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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2 03:57

연반ㅈㅇ 알오ㅈㅇ



소년은 아직 덜 자란 어린 몸에 너무 무거운 푸른 예복을 걸치고 태자비 궁에서 태자비 책봉식을 거친 후, 다시 붉은 혼례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곧바로 혼례식을 치뤄야 하기 때문에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가마를 타고 황제가 집무를 보는 궁의 앞 광장까지 도착했다. 너른 광장에는 이미 문무백관이 예복을 입고 도열해 있었다. 소년은 작은 몸을 짓누르는 혼례복을 걸치고 머리를 내리누르는 무거운 관을 쓰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문무백관의 사이를 걸어 저 앞에 있는 태자를 향해 갔다.

너무 멀어서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황제와 황후에게 절을 올리고 태자와 맞절을 하고 길고 길었던 혼례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태자와 술잔을 나눌 차례가 왔다. 아직 술은 입에도 대 보지 않은 어린 소년이 무섭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침을 꼴깍 삼키며 술잔을 받았을 때였다. 바로 앞에 서 있던 태자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리더니 태자의 손이 술잔 위를 가볍게 스쳤다. 그리고 술을 한 모금 마신 소년은 입 안으로 넘어오는 달콤한 맛에 깜짝 놀라며 입맛을 다셨다. 각오했던 것과 달리 달콤하기만 한 술맛에 기분이 좋아진 소년이 혼례복의 무거움도 잊고 자리의 엄숙함도 잊고 헤헤 웃자, 다시 앞에서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귓볼이 붉어진 소년은 얼른 궁인의 손에 술잔을 넘겨주었고, 비로소 길고 긴 혼례가 끝났다.

그날 밤 소년이 태자비의 궁으로 돌아가 신방으로 예정된 침궁에 얌전히 앉아 있자, 태자가 도착했다. 궁인들이 태자의 방문을 미처 고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소년에게 다가온 태자는 소년의 조그만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관을 벗겨주고, 덜 자란 몸을 내리누르고 있던 무거운 혼례복을 벗겨주었다. 

"고생 많았소, 나의 비."
"고생하셨습니다. 전하."

태자는 소년의 혼례복 겉옷을 모두 벗겨주고 가벼운 혼례복 내의만 입고 있는 소년을 무릎 위에 앉히고 궁인들이 마련해 놓은 주안상을 내려다보다가 젓가락을 들었다. 

"뭘 좋아하시오, 나의 비는?"
"음...."

혼례식 전에는 한 번밖에 못 본 사람이라서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대륙을 양분하고 있는 제국의 태자니까 무서운 사람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태자는 처음 만난 그날 그랬던 것처럼 다정하게 소년을 얼렀다. 

"여기에 좋아하는 음식이 없소?"

그래서 소년은 조금 용기를 내 봤다. 모국인 연국에서조차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기만 하던 소년이지만 이 사람은 소년을 함부로 무시하고 거칠게 대하지 않을 것 같아서 조그만 손가락을 들어서 접시를 하나 조심스럽게 가리켰다. 

"저는... 육전..."

소년이 태자를 기다리는 동안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눈독 들이고 있던 육전을 가리키자 태자는 큰 손으로 솜씨좋게 젓가락을 움직이며 육전을 집어서 소년의 입 앞에 대 주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생하셨소."

소년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육전을 받아먹자, 태자는 오물거리는 소년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가 양념을 해서 구워낸 소고기를 가리켰다. 

"소고기인 듯한데, 이 양념구이도 먹어 보시겠소?"
"네, 전하."

하루 종일 밥은 제대로 못 먹고 내내 무거운 옷을 입고 이 의식, 저 의식을 하느라 너무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라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자는 고기구이도 집어서 입에 넣어 주었다. 뭐 먹고 싶냐는 말에 냉큼 육전부터 이야기한 걸 보고 소년이 고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는지 태자는 고기 위주의 안주만 집어서 주다가, 아기새처럼 열심히 받아먹고 있는 소년을 보며 빙긋 웃었다. 

"오늘 식사를 전혀 못 챙기지 않았소? 밥 조금 드시겠소?"

육전이나 고기구이나 다 짭짤해서 밥 생각이 나기는 했기 때문에 소년이 뺨을 붉게 물들이고 고개를 끄덕이자 태자는 문 밖에서 대기 중이던 궁인들을 부르더니 밥상을 차려오라고 했다. 소년이 민망해서 태자의 품 속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자, 태자는 소년을 토닥이며 웃었다. 

"술도 안 마실 것인데 하루 종일 제대로 못 먹은 걸 알면서 주안상만 차려놓은 저들이 눈치가 없는 것이오. 신경 쓰지 마시오"
"혼례식 때 술은 맛있었습니다."

소년이 지금까지 마셔 본 어떤 음료보다도 달콤하고 맛있었던 술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시자, 태자는 웃으며 소년을 토닥였다. 

"그 술은 그대의 연치가 아직 어려서 조금 달게 만들었던 것이오. 그대가 성년이 되면 내가 그대의 첫 술을 함께해 줄 테니, 술은 그때까지 참으시오."
"원래는 씁니까?"
"음. 쓰지."
"쓰면 안 마실 겁니다."

소년에게 태자가 왜 어렵지 않으랴. 그러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황궁에 처음 들었을 때부터 반갑게 맞아줬던 사람인 데다 소년이 혼례를 준비하는 그 바쁜 시기 동안에도 궁인들의 눈치를 보며 틈틈이 눈을 빛내며 읽었던 재미있는 책들을 잔뜩 넣어준 사람도 태자라는 귀띔도 들은 상태였다. 게다가 혼례가 끝나자마자 무거운 혼례복과 관도 벗겨주고, 하루 종일 거의 굶다시피 해서 비어 있던 배도 부지런하고 살뜰하게 채워준 사람이라 어머니에게도 부리지 못해 본 어리광이 튀어나왔다. 먼 타국까지 와서 한참 큰 어른과 혼례를 치르기까지 했지만 소년은 아직 어린아이라, 어린 마음에 자기를 예뻐해 주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어리광까지 부리고 나자 덜컥 겁이 나서 태자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자 태자는 웃으며 소년을 토닥였다. 

"그럽시다. 싫으면 마실 필요 없소."

소년이 마음을 놓고 태자의 가슴에 기대 앉아 있자, 밥과 탕, 여러 가지 반찬을 갖춘 밥상이 들어왔다. 태자는 여전히 소년을 무릎에 앉혀 놓고 있었지만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상을 당겨 주고 소년의 손에 수저도 들려 주었다. 

"많이 드시오. 나의 비."

수윤제국에 오기 전에 수윤제국은 북쪽에 있는 나라라 많이 추워서 음식이 유난히 싱겁다는 말을 들었는데 태자비의 궁에서 만드는 음식은 하나같이 소년의 입맛에 딱 맞게 짭짤했다. 수윤제국의 음식에도 적응하길 바라는지 가끔 간이 심심한 음식들도 섞여 있긴 하지만 탕이나 무침류의 반찬들은 따뜻한 남쪽 나라 출신인 소년의 입맛에 맞춘 듯한 음식이었다. 그게 소년을 위한 배려였다는 것은 태자의 밥상을 흘긋 보고 알 수 있었다. 태자의 상에 올라온 탕이나 무침류는 색만 봐도 훨씬 심심해 보였으니까. 소년은 태자비 궁의 궁인들은 숙수를 포함해서 모두 태자가 직접 선정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뺨을 붉혔다. 태자가 얼굴도 모르는 저를 맞이하며 정성을 다해 준 것이 기쁘지 않을 리 없으니까. 덕분에 기분 좋게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궁인들이 내놓은 달콤한 과일 음료를 술 대신 나눠 마신 뒤였다. 

"그대가 연치가 어려서 아직 합방은 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시오."
"네."

소년이 아직 너무 어려서 풍제국의 그 늙은 황실 종친도 차마 소년을 제 첩으로 내놓으라 말하지 못했지만, 아마 1-2년 후에는 소년을 요구했을 것이고 소년의 아비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소년을 그 늙은이에게 바쳤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소년은 아직 어리건 말건 그 늙은이의 잠자리 시중을 들어야했겠지. 그런 삶을 예상하고는 있었어도 무서운 건 사실이었다. 수윤제국으로 오고 혼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내내 씩씩한 척했어도 사실 다가올 잠자리가 무섭긴 했기 때문에 소년이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는 소년의 눈에 방울방울 맺히는 눈물을 닦아주며 소년을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그대가 겁 먹을 만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네, 전하."
"얌전히 잠만 잘 테니까 옆에서 자기만 하는 건 괜찮겠소, 나의 비?"
"... 네, 전하."
"고맙소."

소년이 울컥 올라왔던 서러움과 겁이 진정돼서 다시 꼼지락거리고 있자, 태자는 소년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물었다. 

"밥을 지금 먹어서 금방 잘 수는 없을 테니까 좀 걷겠소? 정원은 좀 둘러봤소?"
"네, 전하. 아름다웠습니다."
"그럼 나와 같이 한번 나가봅시다."





태자가 궁인들을 부르자 궁인들이 들어와서 겉옷을 벗고 내의만 입고 있는 태자비의 몸 위로 포근한 망토를 걸쳐주었다. 그리고 태자가 태자비의 손을 잡고 정원으로 나가자 태자비는 태자가 이끄는대로 여전히 아름다운 정원을 걸어 연못가까지 갔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전에는 분명히 꽃이 피지 않아 푸른 풀만 가득하던 곳에 하얀색의 예쁜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저런 꽃 처음 봅니다."
"마음에 드시오?"
"방울처럼 생겼습니다."

태자비가 입을 헤 벌리고 꽃을 한참 바라보다가 태자를 돌아보자, 태자는 어린 탓에 아직 통통한 태자비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서 은방울꽃이라는 이름이 붙었소."
"이 꽃 이름이 은방울꽃입니까?
"그렇소."
"정말로.... 너무 예쁩니다."
"꽃에도 저마다 다 의미가 있다고 하오. 저 꽃의 꽃말이 뭔지 아시오?"
"꽃말이 있습니까? 뭡니까?"

태자는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눈동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틀림없이 행복해진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꽃이지."
"꽃말도 너무 예쁩니다."
"그렇지."

태자는 꽃을 만져보려고 하는 작은 태자비를 얼른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저렇게 예쁘게 생기고 향기도 좋지만 독성이 있는 꽃이니 만지지는 마시오."
"독이 있습니까?"
"그렇소. 먹으면 죽을 수도 있소. 꽃가루를 많이 마셔도 죽는다고 하니 이 정도 거리에서 보기만 하시오."
"... 저렇게 예쁜데 독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안 만질 거라고 약속해 주시겠소, 나의 비?"
"네, 전하."

조그만 머리가 꾸닥꾸닥 착하게 움직이는 걸 보며 태자는 다시 한 번 웃었다. 

"고맙소. 이 궁의 이름은 그대가 나와 함께 틀림없이 행복해지기를 기원하며 은방울꽃의 이름을 따서 은방울꽃궁으로 하고 싶은데, 어떻소?"
"저는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행복... 헤헤..."

소년은 예쁜 꽃이 꽃말도 예쁜 것이 마음에 드는지, 방울 모양의 하얀 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꽃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틀림없이 행복해진다? 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지금보다 더 어린 목소리가 입혀졌다. 

- 행복하세요, 청룡님.

태자는 4년 전에 들었던,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던 아이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너의 뜻대로, 상냥한 나의 아이야. 





#노부마치수수께끼의황태자