저는 걔가 미국에서 연애하는 걸 못 봤거든요. 그 서태웅도 미국에서 연애 해봤고, 그 강백호도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소개팅 시켜준다고도 했는데, 그냥 연애하기 싫어서 하는 핑곈가 싶기도 해요.

 

명헌은 웃음이 절로 나와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심장이 벅차올랐다. 태섭아, 태섭아-. 내가 진짜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차피 똑같은 마음인데. 우린 왜 헤어져야 했었을까. 그래도 여전히 너의 마음이 변함이 없어서 안심이 된다. 옆에서 얼굴을 가리고 킥킥 대자 동오가 이상하다는 듯이 돌아봤다. 명헌아, 괜찮아? 취했어? 맞은편의 현철이 동오의 걱정을 자르며 명헌을 밖으로 내쫓았다. 하… 야, 이명헌 너도 그냥 바람 쐬러 가라.

 

현철의 어시스트에 명헌은 거절하지 않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옆에 편의점 봉투를 놔둔 채 쪼그려 앉아있는 태섭이었다. 아까부터 술을 그렇게 마시더니, 반쯤 풀려있던 눈과 마주쳤다.

 

“…왔으면 들어오지.”

“…술 좀 깨느라구요. 집 드가세요?”

“아니. 잠깐 바람 쐬러 뿅.”

 

편히 바람 쐬라며 자신을 피해 식당으로 들어가려 하는 태섭을 술이 덜 깨어 보인다고 붙잡았다. 태섭이 사온 봉지를 열어보니 숙취해소제와 초코 우유, 그리고 바나나 우유가 들어있었다. 정우성은 술을 마시면 늘 초코 우유를 찾았으므로, 아마 이 초코 우유는 정우성 거였다. 바나나 우유는 자신이 대학생 시절 자주 마시던 거였다. 명헌은 뻔히 그 바나나 우유가 제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빨대를 꽂아 태섭에게 건넸다. 그리고 거절할 새도 없이 우성의 초코 우유를 뜯어 빨대를 물었다. 정우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작게 항변하는 태섭에게 먼저 마시는 사람이 임자라고 말해주었다. 달아서 입이 텁텁했다.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아서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는데, 태섭이 우유를 다 마시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명헌은 태섭의 입으로 자신을 잊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이미 미국에서 자기 마음을 질질 흘렸던 태섭의 이야기를 듣고 심지어는 아까까지 의식하는 모습을 직접 봤지만. 태섭이 직접 말해줬으면 했다. 그 말을 듣고자 우성이 했던 말을 빌렸다.

 

“소개팅 할래용?”

 

태섭이 경악해하며 명헌을 바라봤다. 이제는 불편한 기색도 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본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무슨 의도로 말을 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더니 눈썹을 찡그리곤 고개를 돌린다.

 

“…됐어요. 그럴 때도 아니고.”

 

그 이유가 아니잖아. 그냥 얼버무리려고 하는 태섭을 위해 명헌은 한 발짝 물러섰다. 점프 슛을 쏴 보라고 도발했던 그때를 떠올리며, 태섭이 말했다던 그 이유를 자신의 입으로 읊는다.

 

“왜? 전애인 못 잊어서?”

 

그냥 긍정만 해. 정우성이 말했냐며 툴툴 거리는 태섭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맞다고 말해. 날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해 줘.

 

“예에-, 전 아직 제 전남친 못 잊었어요.”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래.”

 

태섭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명헌의 대답이 불만스러운 듯 눈썹이 거의 75도의 각도로 틀어져 있었다. 그러더니 기어코 봉지를 빼앗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연락하겠다는 명헌의 말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연락하지 말라던 태섭의 말에 그저 뿅. 하고 답해줬다.

 

 

술자리가 파하고 명헌은 우성을 데려다주며 태섭의 전화번호를 얻어냈다. 아쉽게도 태섭은 현철이 데려다주게 됐다. 다른 애들까지 데려다주려고 술을 안 마시고 있었던 것 같다. 태섭은 미국에서 쓰던 통신사를 그대로 잠깐 사용한다고 했다. 국내 통신사로 변경하면 또다시 번호가 바뀔 테니, 그 전에 어떻게든 약속을 잡아야 한다.

 

소개팅이라고 말은 했으나, 명헌은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 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태섭은 철석같이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 주는 거라 믿는 눈치였다. 소개팅 상대를 구하는데도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 테니까. 의심받지 않도록 명헌은 오전 10시로 예약 문자를 설정해뒀다. 장소는 정대만의 집이랑 적당히 가까운 곳으로, 너무 가까우면 또 의심할 수 있으니 조심하며 괜찮은 카페를 물색해본다. 날짜는 태섭이 본가에 갔다 올 만한 시간을 확보해두고. 한… 토요일쯤으로.

 

자신의 문자를 받을 태섭의 반응이 궁금했다. 답장을 해줄까? 아니면 화를 내며 번호를 차단할까? 차단은 안 되는데… 차라리 무시하는 게 낫다 뾰홍….

 

 

태섭은 약속 당일까지도 답이 없었다. 약속시간 10분전에 카페에 도착한 명헌은 음료를 2잔 주문하고 앉았다. 아까 대만에게 확인해 봤을 때 전날의 북산 동창회 때문에 해장을 하고 있다는 톡을 받았다. 이제 나이 먹더니 예전만큼 술이 안 받아주는 것 같다 명헌아.... 같이 따라오는 대만의 말에 대충 맞장구 쳐줬다. 동오도 적당히 사려서 먹으라고 대만을 타박했다. 긴장이 풀리질 않는다. 답이 없는 문자처럼 이대로 태섭도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잠시 인다.

 

2시 정각. 카페 밖으로 택시 하나가 급정거한다. 곱슬거리는 머리를 자연스럽게 내린 태섭이 차에서 내린다. 억지로 잡은 이 소개팅이 뭐라고, 늦지 않기 위해 택시를 탔다는 게 괜히 마음이 울렁거린다. 빠른 걸음으로 카페 안으로 들어온 태섭과 눈이 마주쳐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답은 없다.

 

그대로 자리에 앉으며 태섭이 소개팅은 필요 없었노라 말했다. 자켓을 선호하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머리도 내리고 자켓을 입은 모습이 조금 어색했다. 조금 더 순한 인상으로 보이기도 했다. 누구한테 잘 보이고 이렇게 챙겨입은 거지? 태섭은 자신 앞에 있는 소개팅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고 상대가 언제 오느냐 물었다. 명헌은 친절히 그 질문에 답했다.

 

"나다 뿅."

 

황당한듯 기가 차보이는 태섭이 자세를 바로했다. 눈이 동그래진게 귀여웠다.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물어오는 목소리가 흔들렸다.

 

"태섭의 소개팅 상대 나다 뿅."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고 알려주기 위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해줬다. 명헌 자신도 긴장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 뿅이 평소와 같지 않게 살짝 갈라졌지만 태섭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옛날에도 정확한 뿅을 잘 구분하지 못하긴 했지.

 

“공교롭게도 나도 전남친을 아직 못 잊어서.”

 

명헌은 바싹 마른 입술을 살짝 축이며 말을 이었다.

 

“못 잊은 사람끼리 한번 만나봐용.”

 

명헌은 미리 주문한 레몬에이드를 내밀며 살풋 웃었다. 이별을 고했을 때 태섭이 주문했던 레몬에이드를 내민 것은 일종의 의지 표명이었다. 나는 여전히 너와 헤어지기 싫다는 사실을.

 



 

헤어져도 기념일 챙기고 있던 이명헌이 보고 싶었을 뿐인데... 아무튼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