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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9 19:09
정대만은 송태섭과 꼬박 3년을 만났다. 스무살 겨울,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연애를 시작해서 2년은 염병도 그런 염병이 없었다. 떨어지면 죽는 사람들처럼 붙어 있었다. 그리고 스물 두 살 가을. 송태섭의 유학이 결정됐다. 송태섭은 가족들 다음으로 제일 먼저 정대만에게 제 유학이 결정된 것을 알려주었다. 

“아, 진짜? ......잘됐네.” 정대만은 수화기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 한달 뒤, 고등학교 동창회 겸 송태섭의 송별회를 마치고 둘이 함께 돌아가는 길. 송태섭은 정대만의 팔꿈치를 붙잡고 말했다.

“형. 나 형이랑 헤어지기 싫어요.”

“내가 형 놓아줘야 하는 거 아는데. 아는데 그러기 싫어.” 팔꿈치를 잡은 손이 벌벌 떨렸다. 정대만은 그 손을 양손으로 쥐면서 말했다.

“야, 우리가 왜 헤어져!”

“미국이 별 거냐!” 거의 윽박지르듯이 소리쳤다. 그땐 미국 따위가 우리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고 열렬히 믿었는데.

미국은 별 거였다. 둘은 송태섭이 미국으로 떠나고 딱 1년 뒤, 전화로 개같이 싸우다 헤어졌다. 

원래도 둘은 잘 싸웠다. 만난 지 10분만 지나면 “아잇, 야!” 하거나 “아잇, 형!” 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래도 붙어 있을 땐 괜찮았다. 둘이 한참을 말을 않다가도 “그래서. 뭐 먹고 싶은데요.” 하고 은근히 말을 붙이면 “몰라. 너는?” 하고 풀었다. 거리가 멀어진다는 건 그렇게 스르르 풀리곤 했던 일들이 켜켜이 쌓여간다는 거였다. 너는 왜 항상. 형은 왜 맨날. 그런 마음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둘 중 하나가 불이 붙으면 서로 잡아 먹을 듯이 싸웠다. 마지막 한 달은 조용히 통화해 본 기억이 없었다. 거의 소리를 지르거나 한숨을 쉬다 끊었다. 

그러다 헤어졌다.

“야, 끝 내, 끝 내! 아주 헤어져!” 정대만이 먼저였는지, “나 이번엔 진짜에요! 진짜 끝이라고!” 송태섭이 먼저였는지 기억도 안 났다.

“송태섭 오네.”

소주를 털어 넣은 이명헌이 삼겹살집 한 켠에 붙은 텔레비전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시아의 기적 NBA 송태섭, 국내 리그 이적> 정대만은 스포츠 뉴스 아나운서 밑으로 커다랗게 뜬 자막을 한 번 힐끔 쳐다보고는 “그런다더라.” 하고 말았다.

“둘이 그러고 나서는... 만난 적 있어?”

최동오가 이명헌의 빈 잔을 채워주면서 물었다. 대학 시절 내내 같은 기숙사를 쓴 탓에 정대만과 송태섭의 연애를 고스란히 지켜 본 최동오는 그 불같던 연애사를 ‘그러고 나서’로 축약했다. 

“쟤가 한국에 들어온 적이 없는데 어떻게 만나.”

정대만은 삐죽거리면서 대답하고는 삼겹살을 잘랐다.

“이번에 보겠네.” 이명헌이 말했고, “한 10년 만인가?” 최동오가 대답했다. 13년 만이다. 그 말을 꺼내는 대신 소주를 꿀꺽 삼켰다.

*

송태섭이 미국에 간 게 13년 전이었으니, 헤어진 지도 12년이었다. 그동안 송태섭 생각을 많이 했냐면, 그건 좀 애매했다. 처음 한 석달은 생각만 해도 속에서 천불이 났고, 그 다음은 프로리그에 진출을 해서 잡생각이라곤 할 틈 없이 바빴다. 한 3년쯤 지나,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여유가 생겼을 무렵엔 TV만 틀면 송태섭이 나왔다. 주전은 아니더라도 한국인 최초로 NBA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니 세상이 들썩들썩 할 만도 했다. 덕분에 정대만은 강제로 스크린을 통해 구남친과 재회했으나 그땐 헤어진 옛 연인에 대한 감상보다는 농구에 대한 평가가 좀 더 컸다. 잘 하네, 많이 늘었네, 아. 저건 아쉬웠다. 대부분 그런 것들. NBA에 발을 들인 송태섭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고 농구인으로써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히야 씨, 미쳤다.” 가끔 새벽에 경기를 보다가 그런 감탄도 했다. 송태섭이 NBA에서 팀 우승을 이루고 인터뷰에서 휴식기 동안 앞으로의 미래를 고민해보겠다고 했을 때 온갖 언론에서 그의 국내 리그 이적을 점쳤다. 그때는 또 정대만이 바빴다. 당시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가 결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재회에 대한 싱숭생숭한 감정 같은 것도 못 느꼈다. 송태섭은 결국 그 뒤로 두 시즌을 더 미국에서 보냈다. 정대만은 리그 우승이라는 만족스러운 성적으로 마지막 시즌을 마치고 지도자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리고 지금. 송태섭의 귀국이 확실해진 지금에 와서야, 정대만은 헤어진 애인에 대한 소회를 느끼고 있었다.

좀 복잡했다. 그래도 그때 걔랑 참 좋았지, 하기엔 너무 오래 지났고. 그래도 내가 한 살 형인데 좀 더 잘해줄 걸, 미안하다가도 아니 근데 그 놈은 어린놈이 곤조가 있어가지고, 열이 뻗쳤다. 그냥 아주 오래 전에 찍은 사진을 다시 꺼내보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너무 지나서 아, 그때 그랬지 싶다가 그랬나? 하게 되는. 그래도 술에 취한 새벽, 다시 떠올린 옛 연인은 정대만을 꽤 감상에 젖게 하는 바람에 정대만은 옷방 한켠에 있는 대학 시절 물건들을 정리해 놓은 상자를 다시 펼쳤다. 대부분은 대학 리그 때 받은 상패나 부상副賞 같은 것들이었고 팬레터 같은 것도 꽤 있었다. 그리고.

“이게 아직도 있네.”

정대만은 귀퉁이의 칠이 벗겨진 열쇠고리를 검지에 끼워 들어올렸다. 송태섭이랑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고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인형뽑기로 뽑은 거였다. 갈색 얼룩이 있는 못생긴 강아지는 그 당시 유행했던 무슨 캐릭터였는데 얘 때문에 뽑은 건 아니고 이게 물고 있는 브로콜리 때문이었다. “야, 저거 너 닮았다.” 그 말을 시작으로 뽑기 5종 중에 저 브로콜리를 물고 있는 놈을 뽑아주겠다고 난리를 쳤다. 다행히 한 3번 만에 저걸 뽑기는 했는데 그땐 한창 낯 뜨거운 짓을 잘 할 때라 커플템으로 해야 한다고 한 개를 더 뽑았다. 하필이면 구석에 처박혀 있어 저녁 값을 죄 써서 뽑은 비싼 몸이었다. 

돈 없는 대학생 고등학생 커플이었으니 커플링은 엄두도 못 냈고, 똑같이 나눠가진 이 열쇠고리를 정대만은 자취방 열쇠에, 송태섭은 락커룸 열쇠에 매달고 주구장창 들고 다녔었는데. 헤어지고 여기다 처박아 둔 줄도 몰랐었다. 정대만은 오랜만에 보는 열쇠고리를 엄지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어질러놨던 상자를 대충 정리해 치웠다. 열쇠고리는 주머니에 넣은 뒤였다.

*

“얼마에 팔 건데?”
“이거 그래도 명품인데 한 30만원?”
“미친놈아 귀퉁이 다 찢어진 걸 누가 30에 사. 15에 올려.”
“아, 형. 15는 너무했다. 이거 걔가 50은 넘게 주고 사줬어요.”
“그럼 계속 니가 쓰던가.”
“아 어떻게 그래요. 헤어졌는데.”

“뭐하냐?” 연습시간보다 조금 일찍 연습장에 도착한 정대만이 머리를 맞대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선수 둘의 엉덩이를 발등으로 툭 쳤다.

“형!”
“코치님이짐, 마.”
“아. 코치님. 오셨어요.”
“엉. 뭐해?”
“당근이요.”
“당근?”

나란히 붙은 머리통 위에 정대만 역시 턱을 얹었다. 당근이 뭔지는 알았다. 근데 들어본 적이나 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주택이 지갑 팔려고요.”
“너 그거 명품이라고 그렇게 아끼더니 왜 팔아?”
“이거 얘 여자친구가 사준건데 여자친구랑 헤어졌대요.”

“......그냥 계속 쓰면 안돼?” 그 소리에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던 둘 중에 어린쪽이 대번에 고개를 돌렸다.

“아, 좀 그렇잖아요. 볼 때마다 계속 생각나고...... 그냥 팔려구요.”

“그르냐.” 정대만이 정수리에 턱을 대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선배애가 “아, 아파요, 형!” 했다.

“정코치!”
“네!”

한창 후배놈 둘이 당근을 하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연습장 문을 열고 들어 온 감독이 멀리서 소리쳐 불렀다. 정대만이 선수였던 시절부터 지켜 본 감독은 가까이 가자마자 어린 애 대하듯 “야, 대만아.” 하고 팔을 두르며 말했다.

“너 송태섭이랑 친하냐?”
“네? 아뇨??”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튀어나갔다.

“너네 같은 학교 나왔잖아.”
“같은 학교 나왔음 뭐, 다 친해요?”
“이 자식이. 그래서. 진짜 안 친해?”
“예. 진짜 안 친한데요.”
“아오, 너는 걔랑 안 친하고 뭐했냐.”

떡쳤는데요. 정대만은 속으로 삐죽거렸다.

“아, 왜요.”
“그냥 뭐. 니가 걔랑 친하면 니 연줄로 어떻게 좀. 안 되나 했지.”
“뭐, 걔 이적이요? 감독님 말이 되는 소릴 해요. 우리가 뭔 돈이 있어서 걜 데려와요.”

정대만이 코웃음을 쳤다. 정대만은 제가 은퇴 때까지 뛰었던 팀에 코치로 돌아왔는데, 모기업인 대형 식품기업이 최근 경영난으로 휘청거리고 있어 선수들 연봉도 거의 동결 상태라 팀의 에이스를 파네 마네 고민 중인 형편이었다. 

“아 그니까 니 연줄로 좀 해본다고 했잖아.”
“그게 연줄로 돼요?”

“아, 감독님. 제가 안 된다고 했잖아요.” 때마침 들어오던 팀 닥터가 메신저 백을 내려놓으면서 티격태격하고 있는 둘 사이에 끼어 들었다.

“이미 물어봤다니까.”
“아,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감독이 여전히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팀 닥터에게 소리쳤다.

“뭘 물어봐요?”

정대만이 감독에게 끌어 안기느라 구겨진 어깨 깃을 펴며 건성으로 물었다.

“송태섭 이번에 계약한 에이전시에 사촌동생이 있거든요. 그거 얘기했더니 감독님이 걔 시켜서 물어보라고 해가지고.”
“뭘? 우리 팀 올 생각 있냐고?”
“아니. 그렇게 대놓고는 못 물어보고. 코치님 얘기했죠.”
“나? 내 얘기? 내 얘기요?”
“예. 그냥 둘이 친하면 식사 한 번 하자 하고 자리나 마련할까 했더니.”
“근데 뭐. 안 친하대요? 걔가?”

정대만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으면서 관심 없다는 투로 물었다. 이상하게 좀 긴장이 돼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데 손끝에 뭐가 걸렸다. 보지 않아도 알았다. 어젯밤 꺼낸 그 열쇠고리였다. 

안 친하다고 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안 친하다고 하면 좀 억울할 것 같았다. 

“아니. 잘 모른다던데요?”  
“뭐?!”

빽, 소리를 지르는 정대만 때문에 팀 닥터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아니. 걔가 그랬대요? 나 모른다고?”
“아. 예...... 그랬다고...... 그러던데.”

“와. 송태섭. 와.” 정대만이 거의 곗돈 들고 나른 놈 부르듯 송태섭을 불렀다. 팀 닥터는 제가 뭔 실수를 했나, 하는 얼굴로 정대만을 힐끔거렸고 가당찮은 기대를 했던 감독은 영 아쉬웠는지 다시 한 번 “아, 안 친하고 뭐했어!” 하고 핀잔을 하는 바람에 더 억울했다.

씩씩거리는 정대만과 그 등짝을 팡팡 내리치고 있는 감독의 사정이 궁금했는지 지갑을 판다고 뭉쳐 있던 두 놈이 무슨 일인가, 궁금한 얼굴로 다가왔다. “아, 아퍼요!” 감독한테 괜히 짜증을 내고 있던 정대만이 슬금슬금 걸어오는 두 놈을 발견했다. 

“야!”
“네?”
“나도 가르쳐 줘. 당근.”

*

강아지 열쇠고리 │ 3일 전 │ 5,000원

정대만이 후배 애들 도움을 받아 당근에 올린 열쇠고리를 보고 연락이 왔다. “형, 아니 코치님. 진짜 이거 올릴 거예요? 이거 줘도 안 가지-” 조언을 한답시고 입을 열었다가 발로 엉덩이를 까인 후배놈이 만원은 절대 안 된다고 우기길래 오천원으로 낮췄더니 그 덕을 보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열쇠고리 팔렸나요?>

오천원이든 오백원이든 어쨌든 이걸 팔아 치울 생각뿐인 정대만은 재빨리 대답했다. 

<아직 안 팔렸습니다.>

후배가 줘도 안 갖는다던 그 열쇠고리는 꽤 인기가 있었는지, 상대는 안 팔렸다는 말에 바로 사고 싶다고 했다. 보통 깎아달라고 한다던데 그런 것도 없었다. 정대만이 택배든 직거래든 둘 다 괜찮다고 했더니 장소를 알려주면 제가 찾아온다고까지 했다. 기왕이면 당장 치워버리는 게 낫지, 싶어 오늘 저녁 제 아파트 입구로 오라고 했다.

<7시에 가겠습니다.>
<네 입구에 있을게요. 걸어오세요?>
<차로 갑니다. 노란색.>

차로 오는 걸 보면 근처도 아닌 것 같은데. 만원에 올릴 걸. 정대만은 7시를 5분 앞두고 아파트 입구에 나와 팔기로 한 열쇠고리를 다시 들여다봤다. 쫑긋 솟은 두 귀 중에 오른쪽이 유난히 닳아 칠이 벗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코에도 칠이 벗겨져 매직으로 덧칠한 티가 났다. 물건을 부러 함부로 쓰는 편도 아니지만 아껴 쓰는 성정도 못 되었는데 이건 꽤 애지중지했다. 열쇠고리가 뭐라고. 심지어 의미 있는 날 맞춘 것도 아니고, 그냥 문방구 앞에서 뽑은 건데. 근데도 둘이 똑같은 걸 나눠 가졌다는 이유로 칠이 벗겨지면 매직도 칠해주고 고리가 풀렸을 땐 뺀찌로 다시 고쳐서 들고 다녔다. 정대만은 요령 없는 제가 뺀찌를 들고 설치는 걸 보다 못해 이명헌이 한숨과 함께 고쳐 줬던 고리 근처를 만지작거렸다. 

좀 우스웠다. 12년 간 거기 있는 줄도 몰랐던 물건인데 막상 팔겠다고 나왔더니 마음이 울렁울렁했다. 

빵!

멀거니 서서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던 정대만의 등 뒤로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훠. 씨.”

정대만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차로 갑니다. 노란색.> 그 문자를 보고 “노란 차가 한 둘이냐.” 했는데 저런 건 진짜 한 둘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노란색 부가티가 서 있었다. 정대만은 제가 그 ‘당근’이라는 뜻으로 오른손을 슬쩍 들었다. 거리가 멀지 않아 분명 알아 봤을텐데 부가티는 조용했다. 

뭐야, 왜 안 내려. 1분 정도 기다리다가 열쇠고리를 달랑거리면서 가까이 갔다. 거의 범퍼 앞이었다. 정대만은 촌스럽게 힐끔거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면서도 날렵하게 빠진 앞태를 자꾸 곁눈질로 훔쳐봤다. 그때까지도 차가 잠잠했다. 후진도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걸 보면 얘도 그 ‘당근’은 맞는 거 같은데 내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쯤 되자 슬슬 짜증이 났다. 이 싸가지 뭐지? 정대만은 제법 험상궂게 인상을 구기면서 운전석 쪽으로 다가갔다. 마음 같아선 쾅, 쾅, 치고 싶었는데 상대가 부가티라 절로 손에 힘이 빠졌다. 

톡. 톡. 접힌 중지 손가락으로 운전석 유리창을 두드렸다.

“저기요, 열쇠고리 사러-” 

소리도 내지 않고 부가티 차창이 스르르 내려갔다. 

“정대만.”

13년 만에 다시 만나는 구남친이었다.

*

송태섭이 부가티 문을 열고 내릴 때까지 정대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가 처음으로 든 생각은 ‘나 지금 뭐 입었지?’였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목 늘어난 흰 티셔츠에 쓰레빠 차림이었다. 

정대만은 대강 봐도 캐시미어인 것 같은 브이넥 니트에 파텍 필립을 찬 손으로 선글라스를 벗고 있는 송태섭에게 조금 늦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주눅 들지 말자, 쫄지 마, 하는 생각이었는데 의지가 과했는지 튀어나간 목소리가 꼭 시비라도 거는 것 같았다. 송태섭 역시 딱 그렇게 받아들였는지 가뜩이나 삐죽 솟아있던 눈썹이 더 가파르게 휘었다.

“하. 진짜 정대만이네.”

별로 미안하진 않았다. 송태섭 역시 만만치 않게 재수 없는 말투였다. 

송태섭이 신경질적으로 선글라스를 차 안에 던져 넣으면서 정대만이 엉거주춤하게 쥐고 있는 열쇠고리를 쳐다봤다. 

“형이었어?”

정대만은 거의 노려보는 기세의 눈빛에 순간 주먹 안으로 열쇠고리를 감추었다가 곧 태도를 바꿔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 난데?”
“이걸 인터넷에 팔아 치워요? 그것도 5천원에? 형은 매너도 없어요?”  

주눅 들지 말아야 하는데. 송태섭이 배신자 보는 눈으로 쳐다보자 조금 주눅이 들었다. 정대만은 부러 더 큰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상관이야! 내가 내 꺼 판다는데!”

“내가 뭐, 어따 갖다 버린다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외치는데 조금 전까지 잡아먹을 기세였던 송태섭이 주춤했다. 남들이 보면 몰랐을텐데 정대만의 눈에는 보였다. 아주 잘 보였다.

“너...... 갖다 버렸냐?”

송태섭이 다시 한 번 주춤했다. 이번엔 남들이 바도 알 정도였다.

“갖다 버렸다고? 와씨, 그래놓고 나한테 뭐? 매너가 어째?”
“난 홧김에 버린 거고!”
“야, 난 화났어도 버리진 않았다!”
“그래서 안 버리고 여기다 팔아요? 5천원에?!”
“그러는 넌! 넌 5천원 주고 사러 왔냐? 냅다 버려놓고?!”

아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버렸다면서 이건 또 왜 사러 와? 이 새끼 혹시-, 정대만의 그 생각을 똑똑히 읽었는지 송태섭이 있는 대로 낯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요. 그냥 징크스 때문이니까.”
“뭐?”
“그거. 나 미국에서 우승했을 때 쓰던 열쇠고리라 다시 사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딴 맘 없으니까 괜히 김칫국 마시지 말아요.”

별로 김칫국 안 마셨다. 헤어진 지가 언젠데.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이었다. 오히려 송태섭이 무슨 미련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군다면 난처했을 텐데 없다니 다행이었다. 다행인데. 다행이긴 한데, 뭐가 욱했다. 

“아, 그러셔?” 정대만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면서 송태섭의 얼굴에 대고 열쇠고리를 쥔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야. 됐어. 꺼져. 너한텐 안 팔아.”
“네?”
“안 판다고.”
“뭔-. 그런 법이 어딨어요.”
“내 맘이지. 아직 돈 받은 것도 아닌데.”
“돈 주면 되잖아요.”
“아, 안 판다니까?”
“판다고 나와 놓고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 왜!”

그러고는 고레고레 소리를 질러가며 싸웠다. 아, 안 판다고! 가! 꺼져! 다 팔아도 너한텐 안 팔아!  

팔아라, 싫다, 그 얘기를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유치하게 했다. 결국 정대만은 아파트에 진입하려던 차가 부가티 뒤에서 빵빵거리는 틈을 타 도망쳤다. 열쇠고리는 무사히 손아귀에 있었으니 어쨌든 정대만의 승리였다.

*

“끝났습니다.”

송태섭은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면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NBA에 진출하고, 국내에서 유명세를 타면서 인터뷰니 방송이니 하는 걸 지겨울 만큼 했지만 메이크업을 받을 때마다 얼굴에 붓이 지나다니는 느낌이 영 어색했다. 송태섭은 아직도 간질간질한 것 같은 코끝을 찡긋 움직였다가 일어섰다.

“태섭씨.”
“네.”
“기자님 도착하셨는데 바로 시작한다고 할까요?”
“네. 그러세요.”

에이전시의 매니저가 물통을 내밀면서 묻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가 곧장 나가려다 말고 송태섭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좀 전에 메시지 왔었어요.”
“네. 고마워요.”

송태섭은 물통을 내려놓으면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매니저가 메시지라고 생각한 건 어플 알람이었다. 

★NBA 송태섭 열쇠고리★ 강아지 열쇠고리 │ 5분 전 │ 50,000원

새롭게 올라온 게시글에는 야무지게 단 별과 함께 사진이 추가되어 있었다. 13년 전의 송태섭이 열쇠고리를 들고 웃는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