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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8 00:23
"맛이 없어요? 좀 짠가?"
"그냥 그럴 타이밍 같아서 뿅."
"에이... 밥은 먹고 합시다. 물 줘요?"
"어."



그러고 평화롭게(?) 밥먹는 우성명헌. 헤어지자 발언한 게 언제냐는 듯 물 따라주고 반찬 밀어주고 겉으로 보면 꽤 다정한 동거 애인사이 같음. 중간중간 요즘 농구할 때 컨디션은 어떠냐는 둥, 같은 팀 누가 어떻다는 둥 일상 얘기도 나눔. 치울 때도 자연스럽게 역할 나눠서 명헌은 반찬 닫아서 냉장고에 넣고 식탁 닦기. 우성은 그릇 치워서 설거지하기. 폰 보면서 물 홀짝이던 이명헌이 뒤늦게 싱크대에 컵 추가하니까 이미 다 끝내고 장갑 벗으려던 명헌이 "아 미리 넣으라고요.", "쏘리 뿅." 하는 것까지. 그래놓고 식탁에 다시 마주 앉아서는.



"그래서 지금이 왜 헤어질 타이밍인데요?"
"뭐... 이 정도면 꽤 오래 사귀기도 했고. 슬슬 너희 부모님도 포기하신 것 같기도 하고 뿅."
"하긴, 이제 불시에 영상통화 하고 그런 것도 안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요? 성격이 안 맞아서?"
"아니, 너무 성의없잖아 뿅."
"그러면요?"
"그냥...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고 해. 내가 너 찼다고."
"형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말이 그렇단 거지, 뿅."
"형 저처럼 잘생긴 남자 차보고 싶어서 그러죠."
"너처럼 재수없는 남자 차고 싶어서 그런다 뿅."



아 그래도 제가 얼굴은 진짜 잘생겼다면서요!! 울상 짓는 우성을 뒤로 하고 명헌은 씻고 잠이나 자라며 방으로 들어왔음. 두 사람이 연애하기 시작한 건 약 6개월 전으로, 우성의 부모님께서 꺼낸 말 때문이었음. 우성이 너, 좋은 짝 만날 때 되지 않았니. 물론 정우성은 자타공인 농친놈이었지만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은퇴가 아주 멀지만은 않은 나이가 되었고, 한창일 때 미리 짝을 찾아 두어야 나중에 결혼도 늦지 않게 한다... 는 이런 면에선 고지식한 부모님의 조언이었음. 반쯤은, 아니 80퍼센트 정도는 강요에 가까웠지만.

그리고 당연히 정우성은 아직 결혼에 관심도 없었고 농구할 시간도 없는데 선이나 보러다니긴 싫었지. 형들에게 고민상담을 하다가 나온 게 그럼 애인이 있는 척 하는 게 어떠냐? 우성은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음. 그러나 주변에 여자도 딱히 없고, 아무 여자한테나 부탁하기엔 좀 개인적이고. 말로만 했다간 부모님이 얼굴을 보자고 할 게 분명했고. 아마 장기간 계속 연락을 해야 할 테고... 그러다 떠올린 게 차라리 남자도 좋아하는 성향이라고 하자. 그리고 형들 중 아무나랑 사귄다고 보여드리면 결혼하라고 귀찮게 하시진 않겠지.

그 와중에도 취향을 따지며 내가 여자였다면 사귈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현철이 형은 무서워서 패스. 동오 형은 여자친구가 있어서 패스. 성구 형은 자주 만나기 힘들어서 패스. 낙수 형은 본인이 절대 싫대서 패스. 그렇게... 우성이도 형이라면 부모님 앞에서도 거짓말 잘 할 것 같고(이 자식이 뿅) 나도 좋고 형도 담담하게 그러지 뭐, 했으니 결정~ 해서 하게 된... 계약 연애. 언제 헤어질 지 정확히 정해놓진 않았었지만, 적당한 때에 봐서 헤어지자 했었지. 둘 중 정말로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생기거나 할 수도 있고.

부모님에게 알리는 건 바로는 아니고 물어보면 그 때 말하기로 했음. 우성은 본인이 차였다고 하기로 했으니 헤어진 걸 알아도 정말 좋아했는데 실연당해서 슬프다는 핑계로 더 오래 선자리를 미룰 수 있을 거고. 명헌이도 주변사람이 물어보면 그 때 헤어졌다고 말하기로 했지. 다음 날 우성의 집에 있던 단출한 짐을 가지고 나온 명헌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음. 6개월간 우성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더니 제 집이 꽤 낯선 기분이었음. 금방 적응되겠지, 애초에 진짜 사귄 것도 아니고 남들 앞에서나 척했던 건데.

그렇게 며칠 뒤, 현철에게 연락이 왔음.



- 어디냐?
"집이지 뿅."
- 정우성은?
"몰라. 왜?"
- 같이 있는 거 아냐? 정우성 집에 없어?
"...내 말은 내 집이라고, 뿅."
- 아... 뭐냐, 너네 헤어졌어?
"그렇지 뭐 뿅."
- 생각보다 빠르네. 아 나, 정우성한테 빌려준 게임 칩 받으려고 했는데. 이 새끼 어디 갔지.
"글쎄다, 아무튼 난 모르니까 끊어 뿅."
- 어어 그래.



그리고 또 며칠 뒤에는...



"어, 낙수 뿅."
- 우성이 집에 있어?"
"...모르는데 뿅."
- 왜... 아 니네 헤어졌어?
"신현철한테 못 들었냐. 좀 됐어 뿅."
- 아 못 들었다. 알았어~



또, 다음엔...



- 정우성 왜 전화 안 받아?
"헤어졌어 뿅."
- 어, 아 그러냐. 몰랐다 미안~



...이런 일들이 반복됐음. 뭐 다들 연애를 가장했다는 건 알고 있어서 이유는 묻지 않고 넘어갔지만 가끔은 의외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했지. 가령, 왜? 너희 꽤 잘 어울렸는데. 나는 너희가 그러다 진짜로 사귈 줄 알았어. 나는 너네 진짜 사귀게 된 줄? 그럴 때마다 명헌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음. 그러냐 뿅. 그러나 속으론 생각했지. 정우성은 남자를 좋아해본 적도 없는데 무슨. 그것도 나랑? 말도 안 돼 뿅. 고개를 저으면서.

그런데 하루는 적당히 피할 수 없는 일도 있었음.



- 여보세요?
"...예. 어머님."
- 혹시 지금 밖이니? 우성이한테 반찬 좀 가져다주러 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서... 얘는 전화도 안 받고.
"아... 잠시, 제가, 제가 지금 가겠습니다. 근처라서."
- 어머, 그래주면 고맙지. 빨리 안 넣어놓으면 상하는 것들이라...
"예, 금방 갈게요."



우성의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거였음. 헤어졌다고 말하기로 했는데 정우성이 아직 말 안 했나? 대뜸 헤어졌다고 하기도 뭐 하고. 얘는 핸드폰이 폼인가 왜 전화를 안 받아. 어쩔 수 없이 명헌이 급하게 가서 문 열어드리고 몇 주만에 다시 우성의 집으로 들어갔음. 어색하게 어머님과 대화도 몇 마디 나누면서 반찬을 정리하고... 헤어졌다고 해야 하는데. 말해야 하는데. 어머님 기분도 좋아 보이고 요즘 근황이 어떻고 남편이 어떻고, 어떻게 지내는지 살갑게 해주시는데 거기다 대고 어떻게 '제가 아드님을 찼습니다.' 라고 할 수가 있겠어.

결국 끝까지 타이밍 놓치고 잘 지내라는 말에 "예 어머님, 조심히 가세요." 하며 배웅까지 마친 명헌이 혹시 뭔가 잊은 게 있어 돌아오실지도 모르니까 우성이 집에 다시 들어가서 멍하니 앉았음. 생각해보니 정우성이 헤어졌다고 할 때 말이 꼬이면 어떡하지. 2주 전쯤 헤어졌다고 했는데 내가 아직 안 헤어진 것처럼 집에 들락거렸다고 생각하시면. 그렇다고 다시 사귀자고 할 수도 없고. 아니면 말을 다시 맞출까. 오늘 헤어진 걸로 하자고. 그런데 또 이렇게 찾아오시면 어떡하지. 아니면 나한테 전화해서 우성이에 대해 물어보시면-.

명헌은 머릿속에 아까부터 거슬리게 부유하는 한 문장을 무시하려 애썼음. 어떻게든 다른 쪽으로 생각을 틀려고 노력했으나 한 번 그럴싸한 여지를 찾아낸 그 문장은 자꾸만 명헌의 틈새를 들쑤셨지.



그냥 다시 사귀자고 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애시당초 진짜 연애가 아닌데 다시 사귀면 또 어쩌게. 명헌이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고개를 소파 등받이에 기댔음. 어쩌자고 시작했을까. 대체 어쩌자고 내가 이런 바보같은 부탁을 받아들였을까. 파고들수록 상념은 깊어지고 머릿속은 복잡해져 갔음. 떠올리지 말라고 하면 계속 떠올리게 되는 게 사람 심리인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는 건 머리가 아플 정도로 조여오는 후회였지. 적어도 그 때 그만둘걸. 어쩌면 그 때에도. 혹은 그 때에. 전부 차치하더라도 이렇게 되기 전에. 아니, 하다못해...



"형? 여기서 뭐 해요?"
"어? 아, 그게 아까,..."
"아까 뭐요? 맞다 그리고 형 스페어 키... 를..."
"...우성아."
"어... 그,... 지금... 지금, 우는 거예요...?"



이런 한심한 꼴을 보이기 전에.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 그거 너야."


















어쩌다보니우성이가별로안나온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