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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1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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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재업하고 싶은 기분



인간 세상에 섞여 사는 일족이라 양심통만 제외하면 보통 사람과 비슷함. 명헌의 부모님도 평범한 의도로 아들이 건강하게 쑥쑥 잘 자라길 바라며 공놀이를 시켰고, 농구에 흥미를 붙인 명헌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세운 신사 근처 정기가 맑고 토양이 비옥한 고등학교에 털레털레 입학했음.

첫 룸메로 최동오를 만남. 인상이 하도 강하게 생겨서 사실 처음에는 조금 쫄았음. 명헌은 초중학교를 일족과 일족의 혼혈이 많은 집성촌에서 나왔는데 친척들 모두 순둥하고 보얗게 생긴 얼굴들이라 잘생긴 광대뼈와 강렬한 눈빛이 약간 신기한 거임. 그런데 말을 나눠 보니 1학년 최동오는 생각보다 너무 순진하고 섬세한 구석이 있었음. 명헌은 장난기가 발동해서 베시, 베시 하며 말버릇이야. 난 원래 이래. 신경쓰여? 하며 한껏 시무룩한 척을 했고 최동오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아아니, 멋진걸! 하고 대답했음. 그리고 명헌은 막 "ㅋㅋ구라야." 라고 말하려던 참에 갑작스레 명치가 조이는 느낌에 어엌 하고 기숙사 침대 위로 푹 엎어졌음.

반사적인 눈물이 조륵조륵 새어나올 정도로 아팠음. 뭐야? 왜 이래? 그날 저녁 어머니와 통화하고 명헌은 소리 없이 발을 굴렀음. 평소에는 양심통 따위 약하게만 앓고 말던 뻔뻔한 사춘기 이명헌임. 그런데 아마 할아버지 신사 근처라서 피가 짙어진 것 같다고. 대신 거기선 병치레할 일이 없을 테고 운이 잘 따라줄 테니 인간들과 껄끄러울 것 없이 조심조심 잘 지내보라고. 명헌은 허공에 엿을 날렸음. 여기 초면인 빡빡이만 삼백 명 베시. 사내새끼들이랑 어떻게 마찰 없이 3년을 보낸단 말임 베시?

그 후로 최동오와 친구들 앞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이상한 말버릇을 고수하게 된 명헌임. 다른 애들 앞에서는 평범하게 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필 최동오와 1학년 같은 반이 되고 농구부도 같이 들어가는 바람에 이제 명헌과 접점이 있는 동기생 태반이 명헌이 베시, 베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 명헌은 이를 악물었음. 백 명은 족히 될 애들을 속여먹고 그 양심통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명헌은 장난기를 쫙 빼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없도록 사리기 시작했음. 말수를 남들 보기에 영 이상하지 않을 수준으로 줄였고, 함부로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무심한 얼굴을 만들었음. 거북이 영물이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음.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또 시련이 닥침. 명헌이 보기에도 와 쟤는 농구부에 어떻게 들어온겨 베시... 싶게 키가 작고 딴딴한 짱돌같은 애-신현철-가 하나 있었는데, 선배들이 그애를 콕 집어서 툭툭 건드리기 시작한 거임. 다같이 기합을 받을 때에도 맨 앞줄에 선 신현철이 쉽게 타겟이 되었음. 큰 제스처 없이 가만히 뒷짐 지고 버티고 서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농구를 하고 싶은 순수한 꿈으로 강호교에 입학한 만 십오세의 소년이 니는 하루빨리 퇴부하라는 폭언에 조용히 상처받는 모습은 방관하는 것만으로도 명헌에게 양심통을 일으켰음.

아니 나도 1학년인데 베시. 나보고 뭘 하라고. 명헌은 억울했으나 양심통이라는 게 주관적이라 별 수 있나. 그날밤 명헌은 잠자는 신현철의 방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손가락으로 신현철의 발바닥을 쿡, 쿡쿡, 몇 번 찔렀음. 원래 키가 충분히 클 혈통이군. 좀 늦된 건가... 명헌은 막혀 있던 현철의 기류를 풀어주었음. 실수로 잘못 건드려서 원래 백팔십대 후반까지 클 애를 스물둘쯤엔 2m까지 크게 만들어버린 것 같긴 한데 그건 어쩔 수 없었음. 농구하러 왔다고 했으니 열심히 해라 베시.

신현철이 갑작스러운 성장통에 잠을 못 이루고 죽을 것처럼 앓는다는 소문을 모른체하다 또 한차례 가벼운 양심통을 겪게 된 것은 야속한 일임. 이명헌은 명치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며 보건실 건너편 침대에 누운 신현철을 흘끗 보았음. 무릎 통증에 끙끙대는 목소리가 자신의 신음에 겹쳐 들렸음. 신현철이 먼저 말을 걸었음. 너도 성장통이냐...? 명헌은 난 이미 다 컸다 베시. 하고 싸가지없게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약이 안 듣는 통증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해 베시."하고 웅얼거렸음. 그렇게 조금씩 친해짐.

연초의 해프닝 몇 번을 제외하면 명헌의 고교생활은 나름 순탄하게 풀렸음. 운이 따르고 건강할 거라는 게 정말이었는지 명헌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전으로 선발되었고, 한 번의 부상도 없이 주요한 경기에 출전했음. 운과 건강은 명헌과 친한 주변 동기들에게도 미쳤음. 명헌은 즐겁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친구들의 성장을 지켜보았음. 최동오와 신현철에 더해 정성구, 김낙수 등등 농구부에서 부대끼며 명헌의 말을 꼬아듣지 않을 래포를 쌓고 쉽게 상처받지 않는 무던한 배포를 두루 구비한 사내놈들을 어느새 친구라고 부르게 되었음. 코다리조림을 옆 식판에 넘기고 허벅지씨름으로 십연승을 거두어도 양심이 끄떡없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고등학교 생활은 즐거운 것이었음.

정우성이 입학하고 일이 살짝 꼬임. 딱히 신기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떤 휘광으로 온몸을 둘둘 말고 나타난 놈이었음. 모른척 그 앞에서 영물이니 신수니 하는 말을 해보았지만 전혀 못 알아듣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인간이었음. 휘광의 정체는 실력테스트에서 드러남. 농구신? 농구신도 있나? 아무리 봐도 농구신의 축복같은 걸 받았나본데.

무난하게 레귤러로 선발된 정우성이랑은 함께 어울려 다닐 일이 많았음. 한 학년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성은 자연스럽게 무리에 편입되었음. 명헌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명헌이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우성이 쉽게 상처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표정관리를 잘 못하는 고 어린애가 빨개진 귀와 울먹이는 눈과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나 상처받았어요'하고 온 몸으로 고함을 지르면서도 자존심 때문인지 딱히 명헌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고 넘어간다는 거였음.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여전히 대바늘로 가슴께를 죽어라고 콱콱 찔러대는 느낌에 혀를 짓씹으며 명헌은 우성에게 잘 대해주려고 노력했다가, 아예 우성을 피해봤다가, 별 난리를 떨었음.

2학년 인터하이가 끝나고 정우성이 고백을 해왔을 때 명헌은 자신의 온 공덕을 끌어모아 착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음. 그런 거였냐. 하지만 이제 명헌도 호락호락한 신입생이 아니었음. 갈고 닦은 궤변과 합리화를 동원해 자신의 양심을 달랬음. 나는 정우성에게 마음이 없다. 마음이 없는 고백을 받아주는 게 더 못할 짓이다. 명헌은 단호하게 끊어냈음. 우리가 함께할 건 농구뿐이다 뿅. 의외로 차분하게 눈물을 훔치면서 뒤돌던 늘씬한 등을 떠올리고 명헌은 그날밤 양심통이랑은 약간 다른... 아주 가느다란 바늘같은 것이 뱃속에서 휘도는 느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음. 좀 더 다정하게 거절할 걸 그랬나.

명헌은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놀았고, 주장직을 물려받고는 그에 걸맞게 열심히 했음. 산왕에서의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내려고 노력했음. 신현철과는 몸통박치기 세리머니를 하면서 저와는 기껏해야 하이파이브뿐인 정우성이 아주 약간 신경쓰였지만 문제없었음. 이어지는 윈터컵에서는 우승을 따냄. 다같이 힘을 모아 농구부 분위기를 혁신한 동기들, 밤낮 가리지 않고 힘든 훈련을 소화한 부원들, 그들은 노력과 고생에 걸맞는 보상을 받는 것이 마땅함. 이명헌은 진심으로 산왕의 우승을 바랐고 산왕은 우승했음. 하늘이 아닌 인간들이 모여 이뤄낸 성과였지만 그해 겨울에는 혹시 모를 감사인사도 올렸음. 할아버지 고마워용.

명헌은 마지막 인터하이 직후 살면서 그렇게 아플 수가 없을 정도로 크게 앓았음. 자리를 비우기 힘든 부모님이 아키타까지 오셔서 걱정스레 감독님과 면담하고 명헌의 이마를 쓸고 여전히 룸메인 동오에게 잘 부탁하마 말을 건네고 돌아가실 정도였음. 명헌은 다 쉬어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끙끙댔음. 성구와 현철과 낙수가 번갈아 명헌의 방에 앉았다 가며 걱정스러운 말을 몇 마디 했지만 명헌은 원인을 확신할 수 없었음.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윈터컵과 달리 자기를 믿고 따라준 부원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산왕을 응원하던 사람들의 성원에 면목이 없어서. 명헌이 만든 루즈볼을 잡느라 재활이 필요한 수준의 등 부상을 입었다는 상대팀의 어린 유망주도 명헌의 마음을 무겁게 했음. 산왕과 계약기간이 얼마 안 남은 젊은 감독이 누구보다 빨리 충격을 추스리고 건넨 담담한 '기어올라가자'라는 말에 죄송스러웠음. 복도에 무릎을 꿇고 숨김없이 눈물을 토하던 정우성은 개중 정점이었음. 머리가 어지러웠음. 명헌은 푹 쉬어버린 목소리로 성구를 불렀음. 성구야... 성구야. 응 명헌아, 뭐 필요해? 정우성 지금 뭐해...? 걔는 왜 안 와...?

명헌은 여름방학 중 귀중한 보름을 내내 침대에서만 앓다가 조심조심 일어남.

명헌은 이른 아침에 체육관에 나가 연습에 정진하는 다음 세대 부원들을 찬찬히 돌아보았음. 피드백을 하고 건강한 멘탈을 칭찬했음. 앓아눕지 않다니 장해용. 가끔 자학개그를 쳐서 웃겨줬음. 가끔 시간이 나면 팬레터를 읽어볼 용기를 냈음. 질책보다 진심어린 응원이 많다는 사실에 안심해버림. 매니저를 통해 북산 농구부 측에 가끔이라도 좋으니 강백호의 재활 소식을 제게도 알려달라고 청했음. 강백호는 이 천재는 걱정말라고! 어쩌구 하는 카드를 보내줬는데 무슨 팬서비스 차원에서 여러 군데에 뿌리는 것 같았음. 명헌은 뭔가를 오해하는 것 같다고 정정하려다가 조금 웃기고 기특해서 내버려두었음.

명헌은 도진우 감독에게 윈터컵까지 감독님과 함께 뛰겠다고 말했음. 도 감독은 코트 위에서는 명헌에게 대단한 재량을 허락하면서도 코트 밖에서는 그를 딱 열여덟 살처럼 대했는데, 약간 감동받은 듯했으나 곧 깍지를 끼며 하반기 동안 후진 양성이 얼마나 잘 되는지 지켜본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자상한 결론을 내렸음. 명헌은 수긍했음. 그 후로는 누워지내는 동안 빠진 근육을 보충하기 위해 현철과 운동하고, 낙수와 산책하고, 성구와 시시덕거리고, 동오와 노래를 들으며 좀 더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음.

명헌은 우성도 찾아갔음. 휴일이면 둘이 말없이 시내에 나가서 오락실을 들렀고, 역시 별 말 없이 영화를 봤고, 카페에서 이상한 메뉴를 시켜서 함께 먹었음. 마주보면서 식사하는 건 왠지 어색했지만 단둘이 같이 쏘다니는 건 우성이 출국하기 전까지 계속되었음. 여름 끝물에 우성은 명헌에게 명헌은 우성에게 긴 사과를 건넸음. 충분히 잘하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차마 일찍이 찾아가기가 어려웠다는 요지가 서로 같았음. 우성은 공항에 나와줄 수 있냐고 부탁했음. 부모님 말고는 아무도 부르지 않을 거지만 형만은 나와주면 좋겠다고 했음. 명헌은 비로소 약간 간질간질한 기분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음.

밤에 명헌은 어머니께 편지를 쓰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음. 인간과 연애해도 되나용.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을까용. 이런 말은 전화로 물으면 부끄러울 것 같았음.




산왕즈 산삼즈 약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