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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9 15:55
알못ㅈㅇ


아무리 뭐든 있는 궁 안이고 황태자가 아쉬울게 없다고는 하지만 답답해지면 종종 궁 밖으로 잠행 나가는 태웅이겠지. 근데 하필 그날은 저잣거리 축제날이었음. 이국에서도 상인들이 몰려오고 어린애들은 인형과 나무로 만들어진 장난감을 들고 뛰어다녀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그냥 돌아갈까... 하던 차에 갑자기 어깨가 덥석 잡힘. 말타기와 활쏘기로 다져진 몸이 움직이지가 않을 정도로 강한 손아귀였음. 태웅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리겠지.


"너냐 어린애 돈 훔친게?"


자신과 비슷한 키와 덩치의 남자였음. 그것도 빨간머리를 한... 이방인인가? 우리 말을 잘 하는군. 어찌되든 좋을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그 빨간머리가 도둑질은 나쁜거라며 머리를 박아옴. 퍽! 이마가 깨진다는게 이런걸까. 태웅은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똑바로 세웠어. 갑자기 이게 무슨 봉변인지 모르겠는데 자신의 머리를 깬 남자는 여전히 화를 내고 있었음. 그때 어린애 셋이 우르르 이쪽으로 다가오는게 보임.


"빨간머리 형아! 도둑잡았어!"
"뭐? 그럼 이녀석은..?"
"말했잖아 도둑은 여우같이 생긴 남자라고"
"...충분히 여우같이 생겼는데"


태웅은 누가 자기 보고 여우같다고 칭하는 건 또 처음이라 헛웃음이 남. 이런 멍청이가 다 있네. 빨간머리는 상황파악이 완료되었는지 삐그덕 삐그덕 겨우 고개를 돌리더니 와하하 웃어버림. 형씨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태웅의 머리에서 피가 주륵 흘렀고 애들이 형이 사람을 죽이려 했다며 빨간머리를 곤란하게 만들었음.



자신히 도둑으로 몰아 이마를 찢은 이 남자가 존엄하신 황태자 전하이신줄은 모르고 산사나무열매 꼬지와 닭날개로 대충 얼버무리려고 하는 이 행태를 누군가 알았으면 기절했을거임. 당장 거꾸로 매달아 매질을 당해도 시원찮을텐데 태웅은 강이 보이는 다리에 앉아서 그걸 주는대로 먹고 있겠지. 내가 그럴줄 알았나. 너무 여우같이 생겨서 말이지~ 자신의 이름을 강백호라고 소개한 남자는 제멋대로 태웅을 여우라고 부르고 있었음. 태웅은 어떻게 방금 만난 사람한테 이렇게나 말이 많은지 강백호가 신기해서 계속 듣고 있겠지. 들어보니 저잣거리의 그 아이들도 오늘 만난 생판 남이래. 그냥 애들 돈을 훔쳤다는걸 알고 빡쳐서 자기가 찾아주겠다고 호언장담 했다고 함. 강백호는 자신의 몫으로 산 딸기를 다먹고 태웅의 산사열매도 노리고 있었음. 그걸 또 넘겨주는 자신도 이상하긴 해.

"축제 마지막 날엔 불꽃을 쏘아 올린데"
"...."
"나 한번도 본적 없어 밤하늘에 꽃이 핀다는데 다들 설명하는게 영 구려"
"...."
"너도 보러 오는거냐?"
"...저기 언덕 위 정자가 보기 좋을거다. 멍청이"



황가의 소유인 정자였음.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한지 모르겠어. 백호는 자기는 여기 지리를 잘 모른다며 여우가 데려다주면 딱이겠다고 또 멋대로 약속을 정해버림.


"그럼 내일도 보는거네?"
"멍청아 불꽃은 나흘 뒤야"
"아 그럼 그때까진 안 올거야..?"
"...여기서 본다 늦지마"


졸지에 나흘 동안 궁궐을 벗어나게 되버린 황태자 전하이심. 그냥 무시하면 되는데 목소리가 커서 그런가 한마디 한마디가 거슬려. 태웅은 경비병에게 금화 한닢을 쥐어주고 못본채 해달라고 한 것도 잊지 않았음.





강백호는 정말 중앙의 지리를 몰랐음. 한 눈을 팔면 산쪽으로 가려고 했고 장터에는 처음 보는 물건들과 과일들 투성이라며 태웅에게 이걸 사달라 저거는 무엇이냐 조르고 물어보고 바빴지. 서역에서 온 우유과일을 색깔이 이쁘다고 멋대로 먹더니 떫은맛에 인상을 구기고 혀를 내민채로 웩웩 거리지를 않나. 천에 뛰어들어 물장구를 치다가 넘어져서 살려달라고 울지를 않나. 백호의 행동에 휘말리다 보면 어느새 가지고 나온 돈은 바닥 나 있고 옷은 다 젖어있었음. 그런데도 이 멍청이는 재밌지 않냐고 목을 젖혀서 웃고나있지.


"그래서 넌 어디 살아? 이름은?"
"알거 없어"
"또 저런다 멍청이는 내가 아니라 너야"


처음엔 정말 강백호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거였음. 어차피 나흘뒤면 만나지도 않을텐데. 이런거에 연연하고 신경쓰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거 알면 헤어짐만 빨라질뿐이었음.

오늘은 하루를 넘기고 나서야 궁으로 돌아왔어. 시간이 왜이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지.



강백호는 그렇게 불꽃놀이만 기다렸는데 서태웅은 아니게 되었음. 내일이면 불꽃을 볼 수 있어. 오늘 드디어 불꽃놀이네? 앞으로 한시각 후면... 점점 가까워지는 시간에 서태웅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불꽃이 이렀음. 진짜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 굉음과 함께 터졌을 때, 얼마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강백호가 자신은 안보고 불꽃만 봐서 그랬나... 멍청이 불꽃이라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다고. 환하게 웃는 옆모습이 얄미우면서도 참 예뻐서, 참지 못하고 턱을 잡아 끌어 입을 맞춰버렸음. 강백호가 피하지 않는다는 걸 알자마자 허리에 손도 올렸지. 황제의 정자에서 저잣거리 청년과 이런짓을 했다는걸 들켰다간 큰일날거였지만 태웅은 그런건 생각나지도 않았음. 백호가 뒤늦게 태웅을 밀침. 눈이 동그래져 있고 얼굴색이랑 머리색이 똑같아졌어. 태웅이 잠시 숨을 고름.



"나한테 와. 사실 난..."
"나 혼인한 몸인데"
"뭐?"
"아니 좋아서 한건 아닌데 그렇게 돼서.. 이거 비밀로 해주라 응?"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벅벅 긁는 그 멍청한 모습이 서태웅이 기억하는 강백호의 마지막 모습이었음.


혼인을 했다고? 그 멍청이가? 이민족이나 외국의 사람처럼 보이긴 했어. 그런데 중앙은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 행상을 따라 왔거나 귀족의 일꾼인줄 알았음. 그러고보니 밤에 그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입은 옷도 거칠고 남루한게 아니긴했음. 지아비는 있지만 교류가 없는 상태임이 분명했어. 도성 안에 있다면 찾을 수 없는건 아니었음.



"중관, 이미 혼인한 음인을 비로 들인적 있느냐"
"있습죠. 악군으로 흉흉했던 제공의 폐위 이유 중 하나지 않았습니까"
"....."




한동안 밤 중에 궁을 나가 잠행을 하더니 요새는 또 서고와 교육관만 다니길래 안심했더니 저런 질문은 갑자기 왜 하는건지 불안함. 워낙 말도 없으신 분이면서 가끔 이상한걸 물으신단말이야... 이 환관은 한숨을 몰래 쉬고 오늘에야 말로 하고 싶은 말을 했음. 북쪽에서 온 앵수당 마마님과의 합방을 미루면 안된다는거였지. 원래라면 황제폐하의 비가 되셨어야 하나 마마님 나이가 어려 전하의 사람이 되었으니 이것도 인연이 아니겠냐고 꼬드기는것도 하루이틀이지.... 그치만 제 주인은 피곤하니 활을 쏘러 가겠다며 이상한 핑계로 자리를 피하기나 했음.



결국 황태자가 합방을 거부하고 있다는 말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고 나서야 이루어짐. 태자빈도 아니고 고작 후궁과의 합방에 열을 내다니. 이럴거면 아바마마가 취하시질 그랬냐고 투덜거렸다가 벼루로 맞을뻔하기도 함. 환관은 태웅을 후궁이 있는 당으로 안내하며 그쪽도 딱히 전하를 반기지 않으니 피차일반이라고 그저 하루만 그곳에서 침수 드시기만 하면 된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줌. 하긴 석달 전에 왔다고 하는데 여태 얼굴 한번 본적 없으니... 먼저 인사 하러오지 않은거 보니 그쪽도 성격이 만만치 않은거 같긴함. 북쪽이 좀 그런 나라인가보지. ....걔도 북쪽에서 온거 같던데... 생각을 줄이려고 했는데 또 불쑥 떠올라 태웅이 미간을 모음. 합방 전 기분만 더 안좋아졌지.



그리고 겹겹이 닫힌 장지 문들을 시종들이 하나씩 열어주어 방 안에 당도 했을 땐 서태웅은 자신이 꿈을 꾸거나 헛것을 보고 있는줄 알았음.


"...강백호"


베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지만 붉은머리가 비춰졌어. 거기다 저 키에 저 어깨는 한명밖에 없잖아. 한번 보고는 못 잊는다고. 심장이 다시 쿵쿵 뛰었음. 이미 혼인한 몸이라더니 그 상대가 자신일줄이야. 좀 더 일찍 보러 올걸. 그랬다면 이미 저 몸을 취하고 멍청하고 귀여운 얼굴을 마주보며 매일을 보낼 수 있었을텐데 말이야. 태웅이 문을 쾅 닫자 밖에있던 환관이 놀랐음. 이게 좋은 징조인지 나쁜징조인지 모르고 걱정되었으나 시종들을 무르고 좀 더 거리를 떨어뜨리겠지.


백호도 자신의 정면으로 다가 온 태웅의 얼굴에 놀라면 좋겠다. 상상도 안했음. 저잣거리에서 만난 여우자식이 제 지아비일줄이야. 석달동안... 꼬리도 보이지않고... 독수공방 하며 시종들에게 무시나 당하게 한.....
태웅이 백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백호의 인상이 험상궂게 변함. 마치 첫날에 도둑으로 태웅을 오해한 그때처럼 말이지. 그리고 뻑! 하는 소리가 둘 사이에 들려오겠지. 그때처럼 피는 나지 않았음. 이것도 황태자라 나름 힘조절을 했거든.


"여우자식이 아니라 개자식이었잖아"
"무슨짓이냐 멍청이"


태웅이 머리를 잡고 정신을 차리는 동안 백호가 불편하고 치렁치렁한 옷을 들고 벌떡 일어나면 좋겠다. 그리고 다가간 곳은 창문임. 드르륵 탁!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와 백호의 베일을 날리고 빨간 머리칵락도 같이 흩날렸어. 태웅은 와중에 그 모습이 참 잘어울리다고 생각함.



"영감한텐 니가 알아서 말해 난 오늘 밖에서 잘거야"
"저 멍청이가!"



그리고 뛰어내리겠지.... 여긴 이층인데 망설임도 없이 아주 익숙한 모양새야... 태웅은 얼얼한 머리를 잡고 앉아 백호가 나간 창문을 바라봤음. 굴욕감이나 좌절감은 들지 않았어. 일단 역사에 기록될 악군이나 폭군은 되지않아도 되는거잖아.









태웅백호
백호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