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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17:44
알못ㅈㅇ


명헌이네가 우성이네 가신 집안이었으면 좋겠다. 명헌이는 우성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사와키타가 마님이 낳을 아이에게 충성을 다 할 신하로 정해졌음. 명헌이가 네 살일 즈음에 마님이 낳은 아이는 명헌이가 앞으로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모셔야 할 분이었지. 평소에도 명헌이를 귀여워하던 사와키타 영주 부부는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 명헌이를 거의 아들처럼 대했음. 그들 입장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음. 자기 아들을 받들어 수족이 될 명헌이었으니까.. 명헌이는 하루의 대부분을 어린 도련님과 함께 보냈고 도련님과 같은 스승으로부터 교육도 받았음.


명헌이는 아버지로부터 사와키타가 있기 때문에 후카츠가 있는 것이라고 인이 박히도록 들어왔겠지. 명헌의 아버지는 명헌의 능력과 영리함을 확인할 때마다 만족을 감추며 대신 아들의 능력이 미래의 영주께 크게 도움이 될 것임을 칭찬했음. 아들이 지나치게 뛰어나 모난 돌이 되어 정에 맞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음. 영민한 명헌이는 나이가 두 자릿수도 되기 전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았지.


우성은 명헌이를 잘 따랐음. 마치 태어나 세상에서 처음 보고 각인된 것마냥 형 뒤를 졸졸 따라다녔음. 명헌이가 스승님으로부터 강론을 듣고 있으면 우성이도 지루해서 몸부림을 치는 한이 있어도 옆에 붙어있었고 검을 수련하고 있으면 이 도련님도 어디선가 제 키에 맞지도 않는 목검을 끌어와서 낑낑대곤 했음. 아직 모든 것이 낯선 어린 우성이는 당연히 사고를 쳤지. 가끔은 명헌이 책에 먹물을 묻히기도 했고 목검을 쓰는 명헌의 옆에서 어설프게 따라하다 혼자 넘어져 엉엉 울기도 했음. 그러면 그걸 수습해주는 것은 늘 명헌이었음. 책을 못쓰게 되어 형에게 혼날까봐 겁먹은 눈망울을 보며 그저 괜찮다 달래는 것도, 채 잘려나가지 못한 억센 풀에 무릎이 쓸려 우는 걸 안아다 마루에 앉혀놓고 상처를 살피는 것도 모두 명헌이의 일이었음. 그러다보니 우성이한테 명헌이는 좋은 사람이 되었음. 화도 내지 않고 늘 곁에 있는 따뜻하고 좋은 사람. 명헌이가 저를 거스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줄을 이 도련님은 모르고.


형, 나는 형이 좋아요. 언젠가 어린 우성이 둥그런 눈에 장난기를 가득 담고 하는 말에 명헌이 우성을 쳐다보았음. 형은 나랑 맨날 놀아주고 맨날 잘해주고 착해. 악의 없는 말에 명헌이는 웃고 말았지. 아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이 애가 알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었음. 내가 너에게 착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건 너에게 목숨줄이 잡혀있기 때문이라고. 너에게 잘해주는 건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떨어진 선택지가 그것뿐인 것이라고.


에이지, 네 생각만큼 나는 착하지 않아, 뿅.


자조를 이기지 못해 비어지듯 나온 말에 우성은 어떤 망설임조차도 없이 답했음. 아니야. 형은 착해요. 단언하는 어조에서는 이미 도련님다운 독선이 묻어났고 명헌은 그 말에는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음.


대단한 가문의 보호 아래 우성이는 차기 영주로 성장했고 명헌이는 그를 따라 장래의 영주를 모실 신하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음. 겉보기에 피를 나눈 형제처럼 지냈던 이전과는 달리 어느 순간부터는 둘의 행동이 달라지게 되었지. 적어도 명헌이 혼자만큼은. 명헌이는 사와키타 어른들이 제게 보이는 호의와 배려가 아직 제가 어리기 때문에 베풀어지는 것인 줄을 잘 알았음. 그래서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부터는 우성이에게 선을 긋기 시작함. 사실 마음속으로 늘 생각은 했지만 결정적인 건 열 다섯 살 생일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이 큰 계기가 되었지. 너도 이제 언행에 책임을 질 나이이니 각별히 신경쓰라는, 맏아들의 생일에 대한 축하보다도 처신에 대한 가르침이 담긴 말이었음.


그리하여 시작은 걷는 위치였음. 어릴땐 우성이와 나란히 보폭을 맞추며 걸었지만 언젠가부터 명헌이는 우성이의 한발짝쯤 뒤에서 따라 걸었음. 우성이 명헌을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지만 명헌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옅게 웃으며 쳐다볼 뿐 그 손을 잡지 않았음. 우성은 입을 꾹 다물며 서운한 내색을 했겠지. 명헌은 그것이 저와 우성이 당연히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했으나... 끝내 제 팔을 잡아 끌어당기는 손에 명헌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음. 한번 잡아온 손은 마치 명헌이 다시 뒤로 물러날까 두려운 듯 떨어질 줄을 몰라서, 명헌은 우성의 시선 뒤에서 그저 입술을 깨물 뿐이었음.


그 다음은 말투였음. 어른들의 용인 아래 썼던 격없던 말투 대신 높임말을 쓰게 되었음. 아침에 우성의 처소를 찾은 명헌은 저를 반기며 달려오는 우성을 안아주는 대신 천천히 허리를 굽혀 머리를 조아렸음. 도련님. 처음으로 그렇게 불렀을 때 우성이는 뜻밖에도 상처받은 얼굴을 했지.


형.


고개를 들어 우성을 마주본 명헌은 그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내리깔고 답했음.


말씀하십시오.
...왜 그래요, 갑자기.


명헌은 생각했음. 갑자기? 그렇구나. 이 애에게는 갑자기일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명헌에게는 갑자기가 아니었음. 숱하게 뱉는 반말과 친근한 호칭 속에서 명헌은 머릿속으로 번역을 하듯 높임말을 새기고 있었기 때문임. 명헌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한참동안 명헌을 말없이 보고 섰던 우성이 몸을 홱 돌렸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명헌에게는 우성이 입술을 얼마나 깊숙이 깨물고 있었는지, 둥근 눈에 얼마나 발갛게 핏기가 어렸는지 보이지 않았겠지. 다만 시야에 들어온 두 발이 돌아서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본 뒷모습이 잔뜩 토라져 있어서 명헌은 짧게 한숨을 쉬었음. 그리고 조금의 간격을 둔 다음 그 뒤를 따랐음. 이번에는 명헌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음.


도련님. 잔뜩 성이 난 뒤통수에 대고 부르는 목소리에 우성의 발걸음이 멈추었음. 그러나 명헌을 돌아보지는 않았지. 도련님. 명헌이 재차 부르자 그제서야 우성이 두 주먹을 꾹 쥐더니 팩 뒤돌았음. 그렇게 부르지 말라구요! 우성의 하얀 얼굴이 뭐가 그렇게 분한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음.


형이 언제부터,


울음이 차오른 숨에 말이 한번 꺾였음.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불렀어요?


그리고 명헌은 후회했지. 처음부터 그렇게 부를걸. 다른 시종들이 그런 것처럼 처음 이 애를 도련님이라고 불렀을 때, 사람 좋게 웃으며 그냥 이름으로 편히 부르라는 어르신들의 말을 곧이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입에 익지 않더라도 처음부터 제 분에 맞는 말투를 써야 했는데. 묵묵히 쳐다보는 명헌에 우성은 숨을 씨근거리더니 기어이 눈물을 왈칵 터뜨렸음. 소매로 얼굴을 박박 닦아내지만 눈물은 애 속도 모르고 주륵주륵 떨어졌지. 아. 명헌은 질린 표정을 숨겼음. 저 애가 우는 얼굴에는 여전히 면역이 없기 때문이었음. 일단 달래주려는 심산으로 걸음을 옮기는 명헌의 앞에서 우성이 고집스레 걸음을 물렸음. 그리고 말했지.


에이지라고 불러요.


요청 내지 부탁의 의미를 지닌 말은 그러나 명령형이었음. 명헌이 대꾸 없이 다시 한발짝 다가갔고 우성은 또 다시 걸음을 물렸음.


에이지라고 부르라구요!


그새 우성의 얼굴은 눈물에 푹 젖어가고 있었음. 이 애는 왜 이렇게도 쉽게 우는 걸까. 눈을 한번 깊게 감았다 뜬 명헌이 결국 우성에게 손을 내밀었음. 우성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지. 애초에 도련님이 저렇게 나오면 제게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명헌은 잘 알고 있었음.


알았어. 이리 와.


그래서 이번에도 명헌은 우성에게 지고 만 것이었음.


에이지.


제게 달려들어 푹 안기는 우성의 무게를 버티려 명헌은 한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었음. 제 허리를 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은 우성을 명헌은 그대로 내버려뒀지. 그러다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는 것에 별수없이 손을 들어 뒤통수를 쓸어줬고....


명헌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우성이 중얼거렸음. 형, 앞으로도 그냥 나 이름으로 불러줘요. 명헌이 대답하지 않으니 곧이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고는 덧붙여왔음.


우리 둘만 있을때라도. 응?


형은 나한테 특별한 사람이니까. 응? 저를 올려다보는 눈에 명헌은 입술이 돌이라도 얹힌 듯 무거워졌음. 특별한 사람. 명헌은 대답 대신 아직도 다 닦이지 못한 눈물이 맺힌 동그란 눈을 손끝으로 쓸어주었음. 그리고 혀 아래 차오른 말을 다시 목구멍 안으로 꾹꾹 눌렀지.


아니, 나는 너의 목숨을 받들 신하 중 하나일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