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hygall.com/544965666



먹잇감을 괴롭히기 전 꼭 짓는 못된 웃음, 그것을 보았다. 몸을 섞지 못한 기간이 있으니 오래간만에 과격한 행위를 하시려는가보다 하였다. 그런데


"정녕 이것이 맞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예쁘기만 하오."
"그래도..."


이건 예상과 달랐다.


황제는 흡족하게 귀비를 이리저리 돌려세웠다. 마치다는 세 바퀴를 돌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쳤다. 난감하게 황상을 올려다 보았다. 어디에 가신다는 건지는 듣지 못하였어도 몰래 출궁하실 거란 말씀은 들었다. 하여 미리 의복을 준비해 두었다. 지극히 평범한, 종종 후궁들의 친인척들이 황궁을 방문할 때 볼 법한 차림의 옷이었다. 혹 정체를 들킬까봐 얼굴을 가릴 장옷까지 꼼꼼히 준비하여 만전을 기했다. 그런데 황제는 다른 외출복을 가져왔다. 불길할 정도로 묵직한 보따리를 받아들며 마치다는 싸한 느낌을 받았다. 멀쩡한 옷은 아닐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보따리에서 나온 건 모든 사람의 눈에 띄기로 작정하지 않고서는 입을 수 없는 기생복이었다.


"폐하. 나인들의 눈이 밝습니다. 이 차림으로는 조금만 거닐어도 다 들키겠습니다."
"모르는 소리. 요새 궁 안을 활보하는 기생들이 많소. 귀비가 이것을 입고 돌아다니면 아무도 그대를 알아보지 못 해. 기생무리에서 한 명이 빠져나온 줄 알겠지."


마치다는 깊은 탄식을 삼켰다. 틀렸다. 이미 기생 차림을 보겠다고 정하셨다. 그 못된 웃음의 정체가 이것이었구나...


기생 중에서도 이 만큼 화려한 옷은 천출만 입는다. 왕자 출신에 현존하는 내명부 최고 후궁이 기생옷을 입는다는 그 자체도 어불성설이지만, 작정하고 천출 흉내를 내라는 요구는 해도해도 참 너무하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괜한 헛수고로 힘 빼 봤자다. 


휘황찬란한 자색 치마를 소심하게 쥐고 오므렸다. 그렇게 하면 요란벅적한 치마가 가려지기라도 하는 듯이. 야속한 치마는 금실로 놓은 자수를 번쩍이며 더욱 존재감을 과시하였다. 이쯤 되면 신분에 맞지 않는 옷이 문제라기보다 너무 허황된 옷을 입은 어색함이 더 큰 듯도 하였다. 물론, 이런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은 더더욱 없고.


"케이. 이걸 보십시오."


황제의 욕심은 옷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이옵니까?"


몰라서 질문한 게 아니다. 황제가 내민 자단목 함은 보석과 장신구를 보관하는 패물함이었다. 


"하나하나 고심하여 골랐소."


뚜껑을 열자, 자진해서는 절대 착용하지 않을 장신구 무더기가 빛을 받고 반짝였다. 황제는 나비모양 떨잠을 꺼내 귀비의 머리에 냅다 꽂았다. 장식에 쓰인 보석의 중량감 때문에 단번에 머리가 무거워졌다. 


"잘 어울리는군."
"하하.."


이를 어쩔꼬. 마치다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라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었다. 지금이야 말로 울지 못해 웃을 때가 아닐지... 싫다고는 말 못하고 떨잠을 매만지는 사이 황제는 직접 금가락지를 끼우고, 자개 장식이 아주 아름다운 노리개를 달았다. 가치가 귀한 만큼 무게가 상당한 보석을 주렁주렁 달자 몸이 족쇄를 채운 듯 늘어졌다.


"별로 기뻐 보이지 않는구려. 고맙지 않은 것이오? 전부 그대에게 주는 선물인데."
"황공하옵니다, 폐하. 소중히 간직하겠사옵니다."
"간직만 하지 말고 달고 다니시오. 그대는 검소한 황비일 필요가 없단 말이야."
"예.."


아니. 대답은 예라고 했어도 정말 일상생활 중에 달고 다닐 자신은 없다. 마치다는 황상께서 보실 때만 잠깐 착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아직 부족하다고 하였다. 잠시 후 상궁 둘이 낑낑대며 거대한 경대를 날라왔다. 그들은 미묵과 분, 연지가 든 접시를 경대 앞에 차곡차곡 진열했다. 일찍이 명을 받아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익숙하고 신속한 몸놀림이었다. 마치다는 일언반구도 없었던 상궁에게 추궁의 눈빛을 하였지만, 상궁은 송구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이, 이것이 다..."
"기왕의 외출이니 치장도 하시오."
"소첩은 이미 치장을 조금 하였사옵니다. 이대로 출발하면 아니되는 것이옵니까."
"안 되오. 내가 가져온 걸로 다시 하시오."


떨리는 눈으로 화장품을 살폈다. 귀비가 평상시에 미량씩 사용하던 것과 전혀 달랐다. 분에서는 훨씬 뽀얀 빛이 났고, 첩에 찍은 연지는 깊고 짙은 빛깔을 뽐냈다. 짐작컨대 이 또한 기생의 물건이겠다. 이것을 덕지덕지 발랐다가는 살아있는 감옥인 채로 외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정녕 다 발라야 하옵니까?"
"어허,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 어서 칠하시오! 이런 치장을 한 케이가 보고싶어 그러니까."
"...."
"지체 말고 칠해보라니까?"


......포기했다.


귀족 집안 정부인 같은 화장이 차림새와 겉도는 것은 사실이다.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수정이 필요하긴 했다. 마치다는 화장도구를 들고 대기중인 상궁들 앞으로 가, 잠자코 눈을 내리뜨고 앉았다. 상궁의 분주한 손길이 귀비의 얼굴을 간지럽히며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경대에 비친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점점 도화살을 맞아가는 가련한 이가 있었다. 당신은 누구냐고 묻고 싶다. 과연. 이런 눈에 띄는 차림을 해도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는 황상의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겠다. 거울 속 그는 더 이상 귀비로 보이지 않았다. 기생으로 보였다. 아니, 기생으로 보이면 차라리 다행이다. 너무 짙고 고혹적인 치장 떄문인지 창기...로 보였다. 그것도 음란행위로 재산을 아주 많이 부풀린 창기.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치장이 끝났다. 피부마저 무거워진 채 황상을 돌아보았다. 과한 화장이 너무나도 민망했다. 황상께는 물론이고, 특히 궁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마치다는 쥐구멍에 숨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짓궂게도 황제는 뒷짐을 지고 굳이 더 아래에서 귀비의 얼굴을 탐색하였다. 곧 황제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우리 나가지 말고 업고 놀까?"


입이 떡 벌어지는 말씀이셨다. 외출하지 않을 거면 왜 그 고생을 하였는가? 너무 억울하여 마치다는 저도 모르게 격앙된 어조로 따져물었다. 


"이제 겨우 준비를 끝마쳤는데 잠행을 취소하신단 말씀이십니까?"
"아, 아니. 농 좀 쳤소. 나가야지. 그럼."


얌전하기만 한 귀비가 강단있게 언성을 높일 줄 몰랐는지 황제는 허둥지둥 말을 바꿨다. 그러나 마치다는 안다. 분명 농이 아니셨다. 놀리는 데도 정도가 있지! 또 말씀을 바꾸기 전에 마치다는 얼른 쐐기를 박았다.


"허면 가시지요."
"...."
"폐하. 가시지요!"
"그래, 가야지. 나를 너무 의심하지 마시오. 오늘을 위해 내탕고도 털었소."


황제는 두툼한 주머니를 내보였다. 그러니까,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금고를 주머니 한 개로 털었다고 주장하고 계시는 것이다. 털었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소액이지만, 어쨌든 하룻밤 잠행에 쓰이기에는 넉넉한 금액이 들었으리라. 나가기는 하실 건가 보다. 마치다는 쓸 데가 없어진 장옷을 상궁에게 넘겼다. 그리고 황제가 준 전모를 썼다. 이로써 확실히 기생처럼 보일 자신의 모습을, 차마 경대로 직접 확인은 못하겠고 상상으로만 그려보았다. 너무 창피하여 너울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황제의 취향이란 얼마나 화려한지 너울 마저 자수가 빽빽했다. 부부는 다소 안절부절 못하는 마치다와 흐뭇하게 곁을 지키는 황제의 분주한 걸음을 시작으로 외출에 나섰다.


말을 타고 한참 달리다 어둠이 짙게 내린 오솔길에 멈춰섰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했다. 활동성 따위는 없는 차림이라 마치다는 황제에게 안겨 말에서 내렸다. 여기가 어딘지, 또 목적지는 어딘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황제는 자신있게 말했다. 


"기대해도 좋을 거요."
"아직도 어디에 가는지 말씀해주지 않으십니까?"
"미리 말하면 직접 보았을 때 재미가 반감되잖소."


대체 얼마나 좋은 곳이길래.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다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황제를 따라 열심히 걸었다. 


"오. 저것을 보시오!"
"...?"


갑자기 공중을 향해 뻗은 손가락에, 마치다는 거추장스러운 전모를 목 뒤로 넘기고는 고개를 들었다. 별무리가 쏟아지는 하늘에 형형색색의 풍등이 일제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아아, 세상에."


관등놀이였다! 다채로운 빛깔을 뽐내며 하늘을 밝힌 풍등은 드넓은 허공을 천천히, 그러나 빼곡하게 채워나갔다. 풍등이 하늘을 대부분 덮을 쯤엔 불빛이 숲의 어둠을 밀어내고 세상에 환해졌다. 정말 아름다웠다. 마치다의 눈망울이 하염없이 떨렸다. 


"우리도 어서 가서 날립시다."


황제는 귀비의 손을 잡고 내달렸다. 풍등이 저만치 가까이 날아올랐음에도, 여기서부터 관등놀이를 하는 곳까지는 꽤 멀었다. 드문드문 집이 몇 채 들어선 민가가 오래 이어졌다. 그러더니, 이내 사람들이 북적이는 소리와 함께 넓은 광장과 둘레길을 따라 선 장터가 나타났다. 야시장이었다. 관등놀이는 광장 한가운데서 진행중이었다.


"와아."


자연히 경탄이 나왔다. 해가 졌는데도 광장은 시끌벅적했다. 풍등을 날리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까닭이다. 장터를 가득 채운 음식냄새와 먼지냄새는 사람사는 동네의 정감이 넘쳤다. 마치다는 대번에 흥겨워졌다. 옷차림 때문에 곤두섰던 신경도 죄다 먹거리나 놀이거리로 기울었다. 


"외출이 마음에 드시오?"
"예, 마음에 들고 말고요! 소첩.. 아니, 제가 백성들의 삶에 빛나길 바란 형태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오늘밤을 열심히 눈에 새겨 차후에 소국민들도 누릴 수 있게 해야겠습니다."
"그래요. 가 봅시다."


부부는 인파를 헤집고 들어갔다. 아무리 황실 예복을 벗었어도, 또 아무리 음란행위로 재물을 모으는 창기로 위장했어도, 그들이 지나가면 백성들이 알아서 길을 비키고 허리를 굽혔다. 잘은 몰라도 높으신 분의 기운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백성들은 또한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기생의 미모를 발견하곤 저들끼리 왁자지껄하였다. 마치다는 쏟아지는 희롱이 부담스러워 전모를 뒤집어 썼다. 그러나 전모마저 화려한지라 딱히 시선을 물려내진 못했다. 결국 다시 전모를 벗었다. 그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뒤집어 쓴 채로는 시장구경이 어렵거니와, 무엇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모처럼의 좋은 날을 낭비하기 아까웠다. 


"아이고. 이거 어느 기방에서 나오셨는지 미모가 두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네 그려. 극장의 배우들보다 아리땁구만. 귀비마마를 꼭 닮았어."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모를 칭찬했다. 수레에 과일을 잔뜩 실은 상인이었다. 그는 신기한듯 마치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명목상이나마 잠행중이니, 귀비마마라고 콕 짚어낸 자는 피해야 마땅하겠다. 그러나 극장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하였다. 마치다는 간식에 유혹당한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상인에게 다가갔다.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극장의 배우라 하셨습니까?"


간혹 귀비전에 선전사업에 대한 비밀문서가 몰래 들어오곤 했다. 타카노 장군이 발송한 것으로, 사업이 대략 어떻게 흘러가는지, 진척은 어떠한지 파악할 수 있는 보고서였다. 마치다는 그 사업의 주인이지만, 직접 주관할 수 있는 게 없으므로 실질적으론 손을 뗀 상태였다. 내명부에서 생존하기 급급한 동안 바깥일에 신경 쓸 여유도 잃었고 말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잊고 지냈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기획한 만큼 마음 한 켠에 미련으로 남은 사업이었다. 제국민이 먼저 연극을 언급하고, 심지어 귀비마마에 대해 부쩍 친근감을 느끼는 것을 보자,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다. 마치다는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을 소매로 가리고서 물었다. 


"아저씨는 극장에 가보셨습니까?"
"아, 그럼. 극장에 안 가본 사람이 어딨나. 여 둘러 보슈. 귀비마마 차림을 안 한 음인이 있던가."
"에.. 앗?"


귀비마마 차림이라니? 상인을 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제야 붉은 비단으로 치장한 음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놀람에서 충격으로, 그리고 긴가민가함에서 황당함으로 감정이 급변한다. 귀비의 차림이라고 의식하기 전까진 저들이 자신과 닮았다고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실상을 알고나니 제법 비슷하게 흉내내려고 열심인 걸 알겠다.


"하핫!"


저항없이 웃음이 터졌다. 어이가 없기도 했고, 나름 그럴싸한 흉내가 우습기도 했다. 선전이 성공적이어서 뿌듯했다. 힌편으론 자신이 저렇게 우울하고 흐리멍텅하게 걸어다니는지 심각하게 고민이 되었다. 


"저것이 귀비 흉내라고?"


황제는 비실비실 걸어다니는 붉은 옷차림의 음인들을 보곤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그리고는 막 곁을 지나친, 치명적인 척 눈을 내리깔고, 대단히 창백한 화장을 한 음인을 향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음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솔직히 마치다도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긴 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쳐다볼 만큼 큰 비웃음이어서 음인은 분하게 고개를 틀었다. 그러나 범상치 않은 황제의 풍채를 발견하곤 대거리 한 마디 못하고 꽁무니를 뺐다. 실컷 웃은 황제는 대단히 흉측한 것이라도 발견한 양 짜증서린 표정으로 바뀌었다.


"기분 나빠."
"재미있지 않습니까. 제법 닮았어요."


마치다는 여기저기 산재한 귀비들을 흥미롭게 관찰하며 답했다. 


"그게 기분이 나쁘다고. 닮았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닮지 않았다고 하기엔..."


애매한 모방에 황제는 은근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래도 틀어진 입술 모양으로 추측하길, 이 상황이 재밌긴 매한가지이신 듯 했다. 


"그쪽은 붉은 옷을 안 걸쳐도 귀비마마랑 참 닮으셨구만. 부러움 많이 사시겠소."
"제가 귀비마마를 닮았습니까?"
"아이쿠야, 이제 보니 말하는 것도 좀 그런 느낌이군."


움찔했다. 마치다는 자신이 연극대본에 사용한 귀비의 말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경박하게 목소리를 바꾸었다.


"그, 그건 그렇고, 아저씨는 무얼 파십니까? 과일인가요?"
"아, 보면 몰라? 수박으로 담근 화채가 있수. 막 개울에서 건져와 시원할텐데 맛보실라우?"


먹겠다고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상인은 거대한 과도로 수박을 반토막 냈다. 그는 가장 잘 익은 조각을 큼지막히 썰어 넣고는 그릇을 건넸다. 이렇게 팔아서 남는 게 있을까 걱정스러울 만치 넉넉했다. 그릇을 받아든 마치다는 황제에게 생긋 웃어보였다. 돈을 내달라는 부탁이기도 하였고, 바깥 음식을 막 먹어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바로 어제까지 궁의가 정한 식단만 따르며 철저하게 회임을 준비하던 몸이었으니 조심하는 게 당연했다. 황제는 망설임없이 은전을 꺼내 상인에게 주었다.


"거스름돈은 필요없다. 다만"


마음 속으로 짜릿한 함성을 내질렀다. 시장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된다는 사실에 무척 들떴다. 달콤한 국물을 꼴깍꼴깍 삼키고는 황상께서 계산하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음식에 허튼짓을 했으면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콜록-!"


화채 먹다 사레들렀다. 이게 무슨 일인가. 군주와 백성의 흐뭇한 교감일 줄 알았는데 협박이 이어지다니? 잠행을 나왔으면 다소의 위험은 감수하셔야지, 애꿎은 상인에게 너무 하시지 않은가. 선한 사람 같은데. 하여간 무엇이든 곱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상인은 서글프게 항변했다.


"허튼짓이라뇨! 일부러 가장 잘 익은 부분으로 드렸는뎁쇼!!"
"아저씨! 너무 속상해 마셔요. 내 생에 가장 달콤한 화채였습니다. 많이 파세요."


마치다는 아낌없이 극찬을 한 뒤 서둘러 황제를 다른 곳으로 모셔갔다. 기껏 호의를 베풀고 협박만 당한 상인이 불쌍하다. 은전을 통째로 주었으니 보상이 되었으리라 믿는 수밖에. 마치다는 죄책감도 눈치도 없이 다른 먹거리를 구경중인 황제의 등에 힘껏 눈을 부라렸다. 


"오호. 제법 잘 빚은 경단이군. 어때요, 케이? 드시겠습니까?"
"...."


황제는 계속 다른 음식을 권했다. 방금 전 화채 상인에게 무슨 겁박을 하였는지 싹 잊으셨나. 경단을 파는 상인에게도 똑같은 협박을 하시려고 그러시는가? 마치다는 장터를 쭉 가로질렀다. 사실은 포슬포슬한 경단은 물론, 예쁜 화과자에도 호기심이 생겼지만, 그냥 지나쳤다. 황제의 으름장에 시달릴 희생양을 또 만들 수는 없었다. 정말이지 속 터진다.


"케이. 왜 다른 건 안 먹습니까?"
"입에 넘어가겠습니까."


혼잡스런 호객소리에 숨어 작게 불평해본다. 


"뭐라? 잘 안 들렸소."
"입맛이 없어 그럽니다."


운좋게 정정할 기회를 얻어 무난한 대답으로 바꿔 답했다. 황제는 아쉬워했다. 


"어허. 돈 좀 쓰고 싶은데 치장도 싫고 음식도 싫고. 재미없구려. 케이는 평생 소원이 누룽집니까?"
"이쪽이 풍등을 사는 줄입니다."


어차피 통하지 않을 말, 풍등 이야기로 황제의 투덜거림을 묵살했다. 황제는 갑자기 화제가 바뀌었어도 못마땅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의 대화는 잊고, 풍등의 색을 고르는데 몰두하고 계셨다.


....작지만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황상께서는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심술을 부렸다 싶으면, 조금쯤 무시해도 관대하게 넘어가신다.


황제는 금색 풍등을 택했다. 마치다는 홍색으로 골랐다. 하도 입어 질려버린 색이지만 귀비를 상징하는 소중한 색이기도 했다. 황제는 돈을 지불했다. 웃돈을 얹어주면 줄을 서지 않아도 구입할 수 있어 그들은 빠르게 풍등을 손에 넣었다. 마치다는 관등놀이를 간다고 알았을 때부터 정해둔 소원을 빌고 빨간 풍등을 날려보냈다. 황제도 금빛 풍등을 날렸다. 부부의 소원을 실은 풍등이 다른 풍등과 공평하게 섞여 저 위로 날아갔다.


"케이는 무슨 소원을 빌었습니까?"
"그런 건 비밀로 해야 이루어지는 거예요, 노부."


말씀드리면 황제가 내내 행복에 겨워 할 소원을 빌긴 하였는데. 그래도 입을 다물어 애태우기로 한다. 이러는 까닭은, 귀비를 애먹이신 데에 대한 약간의 앙갚음이라고 하겠다. 황제는 더 캐묻지 않고 말했다. 


"나는 그대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소."
"방금 비밀로 해야 이루어진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리 털어놓으시다니요. 소원이 중하지 않으십니까?"
"어차피 이루어질 소원이니까. 하늘이 이루어주지 않아도 내가 이루면 그만이지."


참 위풍당당하시다. 어찌나 든든한지. 마치다는 새초롬한 기운을 씻어내고 따뜻한 미소만 남긴 채 황제에게 기대었다. 속으로 고백했다. 저도 당신과 같은 소원을 빌었노라고. 허나 절대 소원을 입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때때로 너무 소중한 것은, 감추고 가려줄 필요가 있다. 


풍등을 날리고 바로 환궁할 줄 알았으나, 황제는 남은 일정이 있다며 마치다를 이끌었다. 그들은 어떤 곳을 향해 직진 중인 무리에 섞여 걸었다. 어느덧 목적지가 보였다. 마치다는 전율을 느꼈다. 그들 앞에 거대한 장막이 드리운 극장이 있었다. 고된 시간을 버티며, 오로지 상상력과 글로만 구상한 극장이다. 장대하게 눈 앞에 펼쳐진 실물을 보자 감격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주황색 천막 내부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언젠가 타카노 장군에세 서신을 써 연극을 시작하기 전에 음악으로 긴장감과 기대감을 고조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이 음악이 바로 그 음악인 듯 하였다. 


"보십시오. 케이가 이룩한 업적입니다. 제국민과 소국민이 함께 어우러져 같은 것을 보고 즐기고 있습니다."
"...."
"어리석은 황제와 대신들이 소득없는 입씨름만 벌이는 와중에 케이는 실질적인 성과를 낸 겁니다."
"어리석다뇨.."


공로를 인정받는 건 보람되나 황제를 낮추는 말씀엔 동의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어리석다는 표현에 놀란 사람은 마치다 뿐만이 아니어서, 지나가는 관객들도 경악하여 힐끔거렸다. 그들은 마치다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야밤에 극장에 놀러왔다는 것은 귀비마마께 열광중일 확률이 높을 터. 변장을 했다 한들 진짜 귀비가 나타났으니, 누군지 정확히는 알아보지는 못하더라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꼈음이라. 이번에는 황제도 정체가 탄로날까봐 조마조마 하였는지 향으로 은근히 압박하여 사람들을 쫓아냈다. 마치다는 약하게 핀잔을 주었다. 


"거 보십시오. 저희가 얼마나 눈에 띄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얌전한 차림으로 나오는 편이 더 나을 뻔했지요?"
"뭘 모르는군. 저들이 케이의 옷차림 때문에 쳐다보는 줄 압니까? 케이의 얼굴을 보면 옷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이런 화려한 옷인 줄도 모른다고."
"이런 옷이 보이지 않는다니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안 보인다니까."
"어떻게......"


...허나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옷보다는 얼굴만 쳐다보았던 것도 같다. 황상의 말씀이 옳을 지도. 마치다는 본전도 건지지 못하고 핀잔을 철회했다. 


그들은 타카노를 찾았다. 그가 아니었으면 사업은 성공적일 수 없었다. 기특해서라도 포상이든 승진이든 약속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궁에서부터 조금씩 밀린 시간 때문에 공연이 곧 시작하려고 하였다. 접선은 관람이 끝나고도 할 수 있으니 그들은 곧바로 천막에 들어갔다.


부부는 아낌없이 은전을 쓰고 특석에 앉았다. 비싼 좌석인 만큼 도떼기시장처럼 사람들이 뒤엉킨 좌석과는 확연히 분리되어 있고, 가림막이 쳐져 있어 극장을 독점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참 좋은 놀이장소를 만드셨소. 대단하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였는지."
"과찬이십니다."


마치다는 황제의 어깨에 기대었다. 손으로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늦은 시각이고, 귀비전에 있었으면 취침을 준비할 시각이다. 나른한 기분과 함께 피곤기가 눈꺼풀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것마저 좋았다. 


목마 조각들이 천막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다는 설치된 목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것에서 시작되었던가, 이 모든 사업은. 감회가 깊다. 말없이 목마만 응시하자, 황제가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내가 그 이야기를 했던가..."
"무슨 이야기를요?"
"목마 말이오. 실은 공개할 생각이 없었소."


마치다는 놀라서 몸을 일으키곤 황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듣습니다. 설마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 사고였습니까?"
"의도하긴 하였지. 허나 원래는 공개하라는 명을 철회하려고 하였소."
"허면 어째서 철회하지 않으셨습니까?"
"동란 소식으로 정신이 분산되어서... 깜빡 하였소."
"...."


갑자기 무수한 감상들이 사라지고 멍해진다. 실수라. 황제는 어쩌다가 작은 실수를 저질렀을 뿐이지만, 귀비가 감당해야 하는 상처는 매우 컸다. 정말로 컸다. 그 고생이 고작 실수 하나에서 시작되었다니.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좋은 면만 바라보자면, 그 수모를 극장으로 발전시킨 자신의 역량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마치다는 직접 아이들에게 삿된 노랫말을 흘렸고, 목마를 전면에 내세운 통속극을 만들었다. 매 순간이 치열한 전략이고 싸움이었다. 그 결과가 이렇다. 웃음과 활기, 지지도, 햇살정책의 아주 작은 실현.


목마사건이 전혀 상처를 남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 상처는 황상을 아주 사랑하게 된 지금도 다소 애증의 형태를 띤 채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목마는 더 이상 귀비의 약점이 아니다. 목마는 무기다. 황후로 봉해지는 그 날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언제든 꺼내 휘두를 수 있는 무기. 


"그대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나도 적잖이 당황했소. 알았거든.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음을... 씻을 수 없는 수치는 어찌 씻어내야 하는지 한참 골몰했소."


목소리가 묵묵하게 젖어들었다. 마치다는 얼른 황상의 눈을 살폈다. 눈물이 맺히거나 눈가가 붉어지지는 않았다. 도리어 죗값을 씹어 삼킨 듯 아주 담담했다. 


"나는 야비한 인간이오. 생각만 많았지 아무것도 씻어주질 못했소. 그런데 그대는 스스로 치욕을 씻어내는구려. 정말 현명하오."
"그런 말씀 마세요. 야비하지 않습니다. 이리 다정하신 걸요."


마치다는 깨달았다. 조금 전 그는 목마를 보고 아무런 감정적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슴 속 깊고 침침한 곳에 애증으로 가라앉아 있던 일말의 감정들도 별 것 아닌 침전물에 불과했다. 낭군님의 다정함에 희석되고, 정치적 목적으로 인해 무기화된 상처는 더 이상 마치다를 상처주지 못했다. 어쩌면 상처가 옅어진 게 아니라, 너무 많은 시련을 지나오며 사람이 무뎌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자신을 향해 약간은 동정심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연민으로 슬퍼지고 싶지 않다. 그보단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다. 대단하다고 칭찬하고 싶다. 환경은 녹록치 못할지언정, 귀비는 강하고 멋있어졌다. 마치다는 그 사실에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 그리고


"기적입니다."
"무엇이 말이오? 연극이 성황리에 공연되는 게?"
"당신을 향한 모든 감정들이요."


마치다의 곁에는 황제가 있었다. 태양과 같은 주군님이자, 소년처럼 여린 낭군님이.


"좋은 감정이오?"
"...그럼요."
"왜 대답이 늦는 거요?"
"그야... 푹 잠겼다가 빠져나오느라 그렇지요."


황상의 어깨에 고개를 걸친 채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의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그대 말이 맞았소. 이런 치장은 하지 말 것을."
"어째서요?"
"궁금하던 연극을 드디어 관람하게 되었는데 이제 그대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이겠어."


짙게 치장한 얼굴에 미소가 움텄다. 옅지만 힘찬 미소는 흡사 꽃봉오리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채 다 피어나기 전에 극장이 어두워졌다. 무대만 제외하고 깜깜해진 그곳에서, 황제는 눈 대신 손으로 미소를 만졌다. 그리고 동그랗게 호를 그린 입술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턱을 당겨 입을 맞추었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귓가를 맴돌았다. 얽힌 혀에서 타고 올라온 짜릿참 감각에, 귀를 간질이는 농염한 선율이 더해진다. 허리가 근질거렸다. 그들은 떨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을 느끼며 서로의 옷자락 속을 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