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hygall.com/542242163



이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대신들에게는 짧았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다음 수를 강구하기에 바빠 하루가 한 시진처럼 지나갔으니. 반면, 귀비에게는 길었다. 편전 앞에 무릎까지 꿇었는데 여즉 황제를 뵙고자 소망하는데 그쳤으니. 황제는 집무가 끝나면 기생들과 무희를 불러들여 주지육림을 벌였다. 내명부고 외명부고 다 골치아파 아주 신경을 끊어버리신 태도였다. 덕분에 곳곳에서 팽팽해진 온갖 기싸움들도 한숨 수그러졌다. 어떤 관점에서는, 이런것도 평화다. 


정작 가장 흥에 겨워야 할 연회장은 썩 평화롭지 않았다. 연회에 동원된 기생들이 아무리 산해진미를 펼쳐 술을 따라드리고 음식을 먹여드려도 황제는 무미건조하게 거부하여 기껏 돋운 흥취를 죽였다. 제국 최고라 극찬받는 무희가 춤사위를 선보여도 황제의 공허한 눈빛은 저 너머를 향하였다. 황제는 무리하게 자작을 이어가다가 거나하게 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면 유유히 사라졌다. 기생과 무희는 완전히 배경과 소품이었다. 그들은 황제가 사라지면 음악을 뚝 그치고 일제히 불만을 터트렸다. 흥을 끌어올려도 문제고, 끌어내려도 문제다. 바른 처신을 고민하느라 눈치싸움만 벌이는데 이것을 연회라 할 수 있을까.


귀비전 주변에 포진하던 얌체 나인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다. 함부로 나대었다간 귀비나 숙비처럼 굴욕을 당하리라는 황실의 경고를 후궁들은 빠릿빠릿 알아들었다. 그들은 눈에 띌 만한 행동을 일체 삼가고, 괜히 나인들을 시켜 수상한 행적을 남기지 않도록 조심했다. 마치다는 비로소 감시받지 않고 지낼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마음은 전보다 더 괴로웠다. 그는 하루종일 적적하게 황제를 기다렸다. 매분 매초 고민했다. 어째서 그분은 귀비전이 아니라 연회장을 찾으셨을까. 까닭이 있으실 거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이지만,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마. 새로 동원된 기생들이 황궁에 도착하였다 하옵니다."
"...."
"인원은 어제의 곱절에 달하고 제각기 거처를 찾아 짐을 풀고 있사옵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거처를 제공받았다는 뜻은, 황궁에 오래 머물며 언제든 부르면 달려가 유흥을 제공할 예정이라는 뜻이다. 이로써 연회장에 노니는 황상께서 귀비전을 찾아주실 가능성은 0에 수렴하고 말았다.


'오늘은 연회가 더 성대할 예정인가 보다.'


마치다는 멍하니 붕대로 마감한 다리를 치마 위로 매만졌다. 마지막으로 뵌 황제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일촉즉발의 공기가 흐르던 편전 마당, 조그맣게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붉게 핏발 선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거기 담긴 감정은 명백히 비탄. 기쁨이나 안도감이 아니었다. 아차 싶었다. 걱정을 덜어드리리기 위해 한 행동이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성치 않은 꼴로 아양부리는 모습이 얼마나 애처로웠을지. 갈기갈기 찢긴 가슴에 소금을 뿌린 격이었다.


귀비전을 찾아주시면 그 상한 마음 고이 돌봐드리겠다고 다짐했다. 태자를 잉태할 몸으로 무리하여 송구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깟 종아리 쯤은 정말로 괜찮으니 폐하께서는 상처 말고 당신의 정인만 보아 달라고... 그렇게 위로하려고 하였는데...


두 밤이 지나도 마치다는 처소에 덩그러니 홀로 있었다. 이제 세 밤째가 되려고 한다.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첫째 밤은 아쉬움이었고, 둘째 밤은 조바심이었다. 그것이 오늘은 배신감으로 발전한다. 황제가 귀비전을 찾아주시지 않으면 자신은 무얼 위해 종아리를 희생하였는가...? 종아리가 아깝다는 뜻이 아니다. 살을 깎아가면서까지 다가갔는데 납득이 가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부응해주지 않으시니까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배신감을 느끼는 이유는 또 있었다. 귀비는 대신들끼리 갈라치게 만들어 정치적으로 가치있는 희생을 하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보상이 없으면 긴급사태에 이용당하고 버려졌다는 뜻밖에 안 된다. 태후마마와 태감은 귀비를 토사구팽해도 황상께서 그러시면 안 된다. 그런데 황제는 귀비의 기다림을 외면하고 계시는데다, 결과적으로는 정치적인 토사구팽까지 하셨다. 


다 식어버린 차를 냉랭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회임에 좋다던가? 아니. 이따위 것이 회임에 도움을 줄 리 없다. 이 몸이 새 생명을 잉태할 준비가 되었으면 아기씨가 생길 것이고, 준비가 아니되었다면 실패할 것이다. 싫은 것을 참고 찻물을 삼켜봐야 무의미한 희망고문일 뿐. 마치다는 더 이상 자신을 고통줄 수 없었다.


잔을 들어 탁자에 쪼르륵 쏟았다. 잔잔한 분노로 손이 떨렸다. 그리고, 젖은 탁자에 잔을 거꾸로 쾅 내려놓았다. 정성스럽게 우린 비싼 차를 그냥 버렸는데 아무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속이 후련해지는 것도 같았다. 


한잔의 차를 파괴하고 침대에 누웠다. 고작 찻물 한 모금 못쓰게 만든 것도 화풀이가 되었는지, 이글거리던 배신감이 다 꺼진 불씨처럼 잦아든다. 대신 까맣게 탄 빈자리를 허망함이 채웠다. 속상하다. 그는 황제가 보고싶을 뿐이다. 황상께 마음을 드린 이래로 그것 말고는 무엇을 더 욕심낸 적 없다. 그런데 요즘은 정치나 감정적 응어리로 자꾸 마음이 탁해진다. 겹겹이 쌓인 오염물 틈새로 그분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순수를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속상함은 곱절로 불어났다. 


구석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곧 머리맡에 묵직한 것이 자리잡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다는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쓸려나가는 털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야옹아. 네 주인님은 언제 오실까?"
"...."
"너라도 가서 주인님을 불러오련?"


고양이는 대답이 없었다. 쉴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마치다는 이마에 살랑거리는 체온을 대답으로 삼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강렬한 술냄새에 잠이 깼다. 별안간 무거운 덩어리가 어깨와 가슴을 세게 짓눌렀다. 놀란 건 마치다 뿐만이 아닌지 귓구멍에 날카로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꽂혔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울부짖음이었다. 귀청이 떨어질 뻔 하여 마치다는 인상을 쓴 채 허우적거렸다. 곧 멀찍이서 물건이 나동그라지는 소리가 났다. 고양이가 허둥지둥 도망가며 떨어트린 듯 했다.


눌린 자리가 답답하고 아파 몸을 빼냈다. 누르는 힘이 강해 덩어리를 패대기치지 않으면 안 됐다.


"으윽!"


어둑하여 눈으로 식별할 수는 없지만, 손바닥에 사람의 머리카락이 감긴다. 마치다는 그 덩어리가 황제의 머리임을 알았다. 그러니까, 방금 그는 황제의 머리를 내동댕이친 것이다. 잠시간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마치다는 화들짝 놀라 쥐고있던 머리채를 놓았다. 


"폐, 폐하?"
"우.... 아프잖아."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오셨다......


사람이 술을 마셨는지, 술이 사람을 마셨는지 모를 상태로. 


"이 야심한 시각에.. 연회는 어찌 하시고.."
"케이. 으음.... 후우...."


황제는 술에 절어 고개도 채 가누지 못한 채 마치다의 양 볼을 찰싹 붙잡았다. 난데없는 소동에 마치다는 어쩔 줄을 모르고 눈만 꿈뻑거렸다. 술에 취한 황상을 모셔본 경험은 전무했다. 무엇보다 황상을 뵌 순간, 이틀간 쌓인 감정들이 터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응어리져 있지도 못하는 채 갈팡질팡하여,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후우.. 케이. 웃어보십시오."
"예?"
"어허. 서방님 말씀이 우스운가. 웃어보라니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황제가 보고 있는 것은 귀비의 얼굴이 아니라 발이었다. 발에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런데도 웃으라니. 그보다도, 뜬금없이 웃으라니.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귀비! 웃어 보래도?"
"폐하. 발은 웃지 못합니다.."
"아니. 꼭 웃어야 해. 예쁘게."


말도 안 되는 고집에 서서히 현실감이 돌아왔다. 화가 났다. 사흘 만에 오셔서는 체통도 없이 웬 난동이신가! 무례를 무릅쓰고 황제의 턱을 살짝 올렸다. 술기운에 시뻘개진 피부와 게슴츠레 뜬 눈이 어둠속에서도 보였다.


"우우..."
"...."


두 가지 마음이 충돌했다. 독한 술냄새와 초점 없는 동공에도 불구하고 둘 만의 공간에서 다시 황상을 뵈었다는 설렘. 그리고, 이제야 귀비전을 찾으시고는 술부정이나 부리시는 데에 대한 노여움. 솔직히 설렘보다 노여움이 더 컸다. 예쁘게 웃어야 한다고? 기가 막혀서 헛웃음만 나온다. 차마 황상께 빈정댈 순 없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딴 소리 하지 말고 좀 웃어보시오. 응?"
"주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으, 내 말 못 들었소!"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웃으라는 요상한 고집을 그만두실 것 같지도 않다. 마치다는 마지못해 억지웃음을 지었다. 일단 요구를 들어드리고, 어서 사태를 수습하고 싶어 어쩔 수 없이 웃은 것이었다. 황제는 자꾸 감기는 눈을 힘겹게 치켜뜨며 미소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이윽고, 버럭 호통이 터졌다.


"이거 아니잖아! 웃음이 썩었어."
"폐하. 정말 계속 이러시겠습니까!"


마치다도 버럭 맞받아쳤다. 안 되겠다. 외람되지만 지금의 황제는 고운 말이 통하지 않는다. 따끔하게 말씀드려야 했다. 


"계속 난동을 부리시면 소첩 정말 화를 낼 것이옵니다!"
"...화를 내?"
"예. 화 내겠습니다."


사실, 이미 화를 내고 있었다. 황제도 그리 느끼신 게 틀림없다. 흐느적거렸지만 바르게 자세를 고치신다. 마치 꾸중들은 아이와 같이 부아가 치민 표정을 하시고는. 마치다는 작게 한숨 쉬며 이마를 감쌌다. 대저 자신은 부인인가 어머니인가. 이렇게나 안하무인이라니. 그런 모습까지도 사랑하지만 그래도 너무 유감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겠다. 황제는 마치다보다 입이 자유로운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칫. 그게 네 본모습이야. 힘들어 죽겠는데 화만 내고. 안 그래?"
"...."


적반하장이 따로 없지. 목 빠지게 기다린 사람이 누구고, 또 화를 낼 사람은 누구인가? 고대한 재회가 이런 식일 줄이야. 마치다는 무응답으로 응답했다. 아무 대꾸도 하고싶지 않았다.


"그대는 순 가식과 위장 뿐이야. 응? 어디 믿을 수가 있어야지.."
"...."
"내가... 내가 그리 만들었지..."


화가 더 쌓인다. 말씀이 지나치시다. 대체 술김에 하시는 말씀인지, 평소에도 하시는 생각인지... 정말 그리 생각하시진 않으실 거라 믿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도 없어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고정하시고 이제 그만 주무시옵소서."


쌀쌀맞게 말씀드렸다. 억지로 눕혀드리기까지 했다. 대체 가식과 위장이 무슨 말씀이냐고 여쭙고 싶지만,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날이 밝고나서다. 그러나 황제는 꾸물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달이 중천에 떴는데 벌써 자라고? 우길 걸 우기시오."


...참으로 답이 없는 주사였다. 힘으로 이길 수도 없고, 정말이지 황제가 미워지려고 한다. 


"왜 그리 죽상이오."
"...."
"에잇, 누굴 탓해! 내가 그리 만들었는데."


황제는 스스로 묻고 답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어쩔 수가 없어서 마치다는 그냥 두서없는 말씀을 지친 귀로 들었다.


"귀비. 귀비. 내 말 들어보시오."
"듣고 있.."
"매일 같은 꿈을 꾸었소. 그대를 떠나 혼자 밤을 넘기던 그 날부터."


말허리를 자르고 혼잣말을 이어가시지만, 그럼에도 술기운에 꺼내는 아무말은 아닌 듯 하다. 마치다는 여전히 도끼눈을 치켜뜨고 있었지만 한귀로 듣고 흘리려던 귓구멍을 진지하게 기울였다. 황제는 간헐적인 딸꾹질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달빛이 그윽하여 후원을 거니는데 그대가 있었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를 보고 서서. 미소가 참 예뻤소.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가 보더라고. 같이 웃고 싶어서 연유를 물었소. 그런데 대답을 안 하더군.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대가 대화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황제는 마치다의 얼굴에 대고 조심성 없이 삿대질을 하였다. 시선은 계속 발바닥을 향하고 계셨기에 마치다는 살짝이지만 이마와 코를 얻어맞았다. 얼른 고개를 뒤로 내뺐다. 정말 가지가지 하신다. 마음이 애틋하려다가도 다시 건조한 바람이 분다.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분명 그런 시간도 좋았을텐데... 그땐 완고한 마음이 들었지. 그대의 목소리를 꼭 들어야겠다고. 내 성격 알잖소. 그래서... 심술 좀 부렸소. 어깨를 붙잡고, 이렇게,"


말씀과 함께 황제는 정말 어깨를 꽉 붙잡았다. 상당한 악력이었기 때문에 마치다의 어깨에도 잔뜩 힘이 들어갔다.


"왜 웃느냐고, 어서 대답을 하라고 종용하였소. 그랬더니 그대가 무어라 대답했는지 아시오?"
"..잘 모르겠사옵니다."
"울지 못해 웃습니다."


고요했다. 그들을 감싼 공기조차 숨을 죽였다.


"사실은 울고 싶었던게지."


꿈을 꾸신 게 아니라...... 마음속을 엿보신 것 같다. 죽을 때도 아닌데, 마치다는 주마등과 같이 지난 날의 장면들을 보았다.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이겨내려고 노력한 하루하루의 긴 누적. 그 매일을 지나온 자신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 그러나 다시 그 하루를 지내보겠느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죽겠노라 답할 것이다. 마치다는 실로 울지 못해 웃고 살았다.


"잘못 들었다고 믿고 싶었소. 다시 그대 얼굴을 보았지. 그랬더니... 웃음 속에 눈물이 있었소. 나는 옳게 들었고... 그게 실체였던거요... 눈물이."
"폐하."
"실체를 알고 나니 그 얼굴에서 눈물 밖에 보이지 않아... 그대 얼굴을 못 보겠소. 그 예쁜 얼굴을 차마 못 보겠소..." 
"그래서 귀비전에 아니 오시고 연회장으로 가셨사옵니까."


황상께서는 연회장으로 '가신' 게 아니었다. '도망친' 것이었다. 꿈에서 시작한 의심이 현실이 될까봐, 믿고 싶지 않은 실체를 목도할까봐, 그것이 두려워 황제는 귀비를 만날 수 없었다.


"그저 꿈일 뿐이옵니다. 어찌 이토록 불안해 하시옵니까."
"....그대가 떠날 것 같소. 떠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상황이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소첩이 왜 폐하를 떠나겠사옵니까."
"곁에 있어도 볼 낯이 없소. 면목이 없소."


어렵사리 진심을 토하신다. 이 말씀을 하시려고 술을 드셨나 의심이 들 만큼 날것의 진심이었다. 문득 황제의 여윈 뺨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음영지는 굴곡은 마치다 못지 않게 험난했을 마음고생의 여정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마치다는 어깨를 붙잡은 황제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저희의 서약을 잊으셨사옵니까. 반드시 폐하의 곁을 지켜드리겠다는 약조... 기억하시지요?"


황제는 여태 숙이고만 있던 고개를 들었다. 땀과 눈물로 푹 젖어 있었고, 새로운 눈물이 또 뺨을 적시고 있었다. 이처럼 큰 오열을 보이시기는 처음이라 마치다는 내심 놀랐다. 얼른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드렸다. 소매가 금방 축축해졌다.


"그 꿈을 꾸기가, 너무 괴로워, 잠을 제법 설쳤소. 그리고, 혹여 그 꿈이 실제면 어떡하나, 한시도 안심하지 못하였소."
"실제일 리가 없습니다. 안심하시옵소서."
"그럼 그건 무엇이었소..?"
"예?"
"그날 편전에서... 왜 그대의 미소 안에 눈물이 있었던게요. 어찌 꿈 속의 모습 그대로 현현해 나를 겁주시었소."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거울을 통해 들여다본 게 아니니 알 턱이 없다. 황상의 말씀으로는 아주 슬픈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꽤 오래 기별이 없으셨으니 황제에게 이런 배경이 있었을 줄 어찌 알까. 미리 알았더라면 조금은 더 조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찰나에 스쳐지나가는 표정 따위보다 더 중요한, 시급히 정정해드릴 착인이 있었다.


"소첩은 분명 울지 못해 웃은 시간이 많습니다. 하오나 웃음으로 덧씌운 눈물이라고 꼭 가식과 위장인 것만은 아닙니다."


왜 가식과 위장 같은 못된 말씀을 하시는가 했더니. 여기에 근본적인 오해가 있었다.


"싫어. 웃을 거면 웃고 울 거면 울란 말이야. 아니 그러면 내가 모르고 지나치는 눈물이 너무 많잖아...! 내가 뱃속의 태자에게 말을 걸 때도 실은 울고 있었던 거 아니오? 그대는 항상 나를 내보내기 바빴잖아. 그런데도 가식과 위장이 아니야?"


그야 겉으로는 좋은 척 하며, 이면으로는 너무 잦은 방문에 마음 졸이긴 하였다. 허나 그점을 감안해도 지금 황상께선 생떼를 부리고 계신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떼를 써 무서움을 달래는 장면이, 지금의 황상 위로 겹쳐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어쩐지 마치다는 어서 내 무서움을 달래어 주라는 무언의 애원이 들리는 듯 하였다.


애틋한 사랑스러움이 화를 밀어냈다. 벌써 사라지기에는 아까운 화지만, 이미 화낼 마음이 다 사라졌다. 마치다는 황제 만큼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어떻게 울거나 웃기를 한 가지만 하겠습니까. 저는 당신을 보면 행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걸요."
"...."
"이것만은 알아주세요. 어떤 감정을 느끼더라도, 심지어 분노와 원망조차, 전부 당신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요. 가식과 위장이 아니랍니다."


황제는 맥없이 고개를 떨구시고는 토로했다.


"힘이 들어. 나는... 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대를 완전히 가졌다는 확신이 들지 않지... 천하가 다 내 것인데... 가장 내 것이어야 하는 그대만..."
"모르시겠어요?"


아. 너무 어린애 칭얼거림과 같은 고백 아닌가. 그런데 전혀 한심하지 않고...... 귀여우시다. 마치다는 서럽게 오열하는 황제를 품에 묻고 생긋 웃었다.


"노부. 그건 당신이 저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요."


아무리 고백을 들었어도 황상께선 울상인데 귀비는 웃음꽃이라니 불경이고 주책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 보상 기한이 조금 밀렸다고 이처럼 복리 이자까지 붙여 갚아준다면 앞으로도 기다려서 보상을 받을까보다.


아니다. 기다리는 건 그만하고 싶다.


밤이 늦었다. 마치다는 퉁퉁 붓고 축축해진 얼굴을 꼼꼼히 닦아드렸다. 그리고 용포를 벗겨 고이 접어드리고는, 침의 상태로 함께 누웠다. 아까는 달이 중천이라며 눕기 싫다 하시더니 지금은 또 순순히 누우신다. 그 만큼 마음이 풀리셨다는 뜻이겠다. 마치다는 꽤나 행복한 기분으로 황제와 이마를 맞대었다. 이미 잠은 다 깼고, 그 때문에 은은한 피로감이 느껴지지만, 이대로 술냄새 속에 꼬박 아침을 기다려야 한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부부는 조금 늦게 일어나 간소한 조반을 함께했다. 그리고나서, 바로 궁의를 불러 진맥을 보았다. 술에 절어 제정신이 아닐 때도 황제는 이날 아침이 회임을 확진하는 날짜인 것만은 기억하였다. 귀비와 황제는 긴장된 표정으로 궁의의 입이 언제 열리는지 기다렸다. 궁의는 손목에 연결한 긴 실 위로 오래 손가락을 대고 있다가, 황제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이 되서야 어렵사리 고했다.


"크흠... 아..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아. 마치다는 미처 내뱉지 못한 탄식을 목 뒤로 삼켰다. 첫 마디만 들었지만 뒷말을 다 들은 것과 같았다. 그럴 듯한 임신증상이 없어 혹시나 하긴 하였다. 그래도 희락기에 씨를 받았으니 회임에 성공할 확률이 더 크다 여겼는데. 애지중지한 뱃속이 텅 비었다고 하니 실망감이 이루말할 수 없었다. 황제는 확실을 기하기 위함이랍시고 세번이나 더 진맥을 시도하였다. 안타깝지만, 진단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다. 궁의가 물러가고나서 마치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


황제는 한참이나 말씀이 없었다. 괜찮다는 말씀도, 아쉽다는 말씀도 없었다. 아무것도 응시하고 있지 않지만 진지한 눈빛은 깊이 생각에 잠긴 듯도, 반대로 아무 생각이 없는 듯도 하였다. 마치다는 조금 돌아 앉아 계신 황제의 앞으로 상반신을 길게 내뺐다. 일견 무뚝뚝해 보이는 팔에 매달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분을 불렀다. 


"폐하.."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셨으면... 혹 너무 애석한 나머지 이대로 일어서서 떠나버리실까 걱정이다. 귀비를 은애하는 마음이 크고 깊은 건 이제 충분히 알았지만, 동시에 황상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행동하는 기분파이기도 하시니 있을 법한 일이었다.


‘아아. 부디 소첩을 봐주세요.’


늘 자기 자신보다 황상을 먼저 이해해드릴 준비가 된 마치다지만, 지금 만큼은 위로가 필요했다. 아기씨가 우리 부부에게 와주지 않은 것도, 그로 인해 여전히 빈약할 수밖에 없는 귀비의 정치적 입지도, 그리고 행여 앞으로도 회임이 어려울까봐 불안해진 마음도... 황제의 다독임 한 번이면 이겨낼텐데. 비록 쉽지는 않을지라도.


한참이 지나 황제는 담담히 중얼거렸다.


"실패했구려."
"송구하옵니다."
"...송구는. 마침 잘 됐소."


어리둥절하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잘 되었다니. 이보다 최악일 수 없는 상황이건만, 무엇이...? 황제는 귀비의 손목을 잡더니 소매를 내려 살결이 드러나게 하였다. 


"풀 데가 없어서 괴로웠지 뭐요. 헌데 이제 참을 필요 없겠네."
"아. 아아..."


갑자기 귀가 뜨거워진다. 마치다는 열심히 마주보던 시선을 흘끗 피하곤, 제 의복의 자수무늬를 한땀 한땀 관찰하였다. 그런 의미라면... 잘 되긴 하였지.


황제의 희롱에 심각하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거둬진다. 마치다는 옷깃의 재봉선을 선을 눈으로 따라 그리며 설핏 웃었다. 아직까진 개운하기만 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혹시 또 모른다. 오래간만에 격렬한 정사를 치르고 나면 개운해질지. 


"케이. 생각을 좀 해봤는데 오늘 밤 나와 함께 어딜 좀 다녀옵시다."
"어디를 가시려고요?"
"비밀이오."


황제의 개구진 눈빛에 사악함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