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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7 01:28
'명헌아, 넌 뭐든 참 미련이 없구나.'


중학교 시절 전 여자친구가 원망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을 때, 이명헌은 생각했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너와 달리.


물론 아무리 헤어졌다지만 눈물을 뚝뚝 떨구는 여자애에게 그런 말을 배려없이 내뱉을 만한 위인이 아니었던 이명헌은 그저 '마스카라 번졌다 베시...' 이 지랄을 떨었고, 뺨에 새빨간 손자국이 난 채 하루를 보내야 했다.

아무튼 이명헌은 그랬다.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에 순응한다. 그래서 미련도 없다.

모든 농구선수들이 찬양하는 이명헌의 굳건한 철벽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동료가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해도, 상대 선수가 예상을 뛰어넘어도 이명헌은 동요하지 않는다. 설령 동요하더라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동요를 가라앉힌다.

이명헌은 그리하여 3학년 마지막 인터하이에 상상도 못한 16강에서 패배하고도 유일하게 울지 않은 주전이었다.

최동오도 울었고, 정성구도 울었고, 신현철도 울었고. 심지어 그 김낙수도 눈시울이 붉어져서는 천장만 바라봤는데.

이명헌만 울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수건을 무릎 꿇은 채 처절하게 울부짖는 한 살 어린 그의 에이스에게 덮어줄 뿐이었다.


"이기고, 이기고... 싶었어요... 형들과의... 마지막 경기... 정말 이기고 싶었단 말이에요..."


숨을 헐떡이는 정우성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명헌이 말했다.


"이 경험이 우성이 널 더 성장시킬 거야, 뿅."

"이렇게, 이렇게... 분한데도요? 슬픈데도요...?"

"지면 분하고 슬프단 걸 알게 됐으니까, 뿅. 그만큼 승리를 갈망하게 되겠지, 뿅."


정우성은 진정된 이후로도 이명헌이 사 준 아이스크림을 퉁퉁 부은 눈에 가져다 댄 채 학교로 돌아가는 내내 툴툴거렸다. 앞으로는 절대 지지 않겠다던가, 뭐 그런 정우성다운 말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우성은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예상보다 이른 출발이었다. 원래는 한 달 후였는데. 결승전 나갈 일도 없으니, 그냥 미리 가서 적응할 시간을 가지겠다나 뭐라나.

이명헌은 손바닥에 턱을 괴고 하늘을 내다보며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삐링? 쁑? 뺑?

다음 어미는 뭐가 좋을까?

뭔가 넋이 나가 보이는 명헌에게 다가와 북산한테 진 것때문에 그러냐고 위로해주던 부원들은 어미를 추천해달라는 말에 썩은 얼굴로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농구부에서 가장 착한 최동오만이 궁금하다는 듯 물어봐 주었다.


"벌써 바꾸게? 아직 다섯 달도 안 지났잖아."


명헌이는 최동오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했다.


"뿅 쓰니까 자꾸 생각이 나서."

"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명헌은 미련이 없다.

최선을 다하니까.

하지만, 정우성은 남자였고, 정우성은 가장 아끼는 후배였고, 정우성은 신뢰하는 동료였고. 무엇보다 이명헌이 무언가를 해 보기도 전에 멀리 떠나 버렸다.

이명헌은 어리둥절해보이는 동오한테 말했다.


"정했다. 삐뇽으로 할 거다, 삐뇽."


너는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을 테고, 나는 평생 이 좆같은 짝사랑에 최선을 다할 수 없을 테니.

나는 앞으로도 너한테만은 미련이 가득하겠구나.








우성명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