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ygall.com/546674725
view 2969
2023.06.05 04:55



연반ㅈㅇ 알오ㅈㅇ



아마미야는 연국으로 출발하기 전 은방울꽃궁에 와서 노부의 반려에게 칠흑처럼 까만 함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노부는 아마미야에게 미리 이 함의 내용물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착잡한 마음으로 함을 흘긋 바라보고 태자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어보시오, 나의 비. 위험한 것은 전혀 아니니."

태자비는 함을 열고 안에서 칠흑같던 함보다 더 새카만 팔찌를 발견하고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태자비가 들어올린 팔찌는 온통 새카만 색인데 안쪽에는 선명한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어서 마치 팔찌 안에서 뭔가가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뭡니까?"

반려는 앞서와 똑같은 질문을 하며 신기한 듯 팔찌를 만졌지만 노부는 그 팔찌에 손을 대자 즉각 본능적인 거부감이 밀려왔다. 견디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나 불쾌함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팔찌가 노부를 거부하고 밀어내려 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신수의 힘이 가득 담긴 물건을 건드렸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지 않은 것을,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것을 아직은 인간인 반려의 몸에 채워야 하는 것이라 노부는 그 거부감을 삼키며 반려의 팔에 새카만 반지를 직접 채워주었다. 노부의 반려는 회임을 알게 된 후로는 수련을 할 때도 무리하지 않도록 조심하고는 있지만 어쨌든 매일 수련을 쉬지 않는 사람이라 군살이 없다 보니 팔찌는 반려의 팔에 헐렁하게 걸렸다. 그러나 팔찌가 팔목에 끼워진 순간 팔찌는 스스로 줄어들며 반려의 손목에 착 달라붙었다. 노부의 반려는 팔찌가 알아서 줄어들어 손목에 붙자 흠칫 놀라더니 노부를 바라봤다. 

"팔찌가 줄어들었습니다."

노부를 바라보는 태자비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지만, 침착하게 노부를 바라봤다. 노부는 수상한 상황에서도 전적으로 신뢰를 보내주는 반려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한숨을 삼켰다. 다행히 노부가 팔찌에 직접 닿지만 않으면 팔찌를 차고 있는 반려를 끌어안는 정도로는 현무의 힘과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 팔찌에는 현무의 힘이 담겨 있소."
"현무 말씀이십니까?"

노부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채를 팔락거리고 있던 아마미야가 끼어들었다. 

"저는 무뚝뚝한 청룡이나 경망스러운 주작과 달리 몹시 성격이 좋기 때문에."

아마미야는 진심으로 제 성격을 자랑하고 싶은 건지 긴장한 것 같은 청룡의 반려를 달래주려는 건지 너스레를 떨었지만 노부의 반려는 노부의 손등을 토닥이며 노부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미야가 뭐라고 하든 노부의 반려에게 제일 좋은 사람(?)은 노부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노부만 바라보고 있자, 아마미야는 삐진 척 부채를 한 번 착 접었다 펼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타케루가 잠들기 전 자신의 힘을 담은 팔찌를 제게 주고 잠들었습니다. 자기는 자신의 반려가 다시 태어났는지 감지할 수 있는 힘만 갖고 있으면 되니 우리에게 자신의 힘이 필요한 경우에 쓰라고 했죠. 혹시나 이 팔찌에 담긴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순간이 오게 되면 자신이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고."

타케루가 자신의 힘을 담은 팔찌를 만들 수 있었던 건 타케루가 잠들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신수들은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힘을 다른 물체에 덜어내면 힘을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노부는 자신의 힘을 담은 물체로 반려를 보호하는 방법을 쓸 수가 없었다. 

"그대가 이 팔찌를 차고 있을 때 위험이 닥치면 그대가 느낄 수 있을 것이오."
"어떤 위험 말입니까?"
"현무는 미래를 읽을 수 있소. 현무의 본체가 아니라 그의 힘만 담아놓은 물체인 만큼 완벽하게 미래를 읽어내지는 못하겠지만,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그대가 독이 든 물건을 건드리도록 유도하려 하거나, 독이 든 뭔가를 먹이려 들거나... 그런 경우에 팔찌가 그대에게 경고해 줄 것이오. 물론 내가 항상 그대를 지킬 것이니 그런 일은 없겠지만 기왕 있는 팔찌를 활용하려는 것뿐이오. 걱정할 건 없소, 나의 비."

노부의 반려가 순진해 보여도 마치다 케이타 역시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궁에서 태어나고 자란 왕실 핏줄이라 회임했을 때 항시 경계해야 한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 만큼 노부의 반려는 검은 팔찌를 한 번 쓰다듬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항시 착용하고 있겠습니다."

자신의 반려가 다른 신수의 힘이 담긴 물건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내키지는 않으나, 미래를 볼 수 있는 현무가 맡겨 둔 팔찌라면 맡겨 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노부는 한숨을 삼키며 반려를 끌어안았다. 





노부의 반려는 아마미야가 여정을 서둘러야 하니 나가보겠다고 떠난 후, 조금 도톰한 배를 조심스럽게 받치며 노부를 바라봤다. 

"저는 소주방에 좀 다녀와야 합니다."
"소주방? 은방울꽃궁의 소주방 말이오?"

태자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황제나 황후, 태자 정도의 궁에만 소주방이 딸려 있지만 노부는 태자비를 수윤제국으로 데리고 오며 태자비 궁을 만들 때 태자비 궁에서 먹는 음식은 태자가 직접 뽑은 궁인들이 태자비 궁 안에서 직접 만들 수 있도록 태자비의 궁 안에 소주방을 만들어 두었었다. 

"간식을 만들려는 것이오?"
"아닙니다. 오늘이 4황자비의 탈상제입니다. 전하. 4황자비가 떠난 지 2년 되는 날 아닙니까. 제가 탈상제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4황자비가 생전에 저를 많이 예뻐해 주셨으니 제사 음식이라도 좀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1주기 기제사 때와 명절 제사 때는 과일만 보내드린 것이 맘 쓰여서 이번엔 좀 제대로 챙겨볼까 합니다."
"그럼 같이 갑시다."
"아닙니다. 제가 직접 요리를 할 것도 아니고, 어떤 음식을 보내면 좋을지 숙수와 의논만 잠깐 하고 올 것이니, 전하는 일하십시오."
"일?"

태자비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태자의 뺨을 콕콕 찔렀다. 

"전하, 그동안 부친이 된다고 기뻐서 일은 등한시하시었죠? 아침에 별실에 가 보니 전하의 서탁 위에 장계가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요즘은 연국에 보낼 사절단을 갑자기 꾸리고 4황자에 대한 조사를 하느라고 황제가 넘겨준 장계를 살피는 일을 게을리한 것은 사실이었고, 봐야 할 장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민망해진 노부가 헛기침만 하자, 노부의 반려는 도톰하게 나온 배를 조심하며 노부에게 입을 촉 맞춰주었다. 

"궁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은방울꽃궁 내의 소주방에 잠깐 다녀오는 것 뿐이니까 일하고 계십시오. 제가 숙수와 함께 4황자의 왕부에 보낼 제사 음식을 정한 뒤에 다과를 갖고 오겠습니다."
"알겠소. 직접 무거운 걸 들지 말고 궁인들에게 맡기시오."
"알겠습니다, 전하."

노부의 반려는 자기가 콕콕 찔렀던 노부의 뺨에 촉촉 입을 맞춰주고 궁인과 사박사박 소주방으로 향했다. 





장계는 정말 산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에 노부는 다음 날에야 장계를 다 검토하고 태자비를 품에 안은 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태자비는 4황자의 왕부에 과일과 전병, 양갱을 보내주었다고 하며 생전에 입궁할 때마다 태자비에게 달콤한 당과를 자주 사다 주었던 다정한 4황자비가 그리워 한숨을 폭 내쉬었다. 노부는 4황자비의 얼굴만 겨우 아는 수준이지만 태자비의 쓸쓸함과 슬픔이 얼마나 깊은지는 알고 있으므로 우울해진 반려를 토닥이고 있을 때였다. 은방울꽃궁의 총관태감이 다가와 불청객의 방문을 고했다. 

"4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넷째 형님이 날 만나러? 청룡궁으로 안내하게, 나도 곧 갈 테니."

그러나 은방울꽃궁의 총관태감은 난처한 낯으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태자 전하가 아니라 태자비 전하를 뵈러 오셨다고 합니다."
"넷째 형님이 나의 비를?"

사망한 4황자비나 태자비나 모두 황자의 반려들이었고, 황제나 황자녀의 반려들은 황실에 속하지 않은 보통의 음인들보다 더 처신에 주의를 요했다. 풍국의 현 황제가 지금 정통성에 의심을 받고 있는 것처럼, 훗날 황실 정통성에 의혹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황실의 음인들은 자신의 반려가 없을 때는 다른 양인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노부나 류세이나 자신의 반려들이 누군가에게 눈을 돌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의 눈 때문에 소라가 태자와 태자비를 만날 때는 늘 류세이가 동석했었다. 마찬가지로 4황자비가 생전에 태자비를 방문할 때, 4황자가 같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태자가 그 자리에 동석한 적도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 4황자가 태자비를 만나자고 한다고? 태자에게 미리 알리지도 않고?

"넷째 형님이 나의 비를 만나는 것이 예가 아님은 형님께서도 잘 아실 터인데?"

노부가 불쾌한 낯을 하자, 총관태감은 더욱 허리를 숙였다. 

"태자 전하가 있는 자리에서 태자비 전하를 뵐 것이며, 태자비 전하에게 닿지 않을 것이니 발을 치고 만나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형님이 나의 비를 만날 이유가 무엇인가?"
"어제 돌아가신 4황자비의 탈상제에 음식을 보내주신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시고자 오셨다고 합니다."

노부와 케이타는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 2년 전 4황자비가 사망했을 때는 워낙 경황이 없었기 때문에 장례를 돕지 못했지만 작년에 1주기 제사 때나 명절 제사 때마다 제사 음식을 보내 주었었다. 과일 뿐이었지만 황실 진상품 중 가장 좋은 과일들을 받아와서 보내주었었다. 그러나 그때 4황자는 찾아오기는커녕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조차 없었는데 갑자기? 갑자기 예의를 갖추게 된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태자는 태자비를 무릎에 올려앉히고 보호하듯 폭 끌어안으며 총관태감을 바라봤다. 

"나의 비가 회임 중이라 사람들과의 만남을 자제하고 있으니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고 전하여라."

태감이 나가고 태자비도 불안한지 노부의 품에서 현무의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괜히 태자의 뺨과 입술에 입술을 촉촉 맞추고 있을 때였다. 잠시 후에 총관태감이 다시 돌아오더니 고개를 숙였다. 

"4황자께서 4황자비의 유품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는데 생전에 태자비 전하께 드리려다 드리지 못한 팔찌가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 팔찌를 전하고자 한다는데 어찌할까요?"

4황자가 의심스러운 상황이긴 한데 유품을 전달한다는 걸 무조건 막는 것도 예는 아니었다. 게다가 4황자비를 많이 따랐던 태자비가 유품이 있다는 말에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도 보였다. 할 수 없이 태자가 태자비를 궁 깊은 곳에 숨겨놓고 혼자서 나가보기 위해 일어섰을 때였다.

노부가 직접 청룡의 힘을 담아서 펼쳐둔 태자비궁의 결계에 청룡이 허락하지 않은 물건이 닿았다는 것을 느꼈다. 노부는 은방울꽃궁 주위로 결계를 펼칠 때, 아몬 및 태자비의 호위들을 지정하며 그들을 제외한 이들은 누구도 날붙이를 지니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인체에 해를 끼치는 독이나 저주가 담긴 물건들도 막아줄 수 있는 결계였다. 청룡의 주된 힘은 방어, 백호의 힘은 정화, 주작은 치료, 현무는 예지였기 때문에 사신수 중 가장 강한 결계를 칠 수 있는 건 청룡이었다. 그런 청룡이 친 결계가 결계를 친 주인에게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역시 4황자가 노부의 반려를 노리는 건가. 노부가 불안과 분노를 억누르며 뛰어나갈 때 궁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하니 허가도 없이 무조건 밀고 들어올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닐 텐데. 문을 열고 나가자, 4황자의 시종이 산산조각난 푸른 팔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4황자가 시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시종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태자 전하. 이 모자란 녀석이 내 정비가 태자비 전하께 드리고자 했던 팔찌를 이렇게!"

4황자가 가리키는 건 산산조각나 있는 청보석 팔찌 조각들이었다. 노부가 깨진 조각 하나를 들어보자, 정말로 맑고 투명하며 푸른 색이 짙은 고급 청보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긴 했으나, 직접 만져 보아도 독이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청룡에게는 물론 독 따위가 통하지는 않지만 신수인 만큼 독이나 저주가 담긴 물건이라면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이 청보석 조각에서는 어떤 독이나 저주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분명히 허락하지 않은 위험한 물건이 결계에 닿은 것을 느꼈는데. 하지만 청룡의 힘은 방어에 특화돼 있어서 결계에 닿은 것을 정화해 버리는 백호와 달리 결계에 닿는 불순한 것들을 자동으로 정화하지는 않으니, 이 팔찌가 결계에 닿아서 독이 없어지거나 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요즘 태자비의 안전에 골몰하는 데다 4황자를 지나치게 의심해서 결계에 뭔가 닿았다고 착각한 건가. 

"4황자비가 전해주고자 했었던 팔찌라 나의 비도 받았으면 기뻐했을 것 같은데, 유감입니다, 형님."
"그러게 말입니다. 아랫사람으로 모자란 것을 두어서."

4황자는 쯧 혀를 차고 노부가 들고 있는 큰 청보석 조각을 바라보았다. 

"태자비 전하께 꼭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4황자비의 시선이 집요하게 청보석 조각에 고정돼 있었다. 지나치게 집요하게. 





#노부마치수수께끼의황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